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스님
구하 스님은 조선시대 말기에 태어나 일제 시대를 거쳐 1960년대까지 거의 한 세기를 사신 통도사의 고승이었다. 스님은 울주군 두동면 봉계 출신으로 어려서 유교 경전과 사서(史書)를 통달하고 출가하였다. 그래서 유교와 한시, 서예에 조예가 깊었고 유학자들과의 교유도 많았다. 스님은 전후 15년간이나 통 도사의 주지를 역임하였고, 젊은 시절부터 취운암의 조실(祖室)이 되어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스님은 유불선 3교의 교리를 통달하였고, 용맹정진의 화신이며 호걸스러운 풍모를 가지고 당시의 불교계를 지도했던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고매 한 인품과 자상한 인정으로 불교계뿐만 아니라 세속에서도 따르는 분들이 많았다. 스님은 많은 한시와 유묵을 남겼다.
[독립자금증서]
겉으로는 일본의 신문물을 배우러 일본에 드나들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큰 자금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기밀비로 총 1만3천환을 내놓았음 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설우 스님이 구하 스님에게 1927년 써준 영수증들은 구하 스님의 재산을 모두 통도사에 내놓은 것처럼 꾸 며 자신의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나중에 이를 눈치챈 일제가 구하스님을 주지에서 쫓아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구하스님 말년에 시봉을 들었던 통도사 주지였던 현문(玄門)스님은 "독립운동 자금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항상 걸인 행색을 하고 구하스님 방 앞에서 행패를 부리면 구하스님이 데리고 들어가 슬며시 자금을 건넸는데, 어찌나 은밀하고 눈 깜짝할 새 건네지는지 그 바로 옆에 있던 시자스님들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통도사가 독립운동 자금을 댄다.’는 소문이 흘러나가자 일본형사들이 통도사 주위를 맴돌며 절의 살림살이를 살폈는데, 그때마다 구하스님은 사제인 경봉스님과 함께 절 밑 사하촌의 기생집에서 일부러 몇날며칠을 머물다가 가곤 했다는 것이다. ‘기생집에서 거금을 썼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사실 두 스님을 존경하던 기생들은 한 푼도 받지 않고 명필로 소문난 구하스님과 경봉스님의 글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구하스님은 1965년 11월24일 한낮 “나 이제 갈란다. 너무 오래 사바에 있었어. 그리고 다시 통도사에 와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94세, 법랍 82세로 열반에 들었다.
스님은 입적을 예감하고 직접 만사(輓詞)를 지었다.
自輓(자만)
此身不欲百年生(차신불욕백년생)
了達淸眞脫世情(요달청진탈세정)
心契彌陀三聖願(심계미타삼성원)
神駝兜率一輪明(신타도솔일륜명)
紅爐點雪歸何處(홍로점설귀하처)
白月香風震法城(백월향풍진법성)
無去無來元體性(무거무래원체성)
逍遙自得任縱橫(소요자득임종횡)
이 몸은 백 년의 삶을 원하지 아니하고
세정을 벗어나 청진을 요달코자 했도다
마음이 아미타 삼성의 원과 계합하고
정신이 도솔천으로 달리니 둥근 달이 밝네
화로 속의 눈은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가
밝은 달 향기로운 바람법성에 떨치네
원래의 체성은 감도 옴도 없나니
종횡으로 소요함을 임의대로 맡기노라
[출처] 독립자금을 보낸 구하스님이야기
첫댓글 신라이후 대한민국이 중국의 속국이 되지 않고 이렇게 우리 민족성을 이어오는 것는 불교의 힘이 그 바탕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