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은 1271년 스페인 아라곤의 왕 ‘페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왕 만프레디의 딸인 콘스탄시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페드로 3세 왕은 자기의 딸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녀의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을 본받으라고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당시 그녀의 조부는 아들인 페드로와 전쟁 중이었으나 엘리사벳으로 인해 서로 화평을 맺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조부는 자진하여 어린 엘리사벳의 교육을 맡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조부가 별세하자 그녀는 8세의 어린 몸으로 포르투갈의 왕 데니스와 약혼하며 궁중 생활을 배우기 위해 리스본으로 가게 됩니다.
그 후 12세에 왕과 결혼하여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후에 남매를 낳게 됩니다. 남편인 국왕은 그리 덕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녀는 왕을 잘 섬기며 환심을 사도록 노력하는 한편,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을 본받아 궁중의 호화로운 생활을 피하고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여 규율을 엄수하며 단식과 극기를 실천하는 등 자신에게 엄격한 생활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1288년 ‘콘스탄시아’라는 딸을 얻게 되는데, 딸은 후에 카스티야의 왕인 페르난도 4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다가 1313년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한편 1301년에는 왕자가 태어났는데, 아들은 포르투갈의 왕위를 승계해 훗날 아폰소 4세가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데니스 1세 왕은 능력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의 교육까지 담당했는데,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자선 사업에도 힘써 병원과 보육원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와 양로원 등을 설립하고, 순례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숙소도 마련해주었습니다.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한 아들 아폰소 4세와 남편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런 그녀의 노력과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아 한때 알랑케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1324년 남편 데니스 1세가 병에 걸리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는데,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뒤늦게 회심하고 신앙을 찾았지만,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남편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그녀는 아들이 왕위를 승계한 후 수도원 · 교회 · 빈민 구제소 등을 세우는데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그 후 코임브라에 자신이 세운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근처로 거처를 옮기며 수녀가 되겠다는 꿈은 포기했지만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되어 수도복을 걸치고 수도자 못지않은 엄격한 보속생활과 봉사활동에 전념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평화와 중재의 사도’로 잘 알려진 그녀는 말년에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전쟁을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1336년 7월 4일에는 아들인 아폰소 4세와 카스티야의 왕이자 조카인 ‘알폰소 11세’간의 평화를 중재하러 가다가 과로로 쇠약해진 그녀는 열병을 얻어 에스트레모스에서 자리에 눕게 됩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옆에 앉아 간호하고 있던 며느리에게 뒤에 흰옷을 입은 부인(성모 마리아)께 자리를 양보하라고 말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그녀의 유해는 코임브라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성당에 묻혔고, 이후 두 왕은 동맹을 맺게 됩니다.
가끔 그녀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는데, 어떤 시각장애가 있는 아이에게 손을 대자 금세 아이의 눈이 밝아졌다는 일화도 있고, 어떤 환자에게 성호경을 긋자 이내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1516년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복녀로 선언됨으로써 코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이 허락되었고, 1626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게 되는데, 1630년 “로마 순교록”에는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8일 축제’(현재는 폐지)와 겹치는 관계로 7월 8일로 바꿨다가 이후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선택 기념일로 변경되면서 축일 또한 선종일인 7월 4일로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포르투갈 또는 아라곤의 이사벨라로 잘 알려진 성녀 엘리사벳은 교회 미술에서 평화와 중재의 사도답게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나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비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과 마찬가지로 장미의 기적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14세기 제대의 한 기록에 따르면, 어느 겨울 아침 성녀가 성을 나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전과 빵을 나누어주었는데, 그녀와 마주친 왕이 무엇을 감싸고 있냐고 묻자 ‘주님의 장미’라 답했고, 1월임에도 불구하고 풀어헤친 앞치마에는 장미가 가득 담겨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