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휴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이자, 주변 일대는 ‘안동 만휴정 원림安東 晩休亭 園林’으로 명승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드라마 촬영지로도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안동 동쪽 길안에서 영천방면으로 가다보면 묵계 마을이 나오고 굽이진 묵계 개울과 작은 언덕이 휘휘 돌아 비경을 이루는 데, 묵계를건너 오른쪽 송암동천(松巖洞天)으로 걸어 올라보면 갑자기 펼쳐지는 송암동 폭포와 널찍한 반타석을 배경으로 만휴정이 자리해 있다. 만휴정이란 이름은 이돈우(李敦禹)가 지은 “무진년 여름 선생이 조상의 시호를 계승한 때 김맹실, 김사행, 유계호와 더불어 차운하다. (歲戊辰夏先生延諡時與金孟實金士行柳季好謹次板上韻)”라고 하는 시에 “관직을 그만두고 저녁에 물러나 앉았다(休官晩退坐).”라는 싯구에서 ‘만(晩)’과 ‘휴(休)’를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지극한 즐거움을 산수에 부치고, 행함과 그침을 천기에 따르며, 세상 밖에서 노닐며 세상사를 뜬구름처럼 가벼이 보았다.”는 보백당의 맑고 깨끗한 경지를 상상할 수 있는 명칭이다.
만휴정 마루에는 북쪽방향에 걸린 쌍청헌(雙淸軒) 현판이 있는데, 원래 만휴정을 건립한 보백당 김계행(寶⽩堂 ⾦係⾏, 1431-1517)의 장인인 의령남씨 남상치(南尙致)의 당호로, 지방관 재직시에 부귀영화에는 아랑곳 않고 청백의 정신을 지켰으며, 1453년 계유정난 때 단종의 폐위를 접하고선 이곳 묵계촌으로 낙향하여 쌍청헌을 지어 지내던 옛터에 만휴정을 짓고 오가면서 풍산에 기거하다가 말년에는 묵계에 머물면서 은일적 삶을 영위한 바 있었다. 김계행은 50세에 사헌부 감찰을 시작으로 20년 가까이 관직에 몸담았었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의 삼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만년에는 대사성, 대사간을 지냈다. 벼슬에서 물러난 직후인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 고문과 태형을 겪고, 이듬해 7월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또 다음해 2월에 옥사를 겪고, 또 8월에 , 고령에도 옥고를 3차례나 겪었다. 이에 1500년 정계를 벗어나 묵계 별저에 머물다가 71세인 1501년, 젊은 시절 추억이 어린 길안 묵계 송암동 폭포 옆, 장인의 숨결이 서려있는 쌍청헌 옛터에 별서를 짓고, 청백의 뜻을 잇고자 하였다. 호는 보백당으로 '집안의 보물은 오직 청백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에서 따왔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환로에서 삼사의 요직을 감당하면서도 간언을 피하지 않고 갈등과 대립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과단성 있는 모습을 보였고, 현실적으로 직분을 다할 수 없을 때 수차례 사임하여 진퇴를 분명히 하고 소임에 전념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다.
김계행은 31세에 식년 동당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했고, 32세에 성주교수로 임명되어 이듬해 부임하였다. 또한, 46세 때 충주향교 교수를 마치고 묵계를 거쳐 풍산 사제로 가면서 점필재 김종직과 처음 만났고, 이듬해 보백당 김계행이 상산을 방문하면서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평생을 이어 교유를 이었다.
만휴정은 이후 지속적인 관리를 받지 못한 채 25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거의 폐허의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750년 경에 와서 9세손 김영(金泳, 1702~1784)에 의하여 중수가 시작되었는데, 이무렵 지은 시를 보면,
선조께서 정자 지은 터를 수많은 현인들이 바라보네. 바위벼랑에 흰 폭포가 쏟아지고 절벽을 깎아 옥단을 이뤘네.
先祖構亭地。群賢濟濟看。懸巖銀作瀑。鏟壁玉成壇。
고상한 자취 멀리 아득하고 맑은 바람 차갑고 시원하네. 오늘에야 중수를 시작하니 사간 시를 지어주길 요청하네.
高躅依依遠。淸風灑灑寒。重修今日始。爲乞賦斯干。
하지만, 그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30여 년 간 터만 닦아놓은 채 본격적으로 진행되지는 못하였고, 임종시 유언으로 둘째 아들 김동도(金東道, 1734~1794, 字:德一)에게 부탁하였는데, 이는 1784년 여름 경 만휴정을 들러서 지은 류도원(柳道源, 1721~1791)의 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선생께서 학문에 뜻을 둔 곳에 여러 해 동안 정자를 경영하네 별천지에 향기가 남아 있고 유업이 후손에게 전해졌네
先丈藏修志。經營積有年。別區芬馥在。遺業裔孫傳。
세 웅덩이 가에 터를 닦아 삼십 년 전에 단을 완성했네 저승길에 천고의 한을 아들에게 부탁하였네
基拓三泓上。壇成卅載前。九原千古恨。分付胤郞賢。
이렇게 1790년에 이르러 다섯달 만에 만휴정이 중건된 이후로, 많은 시인 묵객이 이 곳을 들러 만휴정과 자연을 담아 노래하였다.
한편, 만휴정에는 김계행이 유훈으로 남긴 시가 걸려 있는데, ‘몸가짐은 삼가고 남에겐 정성을 다하라’(持身謹愼 待人忠厚), 81세 되던 1511년 2월에 문중이 모였을 때 남긴 경계의 유훈으로, 홀로 있을 때나 남과 함께 있을 때나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는 정성을 다하라는 뜻이였다.
1863년 11월에는 보백당 김계행에게 정헌(定獻)이란 시호가 하사되었는데, 바로 연봉(延奉)의 예를 행하지 못하고, 1867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돈을 모을 수 있게 되어 1868년에 드디어 연시연(延諡宴)을 치를 수 있었고, 이때 헌관으로 참여하였던 긍암 이돈우(1807-1884)가 일군의 문인들과 함께 만휴정을 돌아본 후 김양근의 시에 차운하여 절구 세 수를 지었다. 이 때 같이 둘러봤던 김양범, 류치호 등 대여섯명도 같이 화운하여 시축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늦게야 영남 땅에 태어나서 도성 바라보며 가마솥 씻으려 했네 선생께서 명운의 시대를 만났으나 집안에 소유한 바 그 무엇이던가
晩生天地東。西望漑鬵釜。夫子當明運。家中何所有。
구름 날려 금학산이 아득하고 천둥이 울리듯 냇물이 유장하네 몸을 편안히 할 수 있는 반석은 만년에 벼슬 그만두고 물러난 곳
雲飛金鶴遠。雷吟玉龍大。盤石可安身。休官晩退坐。
후손에겐 청백정신 남기었고 푸른 산엔 정자가 우뚝하네 오늘의 하사를 말하고 싶으나 크나큰 은혜 형용하기 어렵네
淸白遺雲仍。翠微起榭亭。欲言今日賜。洪造窅難形。
이 시회에 이어서 16년 뒤, 1883년 7월 28일에는 이곳 만휴정에서 수계修稧가 있었다. 수계는 왕희지王羲之가 당대의 명사 40여 명과 함께 음력 3월의 첫 번째 사일巳日, 즉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의 난정에 모여서 재앙을 쫓기 위해 물가에서
지낸 제사로,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집서蘭亭集序」에 “모춘暮春의 초엽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에 모여 를 치렀다.”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수계의 일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긍암肯菴 이돈우李敦禹(1807~1884)의 「만휴정수계서晩休亭修稧序」가 고문서의 형태로 남아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晩休亭修稧序
後十六年癸未, 適因事重過山門。陪季父及同人金上舍幼用友人德祖, 又再登覽焉。
16년 뒤 계미년에 마침 일 때문에 다시 산문을 지나게 되었다. 계부를 모시고 김유용(金幼用)과 김덕조(金德祖)와 함께 또 다시 이곳에 올랐다.
見其山益高水益淸, 三瀑成潭, 曲曲逞奇。
산이 더욱 높고 물이 더욱 맑았으며 세 폭포가 연못을 이루어 구비마다 더욱 기이하였다.
亭在其上, 翼然如鳥斯革而翬斯飛。始覺昔之遊未始遊, 而爲吾州之第一山水也。奇乎奇矣。
정자가 그 위에 있었는데 새가 놀라 날개를 펼치는 듯하고 꿩이 날아가는 것 같아 예전의 유람이 제대로 된 유람이 아니고 우리 고을의 제일의 산수임을 알았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第院宇毁破, 爲菟葵燕麥之場, 亭亦隔人煙, 而在空谷中, 典守無人, 棟宇失色。
다만 원우院宇가 무너져 토규연맥菟葵燕麥의 장이 되었고, 정자도 인가에서 멀리 텅 빈 골짝에 위치해 있는 탓에 관리할 사람이 없어 동우棟宇가 제 모습을 잃었다.
此則不但爲子孫諸公之憂, 而亦吾輩士林之責也。
이것은 자손들의 근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림士林의 책임이다.
同志諸名勝, 相與發論, 各當十文銅, 修稧置案。
동지와 여러 명류들이 서로 논의하여 각자 10문文의 돈을 부당하기로 하는 수계의 안을 마련하였다.
且以告遠近同意者, 續續追入, 爲逐年長息, 以爲保護斯亭之地。
또한 원근의 뜻을 함께 하는 자들에게 알려 속속 끌어들여 해마다 자산을 불려 이 정자를 보호할 바탕으로 삼았다.
咸曰: ‘此不可無識’, 屬余爲言。乃走筆胡草, 以備山中故事云爾。
모두가 “서문이 없을 수 없다.”고 하며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이에 빨리 글을 지어 산중고사山中故事를 갖출 따름이다.
위의 예에서, 만휴정은 추모의 공간으로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만휴정이 추모공간으로 활용된 예는 김성근(金聲根,1835-1919)이 임인년(1902) 중양절에 김택진(金澤鎭, 1875-1924)과 함께 만휴정에 들르면서 지은 만휴정기(晩休亭記)에서 잘 보이는데,
晩休亭記
만휴정기
...
惟我傍祖寶白堂先生, 以學術德望, 當成廟盛際登第, 歷敡薇垣栢府玉署銀臺國子天曹, 是則可行而行也.
생각건대 나의 방조傍祖 보백당 선생은 학술과 덕망으로 성종조成宗朝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홍문관弘文館․승정원承政院․성균관成均館․이조吏曹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이것은 벼슬에 나아갈 만해서 행한
것이다.
直道事君, 後罹危患, 卷退菟裘, 樂泉石領猿鶴, 潛究性理, 葆完壽福, 是則可休而休也.
직도直道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위태로운 환란을 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여 원학猿鶴을 벗 삼고 자연을 즐기며 성리서性理書를 연구하며 수복壽福을 유지한 것은 물러날 만해서 물러난 것이다.
迹其早晩, 寔合乎義矣.
그 조만早晩의 행적은 실로 시의時義에 합치된다.
...
永嘉之黙溪, 嘗所往來遊玩, 而有一奧區, 雲榱月謝, 翼然出臨于松巖洞壑之間,
영가永嘉(안동)의 묵계黙溪는 일찍이 내가 오가면서 노닐고 완상하던 곳인데 한 오묘한 곳에 위치한 정자가 송암동학松巖洞壑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此卽辛酉以後晩休之所, 而爲亭名之者也.
이 정자는 보백당께서 신유년辛酉年(1501) 이후 노년을 보낼 계획으로 정자를 지어 이름 붙인 것이다.
左有雙淸軒, 扁楣之手澤尙新. 前有淸德祠, 後人之寓慕有所.
왼쪽에는 쌍청헌雙淸軒이 있는데 편액의 글씨가 아직도 청신하다. 앞쪽에는 청덕사淸德祠가 있는데 후인들이 경모하는 곳이다.
今登斯亭也, 溪壑草木, 尙見精采, 而高松奏籟, 可仰百世之淸風, 流瀑成泓, 可想實學之淵源.
오늘 이 정자에 오르니 시내골짝의 초목들이 여전히 정채精彩를 발산하고 있으며, 높은 소나무와 바람소리는 백세百世의 청풍淸風을 우러러볼 만하고, 폭포와 웅덩이는 실학實學의 연원淵源을 상상할 만하다.
噫! 晉公之綠野․贊皇之平泉, 皆極將相之富貴, 其所退居, 想不免侈華排鋪,
아! 진공晉公의 녹야당綠野堂과 찬공贊公의 평천장平泉莊은 모두 장상將相의 부귀함을 지극히 드러내었고 그들의 퇴거退居는 생걱컨대 사치하고 화려했을 것이니,
孰若是亭休息之日留有餘不盡之仕祿, 取幽僻瀟灑, 所守淸白也哉?
어찌 이 정자에서 휴식하던 날에 넉넉하고 다하지 않는 벼슬과 녹봉을 버리고서 그윽하고 상쾌한 곳을 취하여 청백을 지키던 것과 같겠는가?
間雖廢興開數, 而晜仍擎護勿替.
간혹 정자가 흥성하고 폐치되는 운수가 있더라도 후손들은 떠받들고 보호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하라.
김성근의 기문에서 전하듯이, 보백당 김계행이 신유년(1501) 이후로 노년의 은거를 위해 만휴정을 짓게 되었으며, 만휴정의 왼쪽에는 쌍청헌, 앞쪽에는 청덕사淸德祠가 있었다고 하는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추모를 위한 공간으로 만휴정을 이용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