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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왕 박승영 제 진경대사탑비문 (축약본)
39代孫 박희용
[해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는 924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의 찬자(지은 이)는 신라 54대 경명왕 박승영(朴昇英)이고 서자(글씨 쓴 이)는 행기(幸期)이며 각자(새긴 이)는 성휴(性休)이다. 전액(篆額)은 최치원(崔致遠)의 사촌 동생인 최인연(崔仁渷, 일명 崔彦撝)이 썼다. 1919년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진경대사 김심희(金審希)는 신라 말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였던 봉림사의 개조(開祖)로, 왕이 ‘진경’이란 시호(諡號)와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경명왕이 쓴 비문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두 군데이다. 도입부의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는 고대사 연구에서 논란되고 있는 ‘任那’란 명칭의 실제를 판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결론부의 <大師, 高拂毳衣, 直昇繩榻, 說理國安民之術, 敷歸僧▨▨之方. 寡人 ~ 翌日, 遂命百寮, 詣於所止, 同列稱▨, 仍差高品, 上尊號曰, 法膺大師> 부분은 경명왕 2년 918년 11월 4일 법회의 모습을 표현한 문장을 통해 진경대사의 법의 깊이와 함께 경명왕의 지적 수준과 정서를 알 수 있다.
신라 천 년 동안 ‘任那’는 ‘金官國‘이었다. 금관국을 초기에 ’任那伽羅’, ‘任那伽耶’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왕이 쓴 비문 그대로 진경대사 김심희는 임나 왕족, 즉 금관국 왕족으로 중시조는 흥무대왕 김유신이다. 그런데도 일본 사학계는 자기들의 사서인 『일본서기』를 근거로 하여 18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任那’는 낙동강 하류 유역의 모든 가야 소국들을 포함하는 지역 명칭이며, 한때 ‘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근거로 하여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경명왕이 직접 쓴 이 비문은 그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 날 그 법회, 진경대사의 법문을 일일이 받아 적는 젊은 경명왕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詞에서 ‘道存人去幾時迴 도(道)를 남기고 사람은 떠났으니 언제 돌아올 건가’ 하며 대사를 그리워하고, ‘霜霑鶴樹悲長悴 霧暗雞山待一開 서리 젖은 학림(鶴林)에 슬픔은 길고, 안개 짙은 계산(鷄山)에서 크게 걷힐 때 기다리네’라 하며 나라를 새롭게 일으켜보겠다는 의지가 더욱 다졌다. 그러나 인명재천이라더니 이 비문을 봄에 짓고는 가을에 30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101년 전 39대 할아버지의 글을 후손이 삼가 첨언한다.
[원문]
故眞鏡大師碑
有唐新羅國 故國師諡眞鏡大師 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門下僧幸期奉⎵敎書⎵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篆]
⎵⎵余製
余聞 高高天象 非唯占廣闊之名 厚厚地儀 不獨稱幽玄之號 豈若栖禪上士 悟法眞人 跨四大而遊化觀風 避三端而𡩷居翫月 遂使假威禪伯掃魔▨▨離乱之時追令 法王扶釋敎於曻平之際以至 慈雲再蔭佛日重輝 外道咸賓弥天率服持 秘印而發揮奧旨擧 玄網而弘闡眞宗 唯我大師則[其人也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 鼇山稟氣 鰈水騰精 握文符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 永安兎郡之人 克奉三朝 遐撫辰韓之俗 考盃相 道高莊老 志慕松喬 水雲雖縱其閑居 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 嘗以 坐而假寐 夢得休▨ ▨後追思 因驚有娠 便以 斷其葷血 虛此身心 潛感幽靈 冀生智子 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 誕生大師 異姿贍發 神色融明 綺紈而未有童心 齠齔而▨▨佛事 聚沙成塔 摘葉獻香
年九歲 徑往惠目山 謁圓鑒大師 大師-知有惠牙 許栖祇樹 歲年雖少 心意尙精 勤勞則高鳳推功 敏捷則揚烏讓美 俾踐僧▨ ▨離法堂 咸通九年 先大師寢疾 乃召大師云 此法 本自西天 東來中國 一花啓發 六葉敷榮 歷代相承 不令斷絶 我曩遊中土 曾事百巖 百嵒承嗣於▨▨ 江西繼明於南嶽 南岳則漕溪之冢子 是嵩嶺之玄孫 雖信衣不傳 而心印相授 遠嗣如來之敎 長開迦葉之宗 汝傳以心燈 吾付爲法信 寂然無語 因▨▨洹 大師-目訣悲深 心喪懇切 尤積亡師之慟 實增絶學之憂
十有九 受具足戒 旣而 草繫興懷 蓬飄託跡 何勞跋涉 卽事巡遊 訪名山而仰止高山 探▨▨而終尋絶境 或問曰 大師雖備遊此土 遍謁玄關 而巡歷他方 須參碩彦 大師答云 自達摩付法 惠可傳心 禪宗所以東流 學者何由西去 貧道 已▨▨目 方接芳塵 豈將捨筏之心 猶軫乘桴之志 文德初歲 乾寧末年 先宴坐於松溪 學人雨聚 暫栖遲於雪嶽 禪客風馳 何往不臧 曷維其已
眞聖大王-遽飛睿札 徵赴彤庭 大師 雖猥奉王言 而寧隳祖業 以脩途多梗附表固辭 可謂 天外鶴聲 早達於雞林之畔 人中龍德 難邀於象闕之旁 ▨▨因避煙塵 欻離雲水 投溟州而駐足 託山寺以栖心 千里乂安 一方蘇息 無何 遠聞金海西有福林 忽別此山 言歸南界 及乎達於進禮 暫以踟躕 爰有▨▨進禮城諸軍事金律凞 慕道情深 聞風志切 候於境外 迎入城中 仍葺精廬 諮留法軑 猶如孤兒 之逢慈父 衆病之遇毉王 孝恭大王 特遣政法大德如奐 逈降綸言 遙祈法力 佐紫泥而兼送薰鉢 憑專介而俾披信心 其國主歸依 時人敬仰 皆此類也 豈惟肉身菩薩 遠蒙聖▨▨尊 靑眼律師 頻感群賢之重而已哉 此寺 雖地連山脈 而門倚墻根 大師 以水石探奇 煙霞選勝 驎遊西岫 梟唳舊墟 豈謂 果宜大士之情 深愜神人▨▨ 所以 刱修茅舍 方止葼輿 改號鳳林 重開禪宇 先是 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 鯉庭禀訓 龍闕馳誠 歸仰禪門 助修寶所 大師心憐▨▨ 意有終焉 高演玄宗 廣揚佛道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寡人, 祇膺丕構, 嗣統洪基, 欲資安·遠之風, 期致禹·湯之運. 聞大師-時尊天下, 獨步海隅, 久栖北岳之陰, 潛授東山之法,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 卑辭厚禮, 至切嘉招. 大師謂衆云, “雖在深山, 屬於率土. 況因付囑, 難拒王臣.” 貞明四年冬十月, 忽出松門, 屆于▨輦. 至十一月四日, 寡人, 整其冕服, 稍淨襟懷, 延入蘂宮, 敬邀蘭殿, 特表師資之禮, 恭申鑽仰之儀. 大師, 高拂毳衣, 直昇繩榻, 說理國安民之術, 敷歸僧▨▨之方. 寡人, 喜仰慈顔, 親聞妙旨, 感激而重重避席, 忻歡而一一書紳. 此日, 隨大師上殿者, 八十人, 徒中有上足景質禪師, 仰扣鍾鳴, 潛廻鏡智. 大師, ▨▨橦擊, 聲在舂容, 曉日之暎群山, 淸風之和萬籟, 縱容演法, 偏超空有之邊, 慷慨譚禪, 實出境塵之表, 莫知其極, 誰識其端. 翌日, 遂命百寮, 詣於所止, 同列稱▨, 仍差高品, 上尊號曰, 法膺大師. 此則盡爲師表, 常仰德尊, 恭著鴻名, 以光玄敎.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其後, 大師已歸舊隱, 重啓芳筵, 諭諸學於道灰, 俱傳法要, 援群生於途炭, ▨䞄慈風則必. 忽患微痾, 猶多羸色, 大衆疑入兩楹之夢, 預含雙樹之悲. 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 告衆曰, “諸法皆空, 萬緣俱寂. 言其寄世, 宛若行雲, 汝等, 勤以住持, 愼無悲哭.” 右脅而臥, 示滅於鳳林禪堂. 俗年七十, 僧臘五十. 于時, 天色氛氳, 日光慘澹, 山崩川竭, 草悴樹枯. 山禽於是苦啼, 野獸以之悲吼. 門人等號奉色身, 假隷于寺之北嶺. 寡人, 忽聆遷化, 深惻慟情, 仍遣昭玄僧榮會法師, 先令吊祭. 至于三七, 特差中使, 賚送賻資. 又以贈諡眞鏡大師, 塔名寶月凌空之塔. 大師, 天資惠悟, 嶽降精靈, 懸慈鏡於靈臺, 掛戒珠於識宇. 於是, 隨方弘化, 逐境示慈, 知無不爲, 綽有餘裕. 至於終世, 心牢無瞥起之情, 雖在片時, 體正絶塵勞之染. 傳法弟子, 景質禪師等五百餘人, 皆傳心印, 各保髻珠, 俱栖寶塔之旁, 共守禪林之䦔, 遠陳行狀, 請勒貞珉. 寡人, 才謝凌雲, 學非對▨, 柔翰敢揚其禪德, 菲詞希播其道風, 遽裁熊耳之銘, 焉慙梁武, 追製天台之揭, 不媿隋皇.
其詞云,
釋迦法付大龜氏, 千劫流轉示後來.
心滅法流何日絶, 道存人去幾時迴.
偉矣哲人憂迷路, 生于浮世降聖胎.
慾海波高橫一葦, 邪山路險軫三材.
方忻宴坐銀花發, 忽歎泥洹寶月摧.
霜霑鶴樹悲長悴, 霧暗雞山待一開.
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 建.
門下僧性休, 刊字.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국역]
고 진경대사비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고(故) 국사(國師) 시호 진경대사(眞鏡大師)의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 비명(碑銘)과 서문.
문하승(門下僧)인 행기(幸期)가 왕명[敎]을 받들어 〈비문을〉 쓰고, 문인(門人)인 조청대부(朝請大夫) 전(前)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 : 집사성 차관)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최인연(崔仁渷)이 전액을 쓰다.
내[余 경명왕 : 박승영 917~924]가 〈비문을〉 짓다.
내가 듣건대, 높고 높은 하늘의 모습[天象]이 광활하다는 이름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地儀]이 깊고 그윽하다는 이름을 홀로 일컫지 않는다. 저 선정(禪定)에 들은 상사(上士)와 법을 깨친 진인(眞人) 같은 사람들은 사대(四大)를 초월하여 노닐며 세상을 살피고, 삼단(三端)을 피하여 한가로이 지내며 자연을 즐기다가, 마침내 선백(禪伯)들에게 위엄을 빌려주어 혼란한 시절에 마▨(魔▨)를 일소하게 하고, 이어서 법왕(法王)으로 하여금 태평한 시절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받들게 하여, 자애의 구름이 다시 드리우고 불일(佛日)이 거듭 빛나며, 외도(外道)가 모두 항복하고 천하가 모두 복종하게 한다. 〈또한〉 비인(秘印)을 가지고 심오한 뜻을 드러내며, 그윽한 그물을 들어 참된 가르침[眞宗]을 널리 드러내니, 오직 우리 대사(大師)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이고, 속성은 신(新) 김(金)씨이다.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요, 초발(草拔)의 신성한 후예였는데(팔경역 : 왕조가 시작되어 왕손들이 번창하였으나), 매번 이웃 나라의 군대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귀의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받고 접수(鰈水)의 정기를 타고 났다. 문부(文符)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 ▨▨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의〉 두 원수[二敵]를 완전히 평정하여 토군(兎郡)의 사람들을 길이 편안하게 하였고, 〈진덕왕, 무열왕, 문무왕의〉 세 임금을 잘 받들어 진한(辰韓)의 풍속을 크게 위로하였다. 〈대사의〉 아버지는 배상(盃相)으로, 도덕은 장자와 노자를 높이고 뜻은 적송자(赤松子)와 왕자(王子) 교(喬)를 흠모하였으니, 물과 구름은 그의 한가로이 지냄을 인정하였지만 조정과 재야의 선비들은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어머니 박(朴)씨가 일찍이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가 꿈에 휴▨(休▨)를 얻었는데 나중에 미루어 생각해 보고 임신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비린내 나는 음식을 끊고 몸과 마음을 비웠으며, 가만히 그윽한 신령에 기도하며 지혜로운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대중(大中) 7년(853) 12월 10일에 대사를 낳으니 남다른 모습이 많았으며 얼굴빛은 부드럽고 밝았다. 비단 바지를 입던 어린 시절에도 철부지 같은 마음이 없었고, 이를 갈 나이에는 불사(佛事)를 ▨▨하였으니,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고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
아홉 살에 혜목산(惠目山)으로 곧장 나아가 원감대사(圓鑑大師)를 뵈니, 〈원감〉대사는 〈진경대사에게〉 지혜의 싹이 있음을 알고 절[祇樹]에 머물도록 허락하였다. 나이는 비록 적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정밀함을 숭상하였으니(마음과 뜻이 높고 밝았으니), 노력함에 있어서는 고봉(高鳳)이 공을 미루고(고봉보다 공이 크고, 독서를 열심히 하였고) 민첩함에 있어서는 양오(揚烏)가 명성을 양보할 정도였다. 승▨를 맡아 법당을 떠나지 않았다.
(16세인) 함통(咸通) 9년(868)에 원감대사는 병이 들어 대사를 불러 말하기를, “이 법은 본래 서천(西天)에서 동쪽의 중국으로 왔으며, 한번 꽃이 피자 여섯 잎이 번성하였고, 대대로 이어서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내가 과거에 중국에 유학하여 일찍이 백암(百巖)을 사사하였는데, 백암은 강서(江西)를 이었고 강서는 남악(南嶽)을 계승하였는데, 남악은 곧 조계(曺溪)의 맏아들로 숭령(嵩嶺)의 현손이시다. 비록 신의(信衣)는 전하지 않으나 심인(心印)은 이어받았으니, 멀리 여래(如來)의 가르침을 잇고 가섭(迦葉)의 종지를 크게 열었다. 너에게 마음의 등불로 전하니 나의 부촉을 법신(法信)으로 삼으라.” 하고서, 고요히 말을 마치고 곧 열반[泥洹]에 들었다. 대사는 임종을 지키며 깊이 슬퍼하고 심상(心喪)을 간절하게 하였는데, 스승을 잃은 애통함은 더욱 쌓이고 배움이 끊긴 근심은 더욱 늘었다.
19세에(871년)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서 얼마 후 계율을 지키는 마음[草繫]을 가슴에 품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으니,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일을 따라 두루 돌아다녔다. 명산에 가서 높은 산을 우러러 보고, ▨▨을 찾아가 절경까지 모두 둘러보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대사께서는 비록 이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현관(玄關)을 모두 찾아뵈었으나, 다른 나라까지 순력하여 큰 스님들을 뵙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대사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마(達摩)가 법을 부촉하고 혜가(惠可)가 마음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혜목(惠目)을 찾아뵙고 아름다운 자취를 접하였는데,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捨筏之心]을 가지고 뗏목을 타려는 뜻을 좇으리오”라고 하였다.
문덕(文德)(888년) 초년부터 건녕(乾寧)(898년) 말년 사이에 먼저 송계(松溪)註에서 수행하자, 학인들이 빗방울처럼 모여 들였으며, 잠시 설악(雪嶽)에 머물자 선객(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 간들 좋지 않으며, 어찌 오직 그곳뿐이겠는가.
진성대왕(眞聖大王)께서 급히 편지를 보내 궁궐[彤庭]으로 오라고 불렀다. 대사는 비록 임금의 말씀을 받듦에는 외람되지만 조사(祖師)들의 업(業)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나아갈 길이 많이 막혔다는 이유로(아직 공부할 게 많이 막혔다, 달통하지 못했다. 법력이 부족하다. 38세~44세 사이) 표(表)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가히 하늘 밖 학(鶴)의 소리가 계림(鷄林)의 경계에 일찍 닿았지만, 인간세계에서 용(龍)의 덕을 갖춘 사람을 대궐 문[象闕] 곁으로 부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대사?]는 이로 인해 연기와 먼지[煙塵]를 피하여 홀연히 〈설악을〉 떠나 떠돌다가[雲水] 명주(溟州)에서 발길을 멈추고 산사에 머물며 마음을 깃들였다. 〈이에 명주 지역〉 1,000리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한 지역이 소생한 듯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해(金海)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곧바로 이 산을 떠나 남쪽 경계로 갔다. 진례(進禮)에 이르러 잠시 머물렀는데, 이에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凞)가 〈대사의〉 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깊고 가르침을 들으려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마중하여 성안으로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절을 수리하고 대사의 수레를 이곳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나고 병자가 훌륭한 의사[毉王]를 만난 듯하였다. 효공대왕(孝恭大王)께서는 특별히 정법대덕(政法大德) 여환(如奐)을 보내 멀리서 조서를 내리며 법력을 빌었는데, 조서[紫泥]와 함께 향기로운 발우를 선물하였으며, 특별 사자[專介]를 보내 〈대왕의〉 신심(信心)을 전하였다. 나라의 임금이 귀의하고 당시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름이 모두 이와 같았다. 어찌 육신보살(肉身菩薩)이 멀리서 성▨(聖▨)의 존경을 받고, 청안율사(靑眼律師)가 여러 현자들의 존중함을 자주 입은 정도뿐이겠는가.
〈김율희가 수리한〉 이 절은 비록 땅이 산맥과 이어지고 문은 담장 밑[墻根]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대사는 수석(水石)이 기이하고 〈골짜기의〉 아지랑이가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우는 것 같아서 바로 보살[大士]의 뜻에 마땅하고 신인(神人)의 ▨▨에 깊이 부합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띠 집을 새로 수리하고 수레를 멈추어 머무르며 봉림(鳳林)으로 이름을 바꾸어 선문[禪宇]을 새로 열었다. 이에 앞서 지김해부(知金海府)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은 집[鯉庭]에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서는 〈임금께〉 정성을 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선문에 귀의하여 〈대사를〉 받들며 사찰[寶所]의 수리를 도왔다. 대사는 마음속에 ▨▨을 가련히 여겨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뜻을 가지고서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
과인이 삼가 대업을 받아 〈왕조의〉 큰 기틀을 계승함에, 도안(道安)과 혜원(慧遠)의 기풍을 돕고, 우(禹)와 탕(湯)의 다스림을 이루고자 하였다. 대사가 당시 천하의 존숭을 받고 해우(海隅 신라)에서 독보적 존재로서 북악(北岳 설악산)의 북쪽에 오래 머무르며 동산(東山)의 가르침을 은밀히 전수했다는 것을 듣고서 흥륜사(興輪寺) 상좌(上座)석언림(釋彦琳)과 중사성(中事省) 내양(內養) 김문식(金文式)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 간절히 초청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이르기를, “비록 깊은 산속에 있지만 임금의 땅[率土]에 속한다. 더욱이 〈부처님의〉 부촉(付囑)도 있으니 임금의 사자를 거절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정명(貞明) 4년(918) 겨울 10월에 문득 절 문[松門]을 나서 수도에 이르렀다. 11월 4일에 이르러 과인은 면류관과 예복을 갖추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대사를〉 왕궁[蘂宮]의 난전(蘭殿)으로 공경히 맞이하여 특별히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표하고 숭앙하는 자세를 공손히 나타내었다. 대사는 가사[毳衣]를 높이 휘날리며 곧바로 법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법을 설하고, 승려에 귀의하고 ▨▨할 방책을 펼치셨다. 과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사의 얼굴을 우러르고 오묘한 종지를 친히 들으매, 감격스러워 거듭 자리를 피하고 기쁜 마음으로 〈말씀을〉 낱낱이 옷띠에 받아 적었다. 이날 대사를 따라 전각에 오른 자가 80인인데, 문도 중의 상족(上足)인 경질선사(景質禪師)가 삼가 질문을 하여[扣鍾] 〈대사의〉 온전한 지혜[鏡智]를 가만히 끌어내려 하였고, 대사는 질문[橦擊]을 ▨▨함에 소리가 우렁찼다. 새벽해가 많은 산에 비치고 맑은 바람이 만물의 소리에 화답하듯, 조용히 법을 연설하매 공(空)과 유(有)의 극단[空有之邊]을 모두 초월하고, 분연히 선(禪)을 말씀하심에 속세의 바깥으로 벗어났으니, 누가 그 궁극의 경지를 알겠는가. 다음날 마침내 모든 관료들에게 대사가 머무시는 곳으로 나아가 함께 ▨을 칭하게 하고, 이어서 벼슬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는 곧 온전히 모범[師表]이 되어 항상 존귀한 덕을 우러르며 공손히 큰 이름을 드러내어 심오한 가르침을 빛나게 하려 한 것이었다.
그 후 대사는 곧 예전에 머무시던 곳으로 돌아가, 가르침의 자리를 거듭 열어 죽은 도(道)에 헤매는 여러 학인들을 깨우치고, 법의 요체를 갖추어 전하여 도탄에 빠진 뭇 중생들을 건졌으며, 자애로운 바람을 베푸는 일이라면 반드시 하시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 병색이 완연하였다. 대중들은 곧 돌아가실 것[兩楹之夢]을 알고 미리 열반[雙樹]의 슬픔을 머금었다. 용덕(龍德) 3년(923) 4월 24일 새벽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모든 법은 다 공(空)하며 모든 인연은 다 고요하다. 세상에 살아감이 떠가는 구름과 다름없다. 너희는 힘써 수행하며 삼가고 슬피 울지 말라.”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봉림사 선당(禪堂)에서 입적하였다. 세속의 나이는 70세이고, 승려 나이[僧臘]는 50세였다.
이때에 하늘빛은 흐려지고 태양을 빛을 잃었으며, 산과 내가 무너지고 마르며 풀과 나무가 시들고 말랐다. 산새들은 이에 괴롭게 지저귀고 들짐승은 슬피 울었다. 문인들이 울면서 시신을 받들어 절 북쪽의 언덕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과인은 갑자기 〈대사가〉 입적을 듣고서 깊이 슬퍼하고, 소현승(昭玄僧) 영회법사(榮會法師)를 보내 먼저 조문하게 하고, 3·7일에는 특별히 사자를 보내 부의(賻儀) 물자를 주고 또 시호를 ‘진경대사(眞鏡大師)’, 탑의 이름을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으로 추증하였다.
대사는 하늘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받고 큰 산의 정기를 받았으며, 자애로운 거울을 마음[靈臺]에 걸고 계율의 구슬을 정신[識宇]에 두었다. 이에 사방으로 교화를 펼치고 지역마다 자애를 보였으니, 알고서도 하지 않음이 없어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세상을 마칠 때까지 마음이 굳건하여 잠시도 감정을 일으키지 않고, 비록 잠깐이라도 몸이 단정하여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았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인 경질선사(景質禪師) 등 5백여 인은 모두 심인(心印)을 전하여 각기 계주(髻珠)를 가지고서 다 같이 〈대사의〉 보탑 곁에 머무르며 함께 선문을 지키고 있는데, 멀리서 〈대사의〉 행적을 적어 보내며 비석에 새길 것을 요청하였다.
과인은 재주는 속기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배움은 대▨(對▨)이 아니지만, 여린 붓으로 감히 그 선덕(禪德)을 드러내고 너절한 말로 그 도풍(道風)을 널리 퍼뜨리고자 한다. 웅이(熊耳)의 비명[熊耳之銘]을 본뜬 것이니 어찌 양무제(梁武帝)에 부끄러우며, 천태(天台)의 게송을 따라서 지은 것이니 수나라 황제에 부끄럽지 않으리라.
그 사(詞)는 다음과 같다.
석가가 가섭[大龜氏]에게 법을 부촉하니,
오래도록 전해져 뒷사람에게 보여주었네.
마음은 없어져도 법은 흐르니 언제 끊어지며,
도(道)를 남기고 사람은 떠났으니 언제 돌아올 건가.
위대하도다 철인이여! 길 헤매는 사람들을 걱정하여,
세속에 태어나 성모(聖母)의 태속에 내려오셨네.
욕심의 바다와 높은 파도, 일엽편주로 건너고,
못된 산의 험한 길 삼재(三材) 타고 넘어가네.
흔연히 자리에 앉아 계심에 은색 꽃[銀花]이 피더니,
문득 열반을 노래하니 보월(寶月)이 사라졌네.
서리 젖은 학림(鶴林)에 슬픔은 길고,
안개 짙은 계산(鷄山)에서 크게 걷힐 때 기다리네.
용덕(龍德) 4년(924) 갑신년(甲申年) 4월 1일에 세움.
문하승 성휴(性休)가 새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논주]
(1) 余製 여제 : 내가 짓다.
전문을 정독해 보면, 경명왕 박승영(917~924)이 진경대사의 설법에 깊은 감영을 받은 차에, 상좌인 승려 행기가 올린 행장을 참고하여 손수 지었음을 느낄 수 있고, 사용한 언어와 문장을 통해 박승영이 당시의 불교학과 유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高高天象 非唯占廣闊之名 厚厚地儀 不獨稱幽玄之號 높고 높은 하늘의 모습[天象]이 광활하다는 이름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地儀]이 깊고 그윽하다는 이름을 홀로 일컫지 않는다 : 하늘과 땅이 베푸는 은혜는 만물만사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미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늘과 땅의 품속에서 생로병사 영고성쇠를 영원히 반복한다. 경명왕 박승영의 자연관과 인생관이 함축된 구절로서 그의 깊은 사색과 통찰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색과 통찰은 철학자의 것이지 제왕의 것이 아니다. 신라 말기 삼국이 분립하여 재통일을 다투는 이 긴박한 시대에 철학자적 소양을 갖춘 이가 왕이 되어서는 개인으로나 나라로나 득 될 게 없다. 박승영이 왕이 되지 말고 학자가 되었다면 자질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917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7년 만인 924년에 이 비문을 쓰고 난 후에 훙하였고, 아우인 위응이 경애왕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4년 만인 927년에 포석정에서 견훤의 난에 시해당했으며, 김씨족 김부가 왕위를 이어 경순왕이 되었으나 9년 만인 935년에 신라를 고려 왕건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문약은 난세를 초래하고, 무강은 난세를 극복한다.
(3) 眞人 : 승려가 아니면서 山水에서 수도하는 사람. 도교의 도인, 도사라 할 수도 있지만, 삼국유사의 ‘포산의 두 성인인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聖師와 같은 사람. 또는 자연법칙과 인생법칙을 사유하는 사람. 또는 한국 고유의 풍월도를 추구하는 사람. 924년 당시의 신라에는 불교, 도교, 유교 등 외래 사유체계와 함께 한국인 고유의 자연 숭배를 바탕으로 한 샤머니즘 형 사유체계의 맥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俗姓新金氏 : 흉노족 왕자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 ~ 기원전 86년) 후손들(증손 대)이 신나라(新, 8년 ~ 23년)가 멸망하자 산동성에서 한반도 동부 경주 인근으로 이주하여 김알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주김씨가 있다. 이어서 다른 후손들이 낙동강 하류 지역에 이주하여 6가야를 형성하여 김해김씨를 형성했다. 이 시대는 김알지 계림신화 65년과 김수로왕 신화 42년과 비슷한 연대이다. 두 부족 다 황금을 숭상하는 흉노족 후손이기 때문에 金이란 성을 함께 사용했는데, 금관가야국 왕이 항복하면서 경주김씨와 구별하여 신김씨라고 하였다. 후일에 경주와 김해로 분관하였다.
그런데 이 흉노족을 우리 민족과 별개의 민족으로 봐선 안 된다. 기원 전후부터 형성된 한반도의 소국들은 알타이산맥, 몽골, 카스피해 등 서북방에서 온 씨, 부족들과 시베리아, 북만주, 연해주 등 동북방에서 온 씨, 부족들이 연합한 생활공동체이다. 넓게 보면 모두 흉노족이다. 경주김씨와 김해김씨는 몽골과 산동성 지역에서 살다가 몇 세기 늦게 한반도에 도착한 흉노족이다. 혈연이 한 뿌리이고, 말과 생김새가 같기 때문에 큰 전쟁 없이 서로 융합할 수 있었다.
신라가 532년에 금관가야로부터 항복을 받아 그 왕족을 신라 귀족으로 편입하고, 이어서 순차로 나머지 가야 소국들로부터 항복을 받음으로써 100여 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삼국통일을 도모하는 데 큰 자신이 되었다. 반대로 562년에는 끝까지 저항하는 경북 고령 일대의 대가야를 무참하게 도륙함으로써 복종의 기강을 세웠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쉽게 항복한 이유는, 김수로계 김해김씨 왕족과 김알지계 경주김씨 왕족은 김일제계 흉노족 김씨로서 뿌리가 같고, 거의 같은 시대에 왕망이 세운 신나라가 망하자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와서 경주와 낙동강 유역에 각각 정착했기 때문이다. 금관가야계 왕족의 성이 김씨이기 때문에 통합되고 난 후에 신라 왕족의 성과 구별하기 위해 ’신김씨‘라고 하였다. 금관가야 구형왕의 아들인 김무력이 554년 관산성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이고 대승하여 백제의 군세를 꺾고 군사적 우위를 점하였으며, 668년 증손자인 김유신이 태대각간으로 삼국통일을 완성하였다.
『密陽朴氏世譜上』에 보면 남해왕(4년~23년)의 비 운제왕후가 김씨이고 아우 朴忒의 配도 김씨이다. 또 한 유리왕(24년~57년)의 비 명선왕후가 김씨이다. 이것은 新나라가 쇠약해지고 망하자 철제무기로 무장한 김씨족이 고구려와 백제를 피해 만만한 서라벌 땅으로 들어왔고, 살생을 염려한 박씨족 왕 남해왕과 유리왕이 혼인동맹을 통해 왕권을 지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김알지의 탄생 이전에 이미 초기 신라 왕실과 경주김씨 세력 간에 타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타협의 바탕에는 같은 흉노족 또는 몽골조, 북방이주민이라는 공감대가 있었을 것이다.
김알지가 65년에 계림의 금궤에서 탄생하고, 뚜렷한 이유 없이 석탈해왕의 수양아들이 되고, 왕의 신임을 받아 국상이 되는 것은 김 씨 세력이 신화 창조 작업과 왕권 장악 작업 개시한 때를 상징하는 것이다. 김씨족은 자기들의 조상이 무력을 기반으로 한 집단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박혁거세와 김수로왕의 신화를
차용하여 계림신화를 꾸몄다. 김알지 신화가 허구인 것을 『密陽朴氏世譜上』가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성씨든 이제 신화가 아니라 사실을 근거로 하여 족보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나의 조상인 밀양박씨에게도 해당한다. 박혁거세 신화가 기원전 57년에 있었다고 하는데, 중국은 그보다 500년 전에 공자 등 제자백가가 세상을 횡행하면서 학문을 전파하였다. 이미 천여 년 전에 수십만 군사들이 철제 무기를 들고 벌이는 전쟁이 대륙에 빈번하였다. 그런데도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오고, 김수로왕과 아우들이 함에 든 알에서 나왔으며, 김알지가 항금 궤짝 안에서 옥동자로 나왔다는 신화를 그대로 믿고 주장하는 것은 중국에 대하여 “우리는 5백 년이나 뒤진 미개한 문명이요”라는 고백밖에 안 된다.
(5) 任那 : 고대 한반도에 있던 정치체로 그 실체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자료에는 임나에 관한 기록이 드문데, 본 비문과 강수(强首)가 임나가량(任那加良) 출신임을 전하는 『삼국사기』 열전, 광개토왕이 왜(倭)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러 보낸 군대가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을 함락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광개토왕릉비」 등이 있다. 반면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의 자료에는 임나에 관한 기록이 많은데,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 이외의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의 『한원(翰苑)』에는 임나가 가야와 함께 신라에 병합된 나라로 언급되고 있다. 본 비문의 내용은 [국가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에서 임나가 본래 김해에 있던 금관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의 유력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이 진경대사비문이 만들어진 때가 924년으로서 임나란 명칭이 「광개토왕릉비」에 쓰이고서 약 500여 년 후이다.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등의 명칭은 편의적으로 붙인 것이고, 김수로왕 전설이 만들어진 서기 42년부터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까지 불린 낙동강 중하류 유역과 한반도 동남부 해안의 가야계 소국들의 명칭은 다양하다. 이 비문을 근거로 하면 임나가 곧 김유신 장군의 고국인 금관가야이다.
당시의 사실에 가장 가까운 사료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이다. 그 비에 각자된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을 보면 낙동강 하류 지역의 소국들이 <가야 伽耶>로 불린 때는 400년 이후인 것 같고, 그 이전까지는 <가라 加羅>로 불렸을 것이다. ’임나가라‘와 같이 앞에는 각 지역명이 있고 ’가라‘가 공통으로 붙었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태종무열왕 때의 강수(强首)가 중원소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의 사량(沙梁)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강수(强首)가 임나가량(任那加良) 출신임을 전하는 『삼국사기』 열전은 오류일 수 있다. 맞다면 충주가 임나가량(任那加良)이 되어 <임나>가 충주 지역이 된다. 이 진경대사비문과는 상반된다. 그럼에도 위 [국가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자료는 『삼국사기』 열전을 검증 없이 인용하고 있다.
이어서 ’중국의 『한원(翰苑)』에는 임나가 가야와 함께 신라에 병합된 나라로 언급되고 있다‘고 인용하는데, 중국의 사료라고 하여 전부 믿을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이 현장에 와서 직접 보고 들은 자료가 아니라 바다 건너 수천 리 밖에서 전해오는 풍문으로 들은 것을 기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한원(翰苑)』은 ’임나‘와 ’‘가야’가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 공통 명칭임을 모르고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경대사비문에 뚜렷이 새겨진 글자대로 임나가 금관가야이므로,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의 자료에서 임나가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 이외의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오류이다. 오류가 아니라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만든 위작이다. 『일본서기』의 주장대로 임나가 가야 지역 전체라면, 가야국들의 왕이 일왕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인데, 물론 왜가 침략하여 가야 지역 전체나 일부를 일정 기간 지배했을 수도 있다.
그 사례가 「광개토왕릉비」의 <임나가라 종발성>이다. 대규모로 침략한 왜구가 금관가야 영토의 동쪽 일부인 동래 지역의 종발성을 점령하여 신라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곧 고구려군에게 쫓겨 종발성이 함락되고, 왜구는 일본 열도로 철수하였다. 이렇듯 점령 기간이 길어도 불과 몇 년 동안이었지 수십 년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과장하여 가야 지역 전체를 장기간 지배했으므로 기득권을 가지고, 그 기득권을 후세에 이어받아 한반도를 지배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망발이 아닐 수 없다.
(6) 草拔聖枝 초발(草拔)의 신성한 후예였는데 : 임나의 왕족[任那王族]과 초발의 신성한 후예[草拔聖枝]가 대구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초발은 금관국의 시조와 관련되는 이름으로 생각된다. [한국고대사료DB]
아니다 한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이 틀렸다. ’草拔聖枝‘를 글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草拔‘은 임나왕족이 아니라 ’풀이 돋아난다‘, 즉 ’왕조가 시작되다‘의 뜻이다. 이어서 ’聖枝‘는 ’성스러운 자손들, 즉 왕손이 가지를 치듯이 뻗어나가다“의 뜻이다. ‘왕조가 시작되어 왕손들이 번창하였으나’라 읽어야 한다.
(7) 俾踐僧▨, ▨離法堂 (비천승▨, ▨이법당) : 이 구절은 어린 사미승 (沙彌僧) 시절의 모습이다. ‘俾踐’이란 ‘시키는 대로 실천하다’이며 법당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역할이다, 9살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 고봉처럼 공부하고 양오처럼 시키는 대로 민첩하게 행동한 어린 사미승 진경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俾踐僧▨ ▨離法堂’에서 결락한 첫 글자는 ‘중의 일’ 또는 “중의 역할, 소임‘을 나타내는 ‘業. 任, 務, 事, 律, 規’ 중에서 한 자일 것이고, 둘째 글자는 ‘법당에서 떠나지 않았다’, 즉 법당 청소와 관리가 임무이므로 ‘不’ 자일 것이다.
앞의 글에서 대사의 태몽이 신비하고, 이를 갈 나이에는 불사(佛事)를 하고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었으며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는 미사여구로 승려가 되는 것을 운명으로 표현했으나, 임나 왕족인 신김씨의 후예로서 본거지인 김해 지역이 아니라 아주 먼 경기도 여주에 있는 혜목사 고달사에 9살 나이로 입산한 걸 보면, 이미 오래전에 조상이 김해를 떠나 여주 지역에 이주하였으며, ‘綺紈而未有童心 비단 바지를 입던 어린 시절’은 분식문(粉飾文)일 뿐이고, 사실은 조실부모한 고아였을 것이다.
2025년 1월 27일
開山八畊 박 희 용
박혁거세 69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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