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인천은 일진광풍이 몰아치고, 은행잎은 마구 떨어졌다.
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구는 낙엽이 발길에 채이고 더러는 차에 깔리고
푸름을 자랑했던 나뭇잎이 역할 다 하고 떨켜에서 이탈하여 이리저리 흩날린다.
비바람 그친 가을의 끝자락 창명한 하늘은 맑은 코발트색이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는 “안성맞춤박물관“을 찾았다.
중앙대학교안성분교 입구 좌측에 유기의 변천과정을 한눈에 알 수 있고,
유기전시관, 향토 사료관, 농업역사 실이 있는 안성맞춤박물관에 들어섰다.
달랑 내 혼자다. 아침 일찍 간 탓도 있지만 사람들이 박물관에는 흥미가 없나보다.
젊은이는 박물관보다는 게임방을 더 즐기고 늙은이는 대폿집을 더 찾는 모양이다.
유기그릇 제조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고, 움직이는 모형을 만들어 전시해놓았다.
봉화 유기 공방이 먼저 발달했고, 이조시대에 유기가 오직 안성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 안성유기가 유명해진 이유를 나름대로 이곳 박물관에 와서 알 수 있었다.
주물에는 사용하는 흙이 중요한데 일반 주물사는 보드라운 한강 모래를
최고로 쳤는데 한강의 개발로 한강 모래는 진작 자취를 감췄다.
유기그릇을 만드는 주물사는 인근 평택에서 나는 갯벌 흙이 적합하여
갯토 조달이 용이한 이곳 안성이 지리적으로 유리하여 유기가 발달한 것이다.
남사당패가 사용하는 징과 꽹과리는 방짜제작(方字製作)으로 놋쇠를 두드려 만들어
유기가 발달한 이 고장에서 남사당패가 유명해진데 일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성 남사당패 바우덕이가 그냥 탄생한 것이 아니다.
안성 유기가 봉화 것보다 유명한 것은 서울 양반가들 그릇을 도맡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안성맞춤은 안성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유기를 만들어 판매하였는데,
하나는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그릇으로 “장내기”라고 하였고,
다른 하나는 관청이나 양반가의 주문을 받아 특별히 품질과 모양을
좋게 만든 것을 모춤(마춤)이라 하여 “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겨났다.
경북 봉화 산간지대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주식으로 했기 때문에 주발이 크고
서울 고관 양반들은 쌀밥을 먹었기 때문에 그릇이 아담하고 미관상 보기가 좋았다.
그래서 오래된 봉화유기보다 봉화에서 기술 전수받은 안성유기가 유명해진 것이다.
말(馬)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言)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서울인구가 팽창하는 이유도 다 연유가 있다.
(안성 맞춤박물관 앞 길, 은행잎이 곱게 깔렸다)
(유기전시관, 향토 사료관, 농업 역사관 실이 있는 안성맞춤 박물관)
(유기 주조공장, 좌측은 놋쇠 쇳물을 붓고 우측은 열심히 풀무질 한다)
(안성 전통 방짜 유기, 두드려 소성가공한 제품)
(종묘제례 때 제관이 손을 씻는 의식에 사용된 항아리, 관세이)
첫댓글 그릇에서 원적외선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녹이 쓸면 흙과 짚으로 닦아야 하는 손이 마이가는...
초가집지붕아래 빡빡 닦은 놋그릇에 비록 보리밥이지만 인정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시절이~~ 유기는 천연살균제인데 관리의 불편함으로 사라져가는게 못내 아쉽습니다.
은행나무잎이 깔린 저길을 걸어보고 싶네요
김성희님, 용심머리님, 파초부자님 늘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선배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