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 정문의 작은 사회과학 서점에서 알바를 한적이 있다. 좌우로 문을 열때마다 오래된 문은 어디선가 신음소리를 내며 캑캑거리며 멈췄고, 누군가가 서점 안에서 누군가가 살짝 들어 열어줘야만했다.낡은문마다 책광고가 덕지덕지 붙어있어 얼핏보면 헌책방이라고 오해하기 딱좋은 책방.
어느날 주인아저씨가 큰맘을 먹고 통유리로 문을 교체했고, 책광고는 책상이 있는 자리만 살짝 가릴 수 있을 정도만 하기로 했다. 덕분에 작은 책상 한귀퉁이에 세상에서 숨어 그해 여름내내 그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과 지나가는 자동차와 지나가는 개를 구경하며 한 계절을 보냈다.
가끔 주문한 책이 오는날은 누구보다 먼저 새책의 냄새를 맡기도 했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엔 누구도 오지 않는 침묵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툭툭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광석을 들으며 좋아하는 작가의 새책이 나오는 날은 그 앉은 자리에서 반나절쯤 한숨도 쉬지 않고 책을 읽고나면 멍하니 술취한것처럼 몽롱해지는 날이 가끔있었다.
몽롱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책읽기를 멈추지 않는 건 그 아릿한 기분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누군가는 수학문제를 풀어내고 난 뒤의 짜릿함같은 것. 내게 책을 읽는다는건 그 재미를 찾아가는 골방속의 여행이다.
다카노 가즈야키의 신작 제노사이드는 그런 '재미'라는 면에서 꽤나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작가 다카노 가즈야키는 첫 작품 13계단으로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 상이라는 에드가와 란포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전작 13계단을 읽고 추리소설 답지 않는 느릿한 구성과 너무 뻔한 범인잡기에 셜록 홈즈를 생각하던 나는 ‘흠 일본 추리소설과는 맞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다시는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신작 제노사이드는 추리소설이 아닌 사회소설로 알려졌고 간단히 읽은 리뷰는 꽤나 흥미진진했다.
제노사이드는 진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속의 진화는 인류에 대한 축복이 아닌 현생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의 종의 종말이다.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멸망했듯이 현재의 지성을 뛰어넘는 새로운 종이 나타난다면 현생의 인류는 종말을 맞이 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서로를 증오하지 않고, 자연을 착취하지 않는, 공존과 공생을 본능으로 갖춘 존재.
지구를 지배하는 인종을 지배하는 소수의 권력집단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그에 대한 희망없음에 작가는 더 나은 진화된 생물체가 이 지구를 지배한다면 파괴의 공포에서 벗어난 좀더 나은 지구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한다. 물론 더 이상 현재의 인류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비슷한 인류의 종말을 다룬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는 쿠바의 핵위기로 3차 세계대전의 공포가 전 지구를 휩쓸고 있을 1960년대의 이야기다. 엉뚱한 블록버스터로 만들어 원작과는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버린 영화와는 달리 소설속의 주인공은 차분히 자신이 현재의 인류의 마지막임을, 흡혈귀가 우리속의 전설로 영원히 이야기속을 떠돌듯 자신역시 다음 인류의 영원한 전설이 되는것을 기뻐하며 죽음을, 마지막남은 인류라는 종의 최후를 맞이한다.
제노사이드의 주인공들 역시 인류의 마지막을 예감한다. 신처럼 적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언제가는 지구를 장악할것을 알고 그들의 관대한 처분만을 기다릴수 밖에는 인류라는 존재임을 알고 그들에게 협조하기로 한다.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없는 세상’이라는 책에서 인류가 없어진다면 단 100년만에 지구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고 한다. 작가는 인간의 손길이 사라진지 50년이 되어 생태계가 살아난(!) 한국의 DMZ까지 탐사하며 인류가 없어진다는 것은 인류에게는 디스토피아를, 자연에게는 유토피아라고 이야기한다. 굳이 가이아 이론이 아니더라도 자연은 그 하나로 거대한 생명이다. 해월 최수운 선생은 6살 손자가 콩콩 뛰는 모습을 보며 ‘내 어머니의 가슴위에서 뛰니 내가 아프다’라고 이야기했다.
겨우 2도씨 올라간 날씨에 징글징글한 폭염과 폭우를 일상으로 겪는 지금의 우리 모습만 보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주변의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더불어 함께 살아감을 이야기하지 않고, 더 이상 나의 생명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첫댓글 제목을 보고 의미심장한 생각이 들긴 했는데. SF적인 뉘앙스가.... 궁금하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