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 년 9월 19일 토요일 오대산 동대산
고인돌 님과 함께
교통편 : 버스 이용 06:40 동서울 터미널 – 09:00 진부 터미널 도착 – 09:05 상원사 행 시내버스 – 09:40 상원사
산행 코스 : 비로봉 – 상왕봉 – 두로령 – 두로봉 – 신선복이 – 차돌백이 – 동대산 – 동피골 하산
민박 : 민박촌 별빛동 033-335-6476 비용 : 6 만원
서울에서 상원사까지 :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2364020
산행 코스 :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2368351
거리 20.6 km
소요 시간9h 32m 17s
이동 시간8h 30m 42s
휴식 시간1h 1m 35s
평균 속도2.4 km/h
최고점 1,568 m
총 획득고도970 m
난이도 보통
그다지 큰 무더위는 없었지만 긴 장마와 연달아 찾아온 세 개의 태풍으로 인해 사람들 마음이 많이 지쳐 있다. 특히 코로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담감이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그런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절은 자기 페이스에 맞춰서 여름을 접고 가을로 들어간다. 배낭에 긴 팔 옷을 챙겨 넣었다.
설산은 수요일 목요일 이틀간 지인과 함께 점봉산 주변에 설치된 방위표지물인 삼각점을 찾아 다니다 온 관계로 이번 산행에 동참하지 못하고 소산 형님과 둘이 산행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당일 코스로 대관령에서 선자령을 넘어 진고개까지 진행하면서 물매화 꽃과 애기앉은부처꽃을 찾아볼 생각이었으나 여름에 오대산을 가지 못한 아쉬움이 섞여 있어 1박 2일 일정으로 변경했다. 첫째날에 오대산을 돌고 민박집에서 잠을 잔 후 둘째날 진고개에서 출발하여 대관령에서 마치는 일정이다.
동서울에서 횡계로 가는 버스의 좌석 상황을 살펴보니 예매율이 매우 높다. 이에 목요일 밤 산책 겸 동서울 터미널에 가서 표를 예매하였다. 첫 차가 6시 40분에 출발하는데 수원에 사는 소산 님이 시간을 계산하고 이 차 시간에 맞춰 올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첫째날
이제는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아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데 습관이 들었다. 금요일 저녁으로 치킨을 시켜서 먹은 탓인지 배가 고프지 않다. 윤이가 대구에 내려간 관계로 미리 혼자 있으니 겸사겸사 밥을 지어 한 숟갈 가볍게 먹어 치우고 일찌감치 5시 40분쯤 집을 나섰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 때문인지 시외버스가 28인승 리무진으로 꾸며졌다. 왼쪽은 2인 좌석이고 오른쪽은 1인 좌석이다. 앞 뒤 공간이 넓고 옆 사람과도 충분한 거리가 있어 편안하다. 버스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원주를 지나 장평 터미널에 들렸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와 진부로 나간다. 올봄에 소산과 오대산 비로봉-호령봉-계방산 구간 산행을 마치고 운두령에서 하산하여 속사 갈림길에서 진부까지 걸었던 그 국도 옆을 지난다. 그 때 지나갔던 국도의 속사터널과 나란히 고속도로 속사터널을 통과하면서 꽤 길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었던 기억이 벌써 추억처럼 다가온다.
진부터미널까지 2시간 20분쯤 걸려서 9시에 도착했다. 내리자 마자 터미널 한 구석에 사람들이 줄 서 있는데 소산 님이 뛰어 가더니 그 줄에 합류한다. 오대산 상원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줄이다. 9시 5분 버스가 도착했고 30분 걸려 9시 35분 상원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미리 맞춘 듯이 완벽하다. 날씨도 맞춤형이다. 파란 가을 하늘에 몽실 몽실 하얀 구름덩이도 몇 개 흣뿌려 놓아 푸른 들판에 노니는 양떼를 보는 것 같다.
상원사(上院寺)
오대산(五臺山)이라는 이름은 이 산에 다섯 개의 대(臺)가 있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원래 신라시대 때 이 산의 이름은 청량산(淸凉山)이었다. 오대산으로 개명된 것은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중국의 오대산에서 수양하고 문수(文殊) 신앙을 들여와 이 곳에 절을 지으면서부터다.
그러니 오대산은 철저하게 불교가 깃들어 있는 산이다. 신라 성덕왕 4년 (서기 705년) 성덕왕의 두 아들 보천과 효명이 이 곳을 찾아와 푸른 빛 연꽃이 피는 상서로운 기운을 보고 절을 지었다. 그 후 성덕왕이 죽고 왕위를 물려받으러 오라는 명령을 형인 보천은 받들지 않고 머물렀으나 동생인 효명은 돌아가 왕이 되었다. 그 후 중국에서 수도하고 돌아온 자장이 산 이름을 오대산으로 부르며 상원사를 문수보살이 영위하는 가람으로 만들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억불숭유를 모토로 내건 조선시대에 대부분의 절들은 수난을 겪었지만 상원사 만큼은 오히려 조정 특히 태종과 세조 시대에는 더욱 왕성하게 번창할 수 있었다. 이후 1947년 화재가 발생하여 영산각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으며 1950년 안국전쟁 때는 월정사마저 다 불에 탔으나 상원사는 주지스님의 용기와 지략으로 방화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가 탄압받던 시절 왕이 직접 중창을 이끌 만큼 상원사가 번성할 수 있던 배경에는 신미(信眉) 스님 있었다. 신미 스님은 조선 3대 왕인 태종의 신하였고 4대 세종의 멘토였으며 5대 문종과 7대 세조의 스승이었다. 특히 세종 대왕을 보필하여 한글 창제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신미는 불교의 쇠락을 막는데도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단종과 사육신 등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세조가 악몽에 시달리고 또 몸에 난 종기(한센병)가 형수 즉 문종의 부인이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여길 만큼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때 신미는 불경의 한글 번역과 상원사 중창을 간언하였고 세조는 기꺼이 이에 응하였다. 이런 내용이 한글로 적힌 <중창권선문>이 남아 있다 하니 세조가 그 먼 오대산 상원사를 찾아왔던 이유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겠다.
나는 그동안 오대산 비로봉을 세 번이나 올랐으나 산행 들머리에 있는 상원사를 한 번도 들르지 않았었다. 우선 등산로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는데다 늘 서둘러 지나다 보니 절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음이다. 소산 님을 따라가니 한층 여유가 많이 생긴다. 세조와 문수동자 그리고 세조와 두 마리의 교양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 오대산 상원사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오래된 동종이 있는 절이다. 절의 외부만 훑어보고 나오는데 30분쯤 걸렸다. 나무를 깍아서 만든 달마상이 있는 문을 지나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향한다.
코로나 극복을 위한 기도, 입시 기도 등 여러 기도모임을 광고하는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올 해는 코로나로 인해 석가탄신일 행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데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종교 행사도 제한되다 보니 시주를 받는 절이나 기도를 올리고 싶은 신자들이 애를 먹는 모양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적멸보궁을 향해 수 없이 절을 올리는 보살님들을 본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는 우리말로 읊는 소리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이기게 하고 또 시험을 잘 치르게 해달라는 소박한 소원을 염불하듯 읊는 것이 친근감 있어 좋다. 염불에 맞춰 많은 보살님들이 돌 바닥에 자리를 깔고 끊임없이 절을 올린다.
비로봉 (毘盧峯 1,563 m)
적멸보궁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비로봉까지 약 2 km 정도 되는 짧은 거리지만 경사가 제법 가팔라 산객들의 걸음을 느리게 한다. 더구나 길 가에는 적어도 백 년은 넘었음직한 전나무와 음나무, 피나무, 신갈나무 등 거목들이 늘어 서 있고 숲 속에는 가막살나무 갈매나무 그리고 매발톱나무 등 가을 열매들이 눈길을 끌어 이래저래 느린 발걸음을 쉬엄쉬엄 옮기다 보니 비로봉 (1,563 m) 정상에 선다.
더할 나위없이 날씨가 좋다. 북동쪽으로는 설악산 대청봉에서 귀때기청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을 쉽게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시야가 깨끗하게 펼쳐진다. 코발트라는 광물의 빛깔이 파랗다 하여 가을 하늘빛을 코발트 빛이라 한다. 지금 저 하늘 빛깔일가?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다. 남동쪽으로는 내일 가야 할 노인봉과 소황병산에서 이어지는 능선길이 아득하다.
상왕봉(象王峰 1,491 m)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에는 투구꽃이 제철이다. 진한 보라색 투구꽃이 발에 채일만큼 많다. 강한 독을 품고 있어 아마도 천적이 없다 보니 맘껏 번식하나 보다. 이 능선에는 쑥부쟁이나 구절초 등 다른 꽃은 드물다. 헬기장 부근에서 용담과 과남풀이 여러포기 보인다. 백당나무와 가막살나무 그리고 매발톱나무의 빨간색 열매가 풍년이다.
상왕봉으로 가는 능선길에는 주목 군락이 있다. 부러지고 짜개지고 속이 텅텅 비어진 나무들도 푸른 잎과 붉은 나무껍질이 건재함을 과시한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주목에 비해 기껏해야 70~80년 살 수 있는 인간들이 속절없이 허망해 보인다. 이 나무들은 1,300 여년 전 (705년) 저 아래 상원사가 세워지던 때를 기억하려나? 아니면 1,401년 태종이 참여했던 성대한 법요식과 낙성식을 기억하려나? 세조 10년 (1,460년)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등에 난 종기를 고쳤던 것을 알고 있을까? 적어도 1946년 상원사가 불에 타는 모습을 지켜 보았으리라. 그럼에도 늙은 주목은 산 길 옆에 묵묵히 서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듯 딴전을 피우고 있다. 우리의 아들 딸 손자의 후손들이 또 몇 백 년 후에 찾아와도 그냥 그 자리에 세월을 지키고 서 있으리라.
주목의 긴 수명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긴 세월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생명력에 깊이 공감한다. 오대산 산길에는 주목 뿐만 아니라 긴 세월을 견뎌낸 피나무와 돌배나무도 많이 보인다. 야광나무와 구분이 어려운 돌배나무에는 작은 열매가 하나도 달려있지 않다. 올 해 초 늦서리가 내려 꽃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로령을 지나 두루봉으로
상왕봉을 지나니 숲길에는 금강초롱꽃이 보이기 시작한다. 소산 님은 다른 데에 피는 금강초롱꽃과 달리 청자(靑磁) 빛 꽃이라고 한다. 설악산이나 명지산 등에서 피는 꽃에 비해 흰 빛이 돈다. 대부분 꽃대 하나에 한 송이씩 피어 있다.
오후 3시가 임박하여 두로령에 도착했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평창군 진부면 간평리를 이어주는 고개다. 지난 2월 말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는 길을 걸어 두로봉에 오를 때 쉬어 가던 고개다. 앞으로 동대산까지 가려면 8 km 넘게 남았다. 평상시 산길 걸음으로 가면 4시간쯤 걸리겠으나 꽃과 나무를 만나면 사진을 찍으면서 걷다 보면 더 걸릴 수도 있다. 어차피 산행을 마치고 민박집에 들어가기로 했으니 계획했던 대로 산행을 이어가기로 한다.
두로봉으로 가는 길은 짧다. 겨울에 눈을 헤치며 힘들게 걸었던 길인데 지금 보니 아주 편안한 오솔길이다. 그 길 끄트머리에서 다시 주목 군락을 만난다. 눈 속에 서 있던 나무와 또 달라 보인다.
두루봉을 두 번 지나갔으나 한 번은 비가 내릴 때였고 또 한 번은 안개에 덮여 있어 조망이 없었는데 모처럼 맑은 날씨에 다시 한 번 올라 가본다. 주문진 바다가 보일 듯하지만 수풀에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동대산(東臺山)
동대산으로 가는 길은 2019년 7월 백두대간을 걸을 때 지나갔었다. 어두운 새벽 3시쯤 진고개에서 시작해 차졸백이를 지나 신선목이를 지날 때쯤 날이 밝아왔었다. 가랑비에 옷이 후즐건하게 젖었고 조망이 없는 기억뿐이다. 앞서간 일행을 쫒아 쉬지 않고 급하게 지나갔던 길이다. 이제 그 길을 거꾸로 대낮에 걷는다.
두루봉에서 산길은 한없이 밑으로 떨어진다. 내려간 만큼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이치를 알기에 반갑지만은 않은 내리막 길이다. 하지만 내리막은 신선목이까지 계속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에 조망이 전혀 없고 주변에 꽃도 피지 않은 길이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걸으면 좋은 그런 길이다.
예상했던 대로 신선목이에 잠시 내려선 후에 오르막이 시작된다. 오르막 경사는 그리 급하지 않다. 조금 오르던 길이 얼마간 넓은 평지를 지난다. 땅이 귀하던 시절에는 화전(火田)이라도 일궈 농사를 지었을 법한 그런 땅이다. 그리고 대간 길에 잠시 트인 조망처에서 구름 위로 떠 오르던 일출을 보았던 곳도 지나고 오르막의 끝에서 차돌백이에 도착한다.
차돌백이는 봉우리 위에 큰 차돌 바위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백두대간 뛸 때는 어둠속에서 랜턴 불빛에 비추어 보였는데 밝은 낮에 보니 차돌의 규모가 더 커 보인다. 산길은 차돌바위에서 다시 내리막으로 치닫는다. 전형적인 흙산으로 길 가에 금강초롱 꽃이 뜸하게 피어 있다.
서쪽 오대산 능선길 위로 해가 뉘엇뉘엇 넘어간다. 소산 형님은 동대산에서 일몰을 보자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안부에 내리기 전 바위에서 조망을 살펴보니 해가 금방이라도 마루금 너머로 사라질 것 같다. 진행 방향으로 코 앞에 높다란 봉우리가 버티고 있다. 저 봉우리 꼭대기에 오르면 아직 해가 남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동대산은 그리 가까운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망처에서 보았던 봉우리로 오르면서 작년에 동대산에서 내려올 때 보았던 구부러진 나무며 수풀 모습이 사뭇 다리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봉우리 너머에 또 다른 큰 봉우리가 있고 그걸 넘고 나서야 비로소 동대산이 보였다. 이미 태양은 나무 사이로 붉은 빛을 토해내며 차가와지기 시작했다.
동대산(東臺山)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서쪽 능선에서 너어갔고 주변은 여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6시 25분이니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갔다. 나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소산 형님도 동대산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로 인해 일몰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오면서 나무 사이로 펼쳐지는 일몰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고 한다.
동대산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은 진고개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이고 오른쪽은 월정사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소산 형님은 상원사에서 7시 10분에 출발하는 막차를 탈 수 있을 거라며 동피재로 빨리 내려가자고 한다. 2 km가 넘는 거리를 30분 ~ 40분만에 돌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산에는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 동대산을 출발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길이 차츰 어둠속에 숨어버린다. 배낭에서 랜턴을 꺼낸다. 동피골로 내려가는 길은 낯이 선데다가 급한 내리막을 랜턴불에 의지하여 걷다 보니 걸음이 느려진다.
내달리던 능선길이 뚝 끊어지고 왼쪽으로 가파른 나무계단이 나온다. 그리고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태풍으로 인해 길의 흔적이 흐릿해졌다. 다시 계곡과 멀어져 작은 능성이를 넘어 조금 내려가니 갑자기 큰 도로가 나온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찻길이다. 7시 10분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아침에 확인해 둔 버스 시간표를 보고 이미 막차가 6시 25분에 지나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산행 때마다 늘 마지막에 버스를 타려고 아둥거리며 뛰었지만 이번에는 공연히 뛴 꼴이렀다.
민박집
동피골이 어디쯤인지 모르지만 소산 님은 월정사까지도 거리가 상당히 멀다고 한다. 깜깜한 도로에 랜턴 불 두 개가 흔들린다. 이 길에는 버스가 끊기면 달리 방법이 없다. 진부 택시를 불러야 한다. 가끔 지나가는 승용차에 손을 흔들어보지만 요즘처럼 코로나로 불안한 시기에 선뜻 태워줄 사람은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한 밤중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낯선 곳에서 누가 태워주겠는가?
우선 소산 형님이 아침에 메모해 놓은 민박집 전화번호로 연락했다. 빈 방이 없다고 한다. 다른 집에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다행히 옆 집에는 방이 하나 남았다며 연락처를 알려준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민박집 주인의 목소리는 마지막 남은 빈 방을 채워줄 손님을 친절하게 대해준다. 빈 방을 못구할까 걱정했던 목소리가 구원을 요청한다. “살려주세여 ~ “ 농담삼아 외치는 목소리에 민박집 주인은 바로 차를 보내겠다고 한다.
길을 따라 한참 걸어서 내려가고 나서야 차를 만났다. 그 거리가 꽤 멀다고 한다. 월정사를 지나고 매표소를 지나 또 얼마큼 더 가야 했다. 저녁 8시면 서울에서는 아직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인데 산촌에서는 모든 것이 숨을 죽이는 시간이다. 저녁 먹을 식당은 틀림없이 열려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문닫을 시간이라며 아는 식당에 전화를 해놓겠다고 한다. 방에 배낭을 벗어 놓고 나오니 주인 아주머니가 식당에 전화를 걸어서 비빔밥을 주문해 놓았다고 한다.
비빔밥이 맛있어 봤자 얼마나 맛있을까마는 식당 주인은 곁에 서서 음식 재료값이 많이 올랐다는 둥, 비빔밥에 생더덕을 넣어주는 집은 자기밖에 없다는 둥, 심지어 많이 팔면 팔수록 손해라는 말까지 이바구가 끝이 없다. 산행을 하면서 빵과 과일 등으로 배를 채웠지만 허기져 있는 상태라 비빔밥 한 그릇을 눈 깜짝할 새에 비웠다. 한 젓가락 양만큼 덜어 놓은 반찬도 깨끗하게 비우고, 식당 주인이 너무 맛있어서 매일 먹는다는 된장국도 다 먹었다. 58년 개띠 사장님은 몹시 행복해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달리 음식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내일 아침으로 먹을 도시락을 두 개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잠만 자면 된다.
민박집 방은 두 사람이 편안하게 누워 잠자기에 충분한 크기다. 세 명이 들어도 괜챦겠다. 두 명 기준 6만원이고 한 명 추가하면 만원을 더 내야 한다. 작지만 샤워시설이 있는 화장실과 스크린이 큰 TV까지 갖춘 온돌방이다. 방은 보일러를 때는지 따뜻하다.
소산 형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저런 두서없는 얘기를 나누다가 자정이 넘어서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