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머리에 아래 글은 김좌진이라는 한 인간 개체의 사상적 뿌리나 또는 그 지향을 파서 오늘날 새롭게 검토하고자 함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혀둔다. 또한 논쟁이 많은 청산리 항일의 영웅 백야 김좌진장군의 어떤 치명적인 문제점을 파악하므로써 그것으로 전반 한국 민족사의 엇갈린 시비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려 했다는 어떤 거창한 목적도 없음을 밝혀둔다. 다만 이 글이 현실에서 지금도 씌어지고 있는 허다한 거짓말 역사들에 대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일반인들의 시야(視野)의 한계와 사고(思考)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넓히는데서 얼마쯤 기여할 수 있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따라서 전문성을 띈 학자 연구가들의 문장과 또 다른 형식의 서술법을 구사(驅使)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바란다. 접근방법에 있어서 사이버상의 특수성, 및 일반 비학술계 독자들의 한계를 고려하여, 저자 자신의 취재와 답사의 길에서 맞다들렸던 (逸話)들과 함께 그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아주 쉽고 편한 저자 식대로의 記述법으로 그 과거를 한번 추적해보았다. 1. 김좌진의 아들로 둔갑된 김두한으로부터 우선 드라마 "야인시대"를 두고, "김두한 신화의 허구와 진실", "야인시대"로 다시 뜬 김두한 신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라는 등의 제목과 같은 글들에서, 한국의 서성해(소설가), 신주백(성균관대 한국사 연구교수), 그리고 요즘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역사학자 한홍구같은 이들까지도 나서서 김두한의 그 신화 깨기에 열을 가하고 있는것을 보았다. 그런데 김두한의 신화 깨기는 주로, "깡패였느냐?", 아니면 "낭만적인 협객이었느냐?", 또는 "항일영웅이였느냐?"는 질문을 가지고 진행되며, 위조된 역사가운데서 가장 초점은 김두한을 낳은 생모, 즉 김좌진의 아내가 "드라마에서 소개되고 있는 박계숙"이라는 그 여자냐, 아니면, 사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대로, 서울의 다동권번(茶洞券番)이라는 기생집에서 몸 팔던 그 어린 기생 김계월인가에 집중되어 있을 따름이다. 김좌진장군에 대해서는 일절반구 없다. 번마다 역경에 처한 김두한을 불러일으키는 대한독립군의 사령관이며, 청산리의 영웅인 김좌진장군의 형상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그 누구에게나 거의 독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묻고자는것은 과연 "김좌진장군의 신화와 허구와, 그리고 그 진실은 어디까지인가?"라는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김좌진장군의 엉터리 신화는, 그 아들로 자처하고 나서는 김두한의 회고록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때문에 그 아들로 "자처"하고 나서는 김두한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확실하게 그 아들이라고 증명할수 있는 어떠한 역사적인 증거와 자료들이 지금까지도 전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임권택감독이 만든 영화 "장군의 아들"의 시나리오에 관계한 것으로 알려진 도올 김용옥의 저서(도올세설)에서 까지도, “내가 김두한에 관해 출간된 도서를 다 훑어보고 난 후에 내린 하드 팩트(hard fact)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그는 개성에서 자라난 부모를 모르는 고아다. 열 살 때 서울로 내려와서 거지노릇을 하다가 왕초라는 거지대장에게 붙들려 장차구다리(청계천) 밑 거지소굴에서 컸다. (중략) 다시말해서 그가 장차구다리 밑의 거지에서 종로 일대를 제패하는 깡패두목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픽션과는 전혀 무관한 사태이며, 김두한 자신에게도 의식된 족보의 사실일 수가 없으며 (중략) 그 이외의 어떠한 논리도 가식이다” 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와같은 시시껄렁한 일들은 다 집어치우고, 1963년에, 한국에서 출간한것으로 되어 있는 김두한의 회고록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를 얻어 다시 읽어보면서 필자는 실소를 금할길이 없었다. 2. 위조되기 시작한 김좌진장군의 가계와 혼인 이미 오래동안 남, 북한 력사학자들의 거의 공통된 력사관이 당금 중국에서의 우리 조선족의 력사를 100년 이상으로 꼽고 있으며, 19세기 60년대 기사년 대천입으로부터 시작된 만주에로의 조선인의 이주를 조선족 력사의 발단으로 볼 때에, 우리 조선족의 문학에서 만주지방에 거주하고 지냈던 염상섭, 안수길, 강경애, 최서해 같은 사람들을 모두 조선족문학의 가장 앞자리에 모셔놓는것과 마찬가지로 반일독립운동의 인물들로 안중근과 김좌진, 홍범도 같은 영웅들을 그 가장 앞자리에서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보다 흥미로운 한 인물을 더 첨가한다면 바로 1945년 8월15일 일제 패망후, 조선(북한)의 지도자가 되어, 반세기 이상을 독재자로 군림했던 김일성장군도 들게 된다. 그런데 출신 이야기를 꺼낼것 같으면, 아직까지 한국의 사책에서 그렇게 적어놓은것을 본 적은 없으니까, 김두한이 자기 회고록에서 어떻게 거짓말을 하건말건간에, 거기에 무슨 "신화"로 깨일것까지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김두한은 그냥 깡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하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그 이상인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깡패로 인생을 출발했지만, 국회의원으로 생을 마쳤으며, 김좌진장군보다도 훨씬 더 잘 알려졌다. 그만큼 한국의 청중들은 김두한의 깡패 이야기를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 이야기보다도 더 좋아했고, 설사 지금이라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지고 책이나 아니면 영화를 만들었을 경우, 역시 김두한 깡패의 이야기가 더욱 베스트셀러가 되리라는것은 불보듯 빤한 결과 아니겠는가! 그리고 역사 방면의 전문가가 아닌 일반 청중들 대부분은 그 깡패 이야기에서 자기도 모르게 역사를 배우고 있다. 그래서 어느날부터, 김두한의 거짓말 회고록은 물론이고, 요즘에도 크게 소개된 "야인시대"같은 거짓말 드라마에 이어서, 김좌진장군이 원래는 안동 김씨, 그것도 신라김씨의 시조인 태보공 (휘 알지)의 후손으로 대줄기는 같으나, 내려오면서 고려초의 평장사(平章使) 휘 숙승(叔承)을 시조로 하는 선 안동과 역시 고려초의 공신인 태사공(泰師公) 휘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후 안동에서, 그 후 안동의 줄기로 태어난 김좌진 장군은, 더 바투 들어가서 바로 조선조 말에 세도정치를 휘둘렀던 일명 안동김씨라는 문파였던 것이, 다 지워지고 그는 하루 아침에 갑자기 고균(古筠) 김옥균의 양자로 되어버린것이다. 이제는 사책에 그런 기록이 없다고 떠들어봐야 누구도 믿지 않는다. 신화가 부풀려지다못해, 하루 아침에 갑자기 김옥균의 양자로까지 둔갑해버리고 또 그렇게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 거짓말을 반증(反證)하는데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김두한이 그런 거짓말 회고록을 쓸 때에, 그의 곁에 좀 역사에 밝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모양으로, 김좌진장군이 1889년 충남 홍성(洪城)에서 출생할 때에, 이미 4년 전, 김옥균은 안경수 등과 함께 "갑신정변" 3일 천하를 실패로 마치고, 나라의 최고 역적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중에 있다가, 그후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채로, 상해에서 조선 황실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던것이다. 그때가 1894년이었다. 사책을 뒤집다보니, 우리 김좌진장군이 김옥균의 양자였다는 기록은 어데도 없고, 대신 한국의 정(正), 야사(野史)속에는 김좌진장군과 동시대를 살았던 미모의 여간첩 배정자(裵貞子 1870)만이, 김옥균의 문하생으로,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藤博文)의 양녀가 되어 이름을 정자로 개명하게 되었다는 기록만이 나올 따름이었다. 김좌진장군의 거짓말 같은 신화는 이때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김좌진장군이 피살당했던 그해 1930년 1월, 2개월 뒤인, 3월17일, "조선일보"에 실렸던 기사(특파원 최문우)에 의하더라도, 김두한이 자기 회고록에서 주장하고 있는것 처럼, 나젊은 반일운동가 김좌진장군과 조선 궁궐 박상궁의 딸 박계숙의 사이에서 자신이 태어났다는것도 거짓말인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신문에 이미 소개된 기생 김계월의 사진과 함께 "조선일보" 개성 특파원 최문우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김좌진) 가장 사랑하던 애첩 김계월(26)의 몸에서 출생한 김두한(12)이란 아들이 현재 홍성에 잇느니 혹은 경성 시외에 잇느니 하야 그 확실한 소재처를 아지 못할 안이라 애첩 김계월이가 원산 방면에서 료리업을 한다고 보도되엇거니와 그는 모다 오보이엇스며 허설이엇고 정작 김좌진의 아들 두한이 잇는 곳은 아버지가 잇는 바 바람 거친 그곳과는 정반대로 고요한 조선의 도읍 개성에 잇다. 그는 목하 개성 서본정(西本町) 이백 오십 사 번지에서 자기의 조모와 가치 쓸슬한 그날그날을 소일하고 잇다.” (조선일보) 1930년 3월 17일자) 그런데 이것은 결국 김두한의 출생과정을 밝히는것이고, 그것이 그때로부터 구축하고자 했던 김좌진장군의 신화와는 과연 어떤 연관성을 갖는것인지 알수 없다. 오히려 여느 무협소설에나 나올법한 나젊은 혁명가와 애어린 기생과의 만남,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등 이런식대로 사실 그대로를 회고록속에 기록했더라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김좌진장군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서 궁궐 상궁의 딸보다는 훨씬 드라마틱하고 재미나는것인데, 그예 기생출신의 생모는 없었던것으로 숨겨버리고 말았다. 그 원인은 보나마나 그 생모의 말년이 너무나도 처참하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찾아볼수 있는 일부 연고자들의 회고담에 의하면, 김좌진장군이 만주로 떠난 뒤에, 살길이 막막해진 기생 계월은 아들 김두한을 노모에게 맡겨버리고, 그 자신은 계속 기생으로 함흥과 흥원 등 지방을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자취를 감춰버리고 마는것이다. 항일영웅인 아버지 김좌진장군에게 이런 기생출신의 애첩이 있었다는것을 숨기고 싶었던것은 김두한의 영웅심리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김좌진장군의 신화는, 결국 김좌진장군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그 첫 스타트를 떼기 시작한것이,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 광복군의 참모장이 되어 귀국한, 그 옛적 김좌진장군의 부하인 독립운동가 이범석(李範奭)의 뻔뻔스런 거짓말에 의해, 신화는 또 계속된다. 3. 김좌진의 부하였던 이범석의 자기자랑 그렇다면 이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은 어떤 사람인가? 아무 인터넷에서라도 "검색"에다가 이 이름을 넣고 클릭하면,그의 어마어마한 약력이 떠오른다. 그리고 작금(昨今)의 "야인시대"에서도 소개되고 있듯이, 한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까지도 역임한바 있는 , 독립운동가에 정치가에,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상자다. 호는 철기(鐵驥)요. 서울 태생이며.1915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19년 윈난〔雲南〕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 기병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만주 청산리전투 사령관, 41년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되었다. 광복 후 46년 조선민족청년단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고, 48∼50년 초대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50∼51년 주중대사를 역임하였다. 60년 참의원, 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같은 해 탈당하였다. 저서로 회고록 "우등불"이 있다. 보다시피 청산리전투의 직접 참여자의 한 생존자로, 그가 쓴 회고록 "우등불"이야말로, 광복후의 한국 사학자들이 청산리전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주요한 근거자료가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일이다. 청산리가 만주 어데 가 붙어있는 땅인지, 동네인지, 그네들은 글에서, 지도에서만 봤을 뿐이고, 말그대로의 "들은 풍어리"로 "탁상공론(卓上空論)만 해왔던것이다. 그렇게 기재된 청산리전투와 함께,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사에서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신화마냥 받아들여진 김좌진장군에 대한 한국 사학자들의 엉터리 연구가, 그후 한중수교가 이뤄지고,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중국 연변지방을 다녀올수 있게 된 1980년대 말, 90년대 초엽까지 계속될수 밖에 없었다. 그때 나랑 처음 청산리에 같이 갔던 한국의 원로 역사학자 한분이 개탄하듯이 하던 말이 지금도 머리속에 생생하다. "사실 우리는 그놈(말 그대로의 표현을 옮겨놓았음) 이범석의 '우등불'에 속아넘어갔던게요.아니면 결코 '청산리전투'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지는 않았을거예요!" 그러면서, 회고록이라는것은, 보통 자기자랑을 많이 널어놓기가 쉽상인데,사학자들이 만약 그것만을 크게 믿고 의존하다가는 바로 오늘날의 "청산리전투사"와 같은 우(愚)를 범하게 될수 있다는데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그때 같이 거론된 소위 회고록을 남겼다는 한국 민족독립운동사의 연고자들 가운데서, 특히 김구의 "백범일지"와 이범석의 "우등불"은, 하나는 자기자랑만 널어놓고, 다른 하나는 자기자랑에, 거짓말까지 보태가면서 희한하게 꾸며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큰 증거자료로 간주하고 역사를 써낸 사학자들의 한계를 절감하는 계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던것이었다. 물론 거짓말 회고록을 논할라치면, 김두한의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나, 또는 이범석의 "우등불"도 도저히 비교가 안될만큼 엄청난 조선(북한)의 김일성장군 회고록(세기와 더불어)도 있다. 자기자랑을 널어놓는데서 저그만치 김구의 "백범일지"같은 소책자 비슷한 회고록 4, 50배도 더 되는 회고록이오, 이범석의 "우등불"에 비해서도 3, 40배는 더 되는 회고록이지만, 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어보면, 그도 함부로 거짓말할수 없었던 사실 하나만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가 없는것이다. 20대의 청년기를 만주에서 보냈던 김일성도 항일투쟁의 전 기간동안 거의 100여차 가까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매번 전투 때마다 사살, 또는 상처를 입힌 적군의 수(數)를 부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큰 전과의 하나로 지목받는 "대마록구전투"를 이야기해보자. 공산당 항일연군의 주요 지도자인 양정우가 피살당한 바로 직후, 연변의 화룡지방에서 일본군에 쫓겨다니던 중, 대마록구라는 골짜기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매복기습전을 펼친 일이 있는데, 이때 일본군 경찰토벌대 100여명을 사살한바 있다. 수적으로 이것은 김일성장군의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큰 전투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때 죽지않고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간 연고자들도, 김일성의 이름을 외울 때에, 대마록구에서의 참패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때 사살당한 일본군측의 피해상황을, 만주 비적소탕전에서 일본군이 당한 가장 큰 피해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야기하는 피해가 바로 1920년 6월의 봉오동(卽 鳳梧洞戰鬪 )에서 독립군 홍범도에게 당한 참상을 손꼽는데, 그 전투 규모는 김일성의 대마록구전투보다 규모도 크고 참전 인수도 많으며, 일본군이 냈던 사상자도 엄청났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이었지만,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으로 경미하였다. 일본과 중국, 북한, 소련 등의 사책들에서 한결같이 1920년대 한국 독립군 측의 가장 큰 전과 및 일본군에 대한 사살기록으로 이 157명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와서까지 사살당한 가장 높은 군사관위로는 일본군 육군 소장 2명이었다. 그들은 각기 조선인 항일연군 제2군 4사 사장이었던 안봉학 (용정 세린하 사람)과 제7군의 대리군장 겸 제2로군의 총참모장이었던 최용건의 부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4. 청산리전투는 얼마나 부풀려졌나? 우선 한국의 사학자들이 5, 6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좌진장군에 대하여 아무런 의문과 의심의 여지도 없이 하늘 높이 받들어올리게 된데는 그 "우등불"과 함께 이범석의 존재가 거의 절대적이었다는것을 어차피 중언부언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범석은, 1920년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가, 연성대장, 또는 청년대장, 이런 식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그번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운것으로 자아 및 타인에 의해 잘 소개되었다. 어떤 사료들에서는 그냥 이범석을 가리켜 아주 "청산리전투의 사령관"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최근년간 나온 중앙멀티미디어백과사전은 사실상 그렇게 제작해서 지금도 세상에 배포하고 있는 중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사에 기재되어 있는 청산리전투의 주인공인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를 뒤쫓아 두만강을 건너온 나남 제21사단과 함께, 다시 만철(滿鐵)의 수비대가 송화강[松花江]을 건너 서진하여 3면으로 북로군정서군을 토벌하기 시작했는바, 정작 청산리의 골짜기까지 바투 들어온 혼성여단을 1만여명으로 기술하고 있으면서, 이 일본군의 대부대병력이 두만강을 건너온 시간과, 건너오면서부터 독립군부대들과 진행된 전투들에 대해서는 일절 외우지 않고 있다. 다시 일본군 토벌중대장 시마다[島田]가 지휘하는 120기병 중대가 한국인 촌락인 천수평(泉水坪)에 몰려왔고, 또 19사단의 2만 병력이 어랑촌지방에 몰려들었다고 쓰면서, 이때 전투부대를 거느린 이범석은 오히려 김좌진이 직접 이끌고 다녔던 북로군 정서 제1제대의 대원수 1000명 보다도 500여명 더 많은 1500명의 대원들을 직접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고 거짓말하고 있으며, 사실상의 전투는 바로 자기가 거느린 1500명의 전투부대가 모두 겪어낸것이며, 김좌진의 제1제대는 거진 비전투요원으로써 직접적인 전투에도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것으로 회고하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는가! 죽은자는 말 못하는 법이고, 직접 참가자가 기술하는데, 그 앞에서 정작 청산리가 어데 있는 산골짜기인지 구경도 못해본 당년의 사학자들은 그냥 그 기술을 고스란히 받아적을수 밖에 없었다. 다음 그 뒤에 따른 더 엄청난 거짓말은, 몰려드는 토벌군의 전위사령을 첫 한방에 쏘아눕힌 이범석의 전투개시 신호에 이어서 독립군대원들은 한결같이 기습을 퍼부어 1만명 혼성여단의 2, 200명 토벌군을 일거에 몰살시켰다고 기재하고 있다. 그러고도 또 성차지 않아 다시 어랑촌 전방의 마록구(卽,大馬鹿溝-대마록구,그로부터 20년후 여기서 한인 출신의 청년 게릴라대장 김일성에 의해 화룡현의 마에다(前田)경찰토벌대 100여명이 전멸당하는, 중공 항일연군의 투쟁사상 굉장하게 큰 전투가 발생한다.)의 유리한 고지들을 점령하고 기다리다가 기습을 퍼부어 2만명의 적병중 1000여명을 사살하므로써, 도합 330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한것으로, 자기 도취에 빠져 오늘까지도 그 엉터리 기재를 그대로 널리 소개하고 있다. 5. 청산리전투에서 보여준 김좌진의 진짜 모습은? 결국 이범석은 한국독립전쟁의 가장 빛나는 주역으로 등장하기 위하여, 1920년 9월의 청산리전투를 "적군 사살 3천3백명"이라는 황당한 거짓말을 만들어낸것도 또 모자라서 아주 그 전투의 실질적인 전투부대의 책임자가 자기라는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오히려 사령관인 김좌진장군보다도 500명이나 되는 1500명의 부하를 자기가 직접 인솔했다고 쓰고 있는것이다. 그러면 중대장이 직접 거느린 대원이 구경 얼마였느냐? 이것을 알아보는 방법도 하나 있긴 하다. 1920년대가 한국독립전쟁의 한 분수령을 이루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북로정서의 대원수가 1000명선에 이르렀다는것은 결코 과장은 아니다. 이범석과 꼭 같이 중대장으로 그 전투(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족적을 남기고 있는 양림(양주평, 김양녕, 필사제, 또는 김일성...등의 여럿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까지 중공당내의 항일부대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서 활동했던 조선인이며, 이범석보다 2살 위다.)의 사료에서, 청산리전투 당시 그는 70여명의 대원을 거느렸다고 기재되어 있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같은 중대장으로 이범석은 70명도 아니고, 700명도 아니고, 오히려 사령관인 김좌진장군보다도 500명이 더 많은 1500명을 직접 지휘했다고, 오늘도 계속 그런 엉터리로 기재되어 있는것을 보게 되면, 과연 청산리전투와 함께 빛나는 김좌진장군의 신화는 벌써 5, 60년대 당시 그의 사랑하는 부하였던 이범석에 의해 잔뜩 망신살에 뻗혀있었던것이다. 이범석은 또한 자신이 크고 사나운 군마를 잡아타고 다녔던것으로 자랑하고 있지만, 80년대 초엽까지 살아서 그 전투를 이야기할수 있었던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청산리지방의 노인들은 그때 20여세 밖에 안된 이범석을 알지 못해도, 멋있는 팔자수염에 전모자를 쓰고, 말 대신에 당나귀를 타고 다녔던 30대의 김좌진장군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전투 도중, 부대가 백운평에서 어랑촌으로 이동할 때에, 마을에 들어온 김좌진장군은 군마가 아니라, 당나귀보다는 좀 커보이는 노새같은 짐승(그러나 대부분이 당나귀라고 주장한다.)의 등에 비단방석을 깔고 앉아, 연신 채찍질을 해대면서, "여기서 이렇게 일본군을 죽이고 혼자 도망가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놀라 울부짖는 한인농부들한테, "우리가 일일이 그런것 까지는 책임질수 없으니까 모두 죽지 않겠으면 제각기 살길을 찾아서 도망가라! 도망가지 않고 남아있다가는 반드시 화를 입게 될것이다!"고 소리치면서 가장 앞장에서 마을을 빠져 도망갔다고 한다. 이와같은 회고들은, 청산리전투의 참가자들로, 그후 홍범도를 따라 소련으로 이주한 적잖은 연고자들도 꼭같이 회고하고 있으며, 한때 소련의 사학자들에 의해 일부 사책 (예하면, "간도사신론")들에서도 약간 소개된바 있으나, 김좌진장군을 추앙하는 사람들의 강렬한 반발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범석의 주장대로, 정말 김좌진장군은 직접 전투부대보다는 비전투요원들을 거느리고 전투현장에는 투신하지 않았던것으로 볼수도 있으며, 그 당나귀 궁둥이에 채찍질하며 달렸던것이 백운평에서 어랑촌으로 옮겨갈 때의 일이라고 분석된다. 다시 말하자면, 결코 도망친것은 아니다. 오늘의 한국사가 기술하고 있는대로 일본군 19사단의 2만 병력이 몰려들고 있었다는 어랑촌(漁郞村)에로 먼저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러 달려갔던것으로 해석할수도 있는것이다 6. 청산리 현장에 대한 지리 고증 그런데 문제의 신화는 여기서 깨지는것이 아니다. 독립군의 장군이 타고 다녔던것이 말이면 어떻고, 당나귀면 또 어떻냐? 그런것과는 상관없이, 이 전투는 "...5만 병력을 2,500명으로 맞아 3,300명을 죽인,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大捷)"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된것을, 다시 80년대 초엽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사학자들은, 거기에서 존재되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스스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우선 1920, 30년대를 다 통털어서라도, 일본군의 역사에 3000명이상의 사상자를 냈다는 전투가 그 어느 사료에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왕청, 화룡 두 지방에 수천명의 독립군부대가 틀고 앉았었다는 사실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일이었고, 보다는 이범석중대장이 거느린 1500명에, 김좌진사령관이 거느린 1000명에, 그리고 그 밑에서 일개 연대장의 신분으로 참전한것으로 기재되고 있는 한국 독립운동사가 소개하고 있는 홍범도의 친솔 부대가 700여명, 이런 대충 주먹구구식의 계산에 의해서도 벌써 3000여명선을 훨씬 넘어서는데, 연변 간도지방에 3000명의 독립군부대가 틀고 앉아 일본군 5만여명의 정규뷰대와 대부대 전투를 벌렸던 적이 있다는 사료들도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산(活的) 증거의 현장인 청산리 또한, 거기에 다녀보지 않았던 한국의 사학자들이 나름대로 장장 80리의 골짜기에 100m 내외의 밀림이었다고 제멋대로 기재하고 있지만도, 그 청산리 계곡의 길이가 80리가 아니고, 아주 800리라고 한들, 그 생겨먹은 사방 60미터 남짓한 골짜기의 어구로 5만여명의 정규부대가 몰려들어올수가 없는것이었다. [참고로 필자는 1980년∼1990년 10년간 선후 80여차례나 청산리지방을 답사하면서 취재하고 조사했던 바가 있다.] 가설해서, 골짜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한줄로 서서 들어왔다쳐도 5만명의 정규부대라면 그 길이가 아주 두만강에까지 이어졌으리라는것은 상상으로도 추산할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첫번 전투에서 사살당한것으로 기재하고 있는 1000여명을 일렬로 줄을 세워 들여보낸다고 해도, 1미터 간격에 1명씩 선것으로 계산하면 1천미터나 늘어서는데, 그 골짜기의 양켠에 매복할수 있는 수풀과 둔덕의 지형은 고작 4백여명밖에 숨길수 없는것으로, 그 지방을 돌아본 중국의 군사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다. 만약 그 전문가들의 주장하는 바가 틀렸더라도, 한국사의 주장대로 3000여명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었다면, 그러면 그것은 결국 오늘날 청산리전투기념비까지 만들어져 있는 청산리가 결코 그 역사속의 청산리가 아니라는 주장밖에 더 되지않는것이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오늘의 한국독립운동사가 기재하고 있는, 청산리전투란 확실한 증거와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일개인 연고자들의 거짓말 회고록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신빙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엉터리 신화에 불과했다는것이 본격적으로 밝혀진것은, 어느날 역시 그 전투의 참가자의 한 사람이며, 오히려 김좌진장군보다도 독립운동의 수십년 선배격인 홍범도장군의 친필 회고록(사실은 일기, 소련의 신문들에서 연재되기 시작했다)이 바로 그 원문과 함께 갑자기 발굴되어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7, 역사는 이렇게 위조된다 사실 그 "이념에 의한 좌익과 우익의 분열시기"에도, 홍범도장군의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1920년 6월)"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사학자들은, 그때로부터 바로 수십일 뒤인 1920년 9월 10일에 이어서 발생하는 청산리전투를 한데 이어놓고, 이 전투의 주적(主敵)부대였던 일본군 나남 19사단이 두만강이 건너온 시간이 바로 봉오동전투의 직전것을 발견하고 대조해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일본군의 만주비적소탕전에 관한 사료들에서 최대 가능한 찾아낼수 있었던 사료들에 의해, 일본군의 피살자수는 최종 280명좌우인것으로 판정나게 되었다. 그나마 홍범도가 지휘한 봉오동전투의 일본군 사살자 수는 이미 120명 내지, 또는 150명으로, 그때 죽은 일본군인들 개개인의 이름들까지도 현재 자세하게 발굴되어 나오고 있는것을 보면, 그뒤 김좌진장군의 부대가 백운평에서부터 어랑촌에 이르기까지 전후 3차에 걸친 전투에서 사살한 일본군의 수자는 겨우 150명 좌우로 추산되며, 청산리라는 한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매복전에서는 고작 60여명 정도로밖에 안되는것이다. 그래 지금 한국정부가 돈을 대서, 오늘의 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산리 전적지에 기념비 낙성식을 할 때에는, 어처구니 없게도, 중국, 한국, 북한,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여러 나라의 학자, 교수들이 다 참석한가운데서, 고작 60여명 밖에 사살하지 못한 청산리전투의 신화를, 아주 깨치기에는 아까운듯, 아니면 이때까지 불어왔던 그 거짓말을 다시 바로 잡기에는 부끄러운듯, 이제부터는 아주 홍범도의 봉오동전투를 시작으로 해서, 최후 어랑촌에서의 기습전까지 모두 포함시켜 1920년 6월에서 9월까지의 일본군 사살 300여명으로 접근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들로 서로 주고받기도 하는 모습들이 구차스럽기를 더 이를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구차스러운 일들이, 그 뒤에 바로 김좌진장군이 말년을 보냈던 흑룡강성의 산시 지방에서, 김좌진장군의 이름을 빌어, 한국으로부터 돈을 벌어들이려는 총명한 사람들에 의해 느닥없이 발생하기 시작한것이었다. 사실 중공당의 내부 당안에는 홍범도, 김좌진을 다 포함해서 무릇 중국 경내에서 활동했던 김구며, 안중근이며, 김일성이며, 윤봉길이며, 김책이며, 최용건이며, 지어는 박정희, 정일권같은 친일부역배 출신의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그 자세한 사료들(또는 일제기관에서 보존해두고 있었던 적위당안들)이 아주 잘 보관되어 있으며, 거기에 근거하여 그 인물들의 성격, 성분과 입장들에 대한 적아구분(敵我區分)을 아주 분명하게 해두고 있었다. 그래 아(我)로 판정되는 열사들, 예하면 윤봉길이나 안중군의사의 기념관(또는 전람실) 같은것은 중국경내에서 개관하는것을 허락하기도 하지만, 일단 적(敵)으로 판정되는, 예하면, 일본군 60여명을 사살한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장군같은 인물들에 대하여서는 일절 거론하지 못하게 만드는것이었다. 바로 앞에서 잠간 거론한바 있는, 김좌진장군에 관한, 그 당시 생존자들의 고발자료가, 김좌진장군을 친일왜놈주구로 몰아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나니 그때 또 한번 불거진 김좌진장군의 피살설도, 그 흉수가 구경 누구냐에 앞서, 어떻게 되어 피살당하게 되었느냐는 의문이 쏟아져나온 가운데, 마침내 그 고발자료를 제출했던 당시의 생존자의 한사람인 조선공산당 화요파 출신 항일간부 양환준(연변교육출판사 사장 등 직 역임)선생이 직접 "김좌진장군연구회"가 조직한 학술회마당에까지 불려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불러내놓고 보니 치매에 노환까지 겹친 분이라서 모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때 일부 과격한 사람들, 예하면 정말 김좌진장군을 오래동안 추앙해온 학자들가운데서도, 오히려 원로급의 학자들 여럿이 나서서 흥분한듯한 언(言)투로 무작정 양환준노인을 몰아댔다. "선생이 직접 공도진 (김좌진장군을 사살한 혐의자)으로부터 들었다는 그것이 확실한가요? 공도진의 진술이라는 그것말고 또 다른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선생이 그런 엉터리 증언을 내놓았기 때문에 지금 '김좌진장군연구회'의 입지가 얼마나 난처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고령인 양환준노인은, 그때까지 연변땅에 살아남은 조선공산당 화요파 출신의 유일한 생존자로, 특히 김좌진장군의 피살건(件)과 관련하여서도 가장 주요한 증인임에 틀림없는 연고자였다. 직접 연고자였다기보다는 그 혐의자인 공도진의 친구였으며, 또한 당내(조선공산당 화요파)의 절친한 동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년로한 양환준은 자신이 좀 기력에 넘칠 때에 쓴 많은 회고문장들, 예하면 5. 30폭동과 관련해서, 그리고 김좌진장군과 관련해서도, 많은 사소한 세절들에 이르기까지는 제대로 기억할수 없었다. "그게 딱히 어느때 일입니까? 예하면 어느해, 어느 달에 있었던 일입니까?" "그때 또 누가 곁에 있었습니까? 장소는 어딥니까? 누구 집에서 만났습니까? 그리고 그때 어떻게 두 사람이 꼭 같이 그 장소에서 만나게 된것입니까?" 이러루한 질문들이 쑫아지자, 양환준노인은 눌변(訥辯)이 되어 아무 대답도 정확하게 할수가 없었으며, 결국 시간이며, 장소며, 도저히 앞뒤가 맞지않는 대답이 쏟아져나와서 듣는 사람들을 웃겼다. 그렇지만 연구회는 저들의 의도(그 의도를 나중에 밝히겠다)대로 양환준노인의 대답을 녹음했을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때 확실히 그런 얘기를 들었던지 감히 단정하지는 못하겠소이다. 공도진이 직접 자기가 김좌진을 죽였다고 그랬던지, 아니면 자기 친구 박상실이 죽였다고 그런것을 내가 잘못 들었던지 지금 잘 모르겠소이다. 그런즉 이때까지 내가 썼던 회고문장들을 나는 지금 되걷어들이려고 하오." (대개 이런식의 내용으로 구술했다.) 라는 내용의 담화를 녹음해서, "보라, 양환준이 직접 자기의 옛적 발언들을 다 부정했다!"면서 의기양양해 했다. 또한 이 녹음담화를 턱대고, 필자가 "조상지전기"를 썼을 때에, 연구회는 중국조선민족사학회(회장 한준광, 중국공산당 도문시위원회 서기, 연변주위 선전부 부부장, 연변역사연구소 소장 등 직 역임)를 통하여, 필자를 소송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거기에 대한 답변자료를 쓰면서 어지간히 식은 땀깨나 흘렸던 것을 생각하면, 그 모든 기억들이 새삼스럽다. 그 며칠후 학회에서 왔다가라고 해서 갔더니, "당신이 쓴 답변 자료를 흑룡강의 김좌진장군 연구회에 보내드렸소. 모두 만족하는 기분이었고, 소송도 철회하겠다고 하더구만, 한번 놀러가면 잘 대해줄게요, 거기 책임자분이 전에 흑룡강 해림시의 시장을 했던 분이라오." 라고 하는데 놀랐다. "시장했던 사람이면, 그는 공산당의 관료출신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무슨 역사연구를 한다고 그러는지오?" 라고 물었더니, "역사도 마찬가지요. 그런 사람이 나서서 일을 추진해야, 연구회도 발족되고, 또 연구회의 이름으로 한국정부에 말해서 또 돈도 얻어오고 하지!" 라고 하는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주는 경고가, "당신이 쓴 책에서도 또 김좌진장군은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해서, 흑룡강쪽의 그분들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졌는지 모른다오. 연구회는 김좌진장군을 살해한 그자가 행세식의 사회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 탈을 쓴 파쟁분자로 보고 있소. 또는 일제 경찰의 사촉을 받은 나쁜 자가 저질은 짓으로 보고 있는 것이오. 한국 역사학계의 시각도 우리와 거의 비슷하오. 절대로 공산주의자는 아니오. 그런데 당신은 공산주의자가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진짜 공산주의자가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것이오. 또 진짜 공산주의자가 김좌진장군을 사살하게 된 그 원인을 김좌진장군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했단말이오. 결과 당신이 쓴 이 책이 세상에 나오면서 어떤 후과가 빚어지게 됐는지 알기나 아오?" 8. 정부의 일부 퇴직한 관료들이 앞장에서 추진한 '김좌진장군 연구회' 알고보니, 그때 연구회서는 김좌진장군의 이름을 빌어 한국정부로부터 자금 지원을 얻어내려하고 있었던것이었다. 시장 전력(前歷)을 가진 관료출신의 간부들까지 학자흉내를 내가지고 그 속에 끼인것이 바로 그 원인 때문이었다. "말년에 김좌진장군이 살았던 고장, 여기에 김좌진장군의 이름으로 된 농장을 건설하자!" 그야말로 뛰어난 발상이었다.그리고 기념비도 세워야지 않겠는가! 그러자면 당연 한국정부가 돈을 대야지 누가 돈을 내겠는가! 바로 이와같은 취지하에서, 김좌진장군연구회도 발족되었던것이고, 그 연구회는 청산리전투따위에는 아무런 흥취도 없었다. 다만 김좌진장군이 진짜 공산주의자한테 사살당했다는 사실만 눈 감고 딱 부정해서,그 증거들을 중국정부에 제출하고, 결과적으로 중국정부로부터 자기들이 도모하고자는 모종의 윤허를 받아내려는 것에만 급급했다. 사실 진정한 학자라면, 학문만 연구하면 되는 일이지, 무슨 김좌진장군의 이름으로 된 농장건설이오, 또는 한국정부로부터의 자금지원같은것에 그렇게 흥미를 느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연구회가 그 문제 때문에 그토록이나 비상하게 열을 올렸던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그들이 과연 우리 역사속의 한 인물인 김좌진장군에 대한 참다운 연구적인 목적에서 그와같은 연구회를 발족했는지가 새삼 의문을 가지게 되지않을수가 없다. 학자들은 학문 이외의 다른 일들에서 바보노릇 할 때가 참 많은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학자들속에 같이 섞여 어울린 관료출신의 간부들은 또 한번 대단한 능력을 보여줬다. 사실 그런 분들이 아니고야, 중국정부로 부터 김좌진장군에 대한 기념활동, 예하면 농장건설도, 기념비설립에 관한 허락들도 모조리 받아낼수 있었겠는지가 의심스럽다. 저의야 어찌됐던간에 그 노력과 함께 관료출신 간부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큰 공을 기입해주지 않을수가 없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학자들의 자료들을 긁어모아, 자기들이 관련부문과 교섭하기 좋게끔 두루뭉실히 모아 맞추기를 했는데, 종당에 중국정부 관련부문에 의해, 친일왜놈주구이며, 지독한 반공분자로 낙인이 찍혀져 있는 김좌진장군에 대한 결정을 모조리 되돌려놓은것이었다. "왜놈 주구? 증거가 없다!" "반공 분자? 사실 아니다!" "그를 사살한 혐의자?","일제특무들의 사촉을 받은 변절자이며, 사회주의 계열쪽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자다!" ... 이런 식으로 일단 김좌진장군에 대한 중국정부 관련부문의 결정을 바꿔놓은듯도 해보였지만, 결국 그 관련부문들에도 멍텅구리만 들어앉아 있는것이 아닌바에야,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우선 이런 식으로라도 한국 정부로부터 단 몇푼이라도 얻어내려는것에는 꼭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김종필국무총리가 직접 김좌진장군의 이름으로 된 농장건설에 자금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소문도 파다했었다. 그때 필자는 '김좌진장군연구회'에 보내는 답변자료에서, "김좌진장군이 그후 왜놈주구노릇을 했다는데 대한 증거는 그 어데도 없기 때문에 이와같은 오명(汚名)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가 지독한 반공분자가 아니였다는것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라고 썼는데 그때의 주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또한 김좌진장군도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피살당한 것이며, 그를 사살했던 사람도 가짜가 아닌 진짜 공산주의자였으며, 일제특무들의 사촉을 받은 "나쁜자"가 아니라 김좌진장군이나 꼭 같이 일제침략자와 싸운 조선인 항일영웅중의 한사람이었다."고 필자는 동북항일연군의 명장 조상지장군 비사" (1998년 10월 출판, 중국연변인민출판사)에서 썼다. 9. 김좌진장군의 반공이념을 왜곡해서는 안돼. 반공분자! 이런 식으로 말하면, 여기에는 반드시 어떤 매도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한것 같아서 설명하고 넘어가지 않을수가 없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체제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조선인 청년들을 무수하게 많이 죽인 김좌진장군은 걸출한 항일영웅이면서, 또한 지독한 반공자였음에 틀림 없으며,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적이었다. 또한 그것은 김좌진장군의 의지이며, 본의이며, 이념이기도 했는지 모른다. 그런 그것을 저들의 어떤 이익과 돈 때문에, 명분은 듣기도 좋게 김좌진장군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면서, 나중에 반공분자도 아니었다고 사실을 왜곡하면, 그것이 과연 김좌진장군의 영전에 좋은 선물이 되는것이겠는가! "아니! 나는 분명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또 그들과도 싸웠던 사람인데!" 하고 김좌진장군은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못난 사생아 김두한으로부터, 뻔뻔스런 부하 이범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찬란한 민족독립운동사를 보다 빛나게 장식하고 싶어하는 엉터리 사학자들로부터, 그리고 오늘날은 그 이름을 빌어 돈을 얻어들일려는 한심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자들의 이익 때문에 이용만 당한채 자기 본 모습을 보여줄수 없는 김좌진장군은 억울해도 이만저만 억울하지 않은것이다. 이제 부풀려진 엉터리는 신화는 깨짐과 동시에, 항일영웅이며, 지독한 반공분자인 김좌진장군의 본 모습이 사실대로 안겨와야 한다. 반공은 어쩌면 김좌진장군 본인에게 있어서 가장 떳떳한 자랑가운데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우리가 자기 이익 때문에 제멋대로 외곡한다면 결코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것이다. 분명하게 김좌진장군은 왜놈들도 미워했지만, 왜놈들에 못지 않고 공산주의자들도 미워했던 사람이었다. 그 미워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왜놈들을 죽이듯이 공산주의자들도 잡아들여서는 인정사정 없이 물고를 내고, 귀를 자르고, 여차하면 몽둥이로 뒤통수를 때려 처단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는 그 시체를 마을 동구밖에 던져버린것을, 그 동네(산시) 사람들이 땅을 파서 묻어주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회고는, 연변역사연구소 연구원 강룡권선생이 자전거로 동북지방을 답사하면서, 취재한 기록들에서 부지기수로 나온다. 또한 허다한 생존자들이 회고하고 있다.) 중공당 관련부문의 학자들이 김좌진을 무섭게 미워하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북한의 학자들은, 자주 양세봉장군(독립운동가, 조선혁명군사령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수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왜놈들과 싸우기 위하여 오히려 공산당 계통인 항일연군과도 선뜻이 합작하였으며, 실제로 몇차례의 보기좋은 전투도 같이 진행한바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양세봉장군은 공산당계통의 항일연군 수령인 양정우장군의 부대와 여러차례 합작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있어서 침략자 일본은 한중 두 민족에 있어서 공동의 적이었다. 때문에 반일독립운동이 거의 자취를 감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왜놈들과 싸우기 위하여서도 한인청년들은 대부분이 공산당 계통의 항일부대에 참가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었다. 만주지방에서의 공산당의 활동은 1920년대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김좌진이 피살당한 1930년에는 벌써 허다한 한인청년들이 공산당 계통의 항일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왜놈들보다도 공산주의자들을 더욱 미워했던 김좌진장군은, 결국 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피살당하게 되었고, 앞에서 잠간 소개한 양세봉장군같은 사람들처럼 왜놈들과 싸우기 위해 공산주의자들과도 선뜻이 합작했던것과는 달리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종당에는 할빈영사관의 왜놈 경찰이 주는 돈까지 받으며 주구노릇도 서슴치 않았던 것으로 소문나게 되었다. 지금 추적할수 있는 자료들을 통합해보면, 이런 소문들은 결코 일제 패망후, 양환준같은 사람들의 회고에 근거해서 새삼스럽게 만들어져 나온 것만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좌진장군에 의해 자식 잃은 가족들, 예하면, 김좌진장군은 중동철도선상의 산시역을 지나다니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한인청년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여서는 때리기도 하고, 살해도 하고, 때로는 귀나, 코를 잘라서 그 청년의 집에 보내여 군자금을 빌미로 돈을 협작하기도 했었던 사실은 이미 앞에서 소개하였다. 맺으며 이제 김좌진장군에 대하여 몇가지 정의를 어렵지 않게 내릴수 있다. 무엇보다도 김좌진장군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김좌진장군이 반공주의자가 되면, 오늘날 김좌진장군에 대하여 연구한다는 사람들속에는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김좌진장군 본인에게는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반공했다는 사실을 덮어감추므로써 한 민족진영내의 종파싸움에서 암해당한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당당하고 떳떳하게 반공했던 김좌진장군을 더 억울하게 만들수 있다. 김좌진장군 본인도 결코 이렇게 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현재까지 발굴된 만주의 항일투쟁사 자료를 종합하면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는, 단지 청산리에서 있었던 전투만을 가지고 말해서는 안된다.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당시의 반일투쟁 경력으로나 나이로나, 그리고 세상에 알려졌던 지명도로 볼 때도 홍범도는 모든 면에서 김좌진의 대선배였다.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웃기는 일일지 몰라도 만주의 독립군 제 1호를 손꼽으라면, 1920년대에 있어서 홍범도의 앞에 설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머지 문제는 김좌진장군을 누가 사살했느냐는 문제인데, 당시 간도에서 창작활동을 진행한바 있었던 여류작가 강경애의 동거남과 그의 부하 박상실에 대하여 주장하던 한국의 대부분 역사 학자들이 이미 입을 다물고 있다. 그들은 문제의 박상실에 대하여 그의 자초지종을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상실이 바로 리복림이라는 사실은 생전에 회고담을 남기었던, 지희겸 (조선공산당 엠엘파, 중국공산당 주하중심현위 제1임 서기) 의 녹음테프를 보관하고 있었던 그의 딸 (연변 농학원)이 이 자료를 관련자들에게 공개하면서, 보다 자세하게 리복림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당시 아성에서 할빈으로 가는 길에 나포된 것으로 보도되었던 조선청년 박상실은 바로 당시 아성에서 할빈으로 가다가 기차에서 호로군의 몸 수색에 걸려 다부산즈속에서 권총이 나오는 바람에 체포되었던 리복림이라는 사실을 재차 고증하게 되었다. 이 시간은 리복림과 갑자기 연계가 두절된 상태에서 리복림을 찾고 있던 중에 그가 호로군사령부에 잡혔다는 것을 알게되었다고 회고한 양환준의 회고와도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특히 함부로 왈가불가할수 없는 것은 주하의 흑룡궁에서 지하사업을 하였던 허형식 (항일연군 제3군 후임 군장, 제 3로군 총참모장)과 당시 주하중심현위 비서장으로 있었던 김책의 사이에서 교통원으로 일했던 양재문 (이미 사망, 현재 가목사시 열사능원에 안장되어 있음)은 허형식과 친하게 지냈으며, 리복림은 영안에서 김좌진을 저격한뒤 김좌진의 사람들이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바람에 한동안 아성의 횡산저자에 와서 허형식의 집에 숨어지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 양재문은 이런 사실을 누구에게 들었겠는가? 양재문의 신분으로 볼때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직접 허형식과 리복림 이 두사람에게서 들었을수 밖에 없다. 당사 자료로써 추적이 가능한 허형식의 중국공산당 입당 소개인을 북한에서는 김책이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에서는 최용건이 아니면 바로 리복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김책이나 최용건, 허형식, 리복림, 이들이 당시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였던 조선인들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양재문의 회고담을 의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리연록장군의 회고록 "지나간 년대"에서도 리연록장군이 독립군의 수령을 저격하고 도망쳐오는 길에 영안에서 자기를 찾아온 리복림을 도와주었다고 회고했으며, 이와같은 사실은 중국인민해방군 "항일전쟁총서" 항일연군 제4군 리연록 편에서 언급되어 있다. 물론 그 독립군의 수령이 바로 김좌진이라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때 세간에 알려졌던 사살당한 독립군의 수령은 오로지 김좌진 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장 주요한 증거는 양환준의 회고담인데, 이 회고담 앞에서 한국의 모든 항일투쟁사 방면의 역사학자들이 현재까지도 아무런 반론을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김좌진장군의 아들로 알려져있는 김두한이야말로 진짜로 김좌진장군의 아들이 옳냐, 아니냐를 놓고 열을 올렸던 적도 있다. 부하였던 이범석의 의해 엄청나게 부풀려졌던 청산리전투와, 공산주의자에 의한 암살, 김좌진장군의 일생이 남기고 간 영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과 중국에 있어서 공동의 원수였던 일제와 싸우기 위하여 민족주의자들까지도 오히려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는 때, 오히려 일제보다도 더 미워했던 공산주의자들을 해치기 위하여 호로군과 손을 잡고 중동선상에서 반공산주의 활동을 해왔다는 사실은, 간적접으로 공산자주의 자들을 잡기 위하여 광분하고 있었던 일제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수 있단말인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