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촌 정유성의 간찰은 세 점이나 있다. 모두 도촌이라고 호로 낙필을 하고 있어서 아랫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로 보인다.
첫 번 째 편지는 호백 즉 충청도 관찰사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괄의 난 때에 성균관의 서책들이 많이 소실되어서 그곳에 있는 책판의 책을 찍어보내 달라는 부탁이다. 정유성이 대사성을 한 시기는 인조 26년부터 효종 1년까지 3년간이다. '불구', '도촌'이라고 명확히 아랫 사람에게 보내는 서식을 썼으니 하게체로 번역하였다.
[湖伯 巡史 奉問狀]
近況如何 傾想不/已 此中國子吏/鄭繼叔 今以香/陪下去 幸/饋酒給粮 且本館書冊 适變時/多失 故成□事/下送 道內有/板書冊 隨力/印送 以副多/士之望 餘不具
三月初六日 陶村
[호백 순사에게 드리는 문안 편지]
근황은 어떤지? 끝없이 생각이 나오. 이곳 국자감(성균관)의 아전 정계숙이 지금 향을 모시고 내려가는데 행여 술과 식사를 제공하고 양식을 지급해주면 감사하겠소. 또 본 성균관의 서책이 이괄의 변란 때에 많이 소실되었소. 그래서 ...하기 위해서 내려보내오. 도내에 있는 서책 판목을 힘 닿는대로 인쇄하여 보내주어 여러 선비들의 바람에 부응해주시기 바라오. 나머지는 갖추지 못하오.
3월 초6일 도촌.
*1648년(인조26)~1650년(효종1) 정유성 대사성
다음 편지도 역시 호백에게 보낸 간찰이다. 이 편지에서는 '汝家'라고 써서 거의 손아래 아들을 칭하듯 하니 아마도 사위나 조카 정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전 판관 민종경은 1604년에 경주판관을 했기 때문에 전 판관이라고 한 것이다.
[湖伯 巡軒 奉狀 (수결)]
近日想/巡宣安穩 遙慰 此/處菫支 汝家以/弟汝子皆無恙/勿慮 此中前判/官閔宗慶 乃旧/知情厚者 今因/公幹下去 仍欲/推奴婢 幸/招款接 扶措難//曲放 餘忙不多及
八月卄六日 陶村
[호백 순헌에 편지 올림 (수결)]
근일 순선하는 일이 안온할 걸로 생각하니 멀리서 위로가 되네. 이곳은 겨우 지내고 있고 너의 집은 아우나 아들 모두 무양하니 걱정 말게.
이곳의 전 판관 민종경은 전부터 알고 지내고 정이 깊은 사람인데 지금 공무로 내려가면서 아울러 노비 추심을 하려고 하나 보네. 행여 불러서 환대해주고 부조해주기를 바라네. 나머지는 바빠서 많이 언급하지 못하네.
8월 26일 도촌.
* 민종경: 1604년(선조37) 경주판관.
세 번째 간찰도 아랫 사람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數日前得書問 知/安穩爲慰 卽惟/巡歷平安 此處/菫支 汝家亦穩/保 幸勿慮 辭/狀事 上意如/是倚重 備局旣/請仍任 須亮/處內贍無奴//婢 今聞위배앙州者/ 方隱康津云 須/行文捉送囚許/接 刻督자곤/陳省事矣 圖極//感極感 餘望/好在 不具
卄二日 陶村
張綸病逝 須/修弔持國
//此曲折 須簡通于諸/得知之方
洪千璟妹杖斃事/ 近有人言 以爲不康/ 朝廷徑用刑杖其/族矣 呈諸司乎 可慮
* 持國: 張維 경덕궁(뒤의 경희궁) 지을 때 장륜, 장신의 집을 몰수하여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