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신화3 정주영의 배짱
현대조선은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한창 잘 나가는듯 하던 조선사업에 위기가 닦쳐왔습니다. 이는 바로 1973년에 불어 닥친 오일쇼크 때문이었습니다. 오일쇼크로 인해 유조선을 주문했던 선주들이 배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취소가 잇따랐습니다.
현대조선이 만든 배 가운데 3척이 울산 앞바다에 그냥 떠있었습니다. 그 중 1척은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가 주문한 유조선이었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인 현대조선으로선 휘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주영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역발상을 생각했습니다.
“만들어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를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정주영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습니다.1976년 3월 인도하지 않은 초대형 유조선 3척을 가지고 아세아 상선을 설립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수입해 오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름을 실어나르던 외국 선박회사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만무했지요. 아세아 상선에 수송권을 넘겨주는 댓가로 1400만달러를 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주영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억지지. 내가 택시를 타다가 자가용을 구입했는데 택시회사에 돈을 주어야 하나? 그동안은 우리한테 유조선이 없어서 자기네 배를 택시처럼 돈주고 빌려쓴 것인데 우리가 배를 만들고 우리 배로 우리 기름을 운반하겠다는데 돈을 달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런 요구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였습니다.
정주영은뚝심으로 버텄습니다. 8개월을 버텼더니 3백만달러로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옴싹달싹 안하고 버텼습니다. 결국에는 10원도 안 주고 우리 기름을 현대 아세아상선에서 운송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뚝심도 큰 힘이 되었다 합니다.
그렇게 출발했던 아세아상선은 지금은 현대상선이 되었습니다. 오일쇼크로 몹시도 정주영을 힘들게 했던 현대조선은 요즘 세계적인 현대중공업이 되었습니다. 이것저것 구실을 붙여 다 만들어진 유조선을 안 찾아가려고 떼를 썼던 리바노스! 그러나 정주영은 그를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황량한 모래벌판 사진 한장을 보고 배를 주문해주었던 지난 날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2007년 5월 25일 현대중공업 도크에서 우리 해군의 이지스함이 진수됐습니다.
정주영이 처음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우리 해군은 미군이 폐기처리한 구축함을 가져다 페인트 칠을 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천지개벽이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이 날 진수식에서 정몽준 회장은 500원짜리 거북선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그리워 했다고 합니다.
지금 전세계 바다에 새로 생산되는 배 5척중 1척이 현대중공업 제품이고, 10척중 4척이 한국산이라 합니다. 한국의 조선소들은 중국에 싼 가격으로 수주를 맞긴 배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주문이 너무 밀려 배를 만들 도크가 없기 때문입니다.
길이 200m에 15층 높이의 배를 땅 위에서 조립해 바다로 끌고가 띄우는데 이런 신공법은 한국 조선소에서만 적용하고 있으며 선박 엔진 또한 세계 최고입니다. 엔진을 만드는 공장의 상무는 이 기술자들을 “국가의 보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세계 선박 엔진 시장의 45%를 싹쓸이하고 있다 합니다. 2014년부터 불어닥친 불황의 여파로 몇년간 고전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세계의 선주(船主)들이 다시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모래바람이 휘날 리던 미포만은 이제 배 조립품을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아졌습니다. 당시 그곳에선 3일마다 1억 달러짜리 거대한 배가 한 척씩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현대중공업 직원들은 “배를 찍어낸다”고 말합니다. 세계 조선역사에 이런 기록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한척의 배를 만든 이익금으로 오늘날의 현대중공업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주영을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위인이라 불렀나봅니다. 그리고 그는 또 1984년에 "정주영 유조선 공법"이라는 신공법으로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충남 서산 간척사업 A지구 매립공사는 6.4㎞를 연결함으로써 완공되는 사업이었습니다. 이 사업으로 생기는 육지는 여의도 면적의 43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바다를 막아 옥토를 만드는 이 국가 사업에 마지막 물막이 공사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곳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드나드는 물의 양이 3억 4천만톤, 밀물시의 유속은 초당 8미터에 달해 20톤에 달하는 돌망태를 넣어도 그대로 물에 휩쓸려 나갔습니다.
흔히 최종 물막이 공법은 케이블과 바지선 등 해상 장비로 물막이 구간의 바닥을 점차 높여가는 점고식(漸高式)과 덤프트럭 등 육상장비를 이용해 점차 구간을 좁혀가며 축조하는 점축식(漸縮式) 그리고 이들 두 방법을 같이 쓰는 병행식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산 간척지 공사는 빠른 유속으로 인하여 통상적인 공사방법으로는 엄청난 비용과 작업기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이때 정주영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아 놓고 물막이 공사를 하면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감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이 획기적인 공법의 사용으로 계획공기 45개월 가운데 36개월을 단축,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방조제를 마무리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280억원의 경비를 절약함으로써 전세계인을 놀라게 했습니다.
정말 정주영다운 배포요, 정주영 다운 공법이었습니다. 이 기술은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아 "유조선공법"으로 명명되어 지금 세계 여러나라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계의 큰 별은 가고 없습니다. 그는 2001년 3월 21일 당신이 설립한 서울 아산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타계했을 때 미국 CNN 방송이 한 시간 이상을 특집으로 방송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호는 아산(峨山)이며 1915년 11월 25일에 농부인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
(韓成實)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습니다. 8세에 통천 송전 소학교(通川松田 小學敎)에 입학하여 13세에 졸업하였으며 그와 함께 졸업한 동창생은 27명, 그의 최종학력은 소학교 졸업이고 유일합니다.
2000년 5월에 현대 명예회장직에서 물려났고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하였으며 사후에는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습니다. 이후 5년 뒤인 2006년 11월에 미국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에는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하면된다"는 신화를 창조하신 거목 정주영! 대한민국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경제인이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될 때까지 그의 업적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잊지 말아야 하고 위인 중의 위인, 거인 중의 거인으로 칭송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의 어디에선가 제2, 제3의 정주영이 존재하고 그 험란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기쁘고 행복한 주말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