이명
매미 소리가 들린다. 거울처럼 매끈한 수면에 생긴 잔잔한 파문 같은 소리는 생각보다 손톱의 가시 같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나이가 들면 오는 이명이라 하며 고칠 수 없다고 한다. 워낭소리같이 그냥 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보다.
매미 소리는 계곡의 청량함을 담은 듯 한여름의 땡볕을 식히고, 댓바람을 담은 듯 한여름 밤의 열기를 식힌다. 모두 매미를 부러워한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마음껏 고함을 지를 수 있고, 날 수 있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긴 굼벵이의 생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불가나 도가에서 매미를 해탈의 상징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난 그런 매미 한 마리 품고 산다. 육칠 년 어둠 속에서 사는 굼벵이는 수없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지만, 역시 굼벵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고통의 시간, 두 번 다시 거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라고 고개를 저을지 모른다. 매미가 해탈이라면 굼벵이의 긴 삶은 어찌하란 말인가. 짧은 해탈 긴 어둠은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지 않은가.
어찌 한 철의 매미를 해탈이라 하겠는가. 매미 소리는 깨달음의 일성이 아니라 이명 같은 아우성일지도 모른다. 이명은 폭포 소리만큼 한여름 느티나무 아래의 매미 소리만큼 요란스럽다. 아름답고 시원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기계가 돌아가는 굉음과 같다. 시끄러운 곳에서는 외부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지만, 고요하면 더 크게 들린다. 여간 불편하지 않다. 몸이 피곤할 때나 마음이 불편할 땐 온 머릿속을 매미 소리로 꽉 채워지는 것같이 어지럽다. 소리에 대한 고문도 이러할까.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시끄러우면 귀마개로 막고, 아니면 장소를 옮기면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부에서 울리는 매미 소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오롯이 있는 그대로 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싫든 좋든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무의식적으로 좋은 것은 붙잡고 싫은 것은 뿌리친다. 그러나 가족ㆍ늙음ㆍ병ㆍ죽음과 같은 것은 자의든 아니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비록 그게 고통을 준다고 할지라도. 이명도 더불어 사는 인생 드라마의 한 단면일지 모른다.
매미 소리가 굼벵이의 흔적이듯이, 이유 없이 이명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의 창고에 갇힌 내 삶의 흔적 중 일부가 매미가 되어 맴맴 하는 줄 모른다. 이명은 늘 내 속에 있었는데 내가 몰랐을지도 모른다. 진작 알았더라면 이명이 나올 때, 놀랄지도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때가 왔는가 하고 반갑게 맞이하지는 안 했어도 있는 그대로 인정했으리라.
매미는 육칠 년 동안 어둡고 칙칙한 땅속에서 홀로 살아온 굼벵이의 삶을 품고 있다. 굼벵이와 매미 삶은 다르지 않다. 굼벵이의 삶을 어둡고 칙칙하다고 말하지 마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긴 추억이라고 말하지 마라. 매미는 굼벵이를 벗어난 삶이 아니다.
비록 이번 한철이 마지막이라도, 환희가 아니라 절규라도, 굼벵이의 꿈은 매미가 되는 거다. 꿈은 매미지만 한 번도 매미 같은 삶을 살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다면, 앞만 바라보고 달려가다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고통의 순간을 맞이하는 우리의 삶과 무엇이 다른가.
굼벵이는 매미가 되기 위해서 살지만, 매미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았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하루하루 성숙해 가는 과정들이었다. 굼벵이가 매미가 된다. 만약에 굼벵이가 매미같이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 살았다면, 불지옥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땅속이 굼벵이에게는 최상의 조건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은 30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그곳은 양손을 벌리면 닿을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지낸 세월도 대단하지만, 자신을 가둔 자들을 용서했다. 대통령이 되자 가둔 자와 가두어진 자들의 화합을 위하여 밤낮으로 뛰었다, 마치 한 철의 매미가 한 치의 쉼도 없이 아우성을 친 것처럼. 그에게 있어 감옥 생활은 매미가 되기 위한 굼벵이의 삶이었을 것이다. 매미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굼벵이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 그래서 용서가 가능했을 것이다.
고통은 삶의 장애물이지만 오히려 고통을 이겨내는 힘을 키워준 원동력이다. 그 힘으로 매미는 마지막 절규를 이겨낸다. 매미 절규의 진실을 안다면 굼벵이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안다. 어쩌면 굼벵이의 삶도 매미의 삶도 행복은 아닌지 모르지만,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고통도 아닐 거다.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모색하듯이, 그것은 그들만의 새로운 삶일 것이다.
매미가 매미가 되는 게 아니라 굼벵이가 매미가 된다. 매미는 벗어남이 아니라 굼벵이의 변화다. 그래야 굼벵이의 삶에서 매미를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굼벵이는 매미가 되고 매미는 이명이 된다. 이명이 나를 괴롭히지만 나는 매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