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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아무튼, 주말-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현실 넘어 별세계 창조한 예술가
대구가 낳은 ‘조선 천재’ 이인성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입력 2023.03.04 03:00
업데이트 2023.03.04 13:34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1935, 개인소장. 푸른 하늘과 붉은 땅으로 대변되는 ‘향토’ 경주의 모습을 담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인성이 일본 유학 중이던 23세 때 그린 대작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1912~2002) 선수를 모두 기억할 것이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베를린 거리를 달렸지만, 손기정의 쾌거는 식민지 설움에 찬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런데 손기정과 같은 해에 태어나, 손기정에 비견되는 유명인사로 대활약한 천재화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인성(1912~1950).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조선인을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세 사람의 조선인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라톤의 손기정, 무용의 최승희, 그림의 이인성!” 흠,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오늘날 손기정과 최승희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만, 어째서 이인성은 우리 사회에서 거의 잊힌 존재가 되었을까?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
이인성은 1912년 대구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변변한 직업이 없었고, 모친이 음식점을 운영해 생계를 유지했다. 수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더 이상 집안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저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는 미술적 재능을 이인성은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미술 점수만큼은 만점을 받았고, 주위의 인정에 고무되어 혼자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날도 이인성은 대구의 한 교회를 배경으로 야외 사생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화가 서동진의 눈에 띄었다. 서동진(1900~1970)은 대구에 서양화 재료를 처음 도입했던 미술가이자 독립운동가 이상정(1896~1947)의 계성학교 제자였다. 스승의 영향 아래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가 제대로 미술 공부를 했다. 귀국 후 1927년 대구에서 최초로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대륜고의 전신 교남학교에서 14년간 무보수로 일하며 수많은 인재를 길렀다. 서동진은 이인성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갈 곳이 없는 그를 자신이 운영하던 인쇄소 겸 예술가 아지트 ‘대구미술사’에 취직시켰다. 이인성은 이곳에서 일하고 숙식하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대구의 미술 단체 ‘영과회’ 창립 기념사진, 1927년. 앞줄 맨 왼쪽 이인성. 10대 소년 이인성이 서동진, 이상화(이상정의 동생, 시인), 김용준 등 대선배들과 함께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면 몽둥이를 들고 와서 혼내던 이인성의 친부를 대신해서, 서동진은 실질적인 부친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진정한 스승이자 은인이었다. 이인성이 17세 나이인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서동진과 함께 처음 입선했을 때, 서동진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보다 제자 이인성의 입선이 더 주목되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불과 2년 후인 1931년, 이인성은 스승을 앞질러 선전에서 특선을 차지해 버렸다. 그해 함께 특선을 차지한 화가가 나혜석 같은 대선배였으니, 실로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서동진은 자신을 앞서가는 제자에 시기심을 느끼는 수준의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뛰어넘은 제자가 이제 자신을 떠나 더 훌륭한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대구 유지들의 힘을 모으게 했고, 대구 거류 일본인들의 협력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경북고녀(慶北高女) 시라가 주키치 교장의 주선으로 이인성은 일본 도쿄에 있는 킹크레용 회사(오오사마 상회)에서, 마치 ‘대구미술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1931년 선전 특선을 받자마자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인성, 일본 유학 시절 킹크레용 회사의 아틀리에에서, 1930년대 초, 개인소장
◇“조선의 천재 소년”
도쿄로 가서 이인성은 훨훨 날았다. 킹크레용 회사는 크레용과 물감을 만드는 회사였기 때문에 이인성은 회사가 제공한 화구를 맘껏 사용하면서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이인성은 틈틈이 회사 작업실에서 쉼 없이 그렸다. 그는 유학했다기보다 이때 이미 조선과 일본의 화단을 상대로 어엿한 화가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미술계에 공인된 최고의 전람회인 선전에, 이인성은 일본에서 제작한 그림을 매년 보내 거듭 특선과 최고상을 차지했다. 한때 “선전이 이인성을 위해 있는 거냐”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 시기 이인성의 대표작 ‘가을 어느 날’ ‘경주의 산곡에서’ 등이 쏟아졌다. 낭만과 허무가 공존하는 조선의 ‘향토’를 갖가지 상징과 은유를 더해 연출한 걸작들이었다. 1930년대 조선에 이런 대담한 유화를 그릴 수 있는 화가가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인성, ‘가을 어느 날’, 1934, 개인소장
그뿐이 아니었다. 이인성은 도쿄에 간 이듬해 일본 최고의 관전(官展)인 제전(제국미술전람회)에 바로 입선했다.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의 천재 소년”으로 대서특필되었고, 그의 인터뷰가 실렸다. 일본 유명 화가들이 킹크레용 회사 사장에게 축하엽서를 보내왔다. 무엇보다 이인성의 수채화 실력은 대구에서부터 갈고 닦은 만큼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1935년 일본수채화회전이 열렸을 때, 이인성은 일본인 화가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최고상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인도 인정한 조선인 화가의 ‘클라스’였다.
◇별세계를 창조하는 화가
이때 최고상을 받은 작품 ‘아리랑고개’가 지금도 남아있다. 유학 중 잠시 조선에 왔을 때 구상한 작품으로, 서울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아리랑고개’를 담은 풍경화였다. 이곳은 원래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실제 촬영 무대가 되면서 ‘아리랑고개’로 불렸다. 미치광이 주인공 영진(나운규 분)이 악덕 지주의 머슴이자 왜경 앞잡이 기호(주인규 분)를 죽인 죄목으로,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리랑’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등장하는 배경 장소였다. 이인성은 이 영화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 시절 조선인을 대변하는 ‘울분’의 정서가 이인성에게도 참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성은 영화 ‘아리랑’을 오마주하듯 ‘아리랑고개’를 그려서는, 작품의 내막을 잘 알지도 못할 일본인들의 전시회에 당당히 내걸어서 최고상까지 받아낸 것이다.
이인성, ‘아리랑고개’, 1934, 개인소장.
이인성의 풍경화를 실제 장소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두 번 놀라게 된다. 처음에는 실제 모습과 너무 흡사해서 놀라고, 그다음에는 실제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만들어낸 뛰어난 ‘연출력’에 놀란다. 그는 그저 밋밋할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을 온갖 화사한 색채와 자유자재의 선을 동원하여, 너무나도 매력적인 ‘별세계’로 바꾸어 놓았다. 때로는 처연하게, 때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계가 작품 속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화가야말로 진정 위대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이인성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그의 캐릭터를 가늠할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첫 부인이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뜨면서, 이인성이 혼자 첫딸 애향(愛鄕)의 이화중학교 입학을 챙길 때였다. 엄마 없는 딸을 위해 이인성이 직접 교복을 맞추었는데, 나중에 딸이 찾으러 가보니, 원래 교복인 검은 주름치마 대신 분홍과 보라로 이중배색한 치마를 만들어 놓았더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져 묻자, 이인성은 “예쁜 색도 많은데 여학생에게 검정 옷을 입히냐”며 학교가 문제라고 되레 큰소리를 쳤다.
이인성은 세상의 규율과 통제에 본능적인 저항감을 지닌 유형의 인물이었다. 그가 평소에는 말할 수 없이 얌전하다가도, 술을 마시면 주사(酒邪)가 심했다는 것도 일견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주사는 난데없이 일본 경찰에게 달려들어 시비를 거는 일이었다. 그는 불합리한 통제를 견디지 못했고, 현실을 넘어선 자신만의 별세계 속에서 자유를 꿈꾸었던 천생(天生) 예술가였다.
이인성, ‘노란 옷을 입은 여인’, 1936년경, 대구미술관 소장. 패션디자이너였던 첫 부인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고 이건희 회장의 유족이 이인성의 고향 대구에 기증했다.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실제와 별세계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던 그에게 일이 터졌다. 1950년 11월의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라 제대로 된 경찰이나 군인도 아니고,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는 치안대원들이 도시를 휘저을 때였다. 서울 북아현동에 올라와 살던 이인성은 이날도 술을 마시다가 치안대원과 시비가 붙었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그만 술 마시고 집에 돌아가라며 자꾸 간섭해대는 대원들에게 “내가 누군지 모르냐. 내가 이인성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가 하도 당당하니까, 어쩌면 높은 사람인가보다 하고 대원들이 이인성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에게 이인성이란 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권력자이기는커녕 그림 그리는 화가라고 하지 않는가. 화가 치민 치안대원들이 ‘환쟁이 주제에’ 하는 생각으로 이인성의 집을 찾아가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공포탄을 쏜다는 것이 그만 이인성의 머리에 적중하고 말았다. “오발이다!” 외마디를 남기고 대원들은 사라졌다. 무방비 상태의 이인성은 어린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향년 38세였다.
후에 소설가 최인호는 이인성의 어이없는 죽음을 두고, 절규에 가까운 글을 쏟아냈다.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천재 예술가는 신에게서 태어날 뿐이다. 왜 신에게서 태어난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왜 그들은 (천재 예술가를) 우리 곁에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가” 하고.
이인성, ‘모자 쓴 자화상’, 1950, 개인소장. 이인성의 자화상은 늘 눈을 감고 있다.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세상을 쳐다보기 싫어서 일부러 눈을 감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인성이 총에 맞아 죽은 바로 그해 제작된 작품이다.
◇이인성은 억울하다
이인성을 죽인 것이 전쟁통의 그 치안대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인성의 이름 석 자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화가에 대한 존중이 그 시대보다 지금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도 모르겠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자는 세상 어디에도 있게 마련이지만, 뛰어난 예술가 한 명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일은 세상 더 어렵고 귀한 일인데….
이인성의 사후(死後) 그에 대한 미술계와 학계의 평가도 지나치게 야박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관전인 ‘선전’이나 일본의 ‘제전’에서 주로 활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인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이 가난한 화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사회 시스템이 그것뿐이었는데. 그것밖에 없는 식민지 시대를 탓해야지 왜 개인에게 그 구조를 뛰어넘어 생존할 것을 기대하는가. 그마저 생존해내지 못하고 덧없이 죽은 화가에게 말이다. 일장기를 달고 뛴 손기정이나 ‘사이 쇼키’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누빈 최승희는 어쩔 수 없었다면서, 왜 유독 이인성에게만 ‘관전 화가’라는 딱지를 붙여 평가절하하는지. 억울하다. 이인성의 울분이 전이된 듯 억울하다.
이인성, ‘해당화’, 1944, 개인소장. 한용운의 시 ‘해당화’의 내용과 상응하는 작품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해당화가 피었다고 봄이 왔음을 기뻐하지만, 아직 진정한 봄은 오지 않았기에 망연히 봄을 기다린다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서슬 퍼렇던 1944년 이런 작품을 그려 선전에 당당히 출품한 것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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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2023.03.04 11:28:42
땅을 붉은 빛으로 묘사한 것이 인상적이다. 본래 여린 사람이 술 마시고 주사를 잘 부린다. 맑은 정신으로는 거센 집단을 대항해 싸우는 게 버겁다. 이인성을 알게 돼 반갑다. 그 시절 작풍으로서는 천재시인 '이상'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죽음이 일경의 어이없는 공포탄 발사라 더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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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수
2023.03.04 21:19:45
일제, 일경 이 너무 자주들어 입에 달고사는 불쌍한 한국인
인샬라
2023.03.04 20:34:26
무조건 日帝라고 단정해버리네요....
스타게이트
2023.03.04 15:18:25
사망한 해가 1950년 입니다.
Egg
2023.03.04 13:58:09
일경이 아니라, 전쟁 중 치안대원이랍니다.
서울 性醫學 설현욱
2023.03.04 13:43:53
그냥 고갱 고흐식의 작품들.. 천재..?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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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
2023.03.04 04:37:53
필자의 그동안의 글을 보면 지나치게 찬탄조의 평면적 내용으로 일관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데, 이인성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이인성에 대한 평가에서 필자 말 처럼 일제시기 선전이나 제전에서 활동한 것만을 문제삼아서 과연 그러한가? 선전에서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주로 강조한 조선의 향토색 강조-----일본판 오리엔탈리즘 냄새가 짙은----- 와 이인성의 그림들의 형상화 내용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추종 부합하고 그리하여 내리 수상한 연관성은 없는지 체계적으로 따져 보는 것이 필수적인 것 아닌가? 고갱의 타히티 관련 그림같은 인상을 주는 "가을 어느 날"은 과연 어떻게 봐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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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수
2023.03.04 21:22:21
진짜 한심하다. 그림에 무슨 사상의 흔적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군.
beaboss
2023.03.04 16:59:07
저만 그렇게 느꼈던 것은 아니었군요!!!!
先進韓國
2023.03.04 15:28:39
나는 예전부터 이인성 화가의 그림이 좋았다. 참 잘 그린 그림이다. 당시 저만한 그림 그린다는 게 대단한 거다. 너무 억울하게 죽은 사연이 안타깝다. 그놈의 술 때문에 죽었구나. 저 화가가 더 오래 살았으면 한국 구상화가 더 발전했을 것을 매우 안타깝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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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iah
2023.03.04 14:22:53
화가를 평가하는데 외국 유명 화가의 작품을 과대하게 평가하고 국내작가는 아예 품평조차 하지않는 풍토에 오늘 김인혜 평론가가 이인성 한국 화가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 거론하는 것만으로 자부심을 가지며 감사하게 됩니다. 얼마전 동*일보 문화예술란에 한국 젊은 화가의 세계대회 우승 소식이 자주 있는데도 왜 그런 소식은 쓰지않고 허구헌날 외국 평론가의 글에 함몰된 듯한 글만을 읽어야 하는가 예술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론을 탓한 적이 있습니다. 제발 이런 창의적이고 한국인의 창의성을 고양시키는 글을 읽고 싶습니다. 화가들도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이라는 명화는 이미 수백년이 흘러 더욱 빛을 발한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적 시각으로 보는 최후의 만찬을 그릴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후대들을 바로 평가해주는 평론가가 있어야 비로소 한국 화가들을 외국인들도 경이로운 시각으로 보게 될 겁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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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배
2023.03.04 13:32:39
그림이 좋은것 같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가 우리 곁에 한분 또 계셨었구나.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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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피터팬
2023.03.04 15:48:17
정말 그림이 좋네. 왜 이런 화가를 몰랐을까?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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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22
2023.03.04 13:19:19
선배 화가의 후원과 일본 사회 시스템의 수재를 인정하는 풍토하에서 혜택을 입고, 조선 사회의 예술에 기여 했으면 그 것 그대로 인정하면 되지, 무슨 서슬퍼런 시대에 진정한 봄이 안왔다고 은유 어쩌고,,,,꼭 그렇게 왜곡시키고 비틀어서 해석해야 하냐. 아름다움과 미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글 말미 의 해당화 관련 해석 보고 웃기지도 않는다. 해당화 그림 그대로 받아들여도 잘 그린 그림이다. 일본사회의 관용 하에서 잘 성장한 화가에게 무슨 서슬퍼런 시대의 은유어쩌고 ...참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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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모네
2023.03.04 15:20:50
미술에 관하여 문외한이다. 전문성하고는 별개로 올려 놓은 그림은 나를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천재화가를 신께서 시기하였을까? 안타까운 절명에 그저 안타까움이 긴 여운을 남긴다. 나름의 화풍을 창조 해냈을 그런 아까운 천재화가를 알게되어 기쁘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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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영아리
2023.03.04 14:10:10
일본 제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대한민국 같으면 가능한 일일까?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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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양
2023.03.04 16:28:22
이런 천재화가 이인성뿐만이니고 일제시대엔 천성적으로 타고난 천재화가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경남 합천에서 태워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어떤 연유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미술을 익혀서 선전에서 세번이나 특선도 했다는 정말조(鄭末朝)와 같은 화가도 한국전쟁이후 그 이름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비운의 천재 화가였던 같다. 김인혜 팀장께서 혹시 틈 나시면 이 정말조화백도 한번 추적해 봐 주시면 쾌 흥미로울 듯 합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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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性醫學 설현욱
2023.03.04 13:48:36
예전 김진호 화실에서 누드 모델하던 홍대 회화과 친구가 훨 뎃상이 낫겠구먼..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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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하늘
2023.03.04 09:52:06
글쎄... 솔직히... 아무리봐도... 저 그림의 뭘보고 천재? 라 하는지 모르겠네....죽음은 어이없고 억울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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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에 시체판 똥유족
2023.03.04 12:46:00
문외한 입장에서 봐도 잘 그린 것 같기는 하네... 전반적 분위기가 어두워서 좀 더 밝았으면 하는 아쉬움...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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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할머니
2023.03.04 20:10:52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기사에 실린 그림만 보아도 문외한인 나에게도 대단해 보인다.38세에 억울하게 요절하셨다니 우리는 천재화가를 잃었다고 생각한다.나혜석,김기환 같은분의 이름만아는 우리에게 이인성이란 화가가 있었다는것 알게해주셔서 기사 감사드립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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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2023.03.04 15:38:17
서정진님이 천재네요. 인성의 천재.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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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무변
2023.03.04 19:40:10
내가 보는 그림의 느낌이 비슷하다고 누굴 모방했다고 보는 건 잘못이다 우리나라에 일찌기 이런 그림을 그린 분이 있었다는 걸 지금에야 알게되어 안타깝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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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좋은사람
2023.03.04 20:38:26
이인성 이 아마도 권력적 화가들에 의해서 무시 숨겨 져 오지않았나싶다. 어떻게 유럽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모방 했다고 할수있나? 절대 그렇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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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ger kang
2023.03.04 18:00:33
이인성.오호.통재라! 참새들,고니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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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요
2023.03.04 17:21:38
필요이상으로 우리문화와 전통들을...... 세계최강이라 포장하는 이른바 국뽕들.. 이거 전부 좌익사상입니다. 이 국뽕들을 빼내고, 과거에서 배울부분만 배워야하는 자세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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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
2023.03.04 19:58:26
고갱,고흐 영향을 받아서인지 색체나 구도 모두 유사하다. 하지만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은 있는 것 같다 훌륭하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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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eka
2023.03.04 19:07:25
이인성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서 반갑다. 미술가에게서 관변화가가 뭔가 전쟁참여 등의 적극적 친일이 아니라면 일제가 주관한 미술제 참가 정도의 소극적 친일은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고 본다. 아니면 인간의 예술적 영혼은 죽이고서 땅이나 파면서 살아야 하겠지.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허무는 야만적 행위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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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벼
2023.03.04 21:16:51
이째명이 헛소리 하는 시궁창 냄새 나는 기사보다 이런 문화 기사 자주 올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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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심가득
2023.03.04 20:14:07
글쿤. 이인성이라는 이름을 이 기사에서 처음 들어볼 정도로 저평가 된 근현대사의 인물이었네. 환쟁이가 되겠다고 해서 자식의 앞길을 막은 이인성의 아버지나 본인은 최고학부의 물을 먹고도 자식은 초등학교만으로 학업을 끊은 이재명의 아버지나 끕은 비슷하구나. 이재명보다 두살많은 내 입장에서는 자식이 하고자 하는 것은 본인들이 원하는대로 해서 나의 둘째는 소위 말해서 '환쟁이'인 에니메이션 프리랜서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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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ico
2023.03.04 15:07:25
오우! 감사합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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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22
2023.03.04 14:00:07
밑의 댓글처럼, 고흐와 타히티 고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느낌의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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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影塔
2023.03.04 21:26:56
이런 화가께서 있는 줄도 몰랐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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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
2023.03.04 21:17:54
대단합니다. 그저 대단합니다. 지금껏 보아온 유명화가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채색이 그저 놀랍습니다. 일견 촌스럽나 해서 보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분이 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참으로 기이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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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친구
2023.03.04 21:13:56
고호, 고갱 보다 더 훌륭한 천재를 우리는 몰라보고 역사의 비극속에 일찍 보냈고, 사후에도 그놈의 친일 잣대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김환기 보다 한 수 위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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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8899
2023.03.04 21:08:02
이인성 훌륭한 화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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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2023.03.04 20:39:44
38세, 아까운 나이에 떠나갔구나. 안타깝다. 아깝다. 분홍과 보라로 딸 교복 치마를 지어 주듯, 우리의 화폭을 아름답게 지어 주셨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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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고 싶은자
2023.03.04 20:30:02
작가와 작품해설을 보고 뛰어난 작품을 이해할수 있어 감사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재평가되어야 할 천재 화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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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dHooD
2023.03.04 16:27:22
그저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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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2023.03.04 21:39:28
들은 바와 다르다. 기사가 사실인가? 북으로 갔기 때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궁금하다. 서울에서 기사처럼 죽었다면 왜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단순히 일제가 주관한 미전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라면 그 시대 화가 대부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 같은 정도의 활동으로 연명하고 생활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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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샌델
2023.03.04 21:26:17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네 ;;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제라도 고인을 기억하자라고 하고 싶지만 기억해야할 인물들이 너무 많은것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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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입니다
2023.03.04 21:19:22
결국은 그 옛날에도 권력이 뭣보다 "우선" 이였네요 높은 지위에 있는 줄 알고 순순히 보내 줬다는 거 아닙니까? 그나저나 전 잼나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아랫분이 글을 평가 하셨는데 뭔 문학작품을 전문적으로 등단하는 글도 아닌데.. 참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앞으로 전 꼭 챙겨 보겠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이라 더~요 덕분에 1930년대에 이런 그림을 한국인 천재 화가가 계셨다는 것도 알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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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투
2023.03.04 21:02:32
애달프구나. 이중섭 작가나 이인성작가 그리고 윤동주 등등 모두 한창 나이에 우리곁을 떠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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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N.Y
2023.03.04 20:42:46
덕수궁에서 몇년전 전시회에서 가을 어느날을 감상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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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K머린
2023.03.04 14:37:30
미술계도 같은 시대, 서구의 작품, 작가들과 비교 해봐야 한다. 서양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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