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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하나님의 연설의 결론(1-2)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갖기는커녕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이웃의 입장조차 헤아리지 않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자기 눈앞에 있는 것에 매몰되어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달라고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기도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불평할 수밖에 없고, 신앙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1-2)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연설의 결론으로 욥에게 대답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지금 이 상황은 법정적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데, ‘다투다(리브)’라는 단어는 종종 재판의 상황에서 고소하고 변론하는 상황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탓하는 자’라는 표현도 법정에서 ‘고소한 사람’이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욥이 하나님을 법정으로 불러내기를 원했는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욥의 말을 따라 욥을 법정으로 불러내셔서 그에게 대답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부분은 욥에 대한 비난이나 책망이라기보다는 진정으로 욥의 대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욥의 첫 번째 대답(3-5)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당신의 뜻대로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따름으로써 그분의 섭리에 의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리를 믿는 것외에는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주신 분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3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3-5)
하지만 대답을 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욥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능력과 지혜를 들으면서 자신의 지혜가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자신이 그동안 한 말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무례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손으로 입을 가린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침묵한다는 것을 뜻하는 행동으로, 욥은 21:5-29:9에서 다른 사람에게 손으로 입을 가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 스스로 입을 가리고 있습니다. 욥의 연설에서는 욥의 비극의 끔찍함으로 인해 생긴 침묵이라면,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비천함 때문에 생긴 침묵입니다. 5절에서 그는 이미 한 말 외에 한마디도 더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동안 자신이 한 말이 하나님의 지혜에 비해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욥은 인간과 하나님의 지혜 사이에 상상할 수 없는 격차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하나님께 수긍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연설을 하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연설(6-24)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 세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는가?’라며 원망합니다. 욥기는 이런 교만함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여기지 말고, 자기들이 가장 보배로운 존재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돕지 않으신다는 이유로 불평하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도우셔야할 분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교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6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7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8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9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10○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11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12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13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14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15○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16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17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18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으니 19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20모든 들 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21그것이 연 잎 아래에나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22연 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도다 23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24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6-24)
욥이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좀 더 교훈을 주시기 위해 두 번째 연설을 시작하십니다. 두 번째 연설은 크게 욥에게 의에 대해 충고하시는 부분과 하마(베헤못)라는 매우 신비로운 동물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시는 부분으로 이들을 통해 또다시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욥에게 알려주십니다.
(1) 욥에 대한 충고(6-14)
6절부터 여호와의 두 번째 연설이 시작되는데, 첫 번째 연설과 동일한 말로 시작하십니다. 욥이 아직 그의 고소를 취하하며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8절에서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는 이런 욥의 태도에 대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 문장이 전제하는 것은 욥도 인과응보 신학을 암시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세 친구들과 지금까지 자신이 죄가 없이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인과응보 신학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욥은 자신은 죄가 없는데, 왜 죄인인 것처럼 고통을 주시냐고 하나님께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고 이런 욥의 태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네가 하나님과 같은 능력과 권위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9절의 말과 목소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과연 하나님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지혜와 능력이 욥에게 있냐고 질문하십니다. 10-13절은 지도력에 관한 것으로 욥에게 능력이 있으면 한번 해보라고 말씀하시는 목록들이 등장합니다. 10절에 나오는 위엄, 존귀, 영광, 영화라는 단어는 모두 하나님을 높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진토에 묻는다는 것과 무덤에서 얼굴을 싼다는 것은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여 죽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과 같은 능력과 위엄을 가지고 교만한 자와 악한 자를 심판해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의 오른손이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다고 인정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아이러니로 만약 욥이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하나님을 변호인으로 애타게 찾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현재 욥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욥도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크신 하나님을 그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하마(베헤못)(15-24)
욥의 한계와 하나님의 크심을 더 알려주시기 위해 15-24절에서 베헤못에 대한 질문을 하십니다. 베헤못이 어떤 동물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코끼리, 악어, 하마. 공룡 혹은 상징적인 동물 등으로 해석합니다. 초식 동물이면서 강하고 물가에 있다는 표현과 고대 이집트에서 갈고리로 코를 꿰어 하마를 잡는 그림을 근거로 많은 해석에서 하마로 보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하마의 꼬리는 팔고 얇아 백향목과 같다는 묘사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헤못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육지에서 가장 뛰어난 동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베헤못에 대한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5절은 욥과 베헤모의 비교이고 16-18절은 베헤못의 외모에 대한 설명이며, 19-24절을 베헤못의 뛰어남에 대한 설명입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욥을 지은 것처럼 베헤못을 지었다고 하심으로 욥과 배헤못을 동일한 창조물로 두셨습니다. 16-18절은 베헤모의 외모를 설명하는데, 강력한 힘을 가진 허리와 힘줄을 가지고 있으며, 꼬리는 백향목같이 심하게 흔들린다고 하는데, 백향목은 구약에서 등장하는 굵고 곧은 나무로 가장 좋은 목재입니다. 또한 넓적다리는 힘줄이 꽉 짜여 있고 뼈는 놋관과 쇠막대기 같이 강하다고 묘사합니다. 이런 묘사는 주로 베헤못이 다부진 몸체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19절부터는 베헤못의 뛰어남을 설명하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중에 으뜸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 으뜸이란 표현은 ‘처음’, ‘최고’라는 뜻 모두를 갖는데, 여기서도 두 가지 의미 모두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로, 창조주이신 하나님 외에는 베헤못을 해칠 수 없습니다. 셋째로, 모든 야생동물이 뛰노는 산들이 모두 베헤못의 밥상이어서 어느 짐승도 그가 먹이를 먹는 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넷째로, 시원한 그늘이나 늪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는 모습으로 연잎이나 시내 버들이 감싼다는 것은 아무것도 그들의 쉼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심지어 폭우가 와서 요단강이 범람할지라도 베헤못에게는 전혀 방해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경우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철병거나 말도 강이 범람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은 절대로 베헤못을 잡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베헤못이라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짐승에 대한 설명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욥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니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나를 지키셔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조금 변형되면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를 원망하고, “내가 이렇게 힘든데 교회는 아무 일도 안 해 준다”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우리 중에는 이런 악한 마음을 품는 사람이 없어야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