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책꽂이에는 박완서 전집(문학동네) 옆에 5권짜리 오정희 전집(문학과지성사)이 놓여 있다. 르포 작업을 준비하면서 <중국인 거리> <옛우물> <유년의 뜰> 등을 한 편씩 읽었다. 작가가 사회적 약자와 어둠을 드러내는 방식과 인간의 내밀함을 묘사하는 문장을 공부하는 교재로 삼았다.
최근에 나온 한국 시 번역가 인터뷰집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에는 오정희 소설가 언급된다. 8살에 이민 간 한국계 미국인, 94년생인 한영번역가 소제가 오정희를 통해 한국문학에 눈 떴음을 고백한다. 소제가 <저녁의 게임>이란 단편을 읽고 다크한 문체에 단번에 매료돼 오정희의 모든 작품을 독파했다는 대목이다. “1986년에 발표된 <완구점 여인>에는 장애인 여성과 여고생의 사랑이 묘사된다. 그 시대에 레즈비언 이야기가 소설로 나오다니,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101쪽)
한국문학에서 피해갈 수 없는 이름, 시대를 앞서 갔던 개화된 소설가 오정희가,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을 통해 ‘블랙리스트 실행자’임에도 불구하고 서울국제도서전의 얼굴 역할을 했음이 드러났다. 아, 실망과 충격이란... 소제 번역가는 자신의 트위터에 ‘오정희 탈덕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글 쓰는 사람은 어때야 하는가를 늘 생각한다. 나는 글이나 강연을 통해 사회적으로 과평가된 직업 중 하나가 ‘작가’라고 줄곧 주장해왔다. 사람들은 작가를 높이 본다. (“엄마가 작가라서 애들은 좋겠어요.” “글 잘 쓰는 사람 멋있어요.”) 작가에 대한 인식이 좋은데 여느 업계가 그렇듯이 여기도 글을 도구로 사기 치는 사람이 많아요, 라고 말한다. 그러면 관객들은 웃는다.
글이 삶을 초과하는 경우를 말하는 거다. 오정희 소설가는 지난 2021년 KBS와의 인터뷰에서 “문학이나 예술이 주는 가장 큰 미덕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소설을 통해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냈지만 그렇게 얻은 권력으로 동료 문인들을 검열하고 지원에서 배제했다. (기자화견문 참조)
글쓰기는 대단하지만 대단하지 않다. 쉽게 하찮아진다는 건 기반이 단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글쓰기는 자기 연민으로 비대한 자아를 과시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괜찮은 문장을 쓰고 나면 이미 자기가 그런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쓰고 나서 그 사안에 대해 잊어버리기도 한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래서 글의 권위와 진실은 쓰는 순간이 아니라 쓰기 전과 후에 만들어가야 하는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속는 줄도 모르고 나를 속이며 글 쓰는 허깨비로 살게 될까봐 두렵다. 글을 쓰고, 글쓰기가 세상을 낫게 만들 수 있다고 사람을 만나서 말하고 다니는 직업인으로서 정신 바짝 차리고 싶다. 그래서 일단 어제는 도서전 바깥 코엑스 동쪽 마당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자 오정희 소설가의 2023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 자진 사퇴에 대한 문화예술계 입장’ 기자회견에 갔다. 작가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뙤약볕 아래에서 1시간 동안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당사자의 공개 사과와 관련 기관의 재발 방지 대책에 관한 구호를 외치고 왔다.
-오정희 소설가는 공개 사과하고 대한민국예술원에서 자진 탈퇴하라!
-박보균 문화체육부 자관은 오정희 사태 관련 책임자 처벌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하라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오정희 사태 관련 진상조사 하라
-대통령경호처는 도서전 개막식에서 문화예술인들에게 자행한 과잉경호와 폭력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에 오정희의 문학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좋아하던 문인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다니... 아 괴로습니다. 정말. ㅜㅜ
첫댓글 사람들이 끌려나가는 걸 보고 어이가 없었어요. 지금 시대가 진짜... 역행하는 역사도 역사인가요 ㅠㅠ 아 정말 살맛이 안납니다
글을 써서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한 사람으로서 글과 삶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 마음 먹어 봅니다. 오정희 작가가 다른 작가들의 목소리에 자신을 다시 돌아 봤으면 좋겠어요.괴로워 하시는 마음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