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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가 미국으로 가려고 탄 배가 항해 중 침몰직전의 위급한 상황을 만납니다. 그때 미국 인디안에게 선교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가는 자신은, 지금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데, 한 쪽 구석에서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찬송을 부르고, 평안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들이 바로 모라비안 교도였습니다.
웨슬리는 미국선교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모라비안에게 많은 영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 모라비안은 진젠돌프 백작이 이끌었는데, 다양한 교파적 배경을 초월하여, 하나 된 교회생활을 시도했고, 적극적으로 선교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은 그들의 찬송이 매우 깊은 영성과 품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와 모라비안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요? 그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웨슬리는 신대륙의 조지아(Georgia) 주에서 선교사역을 하기 위하여, 1735년 10월에 런던을 떠났다. 대서양을 횡단하던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하기 약 10일 전인, 1736년 1월 25일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됐다. 이때 웨슬리는 그런 형편에서도 변함없이 평안히 기도와 찬송을 하면서, 배 안에 있는 궂은 일을 불평없이 감당하는 무리를 보았는데, 그들이 바로 영국을 출발할 때부터 함께 하였던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웨슬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하였으며, 동시에 그와는 달리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에게서 큰 충격을 받았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독일의 경건주의 전통을 따르는 이들로서, 독일을 떠나 웨슬리처럼 조지아 주로 가고 있었다. 웨슬리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들 안에 있는 깊은 신앙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들이 신학적으로 영국국교회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모라비안(Moravian)운동은 교회사에서 잘 알려진 운동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그들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라는 점과, 현대 선교운동의 선구자라는 점과, 교회연합을 강조하였다는 점등 이다. 특히 그 운동의 지도자 진젠도르프의 신앙과 열심, 그리고 헌신은 그리스도교 지도자의 훌륭한 모델로서 비쳐지고 있다. 모라비안 운동이 교회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이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모라비안 운동의 그런 점을 가리켜 "유럽선교에 활력 있는 누룩"이라 하였고, 비숍 하세(Bishop Hasse)는 말하기를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의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죠지아에서 그들의 활동은 좋은 반응을 보였고, 마침내 더 많은 선교사를 죠지아로 파송하도록 결정하였다. 1737년 8월, 26명이 헤른후트를 떠나 런던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런던에서 죠지아로 가는 배를 잡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시몬즈(Simmonds)라는 배로 대서양을 횡단하게 되었다. 그 배에는 당시 죠지아 총독 오글톱의 초청을 받고 죠지아로 가는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도 승선을 했는데, 바로 이 사건이 18세기 영국교회의 부흥운동을 가져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배에는 영국인 벤자민 잉함(Benjamin Ingham)과 찰스 델라모트(Charles Delamotte)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도 후에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우연한 만남인 것 같은 사건을 통하여, 사람을 예정된 축복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웨슬레가 그 후에 모라비안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연결되는 것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3개월이란 긴 항해를 통하여,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였다. 잉함 목사는 후에 미국에 돌아와서, 형제단의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어 활약하였다.
요한 웨슬리의 일기 - 1.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만남.
* 세상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미국 인디언 선교사로 떠나는 요한 웨슬레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라비안 교도와 독일인 목사를 만나 자신의 신앙에 뭔가 부족한 것을 깨달음.
1735년 10월 14일 화
...우리의 모국을 떠나는 목적이(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축복도 우리에게는 이미 내려 주셨기에)
궁핍을 모면하려는 것도 아니요, 오물이나 쓰레기 같은 재산이나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영혼을 구하는 것,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살기 위함이다.
10월 17일 금
...일요일에는 날씨가 좋고 바람이 잔잔해서 아침예배를 뒤 갑판에서 드렸다.
나는 처음으로 준비 없이 즉석 설교를 하고 6~7명 되는 신도들에게 성만찬을 집례하였다.
10월 20일 월
...지극히 작은 일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믿으면서 우리는 전적으로 고기와 포도주를 멀리하고
쌀밥과 빵만 먹으면서 채식을 하였다.
1736년 1월 23일 금
저녁에 또다시 폭풍이 시작되었다. 아침에는 더욱 심해져서 배가 곤두박칠치게 되었다.
"나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죽지 않으려고 안달을 했기 때문이다...
1월 25일 주일
정오쯤 되어서 우리가 세 번째 맞는 폭풍이 시작되었고, 4시가 되자 폭풍은 전보다 더 맹렬하였다. 7시에 나는 독일 사람들을 찾아갔다. 얼마 안 있어서 나는 그들의 행동이 매우 신중함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여객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을 계속하여 그들의 침착함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어떤 영국 사람도 그런 일을 감히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그런 일이 그들의 자랑스러운 마음에 유익하다든가 그들의 구세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더 많은 은총을 베푸셨다는 말을 하면서 어떤 보수도 바라지 않고 받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봉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온유한 마음을 보여주셨는데 어떤 상처를 받아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만일 떠밀리거나 얻어맞거나 내동댕이쳐져도 그들은 다시 일어나서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불평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제 그들이 정말 두려운 마음에서 뿐만 아니라 교만과 복수와 복수심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았는가를 시험할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예배가 시작되면서 시편이 한참 낭송되고 있는데 파도가 덮쳐서 큰 돛대가 산산조각이 나고 배를 뒤덮어 갑판과 갑판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큰 바다 깊은 물이 우리를 다 삼켜 버릴 것 같았다. 영국 사람 사이에서는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독일 사람들은 조용히 계속하여 시편을 낭송하였다. 나는 후에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두렵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는 "아니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당신네의 부인들과 어린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부드럽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니오, 우리네 부인들과 어린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2월 6일 금
오글소프 씨가 독일인 교회 목사 슈팡엔베르크 씨와 함께 사반나로부터 돌아왔다.
나는 곧 그의 심령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알고 내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그에게 충고를 부탁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내 형제여, 나는 먼저 당신에게 한 두 가지 물어야겠습니다.
당신 자신 속에 증언이 있습니까?" 나는 놀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는 그것을 관찰하고 또 물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나는 잠시 멈추었다가 "나는 그분이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압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압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을 것으로 희망합니다."
그는 다만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 자신을 압니까?"
나는 "압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빈말 같아서 두려웠다.
모라비안 교도에 대해
감동적인 모라비안 교도들의 이야기
1. 설립배경
개혁가 죤 후스- 교황의 면죄부 판매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공격.
교회의 머리가 교황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며,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주의자며
교황은 그를이 단으로 몰아 1415년 화형.
1457년 핍박을 피해 성에 숨어들어가 신약성경을 모델로 복음적인 신앙 공동체 형제회 설립. 모라비안교회 전신
2. 핍박받는 모라비안
카톨릭은 이 모라비아의 후수파인 형제회를 잔인하게 핍박.
형제들은 재산몰수와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해 추위와 굶주림으로 굶어 죽어갔지만 신앙을 결코 포기치 않았다.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견고해졌다.
또한 그들은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웠는데, 그 나라 최상의 학문은 그들로부터 나왔다.
1558년 모라비안 교회에 호의적인 왕들로 60년 동안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갖게 되었다.
이때에 필사적으로 붙들었던 순수 복음신앙을 버림으로 영적인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카톨릭과 모라비안 교회의 30년 전쟁이 치뤄졌고, 1620년 모라비안 교회가 패배해 다시 핍박을 받는다.
3, 헌신적 지지자 진젠도르프와의 만남
1722년 오랜 핍박으로 거의 전멸하고 남은 자들이 진젠도르프의 땅에 정착하게 되었고 거주와 생활에 많은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진젠도르프는 이 유서 깊은 교회를 재조직하고,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를 결성,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모라비안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으며, 청년 남녀들을 가정으로부터 분리시켜 엄격한 감독 하에 신앙 훈련을 시켰다.
4 모라비안의 선교활동
1731년 진젠도르프는 덴마크 대관식 때 서인도에서 온 한 흑인과 그린랜드 출신인 두 에스키모인을 만났는데, 선교사 파견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 계기로 모라비안 교회는 소극적인 경건 생활에서 적극적인 세계 선교로 방향을 전환하고.
선교활동 초기의 모라비안들은 겨우 200명 가량의 피난민들이었지만 해외로 1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선교의 확산은 계속되었으며 1930년까지 세계 14나라에 3,000여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19세기 유럽에는 15개의 선교 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5. 끊임없는 선교의 열정과 영향
진젠도르크는 주변의 시기로 1736년에 고향인 작센으로부터 추방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라비안의 선교 사역을 통해 변화되었다.
초기에 루터교회의 영향력 안에 있었지만 1760년 진젠도르프 사후 완전한 결별을 한다
영국 안에 15개의 모라비안 형제단이 있었으며
말씀에 대한 경외감, 구원의 확신, 그리고 믿음에 근거한 분명한 신앙 간증으로
영국의 복음적 각성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는 런던의 훼터 레인(Fetter Lane)에 있는 모라비아 교회에 가입하였다...
존웨슬레가 이들과 결별한건 그들의 지나친 경건주의와 정숙주의 때문이다..
구원에 대한 참회 체험 존 웨슬레만 아니라 찰스 웨슬레 그리고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까닭에 모라비안 형제단의 가치는 그들 자체 운동에 의한 파급 효과로 인해 세계 선교열을 일으킨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미친 영향으로 인해 그 파장이 길게 연결된 것이다.
6. 모라비안교회특징.
선교로서의 전체 교회로, 지역교구의 교인보다 선교사가 3배나 더 많은 특수한 교회며,
다종 다양한 각계 각층의 귀족, 법원의 사람, 대학생, 교수, 흑인, 백인을 가리지 않는
전세계인 모두가 그들의 전도 대상들이다.
핍박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선교로 많은수의 선교사들이 순교를 당했다.
자립선교로 선교사들은 자신의 기술과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먹고살며 선교하는 정책을 펼쳤다..
의료사업이나 교육선교사업 또는 꼭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각 교회별로 선교기금을 모아 선교지원을 하였고
선교사로 파송하는데 많은 돈이 들지 않았기에 그들이 필요한 곳에 적절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할 수 있었다.
세상의 평범한 교회가 아니라 참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로 부터 비롯된 교회 안의 교회며
'세상의 소금'이라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나아오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슬로건을 내걸어,
모라비안 교회는 부흥을 맞고 루터교회와 결별의 계기가 된다.
경건주의는 개인적이고도 체험적인 것으로써의 종교, 인격적인 참여에 의한 삶의 증거,
하나님 말씀에 의한 능력이 나타나는 생활, 영혼 없는 제도, 생명력 없는 몸,
내용 없는 형식 등에 대한 저항등이 전체에 흐르는 핵심을 이룬다..
7. 모라비안의 선교지역과 교세 현재의 모습
1732년 서인도지역을 처음 파송하고 후에 1735년에는 그린랜드, 1735년 수리남(Sirinam),1737년 아프리카, 1740년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실론(Ceylon), 1742년 중국, 1747년에는 페르시아, 1754년 자메이카, 1756년 안티구아(Antigua)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진젤로프가 죽은1760년 당시엔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약 6,125명의 선교사가 활동했다. 그의 사후에도 선교사업은 지속된다.
진젤로프 사후 모라비안 교회는 많은 수의 교세를 자랑한 적도 없고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숫자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지는 못하였다.
19세기를 정점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핍박이 없는 평화에 신앙의 순수성을 잃고
지도층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민주적이되어서 그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다.
하지만 이들이 벌인세계 선교사와 현대교회에 끼친 영향은 막대 하였다...이
들영향으로 대서양 연안 지역에 모라비안교도와 국가가많다
이들의 선교사역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작은 교회는 믿음과 사랑으로 계속 나아가 개신교들이 200년 동안 한 것보다 20년 동안에 더 많은 선교를 하였다.”
이같은 탁월한 선교사역을 성취한 형제들의 특징은 단순 소박하고 성령을 따라 경건한 삶을 영위하며,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한 데 있다.
그리고 그들은 형제애를 강조하며, 기도에 전심으로 애썼다. 또
한 그들은 많은 경우에 팀으로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반면 남아 있는 성도들은 가정적으로 그들을 후원하는데 힘썼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당시, 카톨릭의 영아세례에 반대하여 '침례는 자신이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므로 영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모라비안 운동이 일어났었죠.
하지만 당시 루터파는 영아세례를 인정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 루터가 카톨릭 신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카톨릭의 전통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답니다. - 모라비안 교도들은 이단으로 정죄 받아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재침례를 주장하리만큼 개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만남을 중시하는 뜨거운 그들의 열정은 그들을 유랑하는 순례 전도자로 만들게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