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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摩尼山) 2
- 위 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 높 이 : 472,1 m
1. 일 시 : 2013. 3. 14. 07:30 ~
2. 장 소 : 마니산
3. 참석인원 : 21명
4. 등산코스 :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481-39(이삭펜션)입구 - 마니산 정상 - 참성단 -
마니산국민관광지주차장
5. 다녀온길 : 중앙고속 춘천IC - 서울. 춘천고속 춘천JC, 화도IC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김포한강로고속화도로 - 전등로 - 정수사방면 - 동막해수욕장방면 -
화도면 사기리 481-39 이삭펜션 입구
6. 오늘활동 상황
○ 07:30 --- KBS앞 출발(가평휴게소 경유)
○ 09:50 ---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481-39(이삭펜션)입구도착
○ 10:57 --- 들머리진입
○ 12:00 --- 참허동천 갈림길
○ 12:35 --- 참성단중수비
○ 12:39 --- 마니산 정상
○ 12:50 --- 정상 헬기장 점심식사
○ 13:28 --- 참성단
○ 14:00 --- 단군로 갈림길
○ 14:23 --- 매표소
○ 14:25 --- 마니산국민관광지주차장 도착
○ 14:50 --- 마니산국민관광지주차장 출발
○ 15:15 --- 대명항 도착(자유시간)
○ 16:36 --- 대명항 출발
○ 19:20 --- KBS앞 도착(구리, 춘천휴게소 경유)
7. 마니살 살펴보기
☐ 개관
-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고, 지금도 개천절에 제를 올리고, 전국체전의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한다. '77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마니산은 500m도 안되지만, 해발 0m에서 시작되므로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교통이 편리하고 주위에 유적지가 많아 탐방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정상의 참성단(塹星檀, 468m)까지의 등산로가 계단길로 포장된 이후에는 노약자나 초심자들에게도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계단길은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오른쪽 능선따라 계단이 없는 단군로(길)가 있다. 이 등산로는 비교적 완만하다. 중간 정도와 참성단 바로 아래 다소 가파른 구간이 2군데 정도 있을 뿐이다. 마니산에는 고찰인 정수사 등이 있고 사계절을 통하여 변화무쌍하여 그윽하기로 저명할 뿐 아니라 가을철 강도팔경의 하나로 손꼽혀 자연경관이 기이하기로 이름 나 있다. 참성단이나 정상에 서면 강하 명물 염전, 서해바다, 영종도 주변 섬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마니산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적지도 둘러 볼 수 있는 문화역사 산행지이기도 하다.
인기명산 100 중 66위
-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이 있고, 성화를 채화하는 마니산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산행지로 사계절 두루 인기 있다.
산림청 선정 100 명산
- 단군시조의 전설이 간직된 산으로 역사·문화적 가치 등을 고려하여 선정. 사적 제136호인 참성단(塹星壇), 함허동천, 사적 제130호인 삼랑산성이 있음. 또한 많은 보물을 보존하고 있는 정수사(淨水寺) 및 전등사(傳燈寺)등이 있으며,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이기도 함
8. 등산기행
□ 산행안내 준비
<마니산 등산안내도>
- 마니산은 갈 摩 신중 尼 자를 쓴다. 용의 턱 아래나 용왕의 뇌에서 나왔다는 보물 구슬 또는 심마니들의 은어로 ‘사람’을 이르는 말로 풀이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용의 턱 아래나 용왕의 뇌에서 나왔다는 보물 구슬 또는 불행과 재난을 없애 주고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하며 물을 변하게 하는 따위의 덕이 있다고 풀이한다. 마니산 이름에 얽힌 자료를 찾지 못하였지만 불교와 연관이 있을법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 모두산악회에서 2009. 11. 12 정수사 - 정상 - 참성단 - 마니산국민관광지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이미 다녀온바 있다. 그 당시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으나 동행하지 못하여 아쉬움을 갖고 있던 산 중 하나이다.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차일피일 하면서 오늘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탐방기회를 맞이하였다. 마니산은 강화8경 중 하나이며 단군신화의 얼이 서린 산이다. 강원도에는 태백산 천제단이 있는 반면 인천에는 마니산 참성단이 있다. 천제를 올리는 기능은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다만 강원도민체육대회 성화는 태백산 천제단에서 채화 봉송되는 반면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는 강화 마니산에서 채화 봉송된다. 또한 태백산 천제단을 3기가 있는 반면 마니산 참성단은 1기가 있는 것이 비교되었지만 규모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 마니산은 강화도 남서단에 위치하며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마니산을 중심으로 한라산과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다. 마니산이 단군이 제천할 정도의 명산으로 용이 승천하고 용마가 나왔으며, 신선이 사는 곳으로 72대 왕후장상이 나올 곳이라 한다.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성조께서 하늘에 제천의식을 봉행하신 참성단이 있으며 ‘88 세계 장애자 올림픽을 비롯 매년 전국체전시 성화를 채화 봉송하고 있는 민족의 영산이다. 등산로를 따라 918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노라면 서해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수 있으며, 동쪽 기슭으로 신라 선덕여왕 때 지은 정수사 법당 살문짝 꽃무늬의 아름다움도 즐길 수 있다.
- 강화에는 지석묘와 마니산의 참성단 등 고대사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고 고려시대 강화는 약 40년간 수도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과 강화도조약 체결 등의 현장이기도 하다.1) 이상과 같이 강화는 한국고대사에서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민족사 시작과 전개에 깊이 연관돼 있는 역사의 시원이며 국난극복과 호국충렬의 고장이다.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이 자손대대 겨레가 번영을 누리도록 하늘에 제사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다만 이 참성단 축조연대는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강화는 고려시대에는 몽골과의 대몽항전에서 국가수호의 숭고한 역할을 담당했고 임진왜란 때도 호국정신을 발휘했다. 민족사의 격동기 때마다 강화는 역사의 주도적 위치에서 저항과 호국정신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군민들의 이런 끈기 있는 저항 및 호국정신은 군민들의 수준 높은 역사의식과 뿌리 깊은 애국심이 강화가 수도와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지리적 조건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숙명적 결과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강화의 역사적 위치는 단순히 지방역사라기보다 여러 시대에 걸친 통시대적 민족사로 봐야 할 것이다.고구려시대 혈구로 불렸던 강화는 신라 경덕왕 때 해구군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전기 강화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고종은 몽골과의 항전 때 1232년(고종 19) 몽골 침입을 당해 강화를 수도로 삼은 뒤 군으로 승격시키고 강도(江都)로 이름을 지었다. 충렬왕 때 강화는 인천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고 1377년(우왕 3)에 부로 승격되었다. 1906년 다시 강화군이 되었고 1910년 교동군에서 삼산면을 편입하고 1914년 4월 1일 교동군을 편입시켜 영역을 확대하였다.
- 역사적으로 대륙으로부터 온갖 외침들에도 굴하지 않고 버텨왔던 우리나라는 19세기말 다시 프랑스와 미국, 일본 등 제국열강들의 침입을 받고 개항을 강요당했다. 강화는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미국과의 신미양요의 전쟁을 겪었다. 1875년 일본과의 무력충돌인 운양호사건에 이어 조선은 드디어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항을 했다. 건국 후 한국전쟁 때도 강화 주민들은‘강화향토방위특공대’란 유격대를 조직해서 공산군에 저항, 그들을 격퇴함으로써 강화 방위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런가 하면 강화와 인접한 황해도 연백군 지방 8240독립 부대가 적진 중에서 혈전을 벌이다가 북한군의 수적압도에 눌려 부득이 남하, 강화에 거점을 두고 항전, 섬을 사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 강화의 연혁을 살펴본다.
▸상 고 시 대 : 갑비고차(甲比古次)
▸400 년 : 고구려 광개토왕시 혈구군(穴口郡)으로 호칭
▸742 년 : 신라 경덕왕시 해구군(海口郡)으로 개칭
▸939 년 : 고려 태조시 강화현으로 개칭
▸1377년 : 고려 우왕시 강화부로 승격
▸1413년 : 조선 태종시 강화도호부 설치
▸1627년 : 조선 인조시 강도로 승격
▸1895년 : 조선 고종시 강화군으로 개칭
▸1915년 : 교동군을 강화군에 편입
▸1962년 : 볼음출장소 설치
▸1973년 : 강화면을 읍으로 승격
▸1995년 :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
- 오늘 나들목이 소재한 화도면의 연혁과 지역특성을 살펴본다. 면소재지는 상방리이다. 마니산이 솟아 있는 중앙부는 산지를 이루며, 서쪽과 남쪽은 서해에 면해 있다. 내리·흥왕리·사기리 일대에는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소규모의 평야가 펼쳐져 있다. 유물·유적으로 정수사법당(보물 제161호)·참성단(사적 제136호) 등이 있으며, 사기리의 탱자나무가 천연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방(上坊)·내(內)·문산(文山)·덕포(德浦)·사기(沙器)·동막(東幕)·흥왕(興旺)·여차(如此)·장화(長花) 등 9개 동리가 있다. 화도면은 1706년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 민진원의 간척사업으로 강화도에 연육 되었다가 1937년 면명 하도면(下道面)을 화도면(華道面)으로 개칭하였다. 면사무소는 1913년 사기리에 건립하였으나 1923년 내리 산3번지로 이전항 후 1957년 상방리 1275번지로 다시 이전하였다가 1988년 현재의 상방리 840번지에 신축,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또한 화도면은 민족의 성지인 마니산 참성단과 정수사, 함허동천야영장, 동막해수욕장 등 관광자원이 집중 분포되어 있는 관광지이다. 마니산이 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마니산을 중심으로 마을이 남북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니산 등산지도>
- 강화군청에서 안내하는 등산코스는 화도버스종점 - 참성단, 연장 : 약2.4km, 소요시간 : 약 48분 코스, 매표소 - 정수사, 연장 :약5.1km, 소요시간 : 약 1시간 42분 코스, 매표소-함허동천, 연장 : 약5.1km, 소요시간 : 약 1시간 42분 코스와 보조코스가 있다. 마니산은 마니산국민관광지매표소를 기준으로 정수사나 함허동천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오늘은 위 코스 중 매표소에서 정수사로 이어지는 코스를 기본코스로 보고 이를 역으로 준비하였고 현장의 상황에 따라 보조코스 연계를 염두에 두고 안내준비를 마쳤다.
□ 등산안내
<단체기념사진>
- 지난 주말까지 목요산행신청 방이 잠잠했었는데 월요일에 접어들면서 신청인원 20여명을 쉽게 넘어섰기 때문에 30명 선 확보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한겨울이 지나면서 꽁꽁 얼어붙었던 산행의욕이 되살아나기를 학수고대하였기 때문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고객의 입맛에 딱 맞아 떨어지는 산이었다면 산행심리를 유발하여 기대효과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마니산이 주는 이미지가 강하게 기능하지 못한 듯 기대를 접고 말았다.
- 당일 주간날씨는 구름조금 끼고 -4 ~ 9℃ 분포를 보일 것으로 예보하였고, 2013. 3. 13.08:00기준 날씨예보는 오전 구름조금 끼고 오후 맑겠으며 기온은 -4 ~ 6℃분포를 보일 것으로 예보하였기 때문에 좋은 산행환경을 예보할 수 있었는데 딱 맞어 떨어지는 바람에 강화도 일원에 점점이 이어진 이름 모를 섬들을 한 눈에 살피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 빠른 길 찾기 정보에 의하면 KBS춘천방송총국에서 강화군 화도면 정수사까지 162,2km/2시간39분으로 나타났다. 이정도의 제원이라면 수도권을 통과하면서 교통체증에 걸리지 않는 한 10:00경 들머리진입이 무난할 것으로 판단하였는데 이 역시 딱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10:00이전에 여유 있게 입산하였다. 노련한 권 희 성기사님의 길눈이 더욱 돋보인 하루였다.
- 오늘은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기본코스로 준비했던 정수사 - 매표소 구간 5,1km/1시간42분 코스는 문도 열어보지 못하고 일찌감치 접어치웠다. 정수사 입구에서 정수사 까지 접근 시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넉넉잡아 2시간30분이면 일정운영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익혀 뒀던 보조코스를 연계하여 4시간대 코스인 사기리에서 입산하여 마니산 정상과 참성단을 경유하여 마니산국민관광지주차장으로 하산하는 코스로 일정을 조정하여 운영하였다. 참성단에서 날머리 하산길도 당초에는 우회로인 단군로를 경유할 요량이었지만 하산일정 운영시간을 감안하여 단군로에서 직진로인 계단길로 조정하여 운영하였다.
- 들머리를 조정하는 바람에 시작부터 애를 먹었다. 버스를 동막해수욕장 방향 길옆에 잠시 정차시킨 채 “산애들애” 라는 상호 간판이 붙은 식당 주인장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들머리는 맞는데 길이 엄청 멀다고 엄살을 부렸다. 얼마나 먼데요? 라는 질문에 아마 정수사보다 한 시간 정도는 더 길것이라고 퉁명스런 답변을 던지고 통화 중이던 손소리통을 들고 수다를 떠는 바람에 더 이상 물어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 화도면 사기리 481-39번지 소재 이삭펜션방향으로 진입하면서 들머리를 식별할 수 있는 이정표나 산악회 안내리본 등 안내시스템이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마니산국민광광지로서 입장료까지 징수하는 산이라고 보기 무색할 정도였다. 아무리 보조코스라고 할망정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 이삭펜션 진입로로 접어들면서 또 한 번 혼란을 겪었다. 전방 사면으로 이어진 등산로로 접어 들면서 후미에 계시던 총무님으로부터 거기는 등산로가 아니니 되돌아 내려오라는 다급한 전갈이 왔다. 그곳은 사설 농장으로 접근하는 길이라고 농장여주인께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흥분하여 난리부르스를 치는 바람에 원점으로 다시 돌아와 다시 출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 입산하면서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였지만 능선 안부에 이르면서 강화군 일원 서해바다에 점점이 이어진 이름 모를 섬들과 눈이 모자라게 펼쳐진 갯벌을 보면서 오랜만에 가슴 뻐개지는 듯한 시원함과 청량감을 맛보았다. 능선에서 이정표 없는 정수사 갈림길까지 오는 동안 능선길 좌우로 옹기종기 전개된 바위 축조물들이 신비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정원사가 가꿔 놓은 정원의 석조물을 보는 듯 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고 숙련된 석공이 잘 다듬어 쌓아 놓은 듯 한 축조물에 탄성이 터지기도 하였다. 선발팀에서 강화가 고향이신 배 흥 원 길초롱님과 동행하는 바람에 사방으로 전개된 시원한 조망을 즐기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섬이나 지형지물에 대한 조언을 들으면서 쉬엄쉬엄 거닐다 보니 어느새 정수사 경내가 눈에서 사라지고 급사면 암릉길 시작지점 안부에 이르렀다.
<정수사>
- 오늘 당초에는 정수사입구에서 입산할 요량이었지만 사기리 이삭펜션입구로 날머리를 조정하여 운영하는 바람에 정수사를 경유하지 못하고 능선에서 경내를 내려다보면서 원경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정수사 경내를 원경으로 한 컷 담으려했었지만 나뭇가지등 현장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창건하여 정수사(精修寺)라 했던 것을 조선 세종 5년(1423) 함허대사가 중창하고 정수사(淨水寺)로 고쳤다. 특히 건물 후면 공포는 건축당시의 세부 건축 형식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고, 1957년 보수공사 중에는 숙종 15년(1688) 수리 당시 세종 5년 에 중창되었음을 보여주는 상량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마니산 동쪽에 자리잡은 정수사는 전등사, 보문사와 더불어 강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찰중의 하나이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8년(639)에 회정선사가 마니산의 참성단을 참배한 후 이곳 지형을 보고 불자가 가히 삼매 정수할 곳이라 하여 사찰을 세우고 정수사(精修寺)라 했는데 그 후 함허대사가 절을 중수한 후 법당 서쪽의 맑은 물을 발견하고 정수(淨水)로 바꾸었다.
- 정수사 법당은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창건하여 정수사(淨修寺)라 했던 것을 조선 세종 8년 (1426)함허대사(涵虛大師)가 수축할 당시 사찰 동편에서 맑은 물 이 나와 정수사(淨水寺)로 고쳤다 한다. 이 절의 법당은 조선 초기의 주심포식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집이며 정면 툇마루 부분은 후대에 붙여 건축한 것으로 보여 당초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집이었다고 추정된다. 이 법당의 문짝은 통나무 판을 이용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정수사에 얽힌 전설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 각시바위의 전설 ♣
- 고려 말 원나라의 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정수사에서 수도 중이었다. 한림학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는 누구인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삼매경(三昧境)에 빠져 있었다. 한편 곧 돌아온다고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는 고려 땅으로 남편을 찾아 나섰다. 고려 땅에 들어와 갖은 고생 끝에 강화도 정수사에 남편이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힘이 솟구쳤다. 한 걸음에 달려갔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남편의 태도는 달랐다. 아이들과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원을 해 보았지만 남편은 도을 닦기 위해서 부득이 더 머물러야겠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고생 고생 하며 찾은 남편을 데리고 가지 못한 아내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산에서 내려온 아내는 치마폭에 얼굴을 가린 채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그녀가 몸을 던진 그 자리에 괴석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각시바위라 불렀다. 한림학사를 함허로 바꾸고, 각시바위를 함허의 처라고 얘기되는 설화도 전한다. <자료출처:강화로닷컴>
<함허동천 갈림길>
- 들머리에 든지 2시간여 만에 처음 접하는 이정표였다. 이 지점까지 오는 동안 관할 소방서에서 설치한 구조신고지점 시설물은 여러 곳 있었지만 이정표는 처음이었다. 여기서 참성단 1km, 정수사 0,7km, 함허동천 1,8km 이다. 여기서 참성단까지 1km 구간이 오늘의 백미구간이다. 이정표 설치지점에서 나무계단을 오른 다음 암릉 길은 안전로프가 설치되어있다. 일부 위험구간은 우회로가 개설되어 있어 큰 부담 없이 좌우 시원한 조망을 즐기면서 암릉에서의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다.
- 갈림길 계단을 올라 능선안부에 오르면서 특별한 인연이 확인되는 순간을 우연히 맞이하였다. 선발팀과 동행하여 본인 바로 앞에 가신 양구 이 영 국님께서 암릉으로 접어들면서 본인 옆에 무리지어 있던 여성 팀 다섯 명 중 한분께서 어! 저 앞에 가신 분 양구에서 많이 보신 분 같은데 여길 다 오셨네? 하시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모른척하고 그냥 지나칠 내가 아니잖은가? 네! 저 분 양구에서 오신 분 맞습니다. 잘 아시는 분인가요? 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와 동시에 양구 형아! 시방 빨리 와 보셔요. 라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고함들 쳤다. 주변에 있던 모든 분들의 시선 집중을 받기는 하였지만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이 분들의 상봉 기회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그 인연이 마니산 정상까지 이어져 기념사진까지 남기는 개가를 올렸다. 우리 모두산악회 카페를 소개한 후 모산사진방 방문을 권유하기도하였다.
- 함허동천 들머리는 간과하였지만 함허동천으로 하산하는 길목을 확인한 바 있기에 소개하고 넘어간다.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가 마니산 정수사(精修寺)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堂號)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기화가 썼다는 '涵虛洞天' 네 글자가 남아 있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니산 서쪽 기슭에 펼쳐져 있으며, 빼어난 산세를 끼고 곳곳에 거대한 너럭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이 바위들을 넘나들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특히 계곡 한 켠에 200m에 달하는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마니산의 절경으로 꼽힌다. 계곡 아래에는 한국 최고의 야영장으로 꼽히는 함허동천 야영장이 자리B잡아 여름철이면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5개의 야영장 외에 체력단련장· 극기훈련장· 팔각정· 샤워장 등 각종 부대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돌담을 두른 주변의 초가에서는 민박도 할 수 있어 사계절 관광지로 이름이 높다
<참성단 중수비>
- 함허동천 갈림길에서 25분 남짓 지나면서 참성단중수비를 경유하였다. 이 지점에 참성단 안내문 2개와 자연석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겨 넣은 조선조에 세워진 참성단중수비가 있다. 비문 내용을 인식할 수 없었지만 이 중수비는 18세기 조선조에 이르러 참성단을 새로이 보수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 이 중수비는 참성단(인천시사적 제136호)을 새로이 보수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가파른 바위 윗면을 손질하여 그 위에 비문을 새겼다. 마니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참성단은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를 지내던 최석항이 관내를 순찰하며 마니산에 올랐다가 이곳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시 전등사 총섭이었던 승려 신묵에게 명하여 새로이 고쳐 짓도록 하였다. 비는 조선 숙종 43년(1717) 5월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비문에는 ‘참성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연, 참성단에 대한 선조들의 뜻 등에 관한 기록들이 함께 적혀 있다. 이 비는 강화군 마니산(摩尼山)에 위치한 사적(史蹟) 제136호 참성단(塹星壇)을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비이다. 가파른 암벽면에 가로 50㎝, 세로 105㎝ 크기의 비 윤곽을 만들고 그 안에 8행 238자를 새겨 넣었다. 주요 내용은 당시 강화유수(江華留守) 최석항(崔錫恒)이 관내를 순찰하다가 마니산에 올라 참성단이 무너진 것을 보고 선두포별장(禪頭浦別將)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 총섭(傳燈寺 總攝) 신묵(愼默)에게 명하여 보수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마니산 정상석>
- 12:40여분이 넘어가면서 마니산 정상에 이르렀다. 들머리에 든지 2시간40여분 걸렸다. 정상주변에는 산불감시초소와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고 이곳에서 참성단 전경이 지척에 건너다보인다. 정상에는 돌로 된 정상석은 없고 마니산 472,1m를 알리는 원형 나무기둥이 세워져 있다. 마니산이 주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정상의 모습이다. 돌로 된 정상석에 길들여진 탓일 듯 싶었다.
- 요즘 전국각지에서 산불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심각한 상황임을 마니산 정상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참성단 전경을 디카에 담기 위해 산불감시초소에 접근하면서 감시요원이 근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들머리에서 단속이 이뤄지는데 여기는 정상까지 근무요원이 상주하고 있었기에 요즘의 심각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 정상 헬기장 한편에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 준비를 하였다. 즉석에서 라면을 조리할 준비가 다 돼 있었지만 요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자제하고 있던 찰나에 산불감시요원이 나타났던 것이다. 아뿔싸! 불을 지폈더라면 큰 봉변당할 뻔 한 상황이 여지없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 상황을 생각하니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아찔하였다. 그럴 즈음 양구 형아께서 농담 삼아 선생님! 여기서 시방 라면 끊여 먹어도 돼요? 란 퉁명스런 질문공세가 터져 나왔다. 그 선생님 답변이 걸작이었다. 네! 끊여 드셔도 되죠? 그런데 불을 피울 수 없습니다. 그분의 명답에 점심식사 전에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 선생님 식사 안하셨으면 저희와 함께 드시죠? 로 현장의 어색한 분위기에서 탈출하기는 하였지만 그 분의 노련한 위트에 박수를 보냈다.
- 강화도 6대산은 마니산, 혈구산, 고려산, 별립산, 해명산, 진강산을 일컫는다. 마니산은 강화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마니산은 해발472.1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 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참성단은 그 중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올라서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 섬이 보이고 맑은 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인다고 한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단군은 북한의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그 후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고 다음에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산신이 되었다 라고만 되어있어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여지승람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후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에 옮겨 산신이 된 후에 이 마니산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
참성단 전경>
- 마니산 정상에서 참성단을 5분여 거리에 있다. 참성단 주변은 철조망이 둘러쳐 있었지만 출입문이 개방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철조망 앞에는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신성한 제단으로 전하고 있으며 사적 제136호로 지정된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그러나 무분별한 출입과 행동으로 참성단이 심하게 훼손되고 있어 부득이 참성단 출입을 통제하오며, 관광객 여러분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아래와 같이 일부 개방하오니 이점 양해하시어 참성단 보호와 보존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참성단 개방시기는 동절기 오전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절기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다.
- 마니산 상봉(472.1m)에 자리 잡고 있는 참성단은 단군 기원전 51년(BC2282)에 단군 왕검께서 민족만대의 영화와 발전을 위하여 춘추로 하늘에 제사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다.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았으며 이곳 마니산은 백두산 천지와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한다 둥근단의 지금은 8.7m이며, 네모난 단은 6.6m의 정방형 단이다. 고려 원종 11년 (1270)에 참성단을 보수한 기록이 있으며, 인조 17년(1717) 강화유수 최석항이 전등사 승 신묵에게 명하여 참성단을 수축케한 금석문이 전한다. 해마다 음력 10월 3일에 천제암궁지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또한 전국체육대회 때마다 대회장에 타오르는 성화는 이곳에서 7선녀에 의해 성화가 채화되어 대회장을 밝히고 있다.
<참성단>
- 참성단의 명칭은 참성대(塹城臺)19)·참성 초단(醮壇)20)·마리산 초단21)·마니산 초성단(醮星壇)22)·마리산 제성단(祭城壇)23) 등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은 역시 참성단이다. 그렇지만 한자로는 참성단(塹星壇)·참성단(塹城壇)·참성단(參星壇)으로 표기하였다. 때문에 현재 참성단을 표기하는데 상당한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예컨대 문화재관리국에서 펴낸 각종 자료에서는 참성단(塹星壇)이라 하고,24) 현지의 안내판에는 참성단(塹城壇)이라 하였다.25) 그렇다면 어느 것이 타당한가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참성단(塹城壇)이 올바른 표기라고 생각한다. 참성단(塹星壇)의 경우 ≪고려사≫나 ≪세종실록≫ 지리지 같은 보다 앞선 시기의 문헌에 나타나지만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또 참성단(參星壇)은 영조 연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서 처음 확인되며,26) 이후 1783년(정조 7)경 편찬된 ≪강도신지(江都新志)≫와 1932년에 편찬된 ≪속수증보 강도지≫ 등에서도 참성단의 일명으로 전하고 있다. 참성(參星)은 28숙(宿) 중 서쪽에 있는 별자리로 모두 10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27) 따라서 참성을 제사하는 제단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그러나 이 표기는 후대의 기록에 보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참성이란 별만을 특별히 제사하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듯 참성단(塹星壇)·참성단(參星壇)이 잘못된 것이라면, 왜 별 성(星)자를 사용했는지가 의문이다. 후술한 바와 같이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이곳에서는 별에 제사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표기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 고려사 지리지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참성단을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참성단은 고조선시대에 이미 존재한 것이 된다.38)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반화되지 않았다. 공민왕 때 밀직부사를 지낸 이강이 참성단을 노래하면서 “돌로 쌓은 신령스런 제단은 태고 전의 일일세(疊石靈壇太古前)”라고 했는데,39) 참성단이 오래된 것임은 인정하면서도 단군과의 관련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강은 그의 아버지 이암이 강화 선원사를 자주 드나들어서40) 강화에 대한 지견이 상당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참성단과 단군을 관련짓지는 않고 있다. 이색은 <마니산기행 차운산상작(摩尼山紀行 次韻山上作)>이란 시에서 “이 단은 하늘에서 이룬 것은 아니지만,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此壇非天成 不知定誰築)”41)고 하여 참성단 축조자를 모른다고 했다. 이렇듯 당시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참성단을 단군의 제천단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다는 전승의 신빙성에도 의심이 간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하나는 전승을 믿고 참성단을 고조선의 유적으로 보는 것이다. 강화에는 고인돌이 다수 분포되어 있다.
<참성단 제단>
- 참성단의 의례는 고려·조선시대에 왕의 명의로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이곳에서의 의례는 고려 원종처럼 국왕이 직접 주재한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관리가 국왕을 대신하여 제사했다. 이때 파견되는 관리를 참성초행향사(塹城醮行香使)라 하는데,67) 원래는 왕의 비서격인 대언(代言)이 파견되었으나,68) 1430년(세종 12) 이후로 그 격을 높여 2품 이상의 관리를 파견했다.69) 그러나 1484년(성종 15)에는 정4품의 호군(護軍)이 행향사로 파견된 사실로 미루어,70) 이 규정이 어느 정도 철저하게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행향사는 참성단 아래의 제궁(齋宮)에 머물면서 제숙한 다음, 제의를 거행했다.
- 참성단의 형태에 대해서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처음 언급이 보인다. 이에 의하면 참성단은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단의 높이는 10척이다.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근데 단의 윗면은 각 6척 6촌이며 아래는 각 15척”이라고 한다. 이후 ≪신증동국여지람≫·≪동국여지지≫·≪강도지≫ 등 역대 지리지가 이 기록을 답습하였다. 여기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제단의 형태가 상방하원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참성단은 제단부와 제단 앞의 전정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높이 약 1m 가량의 옹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정부를 지나면 제단부가 있는데, 이것은 계단과 방형의 제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단을 통해 방형의 제단 위로 올라가 뒷면 아래를 보면 제단이 반원형의 축대 위에 올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방하원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원형으로 쌓은 하단 위에 방형의 제단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에 이종휘는 ≪동사(東史)≫ 신사지(神事志)에서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하였다.100) 하늘은 음을 좋아하고 땅은 양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제단은 반드시 수중의 산에 만든다. 그리고 위는 모나고 아래가 둥근 것은 땅과 하늘을 의미해서 만든 것이며, 또한 하늘과 땅을 함께 제사하는 이유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제단의 위가 네모난 것은 땅을 상징하는 것이며, 아래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데 ≪주역≫의 64괘 중 봉괘(泰卦)가 바로 건하곤상(乾下坤上)의 형태이다. 즉 하늘을 상징하는 건()이 아래에 있고 땅을 상징하는 곤()이 위에 있다. 이것은 하늘의 양기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고 땅의 음기는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이 있는데, 건·곤의 위치가 바뀜으로서 음양의 2기가 교합하고 조화를 이루어 만사가 형통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 참성단 출입문을 빠져 나오면서 진행방향 왼쪽으로 가면 단군로를 거쳐 우회하여 마니산국민관광지로 하산하는 길이고, 직진하면 성화 채송로인 계단길을 거쳐 국민관광지로 하산하는 길이다. 매표소 0,3km 전방에서 합류하여 하산한다. 오늘 당초 일정에는 단군로를 거쳐 하산할 요량이었지만 4시간대 운영시간을 감안하여 0,7km 짧은 계단길을 선택하였다.
<단군사당(단묘)>
- 단군로이든, 계단길이든 단군사당을 비켜간다. 오늘 당초일정대로 단군로로 하산하였다면 잠시 시간을 할애하여 단군사당 (단묘)와 환인, 환웅, 환검 석상을 둘러볼 요량이었는데 이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음을 기약해 보지만 막연한 위안일 뿐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마니산이 주는 작으면서도 강한 이미지에 매료되어 다시 기회를 잡는다면 함허동천 - 매표소 구간과 단군로를 연계할 것을 염두에 두었다. 비록 경유하지는 못하였을망정 참성단에 이어 단군왕검에 대한 자료를 살펴본다.
- 단군(檀君 또는 壇君) 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한민족의 시조이자 고조선의 건국자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시조로 추앙받았으며 대종교 등의 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환검(桓儉)이라고도 한다. 단군은 직책으로 보이며 왕검, 왕험(王儉)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역사서중에 하나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동국통감 외기》 등에 나오는 한민족의 으뜸가는 조상의 이름이다.
- 단군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阿斯達) 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고조선을 건국하여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지며 단군의 뒤를 이어 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한다. 단군은 고조선의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1000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하는 기록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이미 단군은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누대에 걸친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 단군에 대한 기록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에는 중국의 역사서 《위서(魏書)》[5]와 현전하지 않는 한국의 역사서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다. 《위서》에는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두고 조선(朝鮮)을 건국했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으며,《고기》에는 단군의 출생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간략한 생애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단군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후에 다시 아사달로 수도를 옮겨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기자가 조선에 오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다시 돌아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으며 그때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단군은 ‘제단 단(壇)’으로 표기되어 있다.《제왕운기》에는 단군의 출생과 생애에 대해 약간 다른 기록이 전해진다. 《제왕운기》는 《본기(本記)》를 인용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손녀와 신단수(神檀樹)의 신이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단군은 조선을 건국하고 1028년 또는 1038년 또는 1048년[6] 동안 다스리다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제왕운기》의 단군은 ‘박달나무 단(檀)’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단군이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동천왕 21년(247년)조이다.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의 기록에 세주로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원문,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으로 등장한다. 인명(人名)으로 왕검이 등장하는 것은 이 기록이 최초이며 일반적으로 이를 단군왕검으로 이해한다. 인명이 아닌 경우 위만이 도읍하였던 고조선의 수도에 왕검 또는 왕험(王險)이 나타나기도 한다.《삼국사기》에는 선인 왕검에 대한 기록과 함께 선인 왕검이 왕이 되어 도읍한 곳이 왕험이라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 외에《규원사화》,《단기고사》,《환단고기》 등 근대에 이르러 등장한 단군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이들 기록은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여 인정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일부 재야사학자 및 일부 네티즌들은 이러한 기록을 내려오던 역사를 정리하여 기록하였을 뿐 서술된 내용은 사실이라 주장하고 있다.
- 단군은 고려 말, 대몽항쟁 시기에 주목받기 시작하여 조선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 세종 때에는 평양에 단군과 동명왕을 모신 사당을 지어 국가적으로 제사를 올렸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사가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외세의 각축에 대항하는 한민족의 구심점으로 대폭 강조되어 단군교(檀君敎)와 같은 종교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 부각된 단군은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로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종교 및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단군 시대의 역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부풀린《대동사강》,《규원사화》등의 위서들이 편찬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일제 혹은 친일파들이 단군을 종교적·학문적으로 이용하여 민심을 무마하려 하거나 일선동조론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악용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남한의 단군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 사회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중점을 두었다. 단군왕검은 고조선 사회의 제주이자 군장으로, 단군은 대제사장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으며 왕검은 국가를 통치하는 대군주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제정일치의 지도자이다. 방언의 분포와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남선은 무당이 ‘단골’로 불리는 것을 주목하여 단군을 제사장의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단(檀)을 제터(壇)의 다른 표현이라 하여 단군을 ‘壇君(단군)’으로 표기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최남선의 지적에 대해 무녀를 당골네 라고 부르는 것은 무녀가 서낭당이 있는 고을에 산다고 하여 ‘당골네’로 부르는 것일 뿐, 단군과는 관련이 없다는 지적이 있다. 북한에서는 광복 이후 단군 및 단군신화를 고조선에서 정치권력이 성립하는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진 건국신화로 보는 것이 기존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1994년에 단군릉을 발굴할 무렵부터 입장을 바꾸어 단군 신화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고 단군이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단군은 한민족 최초의 지배자로서 출생·건국·무덤이 모두 평양에 있다고 주장한다. 평양직할시 근처에는 북한이 발굴하여 재건한 단군릉이 있으나,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 남한 학계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갑작스러운 입장 변화에 대하여 남한의 역사학계는 주체사상이 북한의 역사관으로 강조되게 된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자료출처 : 위키백과>
<환인, 환웅. 환검 석상>
- 단묘 건축물 뒤편에 환인(桓因)환웅(桓雄)ㆍ환검(檀君) 3신(三神)의 석상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웅은 환인의 서자(庶子)로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인간 세상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환인은 아들의 뜻을 알고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고 인간 세상에 내려가 다스리도록 하였다.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 동굴에서 함께 살던 곰과 호랑이가 항상 사람이 되고 싶다고 환웅에게 빌었고, 환웅은 쑥과 마늘을 내려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하였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으며, 곰은 환웅이 시킨대로 쑥과 마늘만 먹으면서 동굴 속에서 삼칠일(三七日 : 21일) 동안 수도한 끝에 여자가 되었다. 웅녀(熊女)는 아이를 낳고자 하였으나 아무도 결혼해주지 않자 다시 환웅에게 빌었고, 환웅은 사람으로 변신하여 웅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이가 단군왕검이라고 한다.
<서해(西海)바다>
- 서해바다는 점점이 이어진 섬과 눈이 모자라게 펴려진 드넓은 갯벌이 동해바다와 비교되기 때문에 접하면서부터 그 느낌 자체가 남달랐다. 금년 들어 처음 접해보는 서해바다이기에 서해바다의 대강을 살펴본다. 서해바다는 한반도 서쪽에 있는 바다이다. 면적 40만 4,000 ㎢, 남북길이 1,000㎞, 동서길이 700㎞이며, 수심은 20~80m 정도, 최대수심 103m, 평균수심 44m이다. 황허 강[黃河]에 의해 운반된 중국 내륙지방의 황토 때문에 바닷물이 항상 누렇게 흐려 있어서 황해라고도 부른다. 국제 수문기구에 의하면 동중국해와의 경계는 제주도와 양쯔 강[揚子江] 하구를 연결하는 선으로 보고, 북쪽은 랴오둥 만[遼東灣]과 산둥 반도[山東半島]를 잇는 선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보하이 만[渤海灣]까지를 서해의 범위로 본다. 겨울에는 한랭한 북서계절풍이 강하며, 여름에는 남동풍 및 남서풍이 미약하게 분다. 안개는 봄에서 초여름까지 섬과 해안 돌출부 주위에서, 여름에는 해저 냉수괴(冷水塊)가 남아 있는 경기만 북쪽에서 남해연안까지에서 발생한다. 표면수온은 대륙성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25~27℃ 내외, 겨울에는 2~8℃ 내외이다.
- 신생대 제4기의 해수면 변동을 고려할 때 최후 빙하기의 해수면은 현재보다 100m 이상 낮아 서해는 중국 대륙과 연결된 평탄한 육지였다. 이후 해빙기에 해수면이 높아져 바다가 되었다. 서해의 해저에는 한국과 중국의 해안선을 따라서 사퇴가 형성되어 있고, 양쯔 강 하구에는 대(大) 양쯔 사퇴(砂堆)가 동중국해 경계지역에 발달했다. 따라서 양쯔 강 하구에서 300㎞ 해역에 이르기까지 수심이 30m 정도에 불과하며, 서해의 수심의 축은 한국 서해안 쪽으로 더 치우친 대략 125°E선을 따라 형성되었다. 서해의 어장은 수심이 얕고 조류가 급해 바닷물이 항상 혼탁하기 때문에 플랑크톤이 동해의 1/2 정도이나, 하천에서 유입되는 영양염류가 풍부하고 대륙붕과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 어류의 산란장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봄에 수온이 올라가면 조기·갈치·가자미·병어·가오리·넙치·민어 등 회유어족이 제주해류를 타고 북상하며, 겨울에는 한랭한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수온이 매우 낮아지기 때문에 난류성 어족이 남하한다.
- 서해안의 대부분은 조차(潮差)가 매우 큰데, 특히 아산만과 경기만은 조차가 약 8.6m로 한국의 최대 조차지이다. 서해안의 조차는 인천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져서 남포 6.2m, 용암포 4.9m, 군산 6.2m, 목포 4.1m이다. 서해안의 높은 조차를 조력발전에 이용할 경우 한국의 잠재 조력자원은 161.7만kW로 예상된다. 이와 같이 서해는 조차가 커서 얕은 해안의 해협이나 반도의 첨단부에서는 급격한 조류가 나타나 연안항해에 위협이 되기도 했으나, 한반도와 중국대륙 간에는 이미 BC 300년 전부터 꾸준히 해상 교류를 해왔다. 최근 한국과 중국 간의 경제협력교류가 확대되면서 서해안의 개발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대규모의 방조제가 축조되고, 공업단지가 조성되며, 항구시설의 확장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영종도에 대규모 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서해는 동북아시아의 중심무대로 떠오르고 있다.(자료출처:백과사전)
<대명항 자유투어>
- 마니산국민관광지 대형차주차장 내에서 취사행위나 음식물 섭취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오늘 하산행사는 귀로 버스 내에서 간소하게 치를 요량이었다. 그러나 오늘 일정운영이 예상시간대에 무난히 마무리된 관계로 해가 중천에 있었다. 아침 춘천을 출발하면서 버스 내 분위기가 하산 후 행사에 귀추가 주목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대장님! 오늘 하산한 다음 어디가요? 라는 질문공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냥 하산한 후 분위기를 지켜봐 가면서 안내하겠습니다. 라고 얼버무리기는 하였지만 산행 내내 먹자면 먹고, 가자면 가는 거지 뭐? 하고 편하게 마음먹었었는데 막상 닥치고 나니 묘안이 없었다. 소수의견을 무시하더라도 동해안 갔을 때처럼 경비를 갹출할까 하다가 자유 투어 형식으로 방향을 잡았다. 강화가 고향인 배 흥 원 길초롱님의 자문을 받아 대명항으로 목적지를 정하였다.
- 대명항에 도착하면서 진로를 잡지 못하고 잠시 우왕좌왕 하였지만 어시장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팀이 이뤄지면서 어물 쇼핑 조, 횟감 조, 눈 팅 조 등으로 조가 편성되어 분위기가 잡혔다. 단체 활동의 일사 분란함을 보이지 못한 단점이 있었는가하면 자유분방한 가운데에서도 각자 기호에 맞는 자유투어의 장점이 있었기에 그런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갖았다. 주차장 한편 휴식 공간에 설치된 간이 식탁에 자리를 잡고 회포를 풀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이 공간마저 없었다면 초라하게 방파제 신세를 질 뻔 한 하루였다. 여기서는 이지역이 고향이신 배 흥 원 길초롱님의 친구 분들이 왕림하시어 환송해 주셨다. 역시 고향은 좋은 것이여! 그 분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작별하던 순간이 다시금 떠올라 가슴 뭉클하게 하였다.
□ 산행을 마치고
- 오늘 마니산을 다녀옴으로서 강화 6대산인 마니산, 혈구산, 고려산, 별립산, 해명산, 진강산 중 고려산, 해명산과 더불어 3곳을 다녀온 셈이다. 강화에서 제일 높고, 강화 8경 중 제3경이며 단군왕검의 얼이 서린 산이기에 감회가 깊었고 새롭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마니산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느꼈던 것 보다 더 크고, 아름답고, 스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봄이 오는 길목에서 서해바다와 더불어 봄기운을 만끽하는데 한 점 모자람이 없는 일상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 당초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대로 상행일정을 조정하여 운영하는 바람에 사기리에서 정수사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능선 암름의 아기자기한 풍광에 푹 빠져 매료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고, 단체입장료 일인당 1,300원씩의 경비를 절감하는 부대효과를 얻은 셈이다. 전체 운영시간을 4시간대로 잡고 운영하다 보니 하산 길도 단군로에서 계단로로 조정하였지만 한 점 후회는 없었다. 전국체전 성화 채송로를 탐방할 수 있는 기회와 더불어 마니산 종주코스나 다름없는 긴 코스를 예정된 시간대에 소화할 수 있는 개가를 올렸으니 더 바랄 것 없는 일상이었다. 미련이 남는다면 함허동천이나 단군사당(단묘)에 대한 미련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는 하루일정으로 마니산의 모든 것을 섭렵하려는 과욕으로 치부하고자 한다. 개별산행이나 팀 산행으로는 가능하겠지만 단체산행으로는 무리수를 둬야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 오늘 산행일정을 조정하여 운영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 주시고, 예정된 하산시간대에 무난히 일정을 소화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의 인사을 올린다. 또한 자유투어 시간에 횟감과 이슬이 등을 협찬해 주시고 귀로 버스 내 안주를 제공하여 귀로 버스 내 분위기를 일신해 주신 김정복 고문님, 김정한님, 오경희님, 이옥자님, 이승호님과 그밖에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 모든 분들의 도움 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마니산에서의 일상정리를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