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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에 있어'타자'(the Other)의 문제
Ⅰ.글을 시작하며
Ⅱ.타자논의의 배경
Ⅲ.주체와 타자
Ⅳ.타자의 문학적 의미
Ⅴ. 여성주의의 이론적 성과
Ⅵ. 글을 맺으며
Ⅰ. 글을 시작하며
지난 수십년간 현대미술은 '미술'이라는 한정된 영역을 넘는 여러 학술적 연구동향과 문화변천의 흐름 속에서
이전의 정체성과는 구별되는 이론과 실천의 장을 형성해 왔다.
특히 사회학과 정신분석학,언어학,인류학,문화연구(cultural studies)등은 미술의 다양한 실험과 이론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정신적 사조들이었다.
전통적인 미술사나 미학 영역을 넘어서는 이들 학문들의 연구성과와 지적 영역의 확장은,
19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구조주의와 신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후기식 민주의 등의 이름으로 문화전반
과 미술비평에서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 내었다.
현대미술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를 전시라는 구체적 형태로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세계 각지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문화적, 지성적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 미술계가 나날이 국제화되고 국가적 정체성과 세계성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들이 미술외적인
분야에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은, 미술의 원론적 문제들을 현재라는 시대적 토대 위에서 재고할 필요성을 더욱
높이고 있는 것이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현대미술의 여러 논제 중 하나인 '타자' (the Other)의 문제를 살펴 보고자 한다.
지역적으로는 서구(Western),경제적으로는 자본가(capitalist), 계급적으로는 유산계급(bourgeois),인종적
으로는 백인(White), 성적으로는 남성(masculine)으로 대변되는 중심적 권력에 대응하는 개념인 '타자'는
사회의 여러 체계와 제도적권력에 대한 논의에서 비롯되어,
현대미술을 논하는데 있어서도 하나의 중요한 논제로 여겨지고 있다.
문화의 다양성과 복합성이 중시되고 모더니즘 미학이 발전시켰던 환원적, 형식적미학들이 비판되는 현 상황
에서 실제로 많은 미술가들은 이른바 '소수의 예술'이라할 만한 경향들에 주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서구 미술문화의 영향에 민감한 한국미술계에 있어서 서구 자체에서 반성적으로 행해지는 타자에
대한 논의는 기존의가치체계를 재검토하고 그것이 갖는 권력적 속성을 밝혀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있을
것이다.
Ⅱ. 타자논의의 배경
타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근대적 의미의 주체(subject) 개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 사유체계에서주체는 완벽한 에고(ego)이며 그의 언어는 이성
이다.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둔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은 통합된 이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이후 철학자들에 의해 공격
을 받게 되는데,
20세기 후반부의 문화적 흐름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데카르트의 주체개념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키워낸다.
사실 인간 이성과 그에 기초한 통합적 주체 개념은 이미 19세기 말, 프로이트의정신분석학의 등장으로 의문시
되기 시작하였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은 인간의 욕망과 사회적 억압, 그로 인한 신경증과 꿈, 말실수, 농담 등을 설명하는
실마리로서, 수많은 연구보고서와 사례연구, 저술을 통해 체계화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혁명적인 발견으로 일컬어지는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연구는 정신분석의
특성인 '심층해석'이라는 방법론과 함께 문화 및 예술에 대한 논의에도큰 영향을 끼쳤다.
주지하듯이 정신분석은 환자의 말을 분석자가 듣고 그 심층에 내재한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분석 과정은 환자로 하여금 그의 감정과 생각과 소망을 서술하게 하며 정신분석 기술은 의식의 표층 아래에
숨겨진 실제 의미를 찾아내고자 한다.
이 과정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으로서의 비평이론과 유사하며,
이 때 환자의 말/텍스트, 분석자/독자(혹은 비평가), 증상의 원인/저자의 심리라는 대응구조가 성립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분석적 예술비평은 19세기말의 이드 심리학, 20세기의 에고 심리학을 거쳐 20세기 후반부
에는 자크 라캉을 대표로 하는 프로이트의 재해석으로귀환한다.
물론 인간의 사유하는 이성을 의문시하는 학문적, 문화적 흐름은 정신분석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20세기 후반부의 정신적 기조는 욕망, 권력, 지식, 담론 등을 주목하며,
니체 이후의 철학적 관심은 진리나 개념 자체가 아닌 담론의 조정, 조정의 주체, 그 결정과정 등에 집중되어
왔다.
푸코에 의해 제기된 권력과 지식, 그를 통한 역사의 재해석,
바타이유가 내세운 에로티시즘의 부활,
바르트가 제시한 저자의 죽음과 텍스트로의 전환 등은
이른바 후기구조주의적 사유의 대안적 특성을 보여 주는 예들이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on)은 고전적 정신분석학과 소쉬르의 언어이론, 구조
주의적 인류학 등을 접합하여, 에고 형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 개념을
제안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소쉬르의 언어이론에 의하면 언어는 소리와 의미 두부분으로 구성된 기호체계
이다.
그에 의하면 기호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로 구성되어 있고 언어는 차이 혹은 관계에 의해 변별
이라는 기능을 갖는 체계이다.
소쉬르의 이 두 가지 정의는 각기 기호학과 구조주의로 가는 토대가 되는데, 이후 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의 대응이 아닌 경우나 은유, 환유 등의 문제로 그 연구를 발전시켰다.
라캉은 기표와 기의에 대한 소쉬르의 언어이론을 받아들이되 기표가 기의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절대성을 띌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문에 각각 '신사'와 '숙녀'라는 단어가 써 있을 때 그 의미는 일상적인 의미의 '신사','숙녀'
와는 달리 화장실을 의미한다.
이 때 이 두 단어는 관계, 혹은 차이에 따라 하나의 기표가 각기 다른 기의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라캉은 이와 같은 예를 통해 기의는 기표와 분리될 수 없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표들간의 관계
속에서 유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기표가 기의에 절대적으로 앞선다는 것을 주장한다.
언어이론에 대한 라캉의 해석은 인간의 주체가 기표들로 이루어진 체계 안으로 들어가며 이때 기표들은 단지
언어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중시한다.
그에 의하면 언어로의 진입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위치한 주체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 앞서는
단계들은 무의식에 의해 조정된다.
무의식과 언어이론을 접합하고자 하면서,
라캉은 꿈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가 사용한 개념인 압축(condensation)과 전치(displacement)를
언어학적 용어인은 유(metaphor)와 환유(metonymy)로 치환시킨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는 라캉의 유명한 명제는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의 비유적 속성을 무의식
을 설명하는 데 도입한 결과이다.
그는 이를 통해, 언어가 의사소통이라는 일상적인 쓰임새 속에 비유적 속성을 내재하듯이,
무의식이 발현되는 장인 꿈속에서도 압축과 전치라는 의식의 간섭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무의식은 사고와 이미지에 '아무렇게나' 연결된 원시적 본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식과 엇갈
리며 공존하는 어떤 것이며,
의식과 무의식은 모두 언어를 통해 존재하고 특히 기표에 의해 영향받는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프로이트에 대한 라캉의 재해석이 보여주는 특징이자 성과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단지 병리 현상을 치료하는 임상적인 수준을 넘어 정치, 사회, 문화예술 분야로 확대
도입될 수 있는 가능성은,
통합된 의식이나 비과학적 무의식이라는 한계를 넘어 '말하는 주체' (speaking subject)라는 새로운 주체 개념
아래 그 주체의 형성과정과 사회화 단계를 설명한 라캉의 과학적 주체 분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Ⅲ. 주체와 타자
주체분석과정에서 라캉은 대화 속에서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는 나와 나의 말속에서 '나'로 지칭되는 나 사이
의 차이에 주목한다. "나는 무엇을 한다"라는 말을 할때 말하고 있는 에고와 말속의 '나'는 같지 않다.
라캉은 바로 이 두 주체 사이의틈을 중시한다.
「주체기능 형성요소로서의 거울단계』라는 글에서 라캉은 유아단계에 있는 주체가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인 자신의 지위를 인식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라캉에 따르면 유아는 생후 18개월경에 거치는 전언어적인(prelinguistic) '거울단계'를 통해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 사이의 분리를 경험하고 주체와 대상, 주체와 타자간의 관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거울단계를 동일화(identification)로 이해하면 된다. 분석에서 이 용어는주체가 이미지를 취할 때 일어
나는 변화를 뜻한다.
정신분석이론에서 그 효과는 이마고(imago)라는 오래된 용어로 충분히 설명된다." (Lacan, 1977 : 2)
라캉은 상상계(the Imaginary)와 상징계(the Symbolic)라는 단계를 구분하여 인간주체가 언어 질서로 진입하기
이전과 이후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상상계는 언어이전의 단계로서 주체(subject)와 대상(object)간에 명확한 구분이 없는 때이며,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대상을 주체로부터 구분할 수 있는 중심적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비로소 존재의 상상적 수준을 넘어 어떤 통합된 전체로서의
주체/대상 개념을 따로 분리시켜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 상태가 바로 거울단계이다.
거울단계에서 주체는 아직 부분적으로 상상계에 속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나는 거울단계의 기능을 이마고(imago)가 갖는 특정한 기능 중의 하나로 간주하려 한다.
그것은 유기체와 현실, 달리 말해 내부세계(Innenwelt)와 외부세계(Umwelt) 사이에 관계를 수립하려는 것이다." (Lacan,1977 : 4)
주체가 제도 속에서 객관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상징계에 대한 라캉의 이론은 구조주의적 인류학자인 레비-
스토로스의 연구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는 문화적 구조들을 설명하는 데 '상징적 제도'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모든 문화를
상징적 제도들의 조합으로 간주하였다.
언어, 결혼제도,경제적 관계, 예술, 과학, 종교 등을 상징적 제도들로 보고 문화를 이들의 총체인 하나의 구조로
파악한 것이다.
라캉은 레비-스트로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인간 주체와 그의 무의식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미 존재
하는 그와 같은 상징적 제도안에 진입하게 되는가 하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정신분석학의 지평을 넓힌다.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의 특성은 타자와 자신의 구별이며, 이 수준에서 어린아이는 차연의 세계인 언어 단계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와 자신의 구별, 아버지 존재에 대한 인식, 가족관계,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자신의 지위에 대한 이해 등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가능하고 이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에 실패한 경우가 바로신경증(psychosis)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 즉 차이와 규율로서의 언어를 받아들인 사람들조차도 근원적인 무의식의 분출구를 갖게
되는데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언어의 비유성과 꿈, 농담, 예술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라캉의 언어로 재구성할 수 있다.
라캉의 이론대로라면 생각하고 있는 나와 그 말을하고 있는 나는 다르고
따라서 데카르트의 말은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라는 말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바라보기만 하는 '나'가 아니라 보여지는 '나'도 있다는 주체의 객관화는 라캉이 말한 거울단계를 거친,
즉 상상계를 넘어선 주체이다.
이 주체는 상황과 자신을 구별하는 주체이고 타자를 인정하는 주체이며, 자아가 근본적으로 '다름'에서 확인되는
것임을 알고 있는 주체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사회, 문화예술 분야로 라캉의 이론이 확대될 수 있는
것은 라캉의 주체 개념이 갖고 있는 이러한 '타자의식' 때문이며, 이 타자의식은 특히 문화와 여성이론 분야에서
계속 발전되었다.
Ⅳ.타자의 문화적의미
타자에 대한 논의는 주로 중심적인 담론과 제도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가져 왔는데,
하나의 제도적 장치인 전시회도 그 구성과 작가선정, 특정 장르에 대한 주목 등 실제 운영 면에서 정치적 측면
을 이미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다 원론적으로는 재현(representation) 자체가 정치성을 내포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셀 푸코가 말했듯이, 각각의 담론은 특정 분야를 '재현'하며 동시에 그것은 각 담론의
전문화된 청중과 나름의 일관성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예술에 대한 학문에 있어서 이것은 이른바 명작과 연대기에 충실한 작품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데,
이름난 미술관에서의 주요 전시에 출품하기 위해서는 전문화된 청중인 큐레이터 혹은 비평가에게 인정을 받고
그들의 일관된 이론에 부응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문학이론가이자 후기식민주의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재현이 갖고있는 제국주의적 메카니즘을
지적하며 비간섭과 전문화 대신 간섭, 경계간의 교차를 중시한 바 있다.
서구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사상과 문화 예술의 가치들이 빚은 억압적인 인종중심주의를 비판하며 변경에
머물러 온 비서구 전통과 문화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요구하는 그의 주장은 특히 문화이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동에 대한 서구인의 시각을 분석하면서, 사이드는 서구중심의 담론이 어떻게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타문화권에 대한 특정한 스테레오타입을 구성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오리엔탈리즘』에서 그는 푸코의 권력이론을 수용하여, 서구중심 주의가 비서구를 인식하는 권력적 구조를
밝히고자 한다.
"대략 18세기 말을 기점으로 하여,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다루는 종합적인 제도로 논의되고 분석될 수 있다.
그것은 동양에 대한 언급과 공인된 시각, 묘사, 교육,정착, 지배를 통해 동양을 조정한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우위를 선점하는 서양의 시각인 것이다." (사이드, 1978:249)
사이드에 의하면 이러한 서구의 시각은 동양인, 특히 중동인들이 게으르고 거짓말을 잘하며 비이성적인 사람
들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고 아랍과 이슬람 세계에 대한 최근의 부정적 시각도 이러한 이미지에
바탕을 둔 결과이다.
결국 서구와 비서구 간의 문화적 구별은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상 속의 지형도에 의한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늘 외부에 머물러 '내부인'들의 시각으로 재조정된 채 받아들여졌던 '타자'의 문화적 경험을 강조하고, 서로간
의 우위를 구별하는 태도보다는 다름 자체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이드의 이론은, 타자를 인정하는
주체 개념이 결코 개인의주체형성 과정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라캉 이론의 외연을 상기시킨다.
V .여성주의의 이론적 성과
한편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가장 적극적이고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프랑스의 여성주의 이론은 거울단계를 거쳐
진입하는 언어체계가 갖는 가부장적 억압을 중시한다. 그들은 주체형성과정으로서의 거울단계를 벗어난 주체가
'성별화된' 주체라는 라캉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아버지의 이름' (Name-of-the-Father)으로 대변되는 언어
체계의 규범적 특성에 주목한다.
그 이론에 따르면, 신사와 숙녀가 구별되는 언어체계로 들어가면서 여자 어린이들은 이미 중심적 권력에 대한
주변부에 위치하게 된다. 언어 자체가 갖는 이러한 가부장적 권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여성주의 예술가들은
기존 언어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 그들만의 언어를 추구하기도 하며 이것은 한편으로 전위예술과 같이 중심적
예술 흐름에서 벗어난 예술들을 '여성적' 예술로 부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여성주의 이론가 중에서 특히 엘렌느 시수 (H l no Cixous)는 '여성적글쓰기' (ecriture feminine)
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여성성의 적극적인 재현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는 여성의 글쓰기가 기본적으로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체를 글 속에 투여하게끔 하며 이것은 무의식
의 막대한 잠재력을 일깨운다고 주장한다.
남성 중심적인 전통이 여성의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억눌러 왔음을 지적하며, 시수는 일종의 '반이론'
(anti-theory)을 제안한다.
그녀에게 있어 이론이라는 것은 남성 중심의 구조를 구성하는 담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수는 기존의 언어에서대안을 찾기보다는 새로운 언어, 즉 여성의 언어가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
하는 것이다.
보다 철학적인 측면에서, 루스 이리거리 (Luce Irigaray)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억압을 여성의 성적 특질
(feminine sexuality)에 대한 프로이트 이론의 취약성에서 찾고자 한다.
예컨대 그녀는 프로이트가 전개한 여아의 남근에 대한 동경이라는 개념이 여성을 남성의 타자 즉 남근을
결핍한 존재로 보는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성이 단지 남성의 소극적 거울 이미지로만 인식되고 남성의 응시 범위에서만 파악된다면 결국 여성이라는
독립적인 개념은 히스테리아와 신비주의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여성 존재의 특수성을 모색하면서, 이리거리는 여성의 에로티시즘이 보여주는 급진적인 타자성과 그것이 언어
속에서 가지는 분열적인 성격을 촉진시킨다.
오직 여성의 차이와 유동성, 복수성이 관습적으로 재현되어온여성의 왜곡된 이미지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여성의 성적 특질이 시적 생산 (poeticpoductivity)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말라르메나 발레리같은 프랑스 전위 시인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생물학적인 성 개념이 아닌 권력에서
파생되는 성 개념을 적용시켜, 이들의 예술이 중심적 권력에서 벗어난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수나 이리거리가 생물학적 정체성으로서 여성성을 파악한 데 비하여, 크리스테바는 보다 언어학적인 측면
에서 이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녀는 라캉이 제시한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개념을 수용하되 상상계의 역할을
보다 긍정적인 창조적 역할과 연계시키고자 한다. 이를 위해 크리스테바는 상상계 대신 기호계(semiotic)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 단계가 갖는 비고착적인 자유로움과 창조적 힘을 극대화하여 제시한다.
이런 시각에서 크리스테바는 가부장적 중심 권력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여성성'(femininity) 대신 '주변성'
(marginality)이라는 보다 확장된 개념을 제시하기도한다.
Ⅵ. 글을 맺으며
이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미술에 있어서 중심과 주변, 주체와 타자의 문제는 최근 몇 년간 매우 활발히 논의
된 이슈 중의 하나이다.
성적 특질, 성별, 인종적 정체성, 복합문화주의 등은 현대미술가와 이론가들에게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며,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문제들이다.
오히려 이제는 그 논의 자체의 권력적 측면, 즉 중심에 대한 주변의 비판이 권력의 자리바꿈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이 제기되는 실정이다.
한 시기의 대표적 담론이 반영되기 마련인 전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백인' '남성' '이성애
주의자'를 대표했던 전시장의 작품들은 90년에 들어 '유색인' '여성' '동성애주의자'를 표방하는 작품들로 대치
되었고 지금은 권력 자체를 부정한 채 다중성에 기초한 비정형의 탈권력적 성향들이 다양한 목소리의 작품들을
배출하고 있다.
중심과 주변, 주체와 타자는 더 이상 종속적이거나 우열의 개념 속에 놓여있지 않으며 단지 '다름'과 '관계' 속에
놓여있을 뿐이다. 미술의 정치성이라는 것은 이제 제 3세계의 민주화나 인권보호, 환경주의 같은큰 맥락 속에서
만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역사적, 제도적 환경 속에서 제기된다.
오늘날의 '정치적 미술'이 갖는 주체와 타자의 문제, 그리고 이에 내재한 권력적 구조의 문제를 통해 우리는 20
세기 후반부에진행된 다양한 인문학적 연구성과들이 어떻게 미술 및 그에 대한 논의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
를 확인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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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moca.go.kr/media_data/books/periodical/study/study08/study8-4.html
(이 숙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