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0: 12 선 줄로 생각하는 자 -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시험을 조심하라. 항상 나도 시험받을 수가 있다.
1] 그런즉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테'(*)는 '그러므로'라는 뜻으로, 바울이 앞에서 열거한 예증을 근거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충고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2] 선 줄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타나이'(*)는 현재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 신앙이 아무런 흠없이 온전하다는 뜻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복음에 대한 지식과 생활이 흠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섰다’는 말은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한다는 뜻이고 ‘넘어진다’는 말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삶 즉 범죄하는 삶을 가리킨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믿음에 섰고 순종하며 산다고 자신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늘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3]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며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이방의 침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겔 12: 22).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 중에도 자신들이 이미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에 우상의 제사에 참석하고 그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형벌로 죽은 사실을 지적하면서(5, 8절) 믿음 가운데 있을 것을 강조하였다.
이 시간에 “조심합시다.”라는 주제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history, 역사란 중요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아이가 딱딱한 역사 공부가 싫어서 교사에게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교사는 “그것도 몰라?” 하면서 아이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그러자 아이는 “선생님 왜 그러세요?” 그러자 교사는 “이 녀석 봐” 하면서 또 꿀밤을 주려고 하자 아이가 쓱 피했다. “이것 봐라. 피하네.” 그러자 또 다시 아이는 “제발 좀 알려주세요” 그러자 교사는 “이렇게 꿀밤으로 가르쳐 줘도 모르겠니? 내가 너에게 처음 꿀밤을 주었을 때 그걸 네가 기억하고 있었지, 그것도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역사야. 네가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에 두 번째 꿀밤을 피할 수 있었지 않느냐? 이것이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란다” 했다.
11절을 보면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성경에 역사가 기록된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본보기라는 말이다. 그 한 예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징계를 받았는데 그 모든 것도 우리에게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1)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 숭배하는 것이다.
6-7절 “이러한 일은 우리들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출 32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더디 내려옴을 보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겼다. 그때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이스라엘을 진멸하려 하셨다. 그때 모세가 중보 기도와 우상 숭배자 3,000명을 죽임으로 여호와의 노가 그쳤다. 얼마나 악하고 배은망덕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노하셨을까?
이것은 결코 이스라엘에게만 하신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이다.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들면 하나님이 노하신다.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십계명 제일 계명에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그 다음이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라.” 했다. 그러면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 5-6) 하셨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 신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 하면서 출애굽기를 강해한다 해서 그것이 여호와가 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슬람을 경계하는 것도 그렇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자기들 하나님이라고 우기지만 한 분이 두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하나님과 다르다. 하나님은 코란의 법을 아브라함에게나 누구에게도 주신 적이 없다.
우리를 영원히 대접해 주실 하나님을 슬프게 하지 맙시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성경보다 더 믿는 다른 것은 없어야 한다. 그것이 우상이다. 모세가 레위 지파를 이끌고 칼로 쳤던 것처럼 기도하면서 말씀의 칼로 마음을 제거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2) 우리가 조심할 것은 간음이다.
8절에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민 25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 발람이 베푼 꾀로 인해 모압 여자들로 더불어 간음했던 일이 나온다. 발람은 모압 왕에게 이스라엘은 축복의 백성이라 저주는 불가능하니미인계를 쓰라고 귀띔해 주었다. 범죄한 사람보다 범죄케 한 사람은 더 악하다.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아이들에게 ‘동성애란 성 선택의 일종이며 자연스런 것이지 잘못이 아니란다.’ 하면서 동성애 애찬 교육을 시키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동성애 영화를 전국 17개 초등학교와 지역 도서관에서 상영하는 물의를 저지르고 있다. 그걸 어린 초등학교에서 일부러 가르칠 이유가 없다. 외국 학교 영상들을 보면 아주 동성애자로 만들고 있는데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지금 온 세상이 간음의 세계다. 소돔의 관원과 백성들이라 했듯이 관원과 백성이 나서고 있다. 성인 남녀에서 주부, 노인,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온통 타락으로 물든 세상이다. 서울시장이 나서서 동성애 장려하고 미국 대사가 동성애 축제에 와서 격려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게 확산되어 좋을 일은 없다.
이걸 염려하며 기도회로 모인 기독교 집회를 경향신문을 비롯해 매스컴들이 얼마나 고의적으로 악평했는지 모른다. 그걸 보고 '이 시대 어른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할 수가 있나. 세상이 이렇게 됐구나. 바로 이것이 소돔과 고모라구나.' 그런데 이것은 남의 자녀를 다 죽이는 일이다. 자기 자녀는 혹시라도 잘못될까봐 간수하면서 남의 자녀들은 타락으로 내몰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음욕도 간음이라고 하셨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간음할 때 어떻게 하셨는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나 죽이셨다. 이것이 본보기라는 말이다. 지금도 이대로 하시겠다는 것이다. 영적으로도 죽고 육신적으로도 환난이 올 것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수많은 고통이 죄 때문에 온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기도해야지 누구든 큰소리칠 일은 아니다. 다윗도 삼손도 넘어졌다. 그러나 여선지 안나는 청춘에 혼자되었으나 일생을 주야에 금식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함으로 자신의 청춘을 주님께 드렸다. 그랬기에 아기 예수를 만나는 복을 받게 되었다.
(3) 조심할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맙시다.
9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이 말씀이 민 21장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에돔 땅으로 들어가다 길 때문에 마음이 상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
처음에는 길 때문이었지만 불평은 불평을 낳고 낳아 애굽에서 나온 것부터 의식주에 이르기까지 불평했다. 그러다가 불뱀에게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못 믿고 원망 불평하는 것을 본문에서는 주를 시험했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맙시다. 자주 하면 습관이 된다. 불평하면 그 불평이 더 커진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물론 마음이 평안이 없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지 못하면 꼭 불뱀에 물린 사람 같이 놀라고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드러누워 고민하게 된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아도 말씀에 근거하여 보이는 것처럼 사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함께 하심을 믿고 경외하고 삼가하고 대화하고 안심하고 찬송하기 바란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믿는다면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는가? 내세까지도 믿기에 온전히 하나님께 우리 영혼을 맡겨드릴 수 있다.
(4) 조심할 것은 원망하는 일이다.
10-11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민 16장을 보면 고라당의 사건이 있다. 고라는 레위 지파 제사장이다. 고라가 이스라엘 총회에서 택함 받은 250명과 당을 짓고 루우벤 지파 지휘관들과 함께 모세의 권위에 대항하다가 땅이 갈라지고 땅속에 생매장이 되었다. 제사장들과 정치인 즉 정교와 유착하여 당을 만들어 대행했다. 그들은 ‘모세만 하나님 종이냐? 우리도 하나님의 종이다. 모세만 최고냐? 우리들도 총회에 뽑힌 일군이다. 모세만 듣느냐? 우리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서 대항할 때 땅이 갈라져 고라와 함께 한 사람들이 빠져 매장이 되고 향로에서 불이 나와 250인을 사르고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어 일만 사천칠백 명이 죽었다.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그들과 모세가 같을 수 있습니까? 똑 같을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육신의 매장만이 매장이 아니다.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교만하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매장된다는 교훈이다. 그리고 육신의 염병만이 염병이 아니다. 마음의 염병도 있다. 가슴을 찢을만한 맘 아플 일이 생기고 마음에 화병이 생겨난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는 있으나 한계 수준은 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11-12절에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곧 우리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그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역사를 알려주셨으니 또 다시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마시기 바란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경계의 거울을 삼으신 것처럼 다른 신 섬기거나 우상 숭배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대신 아름다운 신앙의 본을 보인 선진들처럼 귀한 복의 주인공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