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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를 기다림
함석헌
전도자를 기다린다. 위대한 전도자의 나타남을 기다린다. 장차 올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힘 있게 외치는 위대한 전도자가 이 시대에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동편 하늘을 우러러 밝은 샛별을 기다리듯이 그것을 기다린다.
오늘날은 말씀의 기근시대다. 옳은 도리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이 되는 진리의 말씀을,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얻어들을 수 없는 시대다. 그 말씀이 말랐는 고로 사람들의 영혼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사막을 흐르는 갯바닥 같이 만나는 사람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심장의 밑바닥까지 타 마른 사람뿐이요, 생명의 푸른 기운을 보여주는 자는 없다. 그들의 얼굴은 누렇게 말랐고, 두 눈이 쑥 빠져 흉악한 모양이 되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가을바람처럼 시들어 말랐다.
물론 기근은 오늘이나 어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벌써 벌써 오래였다. 우리 “성서조선”이 이것을 경고한지도 이미 만 9년이나 지났다.(제8호 권수 주필의 글 참조) 이제 와서 그때를 생각하면, 금석(今昔)의 감을 금할 수 없는데 그때에도 “최고도”라 했거든 스피드 스피드 하는 시대의 9년을 지난 오늘의 인심의 주리고 마른 상태는 얼마나 할까? 과연 지금은 벌써 의식을 잃고 정신이상의 증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그저 금광으로 철광으로 만주로 북지(北支)로 덤비는 것은 미친 사람의 행동 밖에 더 되는 것 없다.
관청에 가보라. 거기도 돈 소리요, 교원실에 가보라. 거기도 돈 소리요, 교회에 가보라. 거기서도 돈 잡는 이야기가 아닌가. 도시에 가면 물론 돈이요, 산골을 가도 마찬가지로 돈이다. 친구의 집이라 찾아가도 성공하는 말만하자고, 병원에 가도 앓는 사람까지 황금을 꿈꾸면서 앓고 있다. 이것이 미친 시대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람이 젊었을 때는 적어도 한번은 거룩한 야심에 불이 붙어 보는 것이다. 어떤 공의적인 것에 일신(一身)을 드리어 위대한 것을 세상에 주고 자기도 얻자는 것이다. 그것이 잘 되면 이상이요 못되면 공상이다. 그런데 지금 청년에게는 이상도 공상도 없다. 있는 것은 돼지 같은, 구미호 같은 현실뿐이다. 20에 이미 취직에 머리를 태우고 30에 벌써 유력자의 배를 내려쓸고 있다. 10년 교육을 해도 이 백성의 정신의 지도자가 되어보겠다는 대망을 가지는 한 사람의 청년을 보지 못하였고, 그렇게 가르치는 한 사람의 교사를 보지 못하였다. 재지(才智)있으면 의학하기를 권하고, 세밀하면 금융조합에 보내고, 근실하면 철도에 소개(紹介)하되 저들에게 리빙스톤이 되라는 자는 없고 마르틴 루터가 되라는 자는 없고 바울이 되라는 자는 없다. 저들에게 뭇솔리니나 포드나 에디슨의 생애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있어도, 모세나 사무엘이나 예레미야의 생애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오늘날 청년에게는 공의심(公義心)이란 없다. 의협심도 없고 명상(瞑想)도 없다.
예레미야! 그렇다. 우리는 예레미야를 대망(待望)한다. 저 같은 난세의 위대한 전도자를 갈망한다. 저는 인심의 타락이 극하야 미친 시대에 나타나서 생명의 말씀을 외치고 외치다 외치다 죽은 전도자다. 저의 때와 같이 지금은 미친 시대다. 욕심에 미친 시대다. 미친 시대를 보고 진리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지금은 동면하는 동물처럼 죽은 듯이 엎드려 있을 때라고 사람마다 말한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말씀의 필요는 점점 더 긴절하여 간다. 생명을 내대고라도 난무하는 광인을 억제하려는 간절한 사랑을 가진 자가 아니면 그의 생명은 구할 수가 없는 것처럼 현대를 위하여 일명(一命)을 바치는 전도자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시대의 앞은 캄캄할 뿐이다.
혹이 말하는가, 이 시대의 물질의 증산을 말함은 옳으나 말씀의 결핍을 말함은 우활(迂闊)한 일이 아니냐고. 과연 물질은 결핍되었다. 그러나 물자의 결핍만으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생활의 유족(裕足)은 물질 이외에 어떤 유래하는 원천이 있음을 알 것 아닌가. 가르쳐 말씀하신 그대로이니, 공중에 나는 새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되 사는 것이요, 들에 백합화가 수고 길쌈 아니 하여도 솔로몬보다 영광스럽게 입는 것이다.(마태복음, 6:26~27)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나니라.” (신명기, 8:3)그렇다, 현대 사람이 이 말씀을 먹었던들 물자의 결핍은 느끼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배부른 사람이란 하나도 없고, 모두가 기갈 못 견디어 어쩔 줄을 모르고 미쳐 덤빈다. 부자도 그것이요 빈자도 그것이다. 저들은 다만 먹는 것이 부족하고 마시는 것이 부족한 듯만 하여, 먹기를 더 급히 하고 마시기를 더 성히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가슴을 태우는 독주와 같이 넘어갈 때에 시원한듯하나, 속에 들어간 후는 점점 더 불길을 일으킬 뿐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아귀(餓鬼)의 모인 곳이 된다. 그러나 그 원인을 아는 자도 없고,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선지자 아모스의 말이 또 한 번 들어맞았다. 왈(曰)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아모스, 8:11) 그렇다, 주 여호와가 이날을 보내신 것이다. 이 기근은 하나님의 징계로 임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징계인가? 생명의 양식이 되는 그의 말씀을 귀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는 지도자라는 사람들로부터 아래는 농산어촌(農山漁村)의 필부필부에 이르기까지 황금이 귀한 줄만 알고 도리의 귀한 줄은 모르며, 세력이 귀한 줄만 알고 신앙이 귀한 줄은 모른다. 그 대가는 이 고통이다. 고로 맘을 돌이켜 생명의 근원으로 향하여 그를 마시지 않는 한 어떤 금산을 캐어내어도 어떤 무변옥야(無邊沃野)를 얻어도 이 기갈은 멎지 않을 것이다.
또 혹이 말하는가. 말씀은 넉넉히 있지 않느냐고. 아침 여섯시부터 밤 열두시까지 까마귀처럼 지저귀는 라디오가 있지 않으며, 날마다 단으로 묶어 던지는 신문 잡지가 있지 않으며, 도서관 마다 서사(書肆)마다 들어찬 서적이 그것이 모두 다 말씀이 아니냐고. 또 수천의 목사 전도사가 주일마다 기도회마다 폭포처럼 쏟는 강설(講說)이 있지 않느냐고. 과연 있다. 많은 말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은 들어 있지 않다. 생명 없는 말, 그는 생기 없는 가을바람이다. 뒤흔들수록 마를 뿐이다. 라디오와 신문과 저작가와 세상의 모든 떠드는 소리를 다 침묵케 하라. 그러면 가늘고 고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전도자는 반드시 나발을 가진 떠드는 선전자가 아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민중을 무엇으로 형용할까. 천사의 무리라 할까. 호표(虎豹)의 무리라 할까. 예수의 말씀대로 목자 없는 양이다. 예수의 말씀을 우리 맘으로 하고 본다면, 예수의 가슴에 있던 사랑을 우리 가슴에 겨자씨만큼이라도 품고 본다면, 이 시대의 민중은 목자 없는 양이다. 잃어버린 양이다. 저가 무한한 사랑으로 세상을 보시었을 것을 생각할 때 그가 탄식했다는 이유도 알 수 있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새끼 찾는 암탉처럼 애를 태우던 것도 알 수 있고, 화 있을 진저 하고 바리새주의를 저주하던 것도 알 수 있다. 목자 없이 헤매는 양! 이 인류는 그의 성안(聖眼)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저로 하여금 십자가로 향하고 들어가게 하였다. 저가 갈 길을 분명히 열어놓았건만 양은 아직도 헤매고 있다. 사탄은 미운 것이요 민중은 가엾은 것이다.
전도의 정신은 사랑에 있다. 사랑하는 자는 잠잠하지 않는다. 저에게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이 있는가. 그는 자녀를 향하여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저에게 국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는가. 그는 동포를 위하여 그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참 위대한 전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에서 나온다. 나를 위함도 아니요 세상을 위함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전도함이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하실 자기 일을 다 하시고 영원의 나라로 가시려 하여 자기를 따르는 자의 대표로서의 베드로를 놓고 후사를 부탁하실 때, 네가 천국에 가고 싶으냐 하시지도 않았고, 네가 이스라엘을 사랑하느냐 하시지도 않았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였다.(요한복음, 21:17) 그리하여 거기 대한 고백이 있은 후에 “내 양을 치라”고 하시었다. 참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참으로 세상을 위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다. 모든 위대한 전도자는 다 하나님의 발 앞에 서서 세상을 굽어본 사람들이다.
예수의 가르치는 대로 세상을 건너다보면 곡식이 누렇게 다 익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회는 간 곳마다, 죄악의 본원지인 도시만 아니라, 촌에까지 심산 골짜기에까지 전도의 필요가 미간에까지 절박한 것을 본다. 산골이 은둔처라던 것은 옛말이오, 기차, 자동차, 금광군의 끌이 소위문명의 티끌을 방(坊)마다 골마다 아니 몰아넣는 곳이 없고, 아니 쑤셔 먹는 곳이 없는 오늘날은 더러워지지 않은 곳이 없고 마르지 않은 곳이 없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간다면 사람의 자식 중에는 혼란의 자식 아닌 것이 없을 터이요, 강산에는 도적의 굴이 뚫리지 않은 봉과 살인의 피가 떨어지지 않은 골짜기가 없이 될 것이다. 세상은 이렇듯 긴급히 하늘나라 아들들의 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천사에게서 그 큰 낫을 얻어가지고 휘둘러서 이 누른 곡식을 거두어 기쁨의 단을 묶을 자는 누군가.
청년이여, 너는 젊었느냐, 젊었거든 이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대망을 발하라. 황백(黃白)의 보패(寶貝)는 이 세상의 무리에게 던져주고, 청자(靑紫)의 고위(高位)는 현실의 아들들에게 사양하고, 너는 탁류에 몸을 던져 빠지는 자를 구하려는 용사처럼 이 어려운 세상에 모험하여 하늘나라의 추수꾼이 되자는 거룩한 대망을 가지라. 늙지 마라. 우리의 선구자 예수는 30의 몸으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 영원의 청년이다.
가물이 심한 1938년 8월 9일 저녁 완항령(緩項嶺)상 주점에서 강낭국수를 만들어주던 80 노인과 하던 문답을 회상하면서
성서조선 1938. 9. 116호
저작집30;18-231
전집20;9-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