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 타고 대통령 되셔야” JP 말에 미소 번진 박정희 (3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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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정부가 의욕적으로 일을 벌여 나가던 1961년 여름이었다. 내 머릿속엔 새로운 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의 혁명과업을 이어받을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드는 일이었다.
군인이 주가 되는 혁명조직을 가지고는 나라를 길게 이끌어갈 수가 없다. 머지않아 국민들이 싫증 낼 게 뻔했다. 우리보다 앞서 혁명을 한 터키나 이집트를 봐도 그랬다. 군인조직이 이끌어가는 통치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마음은 원래 쉽게 변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국민들이 혁명세력에 질리기 전에 민간 정부로 이양(移讓)해야 한다. 혁명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국민의 지지를 얻어 민간 정부로 넘어가는 게 혁명 성공의 관건이라고 본 것이다.
6대 대선이 열린 1967년 5월 3일 밤, 서울 소공동 민주공화당 중앙당사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의장실에서 김종필 당의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낙승을 예상한 듯 두 사람의 표정이 밝다. 사진 중앙포토
“혁명 뒤처리 못하면 역적 돼” 67세 정구영, 37세 JP 손잡다 (34)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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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당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청람(靑嵐) 정구영(鄭求瑛·1896~1978·충북 옥천 출신) 선생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선비’였다. 지조를 절대 꺾지 않고, 변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깨끗하게 지키는 그런 선비 말이다.
그런 분이 우리 정치사에 다시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1963년 8월 30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서울역 앞 민주공화당사에서 입당원서에 서명한 뒤 정구영 초대 총재와 나란히 앉아 있다.
박 의장의 당적번호는 70만 6611번이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자신의 추천인인 정 총재에게 “무슨 사고가 나면 추천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농담을 건넸다.
이튿날 박 의장은 3차 전당대회에 참석해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정식으로 수락하고 후임 총재에 추대됐다. 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