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파랑에게 : 파랑을 배우는 하루
가을의 파란 하늘이 좋습니다. 이런 날에는 실내에 머무는 것이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밖으로 나가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걷고 싶습니다.
곁에 아내가 있다면 함께 통복천을 거닐고, 멀리서 친구가 만나러 온다면 싱그러운 가을바람을 맞으며 파크골프를 치면 좋겠습니다. 아직 골프장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파크골프장에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파란 하늘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과 함께 걸어도 좋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과 함께 가을길을 걸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아이들이 제일 바쁜 것만 같습니다. 다음에 또 이렇게 파란 가을 하늘을 만나게 되면 아이들을 졸라봐야겠습니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무작정 함께 걸어보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가능하겠지요.
지난밤에는 세찬 바닷바람이 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해서 게으른 나는 아침을 침대 속에서 맞이하고 있습니다.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 커튼을 활짝 열어보지만 아직 밖은 어둡습니다. 오늘도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 14층 식당으로 올라갔습니다. 벌써 식사를 끝내고 나가는 연수생도 있고, 나처럼 늦은 아침을 먹으러 오는 연수생도 있습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옆방에 묵고 있는 선배님을 기다립니다. 전화를 드려보니 이제 막 올라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접시에 음식을 담아 창가에 앉았습니다. 창밖으로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두꺼운 유리창 옆에서 햇살을 받고 있으니 추위보다는 오히려 눈부신 열기가 느껴집니다.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의 하늘입니다.
오늘은 오전에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네 시간 동안 실습을 해야 합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미술과 음악이 함께하는 한 시간의 공연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녁 8시가 되어야 연수 일정이 끝나는 날입니다. 오늘만 지나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배운 것을 금방 잊어버리겠지만, 집으로 돌아가 다시 확인하고 떠올려 볼 수 있도록 오늘도 노트북을 펼쳐 부지런히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강의를 듣는 강의실에서는 파란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막힌 강의실에서 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해야 합니다. 창밖의 파란 하늘이 더욱 그리워지는 하루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다시 파랑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파란색을 떠올리면 저마다 다른 느낌을 갖습니다. 오늘 만난 여러 화가들도 파랑에 대해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피카소의 파랑은 우울이었고, 칸딘스키의 파랑은 열정이었습니다. 몬드리안의 파랑에서는 차가움과 규칙을 느낄 수 있었고, 앙리 마티스의 파랑에서는 희망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같은 파란색을 바라보지만 그 색을 통해 느끼는 감정은 참으로 달랐습니다. 화가들은 자신이 느끼는 색의 감정에 따라 자기만의 세계를 완성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미술사에 의미 있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바라보며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같은 파랑 속에도 참 많은 다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을 좋아하는 나는 창문 없는 답답한 강의실에서 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평소보다 늦게 끝난 마지막 강의에서 다양한 파랑을 만났습니다. 자연 속의 파랑과 달리 그림 속의 파랑에는 저마다의 느낌과 감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울, 열정, 차가움, 희망…. 같은 색이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캔버스 위에서 저마다 의미 있는 작품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우울도, 열정도, 차가움도, 희망도, 그리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내가 느끼는 설렘까지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누군가는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모든 파랑은 의미가 있으니까요.
파랑이 그럴진대 분홍은 또 어떻고, 초록은 또 얼마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 학교를 생각합니다. 우리 학교의 초록색 잔디운동장을 아이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요? 선생님들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학교 곳곳에 피어 있는 송엽국의 분홍색은 또 저마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요? 같은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나에게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초록색 잔디운동장이 어떤 아이에게는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던 즐거운 기억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아이에게는 넘어져 무릎을 다쳤던 아픈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도전의 공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위로의 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안에 담기는 마음은 모두 다릅니다. 시간이 흐르고 저마다의 삶이 조금씩 완성되어 갈 때, 오늘의 경험도 충분한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림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파랑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파랑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색의 느낌을 추상적인 음악으로 표현해 주는 실내악 연주가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세상의 땅으로 내리는 단비와 같다고 합니다. 비가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적셔 주듯이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매일 보고 느끼는 학교의 색과 풍경을 조금 더 깊이 느끼게 해주려면 어떤 앙상블이 필요할까요?
초록색 잔디운동장에 음악이 더해지면 아이들은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요? 분홍색 송엽국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 꽃은 아이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요?
같은 색을 보고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것, 그 다름이 모여 더 풍성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알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학교의 풍경에 어떤 앙상블을 더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제 드디어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학교의 파란 하늘과 초록색 잔디운동장, 그리고 분홍색 송엽국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은 여전히 파랑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색을 좋아하세요?
평안하세요.
2026.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