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테살 5,1-6.9-11; 루카 4,31-37
+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 교구 김순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장례미사가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은 1937년생이신데, 86세의 일기로 지난 3일 선종하셨습니다.
신부님은 2년간 로마에 파견되어 포콜라레 공동체에서 지내신 것 외에는 1개 본당의 보좌 신부와 10개 본당의 주임신부를 하신 것이 약력의 전부입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여러 활동에 참여하시고, 사회 정의 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신부님께 특별한 호칭을 부여해 드렸는데, 그것은 ‘종북 사제’라는 칭호였습니다.
오늘 고별사 때 들은 말씀인데, 신부님은 매일 새벽 미사를 봉헌하셨고, 일생 딱 두 번 미사를 궐하셨는데, 로마에 가시던 날과 로마에서 돌아오시던 날 비행기 안에 계시느라 미사를 못 드리셨다고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관심과 실천도 기도와 미사 봉헌에서 흘러나온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합니다.
또한 원로 사목자가 되신 후에는 매일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셔서 5시 반까지 성무일도와 묵주기도와 미사를 드리셨는데, 연옥에서의 단련을 미리 봉헌하신다며 겨울에는 히터를 틀지 않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고 기도하셨다 합니다. 또, 하이든과 베토벤을 좋아하셨다는 말씀도 제게는 특별히 와 닿았습니다.
신부님에 대한 말씀을 들으며, 한평생 사제로 살아오신 원로 사목자 신부님들의 삶에서 저희가 깨치고 배울 점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희의 부족한 삶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까지 미사 때 마태오 복음 말씀을 들었는데, 어제부터는 루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12월 3일부터 대림 시기가 시작되는데, 그 전날까지 석 달간 루카 복음을 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 가시어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 몹시 놀랐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권위’를 나쁜 말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권위주의’는 나쁜 말이지만, ‘권위’는 그렇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이 단어(ἐξουσίᾳ: 엑수시아)는 여섯 차례 나오는데요, 오늘 두 번 나왔고요, 20장에서 수석 사제와 율법학자와 원로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또 당신에게 그러한 권한을 준 이가 누구인지 말해 보시오.”(루카 20,2)라고 말하는데, 여기 나오는 ‘권한’이 같은 단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내쫓으시자 사람들은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권위와 힘을 갖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힘은 있지만 권위는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로 말을 하니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사람들은 “이게 대체 어떤 말인가? 저이가 권위주의로 명령하니 정말 우습지 않은가?”라며 몹시 놀랍니다.
또한 권위는 있으나 힘은 없는 분들도 많습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 정의를 외치다가 핍박받는 사람들, 교권 회복을 외치기 위해 길거리로 나가야 하는 선생님들이 그러합니다.
권한, 즉 권위를 가진 사람이 힘이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입니다. 권위가 없는 사람이 힘을 가진 사회가 나쁜 사회입니다. 나의 말에는 어떠한 권위가 있는지 되돌아봅니다. 권위는 없고 권위주의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정 권위가 있으려면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고 그 말에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입니다.
* 김순호 신부님 추모 영상: https://youtu.be/sQXIKMNRBJk?si=fBwB4hTYwnsb-RJ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