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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예배자로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누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초대교회의 특징에 대해서 몇 가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본문 내용 중에 우리가 보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기사와 표적을 많이 일으켰다는 것이죠. 그래서 초대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표적과 기사 그 표적과 기사로 인해서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3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까 이들에게 찾아온 두려움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포감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외와 존경을 의미하는 영적인 두려움이 이들에게 찾아왔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단지 예수를 믿겠다고 따르는 신자들에게만 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 있던 불신자들에게도 그 표적과 기사는 보여줬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굉장히 큰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저자 누가는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표적을 기록해 주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먼저는 앉은뱅이의 상태가 어땠는지 보시고 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는데 이 만남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적용해야 될 것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앉은뱅이의 상태가 어땠는지에 대해서 오늘 2절은 이렇게 기록해 줍니다. 2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나면서 못 걷게 된 일을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잘 보시면 이 2절 안에 이 사람에 대한 네 가지 정보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그것들을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첫 번째는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죠. 그는 일평생 단 한 번도 자유롭게 서거나 걸어보지 못한 늘 앉아서만 살아야 했던 앉은뱅이라는 것이죠.
4장 22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요. 40여 년 동안 앉아 있었다. 긴 세월이죠. 1년 2년이 아니라 40년을 앉아서 보내야 됐다고 생각해 보시면 굉장히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이 앉은뱅이를 메어다가 미문이라는 성전 앞에 놓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죠.
그러면 여러분 이 사람이 성전 올 때만 그럴까요? 아니죠. 성전 올 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요. 성전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러한 인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그런데 이 사람이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앞에 앉았다. 날마다 앉아 있었다는 거예요.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삶의 목적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함이 아니라 성전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무언가 얻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구걸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죠. 그러니 이 사람에게 있어서 소망은 무엇이겠어요? 성전에 들어가는 게 소망이 아니고 하나님 만나는 게 소망이 아니라 성전 문 앞에 앉아서 누가 얼마를 주느냐 이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 몇 푼으로 일희일비할 수 있던 그러한 사람이었고요. 인생의 가장 큰 낙이라고 한다면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서 베풀어준 통큰 기부 그날은 막 기분이 엄청 좋았겠죠. 오늘 이만큼의 수입이 나에게 왔다고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네 번째는 미문이라는 성문 앞에까지는 올 수 있었지만 그가 그 문을 통해서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 성전 미문이라는 곳 앞에 앉을 때 성전 안이 궁금했겠죠 저 안에서 어떤 형태로 예배를 드릴 것인가, 어떤 형태로 찬송을 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들어가고 싶다. 사람들이 다 들어가는데 나도 가면 안 되나라는 그러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현실을 직시하고 체념하게 되고요.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더 이상 이제 성전에 대한 갈망은 없는 거예요. 내가 들어가서 거기에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이러한 갈망과 열심보다는 오늘 나에게 만나주는 사람이 누구인가, 오늘 나에게 돈 한 푼 주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람 이렇게 소개된 앉은뱅이에게 오늘 매우 귀중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 9시 기도 시간이 되었죠. 성령 충만했던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앉은뱅이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자리에 왔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똑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 푼 주십시오. 한 푼 주십시오라고 구걸했을 것입니다. 마침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곳을 지나갈 때에 다르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동일하게 한푼 주십시오라고 얘기했겠죠.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람들과 좀 반응이 달랐어요. 그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건네죠.
우리를 보라
여러분 앉은뱅이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흥분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그냥 돈 한 푼 던져주고 가고 또 어떤 사람은 건강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잘 맛있는 거 사 먹으십시오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갑자기 우리를 보라 막 이러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면서 심장이 쿵쿵 뛰면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가운데는 무슨 마음으로 봤어요? 무엇을 얻을까? 성경은 그렇게 얼마만큼 줄까 저 사람이 얼마를 주려고 우리 나에게 보라고 할까라는 심정으로 바라보는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인데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 함께 읽어보실까요? 시작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앉은뱅이가 바라보고 소망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은과 금이었다는 거예요. 은과 금을 바라보고 그들을 주목하여 바라보는데 이들이 하는 얘기가 니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겠노라 하면서 하신 이야기가 뭡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즉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들에게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앉은뱅이의 인생을 단번에 그리고 완전히 변화시키는 놀라운 선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죠. 즉 앞서 소개했던 네 가지 그의 삶의 문제 이 문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놀랍게 변화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번씩 차근차근 한번 생각해 볼까요? 먼저 첫 번째 근본적인 문제였던 앉은뱅이의 삶을 청산하게 됩니다. 7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사실 이 사람은 일어나고 싶어도 발과 발목에 힘이 없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무리 힘을 주려고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서지 못한 거 그것 때문에 한 번도 일어나보지 못했던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그 사람을 잡아 일으키니
그 일으키는 힘도 있었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발과 발목에 뭐가 들어갔다고요? 힘이 들어갔다 여러분 이 힘이 들어감으로 인해서 이제는 앉은뱅이의 삶을 청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 앉아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죠
여러분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의 특징에 대해서 시편 1편이 기록해 주고 있죠. 사실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써내려가지만 그거를 거꾸로 잘 읽어보면 복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반대로 생각하면 복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즉 예수 생명의 피가 없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따르다 보니까 그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죠. 그 길에 들어서서 걷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삶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은 죄의 점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갖고 따라갔는데 어느 순간 그 길에 접어들게 되어버린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되어서 앉아버린 그러한 죄의 점진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이 사람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분명하게 성경 그다음 구절을 통해서 가르쳐줍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죠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서 그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내 삶을 차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여러분 이 시편 1편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시편 107편 10절 말씀을 한번 읽어보실까요? 뭐라고 기록되어져 있는지 읽습니다. 시작.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의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여기 보니까 사망의 그늘에 앉았다는 거예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무엇을 거역했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을 멸시했다고요? 하나님의 뜻을 멸시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는 사람은 어디에 앉는다는 거예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게 된다. 그래서 이후에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고통을 준대요. 그래서 마음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그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는 방법 중에는 뭐냐 하면 고통을 주는 내 주변에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 고통 가운데 결국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겸손함을 만들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이 말씀을 제가 보면서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탕자였습니다. 탕자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무슨 이유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여러분 이 사람이 돈이 있을 때만 해도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을 것 아니겠어요? 같이 흥청망청 놀고 즐겼습니다. 그런데 돈이 다 떨어지고 나자 주변의 사람들이 떠나가기 시작해요. 그리고 한 사람도 나를 도와준 사람이 없어요. 오죽하면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 주엽 열매를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야 이게 뭔가 나를 돕는 한 사람이 없어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때 여러분 그가 떠올랐던 한 사람이 누구겠어요? 아버지 내 아버지 아버지 집에 있는 저 종들은 그래도 나처럼은 안 사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그래도 이만큼은 돌봐주는데 차라리 내가 그곳 가서 종으로 사는 게 좋겠다 그런 마음이 안 들겠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형편을 쭉 들여다보니까 결국에는 누구를 바라보게 되느냐 아버지를 바라보게 되었다는 얘기예요.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한결같이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할렐루야 특별히 자녀가 부르짖으면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 아버지시다. 출애굽기의 사건 우리 출애굽 사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부르짖었기 때문에 물론 하나님의 큰 계획과 그림 안에 있었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이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셨다. 돌보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해내신 것이죠. 그것이 조금 전에 읽었던 흑암과 그늘에 앉아 있던 자가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로 응답해 주신다. 그래서 여러분 시편 107편, 아까 10절을 읽었는데 13절, 14절은 이렇게 말씀을 주세요.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에 그들이 그 환란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음에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얼거맨 줄을 끊으셨도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오늘 어디에 앉아 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한복판에 앉아 계십니까? 아니면 내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늘 주님의 품 안에 앉아 계십니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자로서 주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해서 말씀 안에 거하고 주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함으로 인해서 도우시는 하나님, 모든 환란 가운데 지키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존귀하신 아들 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는요. 더 이상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거예요. 8절에 보니까 뛰어서서 걸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어요. 난생 처음 서보는 그 순간 여러분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어요? 여러분 여러분이 한 40년 동안 이렇게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이 오더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영하면이 일어나 걸어라 하면서 손을 잡고 일으킬 때 덩치지 않았겠지 뭐 하는 거지 날 놀리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근데 갑자기 발목과 발에 힘이 들어가더니 막 일어서시는 거예요. 여러분 얼마나 당황스러우면서도 감격스러우면서도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이 사건. 이 사건을 통해서 얼마나 그가 흥분을 했겠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그가 서 봅니다. 그리고 발을 한짝씩 떼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뛰어보기도 합니다. 완전 신세계를 경험한 거예요.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사건인 것이죠. 날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그가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어도 일어날 수 있는 스스로 일어나 걷고 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죠.
여러분 그렇다면 이 사람이 그렇게 하고 일어났어요. 그때 어떤 마음이 들었겠어요? 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를 일으켰다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다음 날 잤어요. 자고 일어날 때 어떻게 했어요? 두 가지 마음 들지 않겠어요?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이 있지 않았겠나 싶어요. 그러면서도 시도를 하겠죠. 시도할 때 뭐라고 하고 시도하겠어요? 스스로 아마 그랬을 거예요. 제가 생각해 보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면서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가위 눌릴 때 있죠 누구나 가위를 누릴 수 있으니 피곤하면 저도 가위 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 막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잖아요. 그러면 희한하게도 가위는 더 나를 이렇게 눌러줘요.
그때 여러분들 어떻게 아십니까? 저는 그때 그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를 물러가라 그러면 정말 빨리 떠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러한 경험을 한 후에 하루만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그때 그가 누웠다가 일어날 때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 나사렛 예수의 이름 나사렛 예수의 이름 이러고 일어났을 거예요. 그러고 사는 인생 즉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인생이 돼요.
조금 오래전 찬양인데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찬양이 있어요. 오늘 이제 끝나고 기도 시간에 찬양할 텐데 그 가사가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주신 능력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원수가 나를 향해 돌진할지라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겠어요? 내 안에 예수가 있어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안에 계신 예수로 말미암아 오늘 하루도 아니 이번 한 주도 원수가 날 공격할지라도 담대하게 물리치시며 쓰러지지 않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세 번째는요. 그의 소망이 더 이상 돈에 묶이지 않아요. 그동안에는 돈이 필요했죠. 돈이 나의 인생의 삶의 전부였지 않겠어요 내가 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잘 받아서 먹고 사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죠.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앉아서 구걸하는 것뿐이었지만 이제는 일어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가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거기서 찬송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그것은요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때문에 찬송이 나오는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10편 42편 5절은 이런 말씀을 주세요.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10편 42편 5절입니다. 시작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누구에게 소망을 두라고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여전히 그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 가운데 낙심, 불안 이런 것으로 구속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으셨습니까?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려운 일이 있더라 할지라도 없지 않아요. 나에게 찾아오는 어렵고 정말 숨 막히는 일이 찾아올지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낙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살아가고 결국에는 하나님께 찬송하며 사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문제가 와서 낙심하고 그 낙심의 문제를 보기 시작하면요. 그때부터 열심히 땅을 파는 거예요. 열심히 땅을 파면서 내 무덤을 만드는 거죠. 그리고 거기 들어가서 죽겠네 죽겠네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그 문제를 보지 말고 그 문제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보시기 시작하면 야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이루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역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생기는 것이고, 그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송하며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특권 아니겠어요?
여러분 이러한 은혜의 삶 안 오면 좋죠. 문제가 안 오고 문제거리가 없으면 제일 좋은데, 그래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이 죄된 세상 가운데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살려고 하면 사단이며 더 공격할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믿음으로 살겠다 열심히 하면 예상을 해야 돼요. 사단이 지금 나를 엄청나게 공격하겠구나라는 예상을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죠. 그렇게 찾아올 때 이길 수 있는 것은요. 그것보다 능한 하나님 그것을 다스리고 통제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소망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네 번째는요. 이제 성전 문 앞 미문이라는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있던 그가 드디어 성전 안에 들어가는 놀라운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죠. 이 사람이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얼마나 처음에는 성전에 들어가고 싶었겠어요? 남들 다 들어갔는데 난 왜 못 들어가 내가 안전망이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로 인해서 내가 못 들어가는 게 너무나 억울하고 너무나 답답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인지하시는 그 장소,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그 자리. 물론 그가 성전 밖에서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하고 예배했다면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전을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에 임재해 주시겠다. 거기에서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한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그가 이제는 성전에 들어가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주님과 대면할 일을 바라보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축복이 임하게 됐잖아요.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말씀하죠.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서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예수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짐 이 놀라운 사건이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 길 그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서 성서로 주님이 임재하시는 그 자리, 주님을 대면하는 그 자리로 담대히 나아가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얼마나 좁은 특권입니까? 여러분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 성전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만나는 이 감격스러운 것은 너무나 감사하고 좋은 일이죠. 그런데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성전으로 가는 그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면 그거 문제 아니겠어요? 하루라도 더 가서 만나야 되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면서 어디를 계속 갔겠어요? 성전에 가지 않았겠어요? 늘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그가 이제 날마다 날마다 성전을 열고 들어가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비하는 그러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성전 밖에서 앉아 있는 인생이 아니라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여러분 이 자리에 성전에 우리 나와 있잖아요. 근데 여기에 나왔다고 해서 우리가 성전 주님의 임재의 자리까지 가는 건 아니잖아요.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 하늘의 문을 여시고 내 마음의 문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임재에 강력하신 역사가 말씀 가운데 내 안에 임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가 성전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앉은뱅이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귀한 선물을 받은 것이죠.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네 가지 문제를 해결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동일한 문제를 해결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받은 것의 감격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제 앉은뱅이만 볼 것이 아니라 누구를 봐야 돼요? 베드로와 요한을 볼 줄 알아야 돼요. 이 사건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살았는가 그 삶을 배워야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기 때문에 물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정말 중요한 핵심의 요소가 있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기 때문에 그것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의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된다. 베드로와 요한이 뭐 하러 갔습니까? 기도하러 갔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 받고 나서는 왜 기도합니까? 이 성령 충만이 나에게 떠나가지 않고 나의 삶을 이 성령 안에서 유지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겠어요?
여러분 초대교회는 그래서 늘 기도에 힘썼다라면서 이 기도를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공식적인 기도의 시간을 찾았던 것이죠. 우리로 말하면 공적 예배에 열심으로 했다는 거 잘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와 요한이 그 당시에 할 일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때 복음을 전했을 때 3천 명이 돌아옵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그들을 케어하고 그들을 제자로 양육시키고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정해졌던 기도의 시간을 버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알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일에 몰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만 그렇게 했겠어요? 아니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야 그래 그 기도 시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구나 하면서 그들도 기도의 시간을 따랐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교회를 통해서 주신 공적인 시간이 있어요. 새벽 기도회를 통해서 기도하게 하고 금요 기도회를 통해서 기도하게 합니다. 특별히 이번 주에는 우리 특별새벽기도회를 진행합니다. 여러분 새벽에 나오면 당연히 피곤하죠. 내 삶에 문제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그래서 여러분 금요 기도회 때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는 우리의 삶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큰 능력이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하늘 문이 열립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주목해 보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으로 역사하신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가 요한복음 16장 24절의 말씀을 함께 크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여러분 기쁨의 충만을 위해 기쁨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또 아주 중요한 것이 이들의 신앙적 영적으로 굉장히 준비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앉은뱅이에게 주목했다는 거예요. 주목 이 앉은뱅이가 구걸할 때 주목해 보았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자에게 참 이웃이 누군지를 가르쳐줍니다. 강도 만나서 겁안 죽게 된 사람, 옷도 다 찢기고 하도 맞아가지고 죽어서 막 이렇게 넘어가고 있는 그 사람, 그 사람 앞에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런데요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거를 보고 피해 갑니다. 한 레위인도 그곳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레위인도 여전히 그를 보고 피해 갑니다. 근데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 중에 그를 발견하고 그를 보고 오라고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글을 집중해서 보니까 참 불쌍하구나라는 것이 고요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씻어주고 싸매 줍니다.
그리고 자기가 탔던 짐승 위에 태워서 주막으로 이동합니다. 거기에서도 돌봐줍니다. 그리고 데나리온 2를 주면서 내가 갔다 올 동안 잘 돌봐주십시오. 부족한 것 있으면 제가 돌아와서 갚겠나이다 하고 맡겼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이 세 사람 중에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가 봐도 누가 들어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그렇죠. 사마리아 사람일 것입니다. 이 사람은요.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주목했듯이 그 악한 영혼에게 주목했다는 것이죠. 주목하니까 그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였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그다음에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구원의 감격과 은혜 가운데 찬송하고 예배도 드려야 되지만 이 신앙 안에서 살아가면서 여전히 불쌍한 인생, 세상 가운데 죽어가는 인생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신앙의 여정을 가는 것이죠.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주목했을 때 그가 요구했던 것은 돈이에요. 그러나 이들이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그러나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것이죠.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해 예수를 알지 못해 죽음 가운데 저 어둠과 흑암 가운데 앉아 있는 그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이 시야가 열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의 신앙뿐만 아니라 아파하는 자를 돌아보고 복음이 필요한 자에게 복음을 주었다.
우리 신은 성도들이 우리의 신앙만을 돌아볼 뿐이 아니라 조금 더 넓고 확장되어서 이제는 나에게 주신 그 구원의 감격이 죽어가는 자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귀한 성도님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 이름의 권능이 있습니다. 그 이름에 치유가 있습니다. 그 이름에 용서가 있고 그 이름에 거룩 화해가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죠.
여러분 그리고 이제 베드로와 요한은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 앉은뱅이와 함께 성전에 함께 들어갑니다. 일어나 걸어라 하고 야 이제 걸었으니까 우리 성전 들어간다. 안녕 이런 게 아니죠 야 일어났으니까 성전에 들어가 봐라고 요구한 게 아니에요. 성경에 보니까 함께 들어갔다. 우리 8절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여러분 이 베드로와 요한이 같은 마음으로 걸어가면서 같은 마음으로 뛰어주지 않았겠어요. 야 그래 그래 우리 함께 하나님 찬양하자. 기쁨이다. 감사하다. 그러면서 정말로 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왔을 때 성전에 왔을 때 그와 함께해 줄 수 있는 이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죠.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더불어 주의 나라를 세워가라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 누군가가 성전에 올 때 왔는가 보다. 그게 아니라 함께 말씀을 읽고 함께 기도도 하고 함께 찬송도 하고 할렐루야 이런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이었다.
여러분 우리 오늘 두 방면으로 조명을 했습니다. 첫 번째 앉은뱅이의 모습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나도 구원의 은혜가 있었다. 두 번째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 우리가 추구해야 될 모습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자로서 내가 감사하고 감격해서 나 하나님 예배드립니다. 이것으로 끝내지 마시고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사역의 자리에 저와 여러분들이 뛰어들어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