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책 읽는 시간이, 정확하게 말하면 단행본 신간 읽는 시간이 줄었다.
책 읽는 시간으로 채우고 담던 길 위의 시간들이 줄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어쨌건 읽는 시간이 줄었다.
새벽에 깨어 매일 읽는 셰익스피어 전집 읽기와 곁들인 몇 권의 책들은 그냥저냥 읽어내고 손에 들고 다니거나 책상 왼쪽에 쌓인 시인들의 신간 시집 읽기는 조금 더 늘었지만 매일 전해오는 매력적인 책들에 관심을 조금 접어둔 것은 사실. 최근에 내 독서 경향과는 조금 결이 다른 책도 몇 권 읽고 눈이 똥그래진 적도 있지만 그래도 책 이야기가 줄어든 건 분명하다.
그러다 눈이 번쩍 뜨이는 신간을 만났다.
스티븐 그린블랏의 <폭군>(이종인 역, Being, 2020)
스티븐 그린블랏. 하버드 대학 인문대 교수. <노튼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다수 엔솔로지의 편집장, 풀리처상 수상, 인문-사회분야 노벨상이라 불리는 홀베그르상 수상 등 학자로 저술가로 명성은 다할나위 없이 화려하다.
그린블랏이 유독 내게 특별한 이유는 그가 주창한 "신역시주의 비평(New Historicism)때문이다. 내 석사논문의 주제였다.
미시역사에 주목하며 문학텍스트와 작가에게 덧붙여진 신성함을 걷어내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텍스트 비평의 시각을 제시한 신역사주의 비평은 모든 '텍스트'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 주었다. 그와 그의 비평이 가장 먼저 주목한 작가는 당연하게도 셰익스피어였다.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회자되는 "위대한" 작가인 셰익스피어의 작품, 특히 비극과 정치극에 절대왕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한 내용들이 담겼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당대의 절대 왕정과 연극 무대의 관련성을 비평적으로 연결시킨 그의 시각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노 교수님의 셰익스피어 강의 시간 마다 그의 입장에 근거한 이론과 비평을 참고하여 셰익스피어를 비평, 비판하는 발표를 하다 "내 수업 시간엔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게"라는 주의를 들었지만 결국 고집을 피우며 고수하다 조금 난감한 상황이 되기도 했던.
각설하고, 결국 그의 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어쭙잖은 석사 논문을 쓰고 박사 논문에도 인용과 참고를 한 후 한참 그를 잊고 있다가 이번에 그를 만난 것이다.
"폭군"이라니! 얼마나 그 다운 주제인가.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과 비극을 통해 본 폭군의 특성에 대한 분석이라니! 오자마자 하루만에 후다닥 읽었다. 마침 나는 매일 새벽 이상섭 선생의 셰익스피어 완역 전집을 읽고 있는 중이다. 비극과 역사극은 지나 희극도 중간쯤 지난 작품들을 다시 읽고 있어서 생생했다. 뿐인가. "폭군", Tyrant, 독재자! 낯설지 않다. 우리 근현대사가 그냥 겹쳐졌다.
그린블랏은 독재자의 독특한 성격에서 행동 양식까지 아주 세세하게 분석하면서도 간간히 간명하게 정의해 놓았다. 독재자, 그는 어떤 인물인가.
"그를 흥분시키는 건 지배의 즐거움이었다. 그는 남을 괴롭히는 자이다. 쉽게 화를 내고 자신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없앤다. 그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떨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남의 약점을 잘 찾아내는 재주가 있고, 남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에 능하다. 이러한 기술 덕분에 (독재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잔인한 즐거움에 매혹하는 자들을 추종자로 부리는" 인물이다.(78)
하여, 독재자의 가장 특징적인 능력은 주변 사람들의 자발적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능력"이며, "강요든 기만술이든 혹은 폭력이든 위협이든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의 의사를 강제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91)
그는 "좀처럼 만족할 줄 모르며"(122), "정직한 충성심 혹은 냉정하고 독립적인 판단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아첨, 확증, 복종"만을 원할 뿐이다.(123) '조급증'(125)과 '뻔뻔스러움'(126)에 '정신적 불안'(147)까지 갖춘 그는 누구도 믿지 못하니 '절대고독'(128)이라는 필연적 조건도 지니고 있다. 그런 독재자는 "웃으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리처드, iii,ii, 182-5) 괴물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잘못 알려진 점도 있다고는 하지만 풍문으로 들은 네로왕에서 리차드를 거쳐 스탈린에서 히틀러까지. 그리고 얼마전 스크린에 비쳤던, 홀로 있는 방에서 노래를 읊조리던, 스크린 속 그 대통령까지.
독재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주변인의 "독자적인 의견"이며, 그가 원하는 충성심은 "그의 의견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동의"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의 명령을 이행하려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이런 "독재적이고, 편집증적이며, 자기중심주의적인 통치자가 고위 관리에게 충성심을 요구하면 나라는 위태로워진다."(169)
"불안정하고 충동적이며 보복적인 독자자의 손아귀에 들어간" 국가는 "통상적인 견제장치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상태가 된다. "합리적인 조언은 마이동풍"일 뿐, "품위 있는 이의 신청은 무시"되고, "직접적인 항의는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178)
옛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속 독재자의 모습이 스크린 속 장면과 그대로 오버랩 되는 것은 착시인가. 그러나 이런 독재자의 통치가, 독재가 가능한 것은 독재자 자신만의 힘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주변인들이 그를 위해 봉사하고 협력하는가. 침묵하는 무수한 다수를 포함하여.
"우리의 내부에 있는 뭔가가 그가 왕좌에 오르는 저 끔찍한 과정을 매 순간 즐기고 있는 것"이라는 그린블랏의 지적은 싸늘하다.(115)
하지만 독재자는 결국 타도된다. 시간의 문제일 뿐. "그는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동정을 받지 못한 채 사망"하고 그의 사후에는 "오로지 파괴의 현장만" 남는다.(79) 때로 그 시간은 오래 걸리기도 한다.
"독재는 인내 앞에 전율하게 될 것"(<겨울 이야기>, iii,ii,30)이다.
"오래 참고 기다리는 형태의 저항"도 있으니 말이다.(179)
독재자는 "일부 적들을 죽일 수 있"고, "남들을 강요하여 자기 뜻에 굴복하게 만들"고, "입에 발린 칭송"을 바치게 할 수도 있다. "모든 집에 스파이를 심어 놓을 수"도 있으며, "추종자들에게 상금을 내리고, 군부대를 규합"하고, "업적을 칭송하는 끝없는 공식행사를 개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재자는 "그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결국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를 미워하게 되니 말이다."(87)
그러나 독재자의 권세는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리 영리하게 정권을 잡아도 그들은 무능하고 그 무능함은 이내 밝혀진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통치해야 하는 국가에 대해 "아무런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지속적인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다. 그들이 아무리 잔인하고 난폭하다고 해도 모든 반대 세력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독재자는 그 스스로 자신의 몰락을 재촉한다. 그 자신의 "고립, 의심, 분노는 서로 상승작용"을 불러와 "오만하고 과도한 자신감을" 갖게 되고, 마침내 그들의 몰락시키는 촉진제가 된다. 그 이후 독재 찾아오는 것은 "공동체의 소생"과 "합법적 질서의 회복"이다.(192)
스크린 속 그로부터 프로 스포츠를 열고 '땡x 뉴스"를 남겨놓았던 그에게서 감옥의 그녀까지 저기 어디 없는 모습이 있나.
독재자의 몰락, 그리고 민중의 저항과 관련한 그린불랏의 통찰에서 가장 두드러진 대목은 이름없는 민중, 특히 독재자 측근의 저항이다.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에서 창조한 콘월의 종복이 바로 그런 저항하는 민중의 전형이다. 이름없는 콘월의 그 하인은 글로스터의 하나 남은 눈 까지 뽑아내려는 콘월에게 "그만두라"고 경고하고 대들며 결국 칼싸움 끝에 콘월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콘월 또한 그 싸움에서 입은 부상의 여파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린블랏은 말한다. 그 하인은 "인간의 예의를 위해 분연히 나선 것"이라고. 그는 몇 줄밖에 안 나오는 사소한 인물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영웅 중 한 사람"이라고.(196)
최측근이었던 부하의 총탄에 쓰러진 스크린 속 그가 다른 인물일까.
"미래를 적으로 삼는 독재자"에게 미래는 없다.
독재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아직 그 수하들은 여전히 부끄러움 모르는 뻔뻔함으로 우리 곁에 있다. 그린블랏의 마지막 경고를 보자.
"엄청난 특권을 배경으로 태어나 하층 계급 사람들을 은근히 경멸하는 금권정치가는 선거 기간에는 군중이 좋아할 법한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자신의 목적(당선)을 달성하는 즉시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것을 하나의 관습적 연기로 만들었다. 건설 현장에서 열리는 유세장에 가야 한다면 평소 머리 손질을 잘 하는 정치가가 일부러 안전모를 쓰는 것이다. 공직에 출마한 사람은 시장에 갈 때는 화려하게 염색한 겉옷 대신에 "아주 낡은 겸손해 보이는 옷"을 입는 것이다."(225)
너무도 오래 반복된 익숙한 장면 아닌가.
이 글을 마무리 하는 지금 버스 차창 밖으로 커다랗게 들리고 보이는 저들은 과연 저 문장 속 그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들인가!
오늘, 그리고 내일은 사전투표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