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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자본주의 왕국의 말랑말랑한 지붕 아래에서 가난한 이들의 냄새를 맡는 장면도 내게는 탄광 속 카나리아와 같이 피 토하는 아름다운 소리, 아스팔트 위로 솟아오르는 풀의 힘찬 솟아오름 같은 노랫소리로 들린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오랜 패배와 침묵에서 냄새를 맡을 줄 아는 것은 김사이 시인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오랜 패배의 냄새를 퀴퀴한 지하방에, 오랜 침묵의 냄새를 엇박자 기침에 비유할 때, 그 비유는 화려한 시의 수사적 범주를 벗어나 삶과 시가 일치하는 순간에만 경험할 수 있는 가슴을 찌르는 통증으로 다가온다. 이런 시야말로 나는 가장 극한의 고통에 직면해 있는 소외된 사람들과 연대가 가능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이 세계의 아픔을 함께하는 노래가 될 수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박형준 (시인, 동국대 교수)
책 속으로
어정쩡하게 가난해서
학자금 보조도 청년주택자금 지원도
자격이 안 되는
너라는 시간은
산소호흡기 낀 가난이라고 증명해야
다음 너를 대출받는
가난은 자본의 밑천
그러니까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
_「계속 다음」 중에서
두통 없는 하루가 지나가요
멀미 나지 않는 하루가 저물어요
몸살 없이 무사한 오늘이에요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라 믿었어요
오늘이 지나도 내일은 아니었어요
오늘 하루만큼 죽어간 나의 오늘이었어요
_「너무 늦지 않기로 해요」 중에서
너와 나의 외로움이 달라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너는 웃는 법을 나는 우는 법을
돈 주고 배운다
_「감정시장」 중에서
여자라는 핏줄은
어디에 서건
동료였던 적이 없다
살아 있는 계급장도 무력화시키며
약 먹여서 찍고 두들겨 패서 찍고 쫓아다니면서 찍고 사랑한다고 찍고 일거수일투족을 CCTV도 찍고 블랙박스도 찍고 너도 찍고 나도 찍고
_「불안한 동거」 중에서
시의 본성은 노래라고 했는데
내 시는 노래가 아니라고 한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노래는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슬픔의 무게가 가벼웠든 깊었든
그만큼의 서사는 남을 테지만
_「갱년기」 중에서
잠시 머물다 지나가리라 생각한
가리봉동 구로에서
30년짜리 붙박이장이 되었지
어제 같은 오늘을
오늘 같은 내일을
유일한 오늘을 경배하지
_시인 노트 중에서
징후는 곁에 있다가 무엇이 되는 것일까. 그녀는 생각에 빠지면 몇 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가스레인지에 얹은 주전자가 타면서 연기가 나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눈에 살기가 돌아 신들린 사람처럼 낯설어지기도 했다. 마치 그 무엇에 서서히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_시인 에세이 중에서
출판사 서평
k포엣 시리즈 32권 김사이 시인의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
불안한 삶을 통과하며 부르는 힘찬 삶의 찬가
k-포엣 시리즈 32권으로 김사이 시인의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가 출간되었다. 『반성하다 그만둔 날』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이후 세 번째 시집이다. 앞선 시집들에서 노동 현장의 부조리함과 그 속에서 이중으로 고통받는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절실하게 그려낸 시인답게 이번 시집에서도 부조리한 삶과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풍경은 개선되는 것 없이 교묘하게 더 나빠지고 있는 것만 같다. 시인은 그러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이 세계의 아픔을 그 자리에서 함께 노래한다.
“도처에 폭력을 모시고 사는 시절이다”
시인의 눈에 포착된 세계는 폭력으로 가득하다. “출근했다가 퇴근하지 못한 사람들/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들/무수히 반복되는 죽음들/죽어도 끝나지 않는 죽음들”을 바라보며 살아남은 자로서 끝없는 통증을 느낀다.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수치심을 알아볼 때 그 순간들이 시가 된다. 박형준 시인은 발문에서 “김사이 시인은 언제나 자신이 살아온 만큼, 자신이 일한 만큼만 시가 되기를 바라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삶과 시가 일치하는 순간을 경험할 때 느껴지는 감동이 이번 시집에는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