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송광사 승보전 〈심우도〉 벽화 중 ‘득우’의 장면. 무명갈애의 날뜀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있는 동자.
‘무엇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가?’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그것은 ‘무명을 바탕으로 한 갈애’라는 것이다.
무명갈애, ‘미쳐 날뛰는 소’ 표현
사찰 전각의 외벽 벽화로 자주 그려지는
〈심우도(尋牛圖)〉에는 소와 동자가 등장한다. 동자가 소를 길들이는 과정이 열 단계로 그려져 있기에
〈십우도(十牛圖)〉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는 검은 색이고 미쳐 날뛰고 있다.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이다.
검은 소는 ‘무명의 갈애(또는 욕망)’을 상징한다. 글 첫머리에 인용한 ‘미목(아직 길들여지지 않았다, 보명 선사의 〈목우십송〉 중에서)’의 내용을 보면, 치성한 욕망과 번뇌는 사방으로 튄다. 숨소리는 거칠고 가슴은 벌렁거린다. 불뚝 화를 냈다가도 우울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기도 한다.
여기 저기 아무 곳으로나 치닫는 발걸음에 무고한 새싹들이 짓밟히는데,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와 욕망의 반복으로
검은 소는 질주 일로이다. 악습은 어느덧 나의 성품으로 굳어져 버려,
그 성품에 하릴없이 휘둘린다. 점점 가속도가 붙는 업력은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친다.
자각이 없는 갈애는 참으로 위험천만이다.
심우도에 등장하는 검은 소는 지혜(또는 통찰지)가 없는 무명 상태의 중생을 가리킨다.
보조국사 지눌이 저술한 〈수심결〉(마음을 닦는 방법)의 첫머리에는 중생의 현주소를
“탐·진·치의 뜨거운 불덩이”로 비유하고 있다.
“탐욕과 성냄과 무명의 뜨거운 번뇌여/ 마치 활활 타는 집과 같거늘/
그 속에 오래 머물러 참으며/ 기나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매 생(生),
매 순간,
매 찰나 마다 무명의 휘두름에 마냥 시달릴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서 벗어나 해탈의 길로 나아갈 것인지 종용한다.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부처가 되는 길 밖에는 없네…
이 육신은 변하는 거짓이라/ 태어남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거늘/ 참마음은 허공 같아서/ 끊기지도 변하지도 않는다”라며, 허망한 몸을 근거로 탐진치의 무명에 놀아나지 말고, 허공같이 드넓은 참마음을 찾으라고 말한다.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갈애’
살아서는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갈애,
죽어서는 ‘다시 삶을 거머쥐고자’ 하는 갈애. 갈애의 성품을 좀 더 파헤쳐 보자.
“죽음의 순간 과거 업에 말미암은 무의식의 형태들이 표현에 떠오른다.
그 가운데 으뜸은 갈애(딴하tah)의 힘이다.
(중략) 갈애의 엄청난 힘에 의해 육체적 새 기반을 잡으려는 본능적 움켜쥠이 있어,
새로운 존재가 잉태되고 새 생명이 시작된다.”
-구나라뜨라,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재생에 대한 아비담마적 해석〉 중에서
“움켜쥐며 달라붙는 그 힘은 가히 압도적이다!”
갈애는 대상이 있다고 착각하고 거기에 들러붙으려는 에너지를 말한다.
삶에 대한 들러붙음. 즉, 집착을 생존본능이라 한다.
이러한 생존본능은 육신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의지의 힘이다.
“참으로 생명이란 갈애의 연속이다. 임종하는 사람은 그동안 축적된 살고자 하는 갈애 위에
죽는 순간의 강력한 갈애가 합해져, 다음 생을 끌어당긴다.
진정 살려는 (갈애의) 의지가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에 의해, 삶을 살게 하고 또 다시 삶을 거머쥐는 윤회의 범인이 드러났다.
초기불전 니까야 속, 붓다의 생생한 말씀을 인용하면,
(무명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12연기의 과정 속에서)
“갈애를 연(緣)으로 하여 집착이 일어난다 → 집착을 연으로 하여 생성이 일어난다 →
생성을 연으로 하여 재생(再生)이 일어난다”라고 한다.
‘알아차림’으로 끊어버려야
무명의 작용〔업력〕은 ‘알아차림’할 때 비로소 멈춘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12연기〔(1)무명 → (2)행 → (3)식 → (4)명색 → (5)육처 → (6)촉(觸) → (7)수(受) →
(8)애취(愛取) →(9)유(有) → (10)생(生) → (11)노(老) → (12) 사(死)’〕는 저절로 계속 돌아간다.
〈유식〉의 표현을 빌자면,
말라식(我相,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무명)은
“멈추지 않는 폭우의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른다.”
그러면 갈애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불타는 아귀의 불을 끄고,
미처 날뛰는 소를 멈추는 길은 무엇인가? ‘알아차림(삿띠)’밖에는 없다.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가 생기고(無明因愛),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업(業, 즉 오염된 업)이 생기고(愛因為業),
업(오염된 업)을 원인으로 하여 (갖가지로 오염된 번뇌·삼계의 색경에 속박된) 안식(眼)이 생긴다(業因為眼).
이식(耳)·비식(鼻)·설식(舌)·신식(身)·의식(意)도 또한 이와 같다.
-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이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을 만날 때(觸),
이미 삿띠를 밝히고 있으면, 촉으로 인한 느낌(수)가 발생하지 않는다.
느낌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인 애취(갈애) → 유 → 생의 전개는 저절로 끊어진다.
알아차림을 놓치는 순간,
무명은 다시 자동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는 세세생생 닦아놓은 업력의 길이 이미 탄탄히 나 있다.
방심하는 순간,
어느 덧 그것에 휘둘리고 있는 자신을 본다.
수행이란, 알아차림의 간격을 조금 조금씩 길게 늘려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덧 알아차림의 힘에 근력이 붙어
그것이 (무명이 저절로 돌아가듯) 저절로 돌아가는 경지에 이르면, 무명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러면, 무명업장을 타파하면 어떻게 되는가?
불교미술의 표현으로 통해 살펴보자.
감로탱 속 불타는 아귀는 깨달음의 ‘여의주’로 변한다.
심우도 속 검은 소는 하얀 소로 변하고,
급기야 텅 빈 ‘일원상’만 남는다.
눈앞에 펼쳐진 불교미술은
“불타는 아귀를 택할 것인가,
영롱한 여의주를 택할 것인가”
또는 “미쳐 날뛰는 검은 소를 택할 것인가,
자유와 해탈의 일원상을 택할 것인가”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