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눅 1:46~56
제목: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1:46)
● 기독교는 성도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성도의 마음이 구주 하나님을 기뻐하는 신앙입니다.
눅1: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
전혀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희미하거나 연약한 믿음은 하나님을 율법적으로 두려워하기는 해도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하지는 못합니다. 성숙하게 성장한 믿음은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마음이 구주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한 것은 마리아 한 사람이 그렇게 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깊고 풍성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성경은 마리아의 찬가를 기록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우리 성도들의 롤 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분인데요. 비천하게 지냈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복이 있다 일컬음을 받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눅1: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
혹시 우리가 비천한 상태에 있고 힘든 지경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럴수록 우리의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힘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으려 애쓰지만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을 갖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 육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서 실망하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와 같은 연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육신의 아버지와 차원이 전혀 다른, 사랑과 연민과 도움을 주시려는 은혜 제공의 관대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첫 단추를 끼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며 기뻐하던 성도들이 무수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수많은 성도들 중에서 중요한 사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요(요인열거주의). 성경은 피조물과 인간들의 모든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하는 세밀한 역사책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중요한 인물과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거룩한 경전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지만 성경을 읽는 모든 평범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마리아의 찬가(눅1:46~56)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구주를 기뻐해야 하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왜 하나님께 성경의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는 중요한 인물로 선택을 받았을까요? 마리아에게 뭔가 대단히 우수한 자격이 있어서였을까요? 그녀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이유는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만한 뛰어난 어떤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비천한 신세(공동번역)를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에 의한 선택입니다.
눅1:49.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50.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1.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
마리아는 자신이 선택받을 자격이 없고 그러한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받은 이유가 하나님의 능력 때문임을 고백합니다(눅1:50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리고 자신이 선택을 받고 은혜를 누리는 원인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 주심에 있음을 고백합니다(51.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물론 마리아는 형편없는 사람이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경외하던 신실한 성도였습니다(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마리아는 겸손하고 자신의 비천함을 아는 믿음의 지혜를 가진 여인이었지만, 천주교가 숭배하는 정도로, 뛰어나거나 신적인 인물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찬가를 부른 마리아는 자신을 비천한 자로 고백하고 자신을 선택하여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눅1: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
하나님은 마리아처럼 자신의 비천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자를 돌보시고 높여주십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생각이 교만하고 권세를 과시하는 자들은 낮추십니다. 이 겸손과 교만의 대비는 성경에서 흔히 등장하고 일맥상통하는 신앙의 원리들 중 하나입니다.
●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그들의 믿음이 뛰어나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을 선택할 만한 의(義)가 있어서 선택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41:8.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사41:14.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으로 선택한 것 때문입니다. 야곱(이스라엘)은 버러지 같이 비천한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의 주권 때문에 등이 강조되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격과 능력이 버러지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인정하고 믿고 고백하는 것이 겸손한 믿음의 태도입니다. 불신자는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차치하고요. 기독교를 사칭하는 이단, 사이비, 신비주의자 및 정통교단에 숨어있는 불건전한 목사들은 하나 같이 모두가 교만하고 자신에 관한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교주나 목사 자신에 대한 TMI만 많이 지껄여 댑니다(too much information, 다른 사람이 궁금해하지 않는 내용도 자신이 먼저 나서대며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 행위). 설교 강단을 교주나 목사의 ‘자기고백의 과잉 공간’이나 ‘감정의 배설구’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매우 심각한 교만이며 신성모독의 근처로 가는 매우 위험한 행위입니다. 이 묵상을 읽는 독자님들 중에 그런 설교자를 만났다면 빨리 피하시고 다른 건전하고 평범한 교회로 옮겨 가시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 겸손한 신앙을 고백한 마리아처럼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음으로 구주 하나님을 기뻐하는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믿음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눅1: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
구약교회는 물론이고 신약교회 믿음의 조상도 되는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의 극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입니다.
히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합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이신칭의 이전에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는데요. 그 선택을 받은 자는 아무 의나 공로가 없었고, 오히려 버러지(사41:14) 같이 비천한(눅1:52) 자들이었습니다. 악인은 교만하고 의인은 겸손하다는 두 부류의 구도가 형성되는데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성도이며 우리의 비천함을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면, 높고 거룩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우리의 영혼으로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우리 구주를 기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축복이 이 글을 읽은 모든 분들에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좋은 묵상이네요. 마리아의 찬가를 가지고 성도들의 신앙이 지향해야 할 점을 잘 설명해 주셨어요!
공감과 좋은 포인트 캐치 감사합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
많은 관주들이 오늘 본문과 한나의 찬가를 연결해 놓았습니다. 읽어 보면 분위기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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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1-10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장코뱅 마리아의 찬가가 한나의 찬가를 인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요.
개혁주의를 선호하는 저의 마인드와 결이 다른 IVP 주석의 내용도 참고할 수 있도록 아래에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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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P 성경주석: 복음서>, 눅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까지 엘리사벳의 집에 머무르며 천사의 메시지에 응답한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하면서, 엘리사벳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축복으로 인해 그 메시지에 대한 더욱 큰 확증을 얻는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메시아의 모친이 될 것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 모친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것을 칭찬한다. 심지어 엘리사벳의 태아의 움직임까지도 마리아의 도착에대한 반응으로 보였다.
마리아의 시적인 대답은 '마리아 찬가'(Magnificat; ‘영광을 돌리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에서 유래)로 알려져 있다. 이 찬가는 유대 시편의 형식과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찬양을 반향한다. 그 단어들의 영감은 사무엘상 2:1-10의, 하나님이 한나에게 아들을 주신 이후 한나가 부른 노래에서 왔다.
이 노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외침이후에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셔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일련의 어구가 이어진다. 또 감사할 이유에 대한 간략한 언급에 이어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전하면서, 강한 자에 대한 심판과 겸손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복 주심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오래 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다. 51-54절에 있는 과거 시제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서 장차 하실 바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행동은 메시아가 수태되면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 가운데서 이미 행하신 것과 동일한 종류에 속한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주. 41절. 아직 태어나지 않은 두 아이이후에 서로 만난 적이 있는지에 대한은 전혀 없다. 나중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아주 가깝게 알지는 못한 것(요 1:31; 눅 7:19), 그리고 그 이후의 내러브티에 두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46절. 몇몇 사본에는 노래의 저자가 마리아가 아니라 '엘리사벳'이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 노래의 정서가 엘리사벳에게 더 잘 맞는다고 주장되어 왔다
48절, '비천함‘은 하나님의 영예에 합당치 않다는 마리아의 느낌이며, 그녀를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들과 나란한 자리에 두고 있다. '비천함'과 '주림'(53절)은 단지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을 가리수도 있지만, 경제적인 가난과 정치적인압제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메시아는 하나님 나라를 이끌고 들어와 그 나라와 연결된 복을 가져다 주시며, ‘교만한 자들'(51절)과 '부자'(3절)에 대한의 심판을 선언하심으로써 경건한 자들을 위해 행동하셨다. 교만한 자와 부자는 그들의 위치 때문에 불의하다고 이해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49절. 하나님은 백성을 구원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 주신다(시 111:9에서처럼).
@장코뱅 마리아와 엘리사벳,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관계가 조금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겸손하고 그렇지 않기 때문에 교만하며... 그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서 오는 것임을 아는 것도 성경본문을 이해하는 한 축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묵상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공감과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서 경건하고 신앙의 깊이가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찬양한다는 것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초신자 시절에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많고, 진심 어린 찬양의 능력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마음 속에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주된 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맨날 찬양만 어떻게 할 수 있나, 너무 단조롭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었으니까요.
물론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의 할 일은 매우 많을 것입니다.
어떤 일에서든지 하나님은 칭송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것을 알고 경험한 자들이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찬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교만하고 믿음이 없고, 위선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칭송하고 찬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네요. 그러므로 찬양이 얼마나 고귀하고 차원 높은 것인지 알겠어요.
좋은 묵상입니다. 감사합니다.
풍성하고 깊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