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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들녘이 황금빛 물결로 일렁이는 추수의 계절, 가을이 되면 산과 들에 저절로 자라는 식물들은 한해살이를 마무리하고 겨울 맞을 준비를 한다. 이른봄 꽃을 피웠던 풀꽃들은 이미 땅 위의 줄기며 잎을 접은 지 오래고, 여름꽃들도 가지가지 색깔의 열매를 서둘러 익힌다. 나무마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할 즈음이면 기온도 이미 낮아져서 식물이 생육하기에 나쁜 조건으로 바뀐다.
하지만 봄꽃과 여름꽃들이 겨울을 준비하는 이 절기에도 더욱 진한 색깔로 자태를 뽐내며 피어나는 아름다운 가을꽃들이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많다. 10여 년 전부터 이 땅에 꽃산행 문화를 전파해온 동북아식물연구소 소장 현진오 박사가 가을꽃들을 만날 수 있는 산행코스를 엄선했다.
<편집자주>
유명산(864m·경기 가평)은 서울에서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수도권에서 당일로 다녀오기에 좋은 꽃산행 대상지다. 정상부에 수만 평의 드넓은 억새밭이 펼쳐지는 산으로서, 다른 꽃이 없더라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산이다. 더욱이 산행기점이 되는 유명산 자연휴양림에는 몇 해 전에 조성된 2만4천여 평의 자생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어 가을 꽃산행 대상지로서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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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명산 정상에 펼쳐진 억새밭. 이곳에는 억새뿐만 아니라 쑥방망이, 자주꽃방망이, 물매화풀, 산구절초, 참산부추 등 여러 종류의 가을꽃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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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산행은 휴양림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입구지계곡을 따라 시작하는 게 좋다. 주차장에서 휴양림 숙박시설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100여m 올라가다 왼쪽의 큰 계곡으로 들어서면 된다. 계곡쪽으로 등산로가 잘 나 있으므로 놓칠 염려는 별로 없지만, 숙박시설로 이어지는 도로가 더욱 크게 나 있어 무심코 큰 도로를 따라 갈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유명산 동쪽에 자리 잡은 입구지계곡은 설악산의 계곡 하나를 옮겨 놓은 것처럼 경관이 뛰어나다. 길이 5km에 이르는 긴 계곡으로서 서울 근교에서는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수량이 풍부한데, 계곡부에 암반이 잘 발달해 있으며, 계곡 양쪽에 깎아지른 벼랑을 이룬 지역이 대부분이다. 10월 중순쯤이면 바위로 이루어진 빼어난 계곡경관에 화려한 단풍빛이 보태져 계곡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새빨갛게 물드는 당단풍나무가 가장 많은 가운데 노란 빛 생강나무, 붉은 빛 개옻나무 단풍이 계곡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계곡의 바위지대에 산구절초가 피어 있는데, 햇볕이 강한 날에는 시들시들한 모습일 때가 많다. 하지만 정상부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산구철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므로 실망할 필요는 없다.
바위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돌길을 지날 때에 눈여겨보면 노란 꽃을 피운 까치고들빼기를 발견할 수 있다. 늦가을에 잎과 줄기가 시들어 문드러질 때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식물이다. 계곡 부근의 습기가 많은 곳에는 우산 모양의 꽃차례에 흰 꽃들을 달고 있는 궁궁이가 피어 있다. 작은 꽃들이지만 큰 꽃차례를 형성하여 피므로 쉽게 눈에 띈다. 계곡과 어우러진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 좋다. 바위떡풀도 바위 겉에 붙어서 자라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는 1시간30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삼거리 갈림목까지 꽃을 보며 가기 때문에 3시간쯤은 잡아야 한다. 이 삼거리에서 유명산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른쪽 작은 계곡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가야 한다. 주계곡쪽으로도 희미한 길이 나 있지만, 정상쪽으로 가는 길이 워낙 크기 때문에 헷갈릴 염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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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쑥방망이. 전국의 양지바른 풀밭에 자라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키 50~100cm이며, 잎 모양이 쑥을 닮았다. 2)왕씀배. 경기도의 깊은 숲속에 드물게 자라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9월 중순 이후에 꽃을 볼 수 있으며, 줄기 끝 부분에 여러 개의 머리모양꽃이 달린다. 3)자주꽃방망이. 전국의 높은 산에 자라는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7월~9월에 핀다. 유명산에서는 정상부의 풀밭에서 드물게 발견된다. 4)새끼꿩의비름. 전국의 풀밭 또는 바위 겉에 붙어 자라는 돌나물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월~9월에 핀다. 꽃이 진 후에 꽃이 피었던 부근에서 살눈이 발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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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근에는 투구꽃, 흰진교, 새끼꿩의비름, 궁궁이, 꽃향유, 금강초롱꽃, 왕씀배 등이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 특산식물로서 세계적으로 한반도 중부지방에만 자라는 금강초롱꽃은 설악산이나 금강산에서는 흔하게 자라지만 경기도에서는 높은 산에서만 드물게 볼 수 있다. 유명산은 금강초롱꽃이 생육하는 가장 서쪽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분포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때문인지 개체수는 많지 않다. 왕씀배 또한 발견하면 기분 좋은 식물인데, 남한에서는 광릉 등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식물이다.
삼거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쯤 걸리지만, 꽃을 보며 가려면 2배쯤 잡아야 한다. 등산로의 경사가 급해 숨을 헐떡이며 올라야 한다. 계곡을 벗어난 후에 올라야 하는 급경사면에서도 여러 가지 가을꽃을 만날 수 있다. 붉은 꽃을 피운 고려엉겅퀴, 붉게 익은 천남성 열매와 풀솜대 열대, 잎 끝이 오목하게 들어간 오리방풀 등이 자라고 있다.
하늘이 트이기 시작하고, 등산로 주변에 마타리, 산구절초, 개쑥부쟁이, 분취, 조밥나물, 참산부추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정상이 가까워진 신호다. 피사체로서 예쁜 모습을 한 개체들을 찾아 사진 찍으며 올라가노라면 지척에 있는 정상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정상 바로 아래에 이르면 사방이 온통 억새의 은빛 물결로 가득하다.
억새밭 속에도 꽃들이 여러 가지 꽃빛깔을 자랑하며 점점이 박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물매화풀로서 허리를 굽혀 억새밭 속을 들여다보아야 찾을 수 있다. 5장의 새하얀 꽃잎이 붙은 꽃이 매실나무의 꽃인 매화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억새밭에서 자라는 물매화풀들은 다른 곳에 자라는 것들보다 키가 큰 게 특징이다.
억새밭 속에서 노란 꽃을 피운 것은 쑥방망이다. 잎이 가늘게 갈라져서 쑥의 잎처럼 생겨서 이름 붙여진 여러해살이풀인데, 꽤 많은 개체가 자라고 있다. 전국에 자라기는 하지만, 유명산 정상처럼 억새 등의 풀밭으로 이루어진 곳에서만 발견되므로 유명산 꽃산행에서 빠트리지 말고 보고 와야 할 가을꽃이다. 이 억새밭에는 산솜방망이와 자주꽃방망이도 자라고 있는데, 9월 중순까지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이 두 가을꽃은 숫자가 적기 때문에 발견했다면 큰 행운이다.
정상에 서면 일렁이는 억새물결 너머로 남한강 물줄기가 시야에 들어와 가을정취를 더한다. 정상 일대는 유명산 꽃산행에서 가장 중요한 식물 관찰 장소다. 초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햇볕이 적당하게 들고, 기온도 높아서 여러 종류의 가을꽃들이 생육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오랫동안 억새밭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가을꽃을 찾아보면 좋다.
하산은 북쪽 능선을 타고 휴양림쪽으로 한다. 1시간30분이면 휴양림 주차장에 이를 수 있다. 경사가 급한 길이 이어지며, 소나무숲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눈에 띄는 식물은 별로 없다. 정상에서 내려서기 시작할 무렵에 나타나는 분취 정도가 눈길을 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