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애초에 다른 우리가, 세상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우리가, 그와 같은 사실이 부정될 때, 다름이 틀림이 되고, 차이가 차별이 될 때 그러한 상태가 일상이 될 때 인간은 고통스럽다.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인간이기를 그만하는 존재도 있고, 그러한 현실에 익숙해지기도 하고, 차이를 인정해주기 보다, 차별받기보다, 차별해도 되는, 차별하는 것이 더 나은 그러한 사회적 위치에 이르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한 인간적 삶의 이유를 정치경제적인 문제에서 찾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빈부격차가, 임금격차가, 소득격차가, 고용형태의 격차가 그와 같은 격차가 인간을 양극으로 나누는 경제가 그러한 경제에 유착하여 다른 세상을 만들지 못하는 정치에서 문제의 근원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치경제가 인간들이 세상 하나뿐인 고유한 존재로 존중받으며 차별 없이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도록 사회를 구조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경제가 만들어 놓은 양극화하는 차별의 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니 인간들도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서로 존중할 줄 아는 성격을 잃어가는 잊어가는 것 뿐이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낫다
‘낫다’는 언어에는 ‘질이나 수준 등의 정도에서 더 좋거나 앞서 있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한국어 사전)
언어는 관념의 산물인데 사회적 ‘약속’이라고 불린다. 사회적 약속이라는 점에서 규제적인 성격을 갖지만 관념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언어는 ‘하나’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낫다’는 ‘언어’도 예외는 아니다. ‘더 좋거나 앞서 있을 때’, ‘낫다’는 표현을 쓴다지만, ‘질이나 수준’이 ‘어느 정도’ ‘더’, ‘앞서야’ ‘낫다’는 ‘뜻’으로 ‘약속’될 수 있는지는 사회 구성원들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언어의 ‘뜻’은 사전에 있지 않고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나 상태의 질이나 수준, 더 나아가 한 사회의 질이나 수준에서 어느 것이 ‘낫다’라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각자가 소유한 ‘부와 권력’, 그에 따른 사회경제적 ‘위치’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하나’의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 사이에 사회의 ‘질이나 수준’에 대한 인식의 격차가 클수록 구성원들의 삶의 ‘질이나 수준’의 격차도 크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럴 경우,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약속이 지켜지기도 어려울 것이다.
언어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인 소통이나 이해도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적대적이기 쉬울 것이다. 그러한 사회의 ‘질이나 수준’은 ‘낮다’고, ‘질이나 수준’이 낮은 사회라고 ‘언어화’할 수 있겠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것도 구성원마다, ‘부외 권력’의 위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애초에 ‘질이나 수준’에 따른 ‘좋고 나쁨’, ‘앞서거나, 뒤 서거나’와 같은 것이 ‘정도’의 차이일 뿐 ‘낫다, 못하다’로 규정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사회 구성원들도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구성원들의 ‘차이’를 존중해주는 사회가 ‘질이나 수준’이 ‘더 낫다’고 받아들이는 구성원들도 있을 것이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사회,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고유성이 존중되는 사회, 해서,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가 ‘질이나 수준’에서 ‘더 나은’ 사회라고 받아들이는 구성원들도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존중과 민주와 평등의 사회가 이상理想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어찌되었든 ‘지금, 여기’에서부터 불평등의 ‘격차’를 줄여나가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더 ‘낫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고, ‘격차’에 따른 반민주, 불평등의 정도가 사회의 ‘질이나 수준’을 결정한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한 관념이기도 하다. 해서, 사회적 약속으로서 언어를 지킬 가능성도 ‘현실’이 어떠한가라는 현실에 대한 인식의 정도에 따라 커질 것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의 격차가 크지 않다는 것은 현실의 '불평등' 격차가 크지 않다는 것을 뜻할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ㅣ경험과 차이
<고어 자본주의 Gore Capitalism>라는 책을 읽다가 역자가 남긴 후기가 눈에 들어왔다. 역자와 같지는 않지만 같을 수 없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때문일 것이다. 역자는 여성이고 나는 남성이라는 점에서, 연령이나 거주지도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무엇이 비슷한 경험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비슷한 경험’이라는 말을 가로막는다.
역자의 말처럼 같은 공간을 살아도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육아를 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성적 지향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은 다르다. 경험이 다르다는 말은 사는 것이 다르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사는 일은 서로의 다름을 알아차리고 그 다름이 차별에 따른 고통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애써야 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고, 차별을 말하며 드러내는 저항이 있었기에 겨우 경험했을 ‘차별하고 혐오하는’‘관계’의 현실을 다르게 살려는 것이기도 할 테다.
역자와 나는 매우 다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느꼈던 것은, 아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면 ‘문학’, ‘중남미 여행’, 역자처럼 중남미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경험 윤리’와 같은 것들 때문일 것인데, 그 역시 역자와 나의 경험이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자의 후기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구나 생각했던 것은 여행 후에 사람들에게 받았던 질문과 그에 대해 역자가 밝힌 생각이었다. ‘중남미는 여행하기에 위험하지 않아요? 강도와 테러가 일상이라던데’, 나 역시 여행 후에 많이 받았던 질문이면서 그곳에 가기 전에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세계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중남미는 마지막 여행지라는 것이었다. 그 말의 의미는 여럿 있지만 여행하기 힘든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 힘듦의 이유에는 고도 3,000m를 넘나드는 지형이나 여행 인프라 같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역자가 그랬다고 말한 것처럼 나 역시 한국에 있을 때보다 중남미를 여행할 때가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이 점에서 나는 역자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같은 경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성별이나 연령, 서울과 비서울이라는 거주지에서 역자와 나 사이에는 비슷하지만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자가 여성으로서 경험한 언제 남성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서울보다 강도와 테러가 일상일지 모르는 중남미가 더 안전했다고 경험했듯이 나 역시 한국보다 중남미에 있을 때가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는 점에서 역자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슷한 경험을 말하는 근거는 다르다고 여성인 역자는 말할 것이고 남성인 나는 동의할 수 있다. 또한, 역자가 말하는 그 안전함이 친숙한 일상이 아닌 낯선 곳이라서 경험했던 감각의 차이일 뿐일 수도 있다고 여긴다. 그곳이 일상이 된다면 경험과 감각은 달라질 것이다.
나는 비슷한 경험을 말하지만 역자는 동의할까. 역자와 나의 경험에는 어떤 비슷한 점이 있을까.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차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차별일 것이다. 내가 느끼는 차별의 근거는 ‘살벌한 생존 경쟁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묻지 마 폭력이나 살인을 그런 구조로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먹고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니 각박해지고 차별이나 불평등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진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 구조에 대한 생각과 감각도 성별이나 연령과 거주지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범죄가 짭짤한 수입이 되기에 범죄계급이 되려는, 몸의 (性) 착취와 훼손된 몸이, 죽은 시체를 즐기는 행위 자체가 상품 가치를 지니는 ‘고어 자본주의’를 말하는 여성인 역자와 남성이면서 피해자보다 가해자에 가까울 내가 차이가 아니라 동일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구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경험하는 것 또한 성별, 연령, 거주지 등이 다르기에 같을 수 없다면 다른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를 다르게 경험한다면, 다른 경험 그 자체가 차별과 혐오의 근거가 된다면, 자본주의를,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기 위한 실마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자치와 평등’, ‘사랑과 우정’에 기반한다는 미완의 공동체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한때 강철과 같이 단련되었다던 ‘혁명 정당’이 있었다. 자치와 평등, 사랑과 우정이 넘치는 강철 같은 혁명 정당을 추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까. 경험과 차이를 넘어설 수 있을까.
ㅣ모순의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차이 나는 것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아도르노)
‘차이와 모순’에 관한 표현에서 아도르노의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오직 문제는 ‘모순의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에 있다고 여긴다.
아도르노의 표현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아도르노가 ‘유토피아’를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아도르노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면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도르노가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목을 끄는 것이다.
만일, 아도르노가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를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이미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립물의 통일의 상태인 ‘모순의 바다’에서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면 그뿐 아닌가. 그렇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으로서 상호 전도의 상태를 반복하면 그뿐 아닌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현실을 ‘모순의 바다’ 그 자체로 인식하는 이들에게,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의 상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일 수밖에 없다. 오직, 주인이 되기 위한 생사를 건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차이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상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지, 주인과 노예가 없는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상태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한편으로, 현실에 ‘모순의 바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오직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의 상태와 같은 유토피아는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엄연히 현재 하는 ‘모순의 바다’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그 ‘모순의 바다’를 건너지 않고는 유토피아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모순의 바다’를 상정하는 아도르노의 현실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겠다면 현실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하영진(작가, 현대사상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