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름에게 김남조
가난한 이름에게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풍림의 음악, 정양사, 1963
가을의 기도 김남조
가을의 기도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당신 앞에 벌받던 여름은 가고
기도와 염원으로 내 마음 농익는
지금은 가을
노을에 젖어
고개 수그리고
긴 생각에 잠기옵느니
여기 이토록 아름차게 비워진 나날
가을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기도드리게 하옵소서
바람 속에서
바람에 불리우다 불현듯 더워오는 눈시울
주체할 길 바이 없느니
이제금 홀로인 그분과 나와
가을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사랑하게 하옵소서
보다 경건히
적요의 눈짓으로 마주 바라보는
계절은 가을
신이시여
당신과 나 사이에
그분과 나 사이에
한 아름의 들국화를 두게 하옵소서
보라빛과 흰빛의 소담스런 국화가
피어도 있고
피면서도 있게 하옵소서
가을은 돌아가는 계절
푸른 하늘 아래
나도 몰래 내가 멈춰서는 계절
문득 멈춰서서 다시 보면
나는 혼자인 나
가을은 저마다 혼자인 계절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정념의 기, 정양사, 1960
카페 게시글
-좋은시와 수필
가난한 이름에게 / 김남조
이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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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2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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