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혜경(47)씨는 살뜰한 살림꾼이다. 잘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그의 입에서는 홍어무침이나 양념꽃게장 같은 음식 이름들이 줄줄 흘러나온다. 맏며느리로 20년을 살아왔다. 시댁식구들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하다 보니 시나브로 실력도 늘었다. 집이 더러워지는 것을 못 본다. 아기자기 꾸밀 줄은 몰라도 물건들은 늘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남편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해본 기억은 좀처럼 나지 않는다. 워낙 고집이 센 남편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그도 불화를 만들어가면서 까지 고집을 피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선한 인상의 그는 천생 아내고 천생 엄마요, 천생 며느리였다.
그랬던 그녀가 요즘 들어 변했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인천지부 지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으면서 부터다. 한 달에 20일 가량은 밤 11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하루 너덧 개의 학교를 돌아다녔다. 조합원들을 만나고 서명을 받고 기자회견을 쫓아다니다보면 어느새 주말이었다. 주말에는 언제나 전국단위의 회의 일정이 있었다.
“청소 안 해놓고 나가면 (남편에게)혼나요.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몰아서 치우죠. 찌개도 3개씩 4개씩 끓여놔야 밥을 차려먹으니까...장볼 시간이 없어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우리 딸이 올해 고3인데 내가 없으니까 만날 라면만 끓어먹는데....영양실조 걸리는 거 아닌가 어떨 땐 겁나요”
고혜경지부장은 지난 2011년 7월, 전국학교비정규직 인천지부가 설립을 준비했을 때부터 함께했던 ‘창립멤버’다. 같은 해 10월 노동조합설립 당시 조합원은 100여명이었다. 1년 3개월이 지난 지금. 조합원 수는 1150여명, 10배가 늘었다. 그사이 고혜경 지부장은 살뜰한 살림꾼에서 노동조합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만민보] 전국학교비정규직 고혜경 인천지부장ⓒ민중의소리
학교 급식실은 관리자가 왕이었다
지난 2002년 고혜경 지부장 집 근처 초등학교에서 조리사를 뽑았다. 마침 조리사 자격증을 따논 터였다. 출퇴근 시간이 아이들 학교 다니는 시간에 얼추 맞는 조리원 일이 그에겐 ‘안성맞춤이다’ 싶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던 1998년부터 부업을 해왔던 터라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집에서 휴대폰 회로를 납땜으로 조립하는 부업에 비하면 수입은 적었지만 안정적이었다. 집도 깨끗해졌다. 그런 그가 노동조합의 일원이 되고 게다가 ‘지부장’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학교 급식실은 관리자가 왕이다. “내년에 한 명 짜를 테니가 생각하고 있어라”라는 말 한마디면 급식실은 난리가 난다. 관리자는 작은 트집이라도 잡는다. 아무리 사소한 잘못이라도 해고의 이유가 된다. 직장이라고 믿고 살았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야 한다는 설움. 온갖 수모를 당하고서도 말 한마디 못하는 속병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만 아니면 돼’라고 못된 마음이 들기를 수십 번. 고혜경 지부장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관리자와의 불화가 발단이었다. 새로 들어온 조리사의 횡포는 참을 수가 없었다. 기본이 안 되어 있었다. 출근시간을 잘 지키지 않았고 늦게 와서는 화장품 샘플을 주욱 펼쳐놓고 사무실에서 화장을 했다. 일을 도와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방해만 하지 말아도 좋았다. 작업용 세탁기는 자신의 전용 세탁기였고 속옷이며 양말이며 돌아가는 통에 정작 작업복을 빨 틈이 없었다.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이년 저년’ 막말을 하기 시작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가 어느 학교 교장선생님의 동생이라는 말도 들렸고 사고치고 이곳으로 전근을 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갈등은 폭발했고 정면충돌했다. 교장까지 나서서 중재를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비정규직이었던 그와 동료들에게는 뭔가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그때 날아온 것이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창립 소식지였다. 준비위원회를 한다는 소식에 그와 동료들은 조합에 가입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가 지부장까지 맡게 된 이유는 그의 처녀시절 노동조합활동 경험 때문이었다.
순박한 시골 처녀가 70일 점거파업을 하게 된 이유
[만민보] 전국학교비정규직 고혜경 인천지부장ⓒ민중의소리
고혜경 지부장의 고향은 담양이다. 아버지는 담양에서 소를 키웠다. “무슨 일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하던 축사는 느닷없이 “쫄딱 망했다.” 남은 재산이라고는 100만원이 전부였다. 순박한 농부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졌다. 고혜경 지부장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떠나기 싫었던 그는 가족과 이별해 고향에 남기로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00만원으로 김포 마찌꼬바 옆에서 식당을 차렸다. 엄마가 밥을 하고 아버지가 음식을 날랐다. 손님이 조금씩 늘면서 어머니와 아버지 힘만으로는 운영이 힘들게 됐다. 아버지는 고혜경 지부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그도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몇 년간 식당에서 밥을 나르며 자리를 잡았다. 식당도 벌이가 괜찮아 그의 집안 형편도 점차 펴져갔다. 하지만 장사가 잘되기 시작하자 건물주인이 눈독을 들였다. 자신이 식당을 운영해야겠으니 나가달라는 거였다. 결국 가족은 쫓겨났다.
할 일이 없어진 고혜경 지부장은 동네에 있던 전자회사에 들어갔다. 미국인이 투자한 회사에는 노동자가 500여명이나 있었다. 전자부품의 불량을 테스트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당시 회사에는 한국노총소속의 노동조합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역시 노동조합의 일원이 됐다. 돌아가면서 맡았던 간부를 해봤던 것이 노조 경험의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저냥 왔다갔다 한거죠. 노동조합이란 게 뭔지도 몰랐던 때였던 것 같아요”
잘나가던 회사는 점차 규모가 줄어들더니 결국 폐업신고를 하기에 이른다.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회사에서 먹고 자고 70일간이나 파업을 벌였지만 회사가 파산을 하고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함께 노조를 했던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각자 살길을 찾아갔다.
바쁘게 살아온 1년, 더 바쁘게 더 바쁘게...
”말도 못할 수모를 다 당해도 참고 살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 조합원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자신감을 얻었다’고 ‘할 말 하고 살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아직 가야할 길은 멀다. 올 한 해 조합원 3천명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단체교섭 이행촉구, 급식실 위험수당 쟁취, 처우 개선을 위해 해결해야 할 현안 문제도 산더미다. 무기계약으로 전환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천지역의 학교비정규직 4.3%가 해고를 당해 직장에서 쫓겨나고 있다.
고혜경 지부장은 아마도 지난 1년 동안 보다 더 바쁘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 그의 딸은 남들보다 조금은 더 힘든 고3 수험생 생활을 해야 할 터다. 하지만 그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학교로 돌아간다면, 집으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정규직이 되어서 돌아가겠다"는 학교비정규직 박금자 위원장의 말이 고혜경 지부장의 가슴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