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연구 레포트 1. 랭보
2253531002 천야현
1. 모음들(vetelles)
보들레르를 '현대시의 기원'으로 본다면, 랭보는 '현대시의 혁명'이었다. 혁명적 이단아답게 "국립도서관을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소리쳤던 그는 "나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기록했고, 소용돌이를 움켜쥐었다."고 회고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16세 때 처음 시를 발표하여 4년만에 중단했다. 그리고 3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17세 때 발표된 [모음들(vetelles)](1871)을 통해 불어의 모음에다 색깔을 부여해 '소리의 시각적 이미지'를 창안해 그의 독창적인 시세계의 출발점을 알렸다.
A는 흑색, E는 백색, I는 적색, U는 초록색, O는 파란색, 모음이여!
나는 언젠가 너희들의 은밀한 탄생을 말하리
A, 지독한 악취 주위에 윙윙거리는
번쩍거리는 파리들의 털투성이의 시커먼 코르셋,
어둠의 만(灣): E, 안개와 천막의 눈부신 백색,
오만한 빙하의 창(槍), 흰 왕들, 산형화의 전율
I, 주홍빛, 토해낸 피, 분노,
또는 참회하는 주정(酒酊)의 웃음짓는 붉은 앵두빛 입술
U, 천체의 주기(週期), 창해(滄海)의 성스런 진동,
동물들이 흩어져 있는 방목장의 평화
연금술이 연구에 골몰한 넓은 이마에 새기는 주름의 평화
O, 기괴한 환성에 넘친 지상(至上)의 나팔,
온누리와 천사들을 꿰뚫는 침묵
오오, 오메가, 신(神)의 눈의 보랏빛 광선!
- 랭보 [모음들] -
14행으로 이루어진 소네트 형식의 시로, 독특하고 환상적인 감각의 세계를 표현하여, 시의 정확한 의미해석을 비롯해 여러 측면에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17세 청소년의 작품으로 보기엔 시의 구조가 파격적이면서도 기발하고 내용 또한 심오하고 다의적(多義的)이어서 아직도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를 통해 랭보는 다섯 개의 모음에 감각은 물론 시공간의 의미까지 부여하여 '감각의 착란'과 '의미의 마술' 그리고 '언어의 연금술'을 꾀했던 것이다. 모음 하나하나에 풍부한 상징성을 부여함으로써 시 해석의 열쇠를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셈이다.
2. 견자
랭보의 '창작시론'은 이른바 '견자(見者)'의 편지'로 불리는 두 통의 편지에 집약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견자'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 '투시자' '깨달은 자' '초자연적 본질의 세계를 파악한 자'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를 의미하는데, 랭보의 '견자'는 이를 뛰어넘는다.
리트레사전에 의하면 견자란 "보는 사람ㅡ성서 용어ㅡ예언자"다. 오늘날 예언자라 불리는 사람이 당시에는 견자라 불렸다. 감각의 착란에 관해 말하자면, 결국 편협한 규칙, 금기, 시대나 문화에 의해 추가된 제한앞에서 그들의 원초적인 명철함을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 감각을 착란시키는 것은 감각을 날카롭고 예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아의 이런 훈련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랭보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아마 내부의 결정하는 목소리에 의해 예언자들이 자신이 예언자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듯이, 자신이 시인임을 알아보았다.
- 클로드 장콜라, [랭보ㅡ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中 -
'견자의 편지' 첫 번째는 그가 중학교 재학 시절 담임교사였던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이다.
저는 지금 최대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시인이고 싶고, 또 견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전혀 이해하실 수 없을 것이고, 제가 설명해드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 미지에 도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통이 극심합니다.(중략) '나'는 하나의 타자입니다. 나무가 자신을 바이올린으로 여기더라도 어쩔 수 없고 또 자기가 모르는 것에 궤변을 늘어놓는 분별없는 자들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미지'는 보들레르나 말레르메가 추구하던 공통의 목적지로서, 정신과 언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이를 위해 시인은 정신을 단련시키고 스스로에게 의도적인 형벌을 가해야한다. 그러니까 스스로 '불량소년'이 됨으로써 정신의 해방을 도모해야 하고, 불량소년은 기존의 역사나 종교, 윤리 등 인간의 정신과 감각을 속박하는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질서와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구속감, 일상적인 행복과 사랑, 윤리 의식 등 인간 정신의 퇴적층으로부터 벗어나는 내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랭보가 이와 같은 생각을 굳히게 된 이유는 기존의 문학적 전통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그것은 '견자의 두 번째 편지'라고 불리는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글에 그 내용이 소상하게 나타나 있는데, 랭보는 이 편지글을 통해 "조화로운 삶을 노래한" 고대 시에서부터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시를 "운을 붙인 산문"이라고 통박하면서, 그것은 "우둔한 세대들의 장난이며, 무기력함"이라는 비난을 퍼붓는다.
나는 감히 견자이어야 하며,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추구합니다. 자신 속에 모든 독소를 걸러내어 오직 그 정수만을 간직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신앙과 초인적인 모든 그의 힘이 필요한 말할 수 없는 고역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죄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미지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왜냐하면 그는 그의 영혼을 단련해서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누구보다도 풍요해진 영혼을! 그는 미지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미쳐 날뛰며 자기 환각들에 관한 지식을 상실하고 말 때에 그는 반드시 그 환각들을 볼 것입니다. 그는 지극히 엄청나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한 약동 속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그때에는 가공할 만한 다른 작업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쓰러진 바로 그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랭보는 이 편지에서도 "감각의 착란"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착란이란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라고 말한다. 결국 시인은 그러한 착란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어야 하며, 그리하여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 받은 자"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시인은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고, 그곳이 바로 '시인이 태어나는 자리'이며, '견자로서의 시인'이 첫 발걸음을 내딛는 공간이 된다.
3. 타자
이러한 '견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타자'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시적인 추진력은 정신의 자기 훼손, 고의적인 추화(醜化)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객체인 '세계'의 구분이 지워져버린 몰아(沒我)의 상태가 온다.
또한 "나는 하나의 타자"라는 말은 '시의 화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발언이다. 이때의 '타자'는 '1인칭 주체', 즉 '경험적 자아'로부터 이탈된 자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제3의 자아'를 칭하는 말인데, 이 자아는 일상적이고 주정적이고 논리적인 자아를 거부한다. 그 이유는 현대시는 '전기적 진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랭보는 '미지의 것에로의 도달'을 시의 최종 목표로 삼았다. 랭보는 "시인은 그 시대의 만유혼 속에서 움직이는 미지의 것을 척도로 정의한다." 고 말했는데, 이는 "불가시적인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들음"이다. 따라서 그 실질적인 내용은 채워지지 않는다. 이 개념은 보들레르에게서 나온 것인데, 랭보는 [악의 꽃]에서 발견되는 '공허한 초월'의 이론적 구상을 무질서한 의식의 파편으로 형상화해냈다.
랭보는 그의 시 [취한 배]를 통해 '감각의 착란'이 만들어내는 '혼돈의 지표'를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나는, 별들이 우러나와, 젖빛으로 빛나고,
초록 창공을 집어삼키는, 바다의 시에
몸을 담갔다. 거기, 창백하고 넋을 잃는 부유물,
사념에 잠긴 익사자 하나가 이따금 떠내려가고,
거기, 대낮의 광채 아래 착란과
느린 리듬, 갑자기 그 푸름을 물들이며,
알코올보다 더 강하고 우리의 리라보다 더 광활한,
사랑의 쓰디쓴 적갈색들이 발효한다!
나는 안다, 번개로 갈라지는 하늘을, 회오리 물기둥과
되밀려오는 파도와 해류를. 나는 안다, 저녁을,
비둘기 떼처럼 솟구치는 새벽을, 그리고
나는 때때로 보았다, 인간이 본다고 믿었던 것을!
나는 보았다. 신비로운 공포로 얼룩진, 낮은 태양이,
까마득한 고대의 연극배우들을 닮은,
보랏빛 기다란 응고물들을 비추는 것을,
파도가 그들 빗살창의 떨림을 멀리 굴리고 있는 것을!
나는 꿈꾸었다, 바다의 눈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입맞춤,
눈부시게 눈 내리는 초록의 밤을,
전대미문의 精氣(정기)의 순환을,
노래하는 燐光(인광)들의 노란 그리고 푸른 깨어남을!
- 랭보 [취한 배] 부분 -
이 시의 화자는 배의 닻줄이 풀리고 선원도 없이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모티프가 겹쳐있는데, 하나는 여행, 다시 말해 세상으로부터의 탈주이고, 다른 하나는 화자의 내적 경험을 열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이 '착란'처럼 뒤섞인다.
시인은 이와 같은 '감각의 착란'을 통해 '미지의 것'을 직관할 수 있지만, 거기에 도달할 순 없다. 그러니까 초월할 길 없는 '공허한 초월'인 셈인데, 따라서 랭보는 "시인은 전대미문의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들을 통한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