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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능가경』에서는 “마음과 인연을 환히 알지 못하면 두 가지 망상(妄想)이 생기고 마음과 경계(境界)를 환히 알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유마경』에서는 “법은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였고, 다시 세 가지 경을 인용하여 이것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
오조(五祖) 문하의 장엄(莊嚴) 대사는 일생 동안 제자들에게 오직 『유마경』에서 보적 장자(寶積長者)가 부처님을 찬탄한 게송의 끝 네 구절인 “세간에 집착 않음이 마치 연꽃과 같고/언제나 공적(空寂)한 행에 잘 들며/모든 법상(法相)을 통달하여 걸림 없어/공과 같아 의지할 바 없는 이에게 머리 조아립니다”라고 하는 것만 들어 보였다. |
그러자 학인이 물었다. |
“이것은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십니다. 화상 자신의 말씀을 얻고자 합니다.” |
스님이 말하였다. |
“부처님 말씀이 곧 나의 말이요, 나의 말이 곧 부처님 말씀이니라.” |
그러므로 초조(初祖)가 서천에서 와서 처음 선도(禪道)를 행하면서 심인(心印)을 전하려 하였으나 불경을 빌려야 했으므로 『능가경』으로써 증명을 삼아 교문(敎門)의 유래한 바를 알리어, 마침내 바깥 사람은 비방을 쉬고 내학(內學)은 받아 이어져서 후대 자손[祖胤]이 크게 흥성하고 불교의 가르침[玄風]이 널리 미칠 수 있었다. |
그러므로 처음으로 마음을 내어 배움을 시작하는 이로서 아직 스스로 깨닫기 이전에 만약 거룩한 가르침의 바른 종(宗)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지하여 수행하며 도에 나아가겠는가? 설령 스스로가 망령된 소견을 내지 않는다 하여도 역시 모두 삿된 스승을 만나리라. |
이 때문에 이르기를 “나의 눈은 본래 바른 것이었는데 스승 때문에 삿되게 되었다”고 하나니, 서천의 96종(種)의 소견에 집착된 무리가 모두 이런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알라. 나무는 먹줄이 아니면 곧게 되지 아니하고 진리는 가르침이 아니면 원만해지지 않는다. |
위에서와 같이 대략 두세 가지를 인용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곧 큰 선지식(善知識)이요, 만물을 벗어난[物外] 종사(宗師)이며, 참선하는 동산의 기린과 용이요, 조사 문중의 귀감(龜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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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가르침을 보이매 바람이 일고 번개가 걷히며 한 말씀을 드리우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른다. 제왕(帝王)이 스승으로 섬기고 조야(朝野)가 귀명(歸命)하며 총림(叢林)이 법칙으로 취하고 뒤의 학인이 이어받는 것이니, 끝내 자신의 소견을 따르면서 부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
의심을 풀고 거짓이 떠나면 성(性)이 나타나고 종(宗)이 밝아진다. 하나하나가 경전의 글을 널리 인용하여 부처님 뜻을 골고루 나타내지 않음이 없다. 그 까닭에 영원히 후사(後嗣)에게 전해지고 가풍(家風)을 떨어뜨리지 아니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 어찌 이제까지 이어지면서 창성할 수 있었겠는가? 법의 힘은 이와 같아서 증험은 헛된 것이 아니다. |
또 만약 불승(佛乘)을 연구하고 보장(寶藏)을 헤쳐 찾으려면, 낱낱이 모름지기 사라져 자기에게로 돌아가게 하고 말마다 참 마음에 명합되게 해야 한다. 다만 뜻 위의 글에 집착하여 말만을 따라 소견을 내지 말고 곧장 설명 끝의 뜻을 더듬어서 본래 근원에 계합하여야 된다. 그러면 스승이 없는 지혜[無師智]가 앞에 나타나고 천진(天眞)의 도가 어두워지지 아니하리니,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이 곧 마음이 자성(自性)임을 알면 지혜 몸을 성취하되 다른 이로 말미암아 깨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므로 언교[敎]는 도를 돕는 힘이 있음을 알라. 처음 마음 낸 이가 어찌 잠깐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자세하게 살피면 법의 이익이 그지없다. 그래서 찾아 책으로 엮어 모았다. |
또 종지(宗旨)를 논한 것이 모두 돈기(頓機)에 머무를 뿐이니, 마치 해가 뜨면 높은 산을 비추고 빠른 말이 채찍의 그림자를 보고 달리는 것과 같다. 그 까닭에 단하(丹霞) 화상이 이르기를 “서로 만나면 집어 내지 아니하여도 뜻을 들면 문득 안다”라고 했으나, 지금 이 종경(宗鏡)에서는 오히려 뜻을 드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문득 스스로 알 것이다. |
그러므로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는 “뚜렷이 밝고 환히 아는 것은 마음의 생각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
눈썹을 치키고 눈을 굴리면 이는 벌써 어긋난 것이니, 선덕(先德)의 게송에 “이는 곧 오히려 글귀를 더함이요/눈을 굴리면 곧 어긋난다./만약 조계(曹谿)의 뜻[旨]을 물으면/다시는 눈썹 치킴을 기다리지 아니한다”라고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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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과 같다. |
이제 불승(佛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실로 아직 알지 못하는 이를 위하여 임시 종경(宗鏡)으로써 참 마음을 돕고 드러낸다. 비록 글과 말을 걸어 놓았으나 묘한 뜻이 여기에 있으므로 아래로 중근기와 하근기를 거두어서 뭇 근기에게 다 미치도록 하여 다만 그 사람 각자에게 자기 이익을 돕도록 맡길 뿐이다. |
백 개의 하천이 비록 넘친다 하나 어찌 큰 바다가 널리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다섯의 큰 산이 스스로 높지마는 태양이 널리 비추는 것을 장애하지 아니한다. |
근기(根機)도 같지 않고 즐기는 것과 하려는 것도 같지 않으며 네 문[四門]에 들어가는 곳도 비록 다르기는 하나, 하나의 참된 소견을 보는 것에는 구별이 없다. 마치 새를 잡는 이가 한 코에 걸려들게 하되 한 코로써 그물이 될 수 없고 나라를 다스리는 이의 공(功)이 한 사람에게 있되 한 사람으로써 나라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
저 『내덕론(內德論)』에서 이르기를 “한 방울의 물로는 국을 끓이지 못하고, 한 개의 나무로는 방을 만들지 못하며, 한 벌의 옷으로는 뭇 사람 몸에 맞추지 못하고, 한 개의 약으로는 서로 다른 병을 고치지 못하며, 하나의 채색으로는 무늬 놓은 수가 될 수 없고, 한 소리로는 거문고와 비파를 고르지 못하며, 한마디 말로는 뭇 선행을 권하지 못하고, 한 가지 계율로는 많은 과실을 막지 못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어찌 점돈(漸頓)의 다름을 괴상히 여기어 법의 문을 전일(專一)하게 하려고 할 수 있겠는가? |
때문에 이르기를 “한 사람을 위하는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도 그러하고 많은 이들을 위하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도 그러하거늘, 어찌 하열한 이해[劣解]를 가진 어리석은 사람이 내는 국집된 소견과 같겠는가? 나의 이 걸림이 없는 넓고 큰 법의 문은, 마치 허공이 모양은 아니면서 모든 모양이 떨쳐 드러남을 거역하지 않는 것 같고 법성(法性)이 몸은 없으면서 모든 몸이 단박에 나타남을 장애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모름지기 6상의 이치[六相義]로써 모두 포섭하여야 단상(斷常)의 소견이 비로소 녹고, 10현의 문[十玄門]으로써 막힘없이 통하여야 거취(去取)의 망정(妄情)이 비로소 끊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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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약 실로 하나를 들어도 천을 깨치는 큰 총지(總持)를 얻게 된다면, 일부러 언어[言詮]를 빌어서 수고로이 해석함이 없으리라. 배와 뗏목은 미혹한 이 나루를 건네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요, 길잡이는 길 잃는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
모든 언어를 꿰뚫고 원종(圓宗)에서 보이고자 하는 것은, 그 모두가 문자(文字)의 성품을 떠나는 것이 곧 해탈임을 모르고, 일체제법(一切諸法)의 진실한 성품을 마음 밖에서 얻고자 문자를 세우는 사람에게, 도저히 문자로서 대치(對治)하여 그 진실을 보이는 것이다. |
만약 모든 법의 근원을 깨치면 곧 문자나 실 털끝만큼의 나타남도 보지 않으며, 온갖 모든 법이 바로 마음 자성임을 비로소 알면 대경[境]과 지혜가 막힘없이 통하고 색(色)과 공이 함께 없어진다. 이 뚜렷이 밝은 끝을 친히 증득하게 되어야 이 한 법의 평등한 때[時]에 든다. |
또 무슨 교(敎)이기 때문에 떠나야 하고 무슨 조도(祖道)이기 때문에 중히 여겨야 하며, 무슨 법이 돈(頓)이어서 취하여야 하고, 무슨 법이 점(漸)이어서 버려야 되는가? 이는 모두가 식심(識心)으로 멋대로 분별을 내는 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
그 까닭에 조사와 부처님이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은밀하게 권도의 문[權門]을 펴시고 널리 교승(敎乘)의 방편을 갖추어 회득(會得)하게 하나니, 갓 견성(見性)한 그 자리에서 무심(無心)해지면 이에 약과 병이 함께 소멸되고 교와 관[敎觀]이 같이 쉬게 된다. |
『능가경(楞伽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모든 천승(天乘) 및 범승(梵乘)과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이/모든 부처의 여래승(如來乘)이니,/나는 이 모든 승(乘)과/유심(有心)을 굴리는 것까지 설명했지만/모든 승(乘)이란 구경(究竟)이 아니니라./만약 그의 마음 소멸하고 다하여/탈 것과 그리고 태울 이가 없으면/승(乘)을 세울 것이 없어지므로/나는 일승(一乘)이라 설명하겠지만/중생들을 이끌어 안내하려고/분별하여 모든 승(乘)을 말하느니라”고 하셨다. |
때문에 선덕이 이르기를 “하나의 흐림[瞖]이 눈에 있으면 천 송이 꽃이 허공을 어지럽히고, 하나의 망령이 마음에 있으면 항하의 모래[恒沙]만큼 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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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고 죽느니라”고 했다. |
흐림이 없어지면 꽃이 다하고 망령이 사라지면 참됨[眞]을 증득하며, 병이 나으면 약이 없어지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남는다. 신단(神丹)은 아홉 번을 굽고 무쇠를 별러 황금이 되듯 지극한 진리의 한 마디 말씀은 범인(凡人)을 바꾸어 성인을 이룬다. 미친 마음이 쉬지 않다가 쉬어버리면 그대로 보리(菩提)이며 거울이 깨끗하고 마음이 밝아지면 본래 이것이 부처니라. |
[문] 위에서 드러낸 것으로 이미 대의(大意)를 알았거늘, 무엇 때문에 아래에서 다시 널리 열며 풀이하는가? |
[답] 상근(上根)과 영리한 지혜는 전생에 익혔는지라 태어나면서부터 알아서 겨우 제목의 종(宗)이라는 한 글자만 보아도 벌써 부처의 지혜 바다 안에 온전히 들면서 섬세한 의심까지 영원히 끊고 단박에 큰 뜻을 밝히므로 곧 한 마디 말이 거의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그를 포섭하여 남는 것이 없다. |
만약 바로 1백 권의 끝까지 보고 항하 모래만큼 많은 뜻에 이르면 용궁(龍宮)의 보장(寶藏)과 축령(鷲嶺)의 금문(金文)도 설명은 다르나 다른 길이 아니다. |
그를 펴면 법계(法界)에 두루 하며 앞은 생략되고 뒤는 자세하나 이는 오직 한 마음일 뿐이다. 근본은 말고[本卷] 끝을 펴도[末舒] 모두가 동일한 경지요, 끝내 다른 뜻이 없고 막힘이 있어도 앞의 종(宗)이다. |
도무지 뜻이 미혹해서 망령되이 취사(取捨)를 일으켜 종이와 먹과 문자를 보고 책이 많은 것만을 싫어하며 고요하고 묵묵히 말 없는 것에 집착하여 요약된 것만을 기뻐한다면, 이는 모두가 마음이 미혹해서 대경을 따르며 깨달음을 저버리고 티끌에 합하는 것이다. |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의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하나와 많음[一多]이 일어나는 곳을 통달하지 못하여 치우치게 국집된 소견을 내면서 다문(多門)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소승(小乘)이 법공(法空)을 두려워하는 것 같고 파순(波旬)이 뭇 선행을 조심하는 것과 같다. |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을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든 모양을 따라 굴리면서 있음과 없음[有無]에 떨어지는 것이니,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대열반의 한 글자와 한 글귀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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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글자라는 모양을 짓지 않고 글귀라는 모양을 짓지 않고 듣는다는 모양을 짓지 않고 부처라는 모양을 짓지 않고 설명한다는 모양을 짓지 않으면, 이와 같이 되는 이치를 모양 없음의 모양[無相相]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
해석하건대 만약 문자에 나아가서[卽]모양 없음[無相]이라 하면 이는 상견(常見)이요, 만약 문자를 여의고[離] 모양 없음이라 하면 이는 단견(斷見)이다. 또 만약 모양 있음의 모양[有相相]에 집착하면 이것도 상견이요, 만약 모양 없음의 모양에 집착하면 이것도 단견이다. 다만, 즉(卽)ㆍ이(離)ㆍ단(斷)ㆍ상(常)의 사구백비(四句百非)의 온갖 소견들이 없어져야만 그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 |
종종경(宗鏡)에 드는 때가 친히 나타나게 되면, 무슨 문언(文言)과 식지(識智)로 설명하고 기술할 수가 있겠는가? 그 까닭에 선덕이 이르기를 “만약 경을 찾아 성품을 안다면 진여(眞如)를 들을 필요 없거니와/만약 법을 계족산(鷄足山)에서 찾는다면 산간의 가섭(迦葉)에게 물으라. 대사(大士)는 옷을 가지고 이 산에 있거니와/무정(無情)은 첫째 되기를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하다면 이는 곧 어찌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마음을 운용하여 문자와 글귀 뜻의 이해를 짓겠는가? |
만약 종(宗)에 밝고 성(性)에 통달된 이면 비록 널리 헤치고 찾는다손 치더라도 오히려 한 글자의 모양도 보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언어의 이해를 짓지 않으리라. 마음이 미혹해서 사물[物]을 세우는 이만이 종이와 먹이라는 소견을 낼 것이다. |
때문에 『신심명(信心銘)』에서는 “6진(塵)은 나쁘지 않아 도리어 정각(正覺)과 같나니,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無爲]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가 속박한다”고 했다. |
이와 같이 통달하면 6진이 모두가 이는 참 종[眞宗]이요, 만 가지 법이 묘한 진리[妙理] 아님이 없다. 어찌하여 관견(管見)에게 국집하여 큰 뜻에 미혹할 것이며, 어찌 모든 부처님의 광대한 경계와 보살의 작용(作用)의 문을 알겠는가? |
그 까닭에 큰 바다의 용왕이 십천(十千) 가지의 질문[問]을 두었고, 석가문불이 8만 가지의 고달픈 인생의 문을 열었으며, 보혜 보살(普慧菩薩)이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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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가지의 의심[疑]을 말하였고, 보현 대사(普賢大士)가 2천 가지의 요설변(樂設辯)으로 대답했다. |
『화엄경』의 보안법문(普眼法門)에서 “가령 어떤 사람이 큰 바다 만큼의 먹과 수미산 더미의 붓으로써 이 보안 법문의 1품(品) 중에서 1문(門)을, 1[문]중에서 1법(法)을, 1법 중에서 1의(義)를, 1의 중에서 1구(句)를 베껴 쓰려 하여도 그 조그마한 부분조차 할 수 없거늘 하물며 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과 같다. |
또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깨달아 아는 바의 온갖 법은 마치 대지(大地)로 인하여 초목들을 나게 하는 것과 같고,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펴 말한 바의 것은 마치 손 안의 풀 잎사귀와 같다’고 하셨다”라고 한 것과 같다. |
다만 이미 말한 법의 가르침은 용궁에 가득 차 있을 뿐이다. |
용수(龍樹) 보살이 인간 세상에 나와 있는 1백 낙차의 분량을 잠깐 보았는데 서천(西天)에 있는 것은 그것의 백 분의 1도 못되고 동쪽 땅에서 번역된 것은 실로 말할 거리조차 못되거늘, 하물며 아직 말씀하지 못한 바의 법이겠는가? |
이야말로 그지없는 미묘한 뜻이라 얕은 지혜로써는 알 바가 아니다. 성기(性起) 법문을 어떻게 이해가 하열한 이로서 볼 수 있겠는가?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헤아리며 우물 안 개구리가 어찌 넓고 푸른 바다의 깊음을 알겠는가? 마치 사자의 큰 울음을 너구리로서는 낼 수 없는 것과 같고, 향상(香象)이 졌던 짐을 나귀로서는 이겨낼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비사문(毘沙門)의 보물이 가난한 이와는 같을 수 없는 것과 같고, 금시조(金翅鳥)가 나는 것을 까마귀로서는 미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오직 망정에만 의지해서 소견을 일으키며 사물을 쫓으면서 뜻이 옮겨질 뿐이다. |
혹은 존재[有]를 말하면서 공(空)을 관계하지도 아니하고, 혹은 공을 말하면서 존재를 겸하지도 아니한다. 혹은 간략함[略]을 말하면서 많음 밖의 하나가 되기도 하고, 혹은 자세함[廣]을 세우면서 하나 밖의 많은 것이 되기도 한다. 혹은 침묵을 여의면서 말에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말을 여의면서 침묵을 구하기도 한다. 혹은 사(事) 밖의 이(理)에 의거하기도 하고 혹은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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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의 사에 집착하기도 한다. |
자못 자재한 이 원종(圓宗)을 깨치지 못하면, 자세함은 펴도 많은 것이 아니어서 이는 바로 하나 안의 많은 것이요, 간략함을 드러내도 하나가 아니어서 이는 바로 많은 것 안의 하나이다. 공을 말하되 아주 없지[斷] 않아서 이는 곧 존재의 공이요, 존재를 논하되 항상하지[常] 않아서 이는 곧 공의 존재이다. |
혹은 설명이 있되 역시 이는 침묵 속의 설명이 되기도 하고, 혹은 설명이 없되 역시 이는 설명 속의 침묵이 되기도 한다. 혹은 이사(理事)는 상즉(相卽)하기도 한다. |
또한 이(理)는 바로 사(事)를 이루는 이(理)요, 이 사(事)는 바로 이(理)를 드러내는 사(事)가 되기도 한다. 혹은 이(理)와 왜냐 하면 일여(一如)로써 이여(二如)가 없는 참된 성품이 언제나 어울리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혹은 사(事)와 사(事)가 상주했다는 것도 옳다. 왜냐 하면 이는 온전한 이(理)의 사(事)로서 하나하나가 걸림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혹은 이사(理事)가 다 아닌 것은, 곧 또한 온전한 사(事)의 이(理)로되 사(事)의 소의(所依)가 아니고 능의(能依)가 아니어서 진제(眞諦)가 숨지 않았기 때문이요, 온전한 이(理)의 사(事)로되 이(理)의 능의가 아니고 소의가 아니어서 속제(俗諦)를 깨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러하다면 존재하고 없어짐이 하나의 즈음[際]이요, 숨음과 드러남이 같은 때이다. 마치 보안(普眼)의 법문을 밝히는 것과 같아서 모두 이는 진리 안의 이치요, 대천(大千)의 경권(經卷)과 같아서 마음 밖의 글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
때문에 경에 말씀하기를 “하나의 법이 능히 한량없는 이치를 낸다”고 하셨다. 이는 성문과 연각으로서 알 바가 아니요, 단공(但空)의 조화를 저버리는 설명과 편고(偏枯)의 결정된 소견과는 같지 아니하다. |
이제 이 그지없는 미묘한 뜻으로 하나의 법을 드러내서 권속들이 따라 생기고 원만한 성종(性宗)으로 하나의 문을 들어서 모든 문(門)이 널리 모인다. 순일하지도 않고 잡다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은 아니다. 마치 다섯 가지 맛으로 그 국을 조화시키고 여러 가지 채색으로 그 수(繡)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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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며 뭇 보물로 그 광을 이루고 백 가지 약으로 그 환(丸)을 만드는 것과 같다. |
가와 겉이 막힘없이 통하고 뜻과 맛이 두루 갖추며, 은밀함을 찾고 미묘함을 들춰내어 종경(宗鐘) 안의 것을 다하며,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뒤섞여 녹고 원인과 결과가 걸림이 없으며, 인아(人我)와 법아(法我)가 둘이 없고 처음과 뒤가 같은 때이다. |
한 문을 들면 모두가 그지없는 법계(法界)를 뚜렷이 껴잡아서 안도 아니요 바깥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도 아니다. 그를 펴면 거쳐 들어감이 겹겹이요, 그를 말면 참 문이 고요하고 고요하다. |
『화엄경』에서는“사자좌(師子座)의 장엄구(莊嚴具) 안에서 각각 한 부처님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보살의 몸이 구름같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의보ㆍ정보ㆍ인아ㆍ법아가 걸림이 없는 것이다. 또 “부처님의 눈썹 사이에서는 승음등불(勝音等佛)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보살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원인ㆍ결과ㆍ처음ㆍ뒤가 걸림이 없는 것이다. 내지 세계 국토의 작은 티끌에도 각각 그지없는 지혜와 덕이 갖추어져 있고, 털구멍의 몸 부분에도 낱낱이 광대한 법문을 껴잡아 들인다. |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기이하고 생각하기 어려운가? 이것은 한 마음이 융합하면 곧 본래 그런 것이다. 요점을 들어 말하면 온갖 그지없는 차별된 부처 일이 모두가 모양 없음의 참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서 존재할 뿐이다. |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씀하기를 “부처는 매우 깊은 참 법성(法性)에 머무르고/적멸(寂滅)하고 모양 없어 허공과 같되/제일의 진실 이치 안에서/갖가지 행할 바의 일을 나투어 보인다./하는 일은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니/다 법성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된다./모양과 모양 없음이 차별 없나니/구경(究竟)에 들어야 모두 모양이 없다”고 하셨다. |
또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곧 모든 삼마지(三摩地)는/대사(大師)께서 말씀하되 마음이라 하셨다./마음의 채색으로 그리기 때문이니/마치 짓는 바의 일들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범인과 성인이 지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는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
이 한 생각의 마음이 찰나(刹那) 동안 일어나는 때에 곧 3성(性)과 3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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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性)의 여섯 가지 이치[六義]가 갖추어진다. 한 생각의 마음은 바로 연기(緣起)의 법이요 바로 의타기(依他起)이며, 뜻에 실체가 있다고 헤아리면 곧 이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바탕이며, 본래 공하고 고요하면 곧 원성(圓成)이다. 곧 3성에 의하여 3무성을 설명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 이치가 갖추어진다. |
만약 한 생각의 마음이 일어나면 이 여섯 가지 이치가 갖추어지며 곧 온갖 법이 갖추어진다. 온갖 진제ㆍ속제며 만 가지 법은 3성과 3무성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
『법성론(法性論)』에서 이르기를 “일어나고 사라짐이 있는 것은 모두가 성(性)이 아니다. 일어남에도 일어남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비록 일어난다 하더라도 항상 하지는[常] 아니하다. 사라짐에도 사라짐의 성품이 없으므로 비록 사라진다 하더라도 아주 없지는[斷] 아니하다. 만약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네 가지 소견[四見]의 그물에 빠지게 된다”라고 했다. |
또 이르기를 “상(相)을 찾으면서 성(性)을 추구하면 모든 법의 무성(無性)을 보며, 성을 찾으면서 상을 추구하면 모든 법의 무상(無相)을 본다. 그러므로 성과 상을 서로 추구하면 모두가 다 성품이 없거니와, 만약 성품이 있다고 고집하면 네 가지 소견의 사면 숲에 떨어진다. 만약 성품이 공한 것을 환히 알면 한 마음의 바른 길에 돌아간다”고 했다. |
때문에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스스로가 깊이 자성(自性)이 없는 진실한 법에 들어가며,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자성이 없는 진실한 법에 들게 하면 마음이 안온하게 된다”고 하셨다. 이로써 미묘하게 통달하여야 비로소 이 종(宗)에 들며, 곧 물건마다[物物] 진리에 명합하고 말마다[言言] 뜻에 계합한다. |
만약 아직 친히 살피지 못하고 뚜렷한 기연(機緣)이 발생되지 않았다면 말하게 되어도 잃게 된다. 어찌 4구(句)로써 취하여 6정(情)으로 알 바이겠는가? 다만 조사의 가르침과 아울러 정혜(定慧)의 쌍조(雙照)를 베풀며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허물이 없을 뿐이다. |
자기의 앎을 굳게 고집하여 믿지 않음이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장애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다른 이가 배우는 길을 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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