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예수 부활 사건과 부활 체험
1. 빈 무덤 (부활 신앙 1)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 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마르코 16,1-8)
♣ 1단계 여행 : 묵상
복음은 빈 무덤을 부활의 첫 사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빈 무덤을 부활의 상징으로 이해한 제자들의 깨달음이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제자들이 과연 어떤 근거로 빈 무덤을 부활의 상징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먼저 예수의 빈 무덤 사건을 상징하는 구약의 사례를 마카베오서에서 찾은 듯합니다. 마카베오서를 보면 사라진 지성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시대에 바빌론이 유다를 쳐들어와 유다가 쑥대밭이 됩니다. 그때 유다인들은 볼모로 끌려가고 성전마저 파괴됩니다.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명을 받고 성전 지성소에 모셔진 계약의 궤를 느보산 어느 동굴에 모시고 나서 그 입구를 막아버립니다. 그 후 이 동굴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비밀에 부쳐진 일로서 다만 하느님이 정한 때가 되면 그 동굴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마카베오 2,1-8)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이해한 예수의 빈 무덤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는 예레미야의 동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무덤 안에 천사들이 등장하는지 그 이유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마르코 복음서에는 천사라는 언급은 없고 다만 '흰 옷 입은 청년' 이 무덤 안에 등장하지만, 마르코 복음서보다 후에 쓰인 마태오 복음서에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의 돌문을 굴리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루카나 요한복음에는 두 명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의 빈 무덤 회상에서 흰 옷 입은 젊은이가 천사로 인식되고 또 천사가 한 명이 아닌 두 명이나 무덤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데는 제자들이 빈 무덤을 계약의 궤가 감추어졌던 동굴로 이해했다는 암시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의 빈 무덤에 등장하는 천사는 모세의 계약의 궤를 지키던 천사를 의미합니다. 계약의 궤에는 두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또 계약의 궤 안에 들어있던 십계명이 새겨진 계약의 판은 바로 예수를 의미합니다. 정리하면, 무덤이 열린 것은 감추어진 지성소가 다시 세상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모세의 옛 계약을 대체하는 새 계약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어 있다는 뜻은 새 계약은 더 이상 지성소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제자들이 빈 무덤과 예수의 부활을 직결시켰다고 보기에는 좀 미흡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빈 무덤이 곧 예수의 부활 사인이라는 확신은 반드시 제자들의 체험을 통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던 그들의 여정을 완성시키는 어떤 결정적인 체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결정적인 확인임과 동시에 예수를 믿고 따랐던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최종 판결이기도 한 그런 체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무덤을 향해 길을 재촉하던 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찾아가듯 향유를 준비해서 죽은 예수를 만나러 갔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여인들에게는 예수의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을 어떻게 치울지 마땅한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날이 밝자 무작정 예수께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 세 여인의 행동에서 우리는 예수를 향한 우리의 참 본성을 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어떤 간절함으로, 죽음마저도 막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끌림인 것입니다. 이 본성이 이들 여인들에게 살아 있었기에 세 여인들에게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 여전히 살아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예수께 달려간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러 달려갔던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빈 무덤에 당도했을 때 발생합니다. 무덤이 빈 것을 보고 그때서야 그들은 절망합니다. 복음은 그들이 빈 무덤을 경험하고는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그들이 천사를 만났기 때문일까요? 그렇기도 하겠지요. 무덤 속에서 영적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소름이 끼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냥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천사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그들을 그토록 공포에 질리게 한 것은 예수가 사라진 텅 빈 무덤,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목적이던 그 예수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 부활의 첫 사인인 빈 무덤은 이처럼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의 죽음보다 더 절망적이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그 용솟음치는 기쁨이 절망과 함께 찾아온다니 믿어집니까?
그러나 '예수의 빈 무덤' 체험은 우리에게 절망만을 안기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절망 한가운데에서 경험되는 어떤 근원적 사실에 대한 통찰도 함께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근원적 사실이란 바로 우리의 마음 바탕이 원래 그렇게 텅 비어 있다는 것과 그 비어 있음이 무엇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빈 무덤을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첫 사인으로 등장시킨 데는 바로 이런 부활 소식의 역설적인 특성을 그들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천사는 빈 무덤이란 공허함과 더불어 오는 부활 소식을 상징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빈 무덤을 처음으로 경험한 세 여인은 기겁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가 사라진 공허한 자리를 본 것이지요. 그러나 그 경험에는 공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의 메시지도 함께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오늘 흰 옷을 입은 청년의 입을 통해 전해집니다만, 굳이 젊은이든 천사든 그렇게 형상화하지 않더라도 빈 무덤의 경험은 다만 공포 경험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희망적인 깨달음의 불꽃도 함께 일어나는 그런 체험을 의미합니다. 즉 천사의 출현은, 빈 무덤의 체험은 공허함을 경험시킴과 동시에 그 빈 무덤에 대한 참된 자각도 일으키는 어떤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이 자각으로 인해 공허함이 공허함만이 아닌 어떤 것이라는 자각이고, 사라짐이 ‘무’로의 환원이 아닌 어떤 새로운 현존 양식으로 인식되며, 어둠이 절망을 꿰뚫는 희망의 서광으로 자각되는 일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공허함은 곧 충만으로, 무는 곧 유로, 어둠은 곧 빛으로 자각되는 새로운 인식이 우리에게 열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그분을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고, 영이신 분을 영으로 만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비어 있다는 말이 주님께서 안 계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분은 비어 있음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고정된 형상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라짐이 곧 현존으로 자각되고 빔이 곧 충만으로 받아들여지며, 어둠이 곧 빛으로 자각되는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첫댓글 어둠이 절망을 꿰뚫는 희망의 서광으로 자각되는 일대 사건.....아멘!
사라짐이 곧 현존으로, 빔이 곧 충만으로, 어둠이 곧 빛으로 자각되는 가운데 계시는 주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