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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패망'
20세기 초 오스만제국(오스만, 오토만)의 가장 큰 위협은 국경선을 같이 하는 러시아제국(러시아)다.
러시아에서 불어오는 슬라브족 민족주의 바람은 발칸 반도 지역의 독립운동을 자극하고 결국 두 차례나 전쟁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군사 지원을 받는 슬라브족 국가들에게 차례로 패하면서 발칸 반도를 포함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잃는다.
러시아는 러시아 정교회 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오스만의 영토를 넘본다. 오스만은 러시아의 위협을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을 구하려 하나 이들은 독일-오스트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히려 러시아와 삼국동맹을 맺는다.
오스만 정부 내각에서는 차라리 독일과 손을 잡자는 친독일파의 의견이 우세해진다. 1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오스만의 접근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독일편에서 참전하면 군사, 재정, 물자를 지원한다는 약속을 한다.
한참 망설인 끝에 참전을 결정한 오스만은 곳곳에서 용감한 전과를 올린다. 수에즈 운하의 영국군을 공격하고 갈리폴리에서 영국과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아나톨리아와 코카서스에서는 러시아군을 막아낸다.
그러나 오스만은 큰 전쟁을 치를만한 산업기반이 거의 없는 농업국가이다. 이집트와 시리아 전선에서 영국과 아랍 반란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면서 승기를 빼앗기고 결국 항복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 오스만의 영토를 해체하기로 한다.
'후세인-맥마흔 서한'
오스만이 세계대전에 뛰어들면서 메흐메드 5세는 칼리파의 이름으로 전세계 무슬림들에게 지하드를 벌이도록 독려한다. 이에 노심초사하는 영국은 특히 인도와 아시아 지역의 무슬림에게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아랍인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즈음 세계 정세를 지켜보던 이슬람의 성지 메카 지역의 수령이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집트에 파견된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에게 서신을 보낸다. 내가 오스만을 공격할테니 나중에 건국할 아랍인 독립국가를 인정해달라고 제안한다. 영국 정부와 상의한 맥마흔은 샤리프 후세인 제안의 대부분(프랑스가 통치하는 시리아 영토에 대한 이견을 제외한 대부분)을 수용한다는 서신을 주고 받는다.
'영국의 대중동정책'
비록 자신의 제안이 다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최대한 많은 영토를 약속 받으려는 샤리프 후세인과 달리,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중동 지역에 대한 다른 비밀 협의를 하고 있다. 일명 '사이크스-피코 협약(Sykes-Picot Agreement, 1916년)'이다.
당시 영국은 동맹국 프랑스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모든 군사력을 서부전선의 참호전에 쏟아부으며 독일군을 막아내고 있는 프랑스는 오스만을 압박하면서 중동 지역에 영향력를 넓히고 있는 영국에 대해 의심과 불만을 가진다.
두 나라는 비밀 회담을 가진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 경과 프랑스 베이루트 총영사 출신 프랑수아 피코가 각각 대표로 참석한 회담에서 영국은 이라크 지역, 프랑스는 시리아 지역, 팔레스타인은 국제공동관리구역으로 하자는 합의를 한다. 러시아는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을 갖기로 하고 이 협약을 동의한다.
샤리프 후세인은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영국은 또 다른 공약을 내건다. 팔레스타인 구역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도록 지원한다는 영국 외무장관의 편지 즉,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1917년)이다. 당시 동유럽에서의 유대인 탄압이 극심하여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시오니즘(Zionism) 운동과 전황이 긴급한 영국 전시 정부의 요구사항이 서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결국 3개의 약속이 거의 동시에 이중 삼중으로 겹쳐진 모양새이다.
맥마흔-후세인 편지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통해서, 벨푸어 선언은 유대인 공동체를 통해서, 사이크스-피코 협의문은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볼셰비키 파가 왕실 비밀문서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된다.
샤리프 후세인과 아랍인들은 몹시 분노하지만 강대국 영국과의 동맹을 버리지는 못한다.
'좌절된 시리아 독립'
1916년 샤리프 후세인은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오스만의 메카 지역을 공격하여 주변을 점령한다.
그는 아랍인들에게 반란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한다. 오스만의 튀르크인들은 꾸란과 샤리아를 무시하는 무신론자들이니 우리 아랍인 무슬림들이 단합하여 몰아내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큰 반응을 얻지 못한다. 대부분 무슬림들은 이슬람 칼리프인 오스만 술탄에게 여전히 충성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교도와 맞서 싸우고 있는 칼리프에게 분열을 야기하는 반역자라고 비난한다.
사실 샤리프 후세인도 거창한 아랍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아랍인의 민족국가나 헌법 의회 공화정 등의 개념은 커녕 자신이 속한 하심 가문의 왕조를 세울 생각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리프 후세인의 아들 파이잘 이븐 후세인 군대가 튀르크인의 오스만을 계속 공격하고 1918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자 아랍인들은 환호한다. 1920년 시리아는 파이잘을 시리아의 왕으로 선언한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같은 해에 오스만의 해체를 국제적으로 공인하고 국제연맹은 프랑스에게 시리아를 위임통치할 것을 결정한다. 파이잘 왕은 항복하나 이에 불복하는 일부 시리아군은 프랑스군에게 거의 전멸된다.
'하심 가문, 아라비아의 패권을 두고 사우드 가문과 겨루다'
하심 가문의 샤리프 후세인은 아들 파이잘 왕과 달리 여전히 본거지인 히자즈 지역에 머물고 있다. 여전히 아랍 지역의 통치자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으나 아라비아 반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다름아닌 사우드 가문이 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가문 다 야망을 가지고 있고 둘 다 영국의 지원 받는 이상 서로간의 한 판 승부는 불가피하다.
1918년 첫 전투가 벌어진다. 이크완(베두인족 무슬림) 전사가 맹활약하는 사우드 가문이 첫 승리를 가져간다. 다음 해 샤리프 후세인은 또다시 공격하지만 더 큰 참패를 겪는다. 영국은 두 가문이 아라비아 반도를 나누어 가지라는 중재안을 내놓지만 샤리프 후세인은 강하게 반발한다.
1924년 사우드 가문의 군대가 샤리프 후세인이 통치하는 메카 지역을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사우드 군대의 학살과 약탈을 견디다 못한 메카 주민들은 샤리프 후세인에게 물러나기를 요구한다.
결국 샤리프 후세인은 망명하고 사우드 군대는 메카를 점령한다. 아라비아 반도의 주인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요르단과 이라크에 세워진 하심 왕국'
샤리프 후세인은 자기들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영국에게 크게 반발한다. 아랍인들까지 들고 일어나는 반영 감정을 달랠 필요를 느낀 영국은 지정학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트란스요르단 지역을 제시한다. 사실 아랍인들은 예전부터 트란스요르단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생각하였지만 일단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1921년 하심 가문 샤리프 후세인의 둘째 아들 압둘라 이븐 후세인이 트란스요르단의 왕으로 선포된다.
우여곡절 끝에 하심 가문의 왕국이 세우지자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요르단에 모여든다. 이들은 트란스요르단에 이어 이웃나라 시리아에까지 아랍민족주의 운동을 펼친다. 내심 시리아를 노리고 있는 압둘라 왕이 이를 은연 중 모른 체 하자 프랑스는 이를 항의하고 영국은 압둘라 왕을 강하게 압박하여 민족주의자들을 추방한다.
영국에 저항하는 또 다른 나라는 이라크이다.
이라크 지역은 주민 구성이 복잡하다. 동남부는 시아파 아랍인, 서부는 수니파 아랍인, 북부는 쿠르드인의 땅이다. 영국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이라크의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필요하다. 영국-지중해-팔레스타인-이라크-페르시아만-인도 이렇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종파와 민족으로 복잡한 이라크 지역을 굳이 하나의 국경선으로 묶은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다.
1920년 국제연맹이 이라크를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결정하자 이라크의 아랍인들은 하나로 뭉쳐 저항하기 시작한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같이 예배를 드리고 같이 시위를 한다. 하심 가문의 반오스만 전쟁이 일깨운 아랍의 민족주의가 발현되는 순간이다. 평화적인 시위가 폭력으로 진압되자 저항은 폭력으로 바뀌고 이라크 전 지역으로 확산된다. 이라크 중부 지역을 접수한 저항 세력은 자치 정부를 세운다. 영국은 공군까지 동원하여 이라크 지역을 탈환하자 저항 세력들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라크인들의 무력 시위 이후 영국의 통치 방식이 바뀐다. 영국인의 직접 통치에서 아랍인을 내세운 대리 통치를 구상한다. 얼마전 프랑스 군대에 의해 추방된 시리아 국왕 파이잘이 물망에 오른다. 영국은 이라크인들의 분노도 가라 앉히고 하심 가문과의 약속도 일부 지킬 겸 1921년 하심 가문의 파이잘을 이라크의 국왕으로 선포한다.
트란스요르단에 이어 두 번째 하심 가문의 왕국 이라크가 세워진 것이다.
다음 편은 터키(튀르키에)공화국의 건국입니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