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 6,7-13 |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열두 제자는 이미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행적을 보고 배웠다. 또 많은 기적을 보기도 했지만 게라사와 나자렛에서 사람들의 불신앙으로 복음 선교가 잘되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또한 바리사이들의 적대행위도 겪었다. 이런 경험들이 그들에게 충분히 학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기만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이 직접 실습을 할 수 있도록 파견을 하신다. 그리고 파견 전에 그들에게 선교에 관련된 유의 사항을 말씀해 주신다.
‘부르시어’라는 말은 제자들을 소집했다는 뜻이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는 악령들을 쫓아내는 권한과 능력을 뜻한다.
마태오 복음 10장 1절과 루카 복음 9장 1절에서는 악령을 쫓아내는 힘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는 능력도 주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마르코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 속에 병을 고치는 능력도 포함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 이유는 더러운 영을 몰아내는 곳에 주님의 복음이 생명력 있게 자라나며 모든 부정하고 파괴적인 것들이 소멸되고 하느님 나라가 새롭게 건설되기 때문이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그런 권한과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제자들을 당신의 사명과 능력에 참여시키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제자들도 같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게 하기 위해서이다.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파견하셨다는 것은 유대인의 풍습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신명기 17,6에 나타난 바와 같이 증인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세우라는 관습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예수님의 제자 파견에서도 복음 전파 활동에 관한 증인으로서 제자들을 파견할 때 이와 같은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이제 갈릴래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 복음 전파에 매진하게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받아 파견되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권능에 힘입어 그분의 거룩한 말씀만을 전해야 한다. |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여행할 때 필요한 휴대 품목을 금지한 이 구절의 내용은 마태오 복음이나 루카 복음과 조금 차이가 있다. 마태오 복음 10장 10절과 루카 복음 9장 3절에서는 지팡이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 기록된 지팡이는 보호를 목적으로 한 목자들이 소지하는 장비이고 마르코 복음의 지팡이는 보행에 도움을 주는 여행용 지팡이라고 보면서, 보행에 도움을 주는 것만 허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빵’은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다 포함되며, ‘여행 보따리’는 양식이나 생필품을 넣고 다니는 여행 가방을, ‘전대’는 일종의 허리띠로서 동전 등을 보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돈’은 로마와 그리스에서 통용되던 작은 구리 동전으로서 소량의 잔돈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신발’은 일종의 샌들 같은 매우 간편한 여행용 신발을 가리킨다.
‘두 벌 옷’은 ‘여벌의 옷’으로 여분의 옷은 여행자가 노숙할 때 밤의 차가운 공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옷’은 속옷을 뜻하는데 당시 속옷은 걸쇠로 어깨에 걸치는 긴 원피스 같은 옷이었고, 대부분 양모나 아마포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당시에 좀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은 일종의 사치나 자기 과시 목적으로 속옷을 두 벌씩 껴입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속옷과 요즘의 속옷은 다르다. 당시의 속옷은 글자 그대로 겉옷 속에 입는 옷일 뿐이고, 집에서는 평상복처럼 입었다. 겉옷은 외출할 때 입는 정장이고, 가난한 사람들 경우에는 밤에 잘 때 겉옷을 이불처럼 덮고 자기도 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것조차 금지하셨다.
그런데 지팡이와 신발을 허용하는 것은 탈출기 12장 11절과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탈출기와 광야로의 여행을 앞두고 내려졌던 명령과 일치시켜 선교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이집트에서 탈출의 긴박감과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명령은
1) 자신들이 전파하는 복음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자기 신변에 대한 염려는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고 2) 제자들이 매일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웃을 통해서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해 신뢰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고 3) 복음 전파나 병자의 치유를 위해 부름받은 선교사들은 청빈해야 한다는 규범적 명령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소유를 버림으로써 하느님께 절대 의존할 수 있도록, 즉 자기소유에 의존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약화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명령은 결국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으로부터 출발하라는 것이다.
이런 사도적 청빈은 가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고 지침이다. 그래서 이 명령은 마태오 복음 6장 25절-34절에 있는 ‘의식주를 걱정하지 말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라는 가르침과 연결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은 ‘필요 이상의 소유’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아예 ‘소유’와 ‘휴대’ 자체를 금지했다. ‘이것은 필요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꾸 챙기다 보면 점점 그 한계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정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이 구절은 신세를 질 만한 집을 찾으라는 말인데, 그 조건은 아마도 경제적 여건도 고려해야 했을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선교 활동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택해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거처할 집을 정하면 떠날 때까지 옮기지 말고 한 집에 머물라는 이유는 제자들의 행동이 주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최초 거주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편한 안식처를 찾아 여러 집으로 옮겨 다니게 되면 주인들 간에 불화를 조성하고 또 좋지 않은 소문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여러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면 주민들에게 폐를 많이 끼치게 됨으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배려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한 집을 정했으면 많은 불편이 있다 해도 참고 떠날 때까지 거처를 옮기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곧 자신의 평안함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일에 전념하는 선교사의 태도인 동시에 이웃에게 선한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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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 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도 선교 활동이 순탄하지 않을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제자들을 환대하는 곳도 있겠지만 어쩌면 사도들은 많은 경우에 환영을 받기는커녕 거부당하고 배척당했을 것이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사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 선포를 거부하는 곳이라면, 이라는 뜻이다. 사도들을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사도들은 그곳을 떠나 ‘말씀’을 받아들이는 곳으로 가야 한다.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는 동작은 원래 유대인들이 이방 지역을 여행하다 고향에 돌아올 때 하던 행동이다. 그것은 이방인들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뜻도 들어 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단호한 행동을 요구하신 것은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은 심판 때에 구원을 줄 수 있는 이를 거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3 장 51 절을 보면,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를 떠날 때 발의 먼지를 터는 장면이 나온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도들의 임무이지만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없다. 그 책임은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단호한 행동을 요구하신 것은 복음을 배척하는 지역은 마치 이방인 지역과 같이 멸망의 자리에 놓이게 됨을 알리고 또 복음을 거절한 자들이 그들 스스로에 대해서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즉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 같은 행동을 명하신 것이다.
여기서 발에서 털어 버린 먼지가 ‘증거’가 된다는 말은 그 먼지가 그 마을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했다는 증거로 남아 있다가 최후의 심판 때에 그들을 고발하는 증거로 사용될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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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제자들의 선교 주제가 스승인 예수님의 선교 주제와 일치하고 있다. 즉 제자들이 선포한 내용은 예수님이 선포한 내용과 같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선교,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선교 메시지를 일치시키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 전파의 대주제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1,4). 그리고 세례자 요한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의 활동까지 ‘회개’라는 말로 묶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죄악된 삶의 길과 방식을 전격적으로 하느님께로 돌이키는 참된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병행된다. |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이 구절에서는 제자들의 복음 전파와 병행되는 정신적, 영적, 육체적 치유의 내용들이 각각 제시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치유 기적은 복음의 진실을 확증하고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래서 제자들의 활동이 말씀의 선포뿐만 아니라 치유 기적까지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이나 제자들의 활동은 두 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즉 하나는 복음 선포 즉 설교와 가르침을 통한 진리 선포이다. 둘째는 치유를 통해서 육체적, 정신적 병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온전한 인간 구원은 인간의 영과 육이 모두 구원을 얻는 전인적인 구원임을 보게 된다. 결국 지상에서 펼쳐지는 모든 선교 활동은 인간의 영, 육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 됨을 알아야 한다.
이 구절에서 보면 제자들의 치료 방법은 예수님의 치료와 차이점이 있다. 즉 기름을 발라 치유한다는 점이다. 루카복음 10 장 34 절을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서 응급 처치를 한다. 이러한 치유 방법은 당시 유대교와 그리스 세계에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당시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 같은 방법의 치유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 같은 기름 바름은 단지 그것이 치료 효과가 있다는 의학적 측면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 5 장 14-15 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병자에게 주는 하느님의 도움 곧 하느님의 은총과 그 능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도들은 의술이 아니라 기적으로 병자들을 고쳤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치료제가 아니라 사도들이 받은 권능의 표시이고, 하느님의 은총의 표시이다. 다시 말해서 병자들을 고친 것은 기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다. 오늘날의 병자성사 때에도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데 역시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 한 말씀, 또는 한 동작으로 고치는데 사도들은 기름을 발라서 고쳤다. 병자를 치유하는 힘은 예수님에게서 오고, 사도들은 그 힘을 받아서 고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열두 사도가 똑같은 말씀을 전하고, 똑같은 기적을 행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의 활동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일치는 그들 모두가 똑같이 예수님의 권능과 지시 아래에 일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의 활동은 사실상 예수님의 활동이었다. 라고 할 수 있다.
12 제자의 파견은
1) 예수님의 선교 활동이 조직화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2) 활동 영역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본 구절 이하에서부터 예수님의 선교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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