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러니까 7월 29일, 일본 도쿄 올림픽 100kg급 유도 결승 시합이 있었지요. 한국의 조 구함 선수와 일본의 울프 애런(Wolf Aaron) 선수간의 한 판 승부였습니다. 연장전을 5분 까지 치를 정도의 각축전이었지요. 그러나 연장전 5분 35초에 결판이 났습니다. 울프 애런 선수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다리후리기를 기습적으로 걸어서 결국 한판승으로 경기를 끝냈습니다.
조 구함 선수도 끝까지 잘 싸웠습니다. 그러나 연장전이 길어지다 보니까 결국은 체력과 지구력의 싸움이었습니다. 얼만큼 잘 버티느냐가 관건이었지요. 일본 선수는 겉으로 보아도 한국 선수를 압도할 정도의 체구였습니다. 그리고 탱크처럼 계속 밀어 부치는 그 힘은 가히 괴력에 가까웠습니다. 눈으로 보아도 조 구함 선수가 힘에 밀리고 있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냥 있는 힘을 다하여 기를 쓰고 있다는 상태임이 역력했습니다. 밀린다고 느껴질 때는 이미 기세가 꺽이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승부가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여하튼 졌지만 조 구함 선수는 분명 최선을 다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이긴 일본 선수의 손을 들어준 것도 잘한 일입니다. 상대의 기량을 인정한다는 페어 플레이 정신이지요.
그런데 이긴 일본 선수가 눈물을 보였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두 선수가 서로 안아주는 장면에서 울프 애런의 눈은 분명 울고 있었습니다. 왜 울었을까? 이겨서, 금메달을 획득해서, 그 승리감에 겨워 감정이 북받쳐 울었을까? 그곳은 일본 선수의 모국인 일본인데 이겼으면 울기 보다는 당연히 기뻐서 두 손 들고 환호하는 것이 마땅한 상황이 아닐까? 그런데 그는 울었던 것입니다. 눈물을 보였습니다.
기뻐서 울기도 하지요. 그러나 대개 슬플 때 울게 됩니다. 눈물을 보이지요. 서러워서 울기도 합니다. 안타까워서 울기도 하고 가여워서 울기도 합니다. 불쌍한 마음으로 눈물을 보이기도 합니다. 억울해서 울기도 하고 처량해서 눈물을 보이기도 합니다. 애통한 심정으로 눈물을 쏟는 경우도 있지요.
일본 선수인 울프 애런은 보기에도 그 얼굴이 전형적인 일본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름도 그렇구요. 그는 아버지가 미국인이고 어머니가 일본 여성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다문화 가정의 아들이지요.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의 성장기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어릴 때 부터 적지 않은 놀림과 무시를 당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 힘겨운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가슴에는 응어리가 맺혔을지 모릅니다. 이번 경기에서도 반드시 이겨서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당당히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서러움을 씻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음 고생이 심했을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위안을 안겨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일본 선수였지만 그가 보인 눈물을 생각할 때 뭔가 가슴에 와닿는 연민의 정 같은 것을 잠깐이나마 느껴 보았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울 때가 있지요. 울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울게 만드는 상황과 형편과 처지도 있습니다. 우는 것이 결코 수치는 아닙니다. 설령 한이 맺혀서 운다고 해도 우는 그 자체는 적어도 인간적인 것입니다. 사람이기에 자기 감정에 의해서 마음대로 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울음을 억지로 감추려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계셨던 완전한 인성(人性)이시기에 울고 싶을 때 우셨던 것입니다. 평소에 아끼던 사람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우신 것입니다. 슬픈 감정에 우신 것입니다. 이 때 만큼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神性)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 신성의 능력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멀리 계실 때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그 당시에 나사로를 그 자리에서 말씀으로 얼마든지 살아나게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영광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죽은지 나흘이 지난 그 때에 비로소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윗을 비롯하여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인간적인 고난의 극치였던 욥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욥16:20).
히스기야 왕이 흘린 눈물을 하나님께서 보셨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왕하20:5).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이 헛되지 않게 하십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시116;8).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차피 눈물과의 인연을 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이르게 되면 눈물은 더이상 관계가 없어지지요. 울 일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