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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4일, <전주한지박물관> 둘러보고 곧장 <익산미륵사지>로 향했다. 10시 넘어 도착, 인근 한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식사를 떼우니!
그리고 익산 미륵사지(益山 彌勒寺址, 국보 제11호,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063-859-5778,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1,00110000,35&queryText=(`미륵사지석탑`)<in>z_title)에 들어선다.
치미
치미는 망새라고도 하는데, 사찰이나 궁궐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을 장식하는 특수 기와이다. 치미는 지붕에 얹어서 웅장하게 보이는 용도 외에 재앙을 피하기 위한 벽사(僻邪)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새 꼬리 형태의 치미는 하늘의 신과 지상의 인간을 연결하는 강녕(康寧)사상이 내포되었다는 설이 있다. 치미는 중국 후한대에 반우(反羽)라고 불린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구려 벽화고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실물로는 고구려 지역의 원오리사지, 정릉사지, 안학궁지, 백제지역의 공주, 부여의 부소산 서복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신라지역의 황룡사와 안압지출토 치미 등이 있고,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치미가 사용되었다.
전시된 치미는 동원 승방지에서 출토되어 복원되었는데 백제시대 치미로 보여진다. 치미는 아래 위가 나뉘어진 2단 구조를 하고 있다. 몸통 부분에는 머리에서부터 종대까지 새의 깃털을 표현한 듯한 방사형의 층단이 전면에 나 있고, 종대부의 층단 내에는 물고기 바늘모양이 반타원형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후미 깃 끝마다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와 같은 구멍은 꼬리와 배 등에도 있으며 구멍에는 장식품을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새의 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몸통 및 종대부는 활처럼 힘차면서도 그 선이 유연한데, 이는 버선코 같은 꼬리 끝과 함께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전시된 치미의 크기는 높이 99cm, 길이 85cm, 머리너비 28cm, 후미 깃의 길이 53cm이다.
금동향로
향은 악취를 없애고 해충을 쫓거나 실내의 습기를 제거하고자 쓰였다. 이 향을 불살라 연기를 피우는 그릇이 바로 향로이다. 나아가 잡귀나 잡년까지도 제거해 준다하여 절에서는 물론 각종 제사 의례에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향로의 출현은 옛 낙랑지역에서 발견된 박산향로를 통해 중국에서 전래된 사실을 알 수 있지만, 향로의 본격적인 제작과 사용은 역시 불교의 전래와 함께 이루어졌다고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쌍영총 고분벽화 행렬도에 보이는 머리에 인 향로의 모습 등을 통해 삼국시대 후반부터는 이미 향로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절에서 쓰인 삼국시대의 향로를 실물로 증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미륵사지 출토 금동향로는 짐승 얼굴 모양의 다리가 4개 달린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그 유례가 없는 독특한 형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금동향로는 높이 30cm, 지름 29.7cm의 비교적 큰 크기로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원형으로 높게 솟은 뚜껑과 운두가 낮은 납작한 대야 모양의 몸체, 그리고 4개의 다리로 구성된 대부(臺部)로 나눌 수 있다.
뚜껑에는 연화문, 심장 모양과 구름 모양의 장식이 있으며, 몸체에는 사자 얼굴 모양의 다리와 짐승 얼굴 모양의 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금동향로는 구리 87.5%, 주석 8.3%의 비율로 주조되었는데 몸체와 다리 그리고 몸체에 붙어있는 장식을 각각 따로 만들어 리벳으로 부착하였다.
향로 표면의 도금은 아말감 도금법으로 하였다. 미륵사지 출토 금동향로는 백제 말기부터 통일신라 8세기 중반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형 토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높이가 100cm 이상 되는 대형토기들이 있다. 이 대형토기들은 주로 중심곽의 외부, 대체로 승려들이 생활했던 곳에서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크다는 점에서 저장용기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형토기들은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땅을 파고 묻어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대형토기는 승려들의 실제 생활에서 먹거리 따위를 저장하기 위하여, 즉 겨우살이에 대비한 김장독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1915년에 일본인이 시멘트로 무너진 뒤쪽을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있다. 6층까지만 남아있으며,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塔身)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미륵사지 목탑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전해진 탑의 형식은 목탑과 전탑이었으며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것이다. 특히 미륵사지에는 동ㆍ서쪽에 석탑이 있고 중앙에는 목탑이 자리하고 있어 목탑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원지로 생각되고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앙의 목탑은 석탑의 기단과 같은 기단형태였으며 계단도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규모는 미륵사지 전체 평면에서 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원과 서원에 비하여 중원이 크며, 목탑도 그 같은 비례에 의하여 동ㆍ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에 비하여 큰 규모였음이 확인된다.
목탑의 상면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었으나, 동탑과 서탑이 양식상 목탑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양쪽 석탑과 비슷한 구조였을 것이다. 전시된 모형은 이 같은 점을 기초로 목탑의 본래 모습을 추정 복원하여 20분의 1로 만든 것이다.
미륵사지
사적 제150호로, 백제(18BC~AD660)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던 미륵사의 창건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30대 무왕(AD600~641)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또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산을 허물어 연못을 메우고 전(금당)ㆍ탑ㆍ낭무(회랑)를 세 곳에 마련한 가람(절)을 조영하였는데 신라 진평왕이 백공(百工)을 보내어 도와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발굴조사에 의해서 미륵사가 3원 1가람이며 산 흙으로 메운 연못에 자리하고 있는 점 등이 밝혀져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는다면 미륵사에는 창건 당시 건축ㆍ공예 등 백제의 문화역량이 최대한 발휘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등 삼국의 기술이 결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 창건은 이곳 금마에 가람을 조영하여 마한 세력을 아우르려는 정치적 의도뿐 아니라, 황룡사로 대표되는 신라 화엄신앙에 대비되는 백제 미륵신앙에 바탕한 것이다. 미륵사는 조선시대 AD1,600년을 전후한 때에 폐사되었다.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
이곳에 전시된 석조물들은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7년간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것이다. 전시된 석조물은 22류 60여 점으로 동원9층석탑 부재, 석등부재, 당간부재, 건물 기단석, 맷돌, 다양한 형태의 건물 초석 등이다.
동원9층석탑모서리옥개석(백제7세기)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
석등 하대석은 동원과 중원의 금당지 남쪽에 각각 1개씩 있다. 서원 금당지 남쪽에는 석등 하대석이 없으나, 발굴조사 전에 서원지역에서 석등ㆍ간주석ㆍ화사석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석등이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 하대석은 조각된 연화문이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말기의 연화문 수막새 문양과 그 양식이 같고, 창건시기부터 현재의 위치에 있었음이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석등 중 가장 오래된 백제시대의 석등이다.
동원과 중원의 석등 하대석은 1변이 각 96cm와 105cm의 정사각형이며 여덟 잎의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여러가지 자료로 미루어 석등은 높이 270cm 내외로 추정되며 중원 석등을 추정 복원한 모형이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중원 석등 하대석 앞에 있는 중심에 원형 구멍이 있는 네모난 석재품은 향로 받침으로 추정된다.
금당지
미륵사의 금당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삼금당이다. 동(東), 서(西), 중(中) 삼금당을 그 세워진 위치에 따라 동금당, 서금당, 중금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각 금당지에는 남북과 중앙에 돌계단이 있고, 같은 양식의 이중 기단과 높은 초석이 있다. 초석은 한 번 105cm 정도의 정방형 초반석 위에 긴 정방형의 초석을 올려놓았는데 밑의 초반석 각 변의 중앙에 위의 긴 초석의 모서리가 위치하도록 하여 초석을 누르는 건물의 전체적인 무게를 8곳으로 분산시켜 받도록 하였다. 각 초석의 정면에는 초석의 움직임을 막고, 그 위에 마루를 깔기 위한 나무 보가 놓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홈이 파여 있다.
삼금당은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칸 수는 같지만 각 칸의 너비에 따른 기단의 전체적인 크기는 중금당의 것이 동서 금당의 2배 정도이다. 삼금당 중 동금당이 제일 먼저 소실되었다. 동금당지에서는 금동제 장식과 납유리가 출토되었다. 서금당지에서는 토제 나발과 연우(延祐, 4년, 1317) 글자가 있는 기와가 나왔으며 같은 시대의 암수 막새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볼 때 서금당지에는 고려말까지 건축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승방지
동서 승방지는 남북 65m, 동서 14m 정도로 같다. 동서 승방지 내부에는 한변 6m 크기의 방 두 개가 남북으로 한 조를 이루며 4조씩 있다.
발굴당시 동원의 승방지에는 구들시설과 이궁이의 흔적이 있었지만 완전한 구조가 남아 있지는 않았다. 이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를 비롯하여 주름무늬 토기병, 돋움무늬병, 불에 탄 곡식 및 중국 당나라의 백자완 등이 출토되었다.
남쪽 내부에서는 중간 크기의 항아리가 곧바로 서서 묻힌 채로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큰항아리 편 하나에는 대중십이년미륵사(大中十二年彌勒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대중은 당(唐)의 연호로서 그 12년은 통일신라 헌안왕 2년(AD858)이다. 이것은 함께 출토된 다른 토기 및 기타 유물의 편년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북편 기단 외부에서는 치미가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양식의 백제 치미는 부여의 부소산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
동원 9층석탑
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유물로 보아 동원 탑지에 서탑과 같은 백제 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탑자리에 1991년부터 석탑의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공하였다.
복원에 따른 고증자료는 서탑과 동원 동탑 기단부 및 1980년 이후 동탑지 주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노반석을 비롯한 탑 석제가 활용되었다.
복원된 탑은 하층기간이 1변 12.5M, 상층기단이 10.5M인 2층 기단이며 9층으로 지면에서 상륜부까지 총 높이는 27.8M이다. 탑의 내부는1층 탑신에 +자형 통로가 있고 2층부터는 공간이 없어 막혀있다. 옥개석과 상륜부에 달린 풍탁은 동탑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금동 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탑 복원에는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임, 총 2,000여 개 2,700여 톤이 사용되었으며 백제시대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 35개가 포함되어 있다.
목탑지
이곳에서 출토된 평기와, 수막새, 기와를 고정시키는 쇠못 등의 유물과 이중기단은 여기에 세워졌던 탑이 목탑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목탑지 기단은 북편 중앙의 계단석, 기단면석, 갑석 일부와 서쪽의 기단석에 의해 한 변 18.56M 규모의 정방형으로 추정된다.
발굴 당시 기단 북쪽의 구 지표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서 나중에 보수, 정비 등으로 지붕에 올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 중기와 후기의 평기와, 수막새가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수막새가 기단에서 북쪽으로 80cm 되는 지점에서 기단선과 평행을 이루면서 출토되어 목탑이 소실되면서 그대로 지붕이 내려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미륵사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연못을 메우고 지었다. 목탑지 하부는 목탑의 기단 면적만큼 메웠을 흙을 다시 깊이 350cm를 파냈다. 여기에 사람 머리 크기의 돌들을 150cm 정도 채워 다진 후, 그 위에 황갈색 마사토와 점질토를 섞어 3~5cm 두께로 층층이 46단 193cm를 다져올렸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는 동서로 2기가 90여 M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지주의 양 쪽 바깥면에는 둘레를 따라 외연선을 돌리고, 중앙에도 한 줄의 선을 깍아서 표현하였다. 양식 수법에 의하여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주의 높이는 4M이다.
당간지주란 절에서 불문(佛門)을 나타내는 문표, 그리고 종풍을 드러내는 종파의 기(旗)인 당(幢)을 달았던 깃대를 지탱해 주는 버팀기둥이다.
연못
사지 입구 중앙 도로의 동, 서편에 있는 2개의 연못은 당간지주 동, 서, 남 쪽에 있는 회랑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 연못은 동서 길이 51M, 남북 너비 48M이고, 서쪽 연못은 동서 길이 54.5M, 남복 너비 41M이다. 두 연못 사이에 있는 도로 및 공간은 동서 너비 50.5M이고 길이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남문 계단에서 남쪽으로 92M 내외이다.
연못의 호안(護岸) 축조 방법은 동쪽 연못의 서측 일부분에는 석축을 쌓았으나 대부분은 주로 점토를 반원형으로 여러 층 판축(板築)하거나 자연지반에 점토를 덧씌운 특이한 방법이다. 발굴조사 시 호안에서 왕버드나무 뿌리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 나무 뿌리가 점토로 된 호안이 유실되는 것을 막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