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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기원전 597년 3월 14일, 아시아의 서부 지중해 연안 예루살렘, 갑자기 수만 명의 병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거대한 공성탑에 투석기까지 준비한 당시로서는 최고의 정예병들이었습니다. (화염 동영상), 높이 12미터의 성벽 위에서 예루살렘의 유대인 병사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죠. 인구 9만의 예루살렘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유대인들의 성소인 솔로몬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2600년 동안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민족수난의 첫 장면입니다.
조안 오츠 박사 고고학자/영국 캠브리지대학: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신성한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내레이션: 이른바 바벨론 유수 (기원전 597~538년 이스라엘의 유다 왕국 사람들이 新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된 사건), 전쟁에 패한 유대의 왕 여호와김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 관료들이 바벨론으로 압송된 사건, 이때 포로들을 끌고간 바벨론의 왕은 느부갓네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 (Nebuchadnezzar II, 기원전 634~562 新바벨론 제국의 제2대 왕) 였다. 수십일 후 유대인들은 그가 건설한 도시를 보고 눈을 의심했습니다. 바빌론, 그곳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사막 한 가운데 건설된 유대인들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도시를 둘러싼 18미터 높이의 성벽과 神의 상징들로 채워진 성문, 도시 내부를 관통하는 대로가 15만 명의 시민을 품고 있는 크고 작은 주택들, 거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조성된 정원도 있었고 하늘에 닿을 듯 뻗어 있는 거대한 탑도 있었죠. 그러나 포로 신세인 유대인들에게는 이 마천루의 도시가 그저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마크 반 드 미에룹 교수 고고학자/미국 콜럼비아대학: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재앙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자신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동족을 포로로 끌고 갔기 때문에 그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내레이션: 당시 유대인들은 바빌론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바빌론에 관한 이야기들이 성경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벨, 즉 Babel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구약성경 창세기 11장). 성경에서 바벨탑은 신에 대적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완성될 수 없는 탑이고 징벌받아야 할 마땅한 탑이기도 하죠. (바벨탑 사진) 이것은 그런 바벨탑에 관해 가장 잘 담고 있는 피테트 브뢰헬의 작품입니다.
앤드류 조지 고고학자/런던대학: 브뢰헬의 작품은 후기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에 묘사된 바벨탑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물론 작품의 영감은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내레이션: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기 한참 전인 기원전 400년경 이곳을 방문했던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존재한다. 탑의 높이는 90미터에 달한다. 바벨탑은 중세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모험가들이 이 미지의 탑을 찾아 사막을 건너 바벨론이 있다는 오늘날의 이라크로 향했습니다. 그리곤 각기 자신이 본 것을 바벨탑이라고 전했고 유럽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앤드류 조지: 18세기까지 여행자들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이 벽돌탑들을 성서 속의 바벨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레이션: 과연 바벨탑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까요. 제작팀은 이라크 공군의 도움을 받아 그 진실을 추적해 보기로 했습니다. 바그다드를 출발한지 약30여분 눈앞에 거대한 흙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말위야 (Malwiya)탑-이라크 북부 사마라에 있는 기원후 851년에 건설된 이슬람 사원탑, 사마라탑, 사마라탑은 탑 주위로 다섯 번이나 감아 올려진 독특한 계단 때문에 흔히 달팽이 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높이만 무려 52미터에 달합니다. 그러나 이 탑은 바벨탑이 아닙니다. 지난 9세기 이슬람 압바스 왕조 때 건조된 미나래, 즉 이슬람 사원 탑인 것이죠. 그런데도 과거 유럽의 모험가들은 종전 이 사마라 탑이 바벨탑일 것이라고 주장했고 유럽의 화가들은 그들의 주장과 성경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한때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번성했던 이라크 지역엔 수많은 흙탑들이 존재합니다. 밝혀진 거대 흙탑만 무려 58개, 이것은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근처, 초가잔빌에 있는 또 하나의 지구라트입니다. 이란 초가잔빌(Choga Zanbil) 지구라트-기원전 1200년대에 지어진 엘람 왕국의 신전 탑, 지구라트란 고대 메소포타미아 어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집이란 뜻, 즉 하늘에 있는 신의 가르침을 받아내는 아주 성스러운 신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른 어떤 건축물 보다 규모가 크고 최고의 기술력이 동원됐죠. 아치는 물론 출입을 통제하는 문도 설치됐습니다. 그 내부에는 건설자의 이름까지 새겨졌습니다. 이라크에 있는 58개의 지구라트 중 가장 큰 규모로 자랑하는 아칼쿠프 지구라트, 아칼쿠프(Aqar Quf) 지구라트-이라크 바그다드 외곽에 있는 기원전 1500년대의 신전 탑, 기원전 1500년경에 건설되었다는 이 지구라트는 300년 넘게 비 바람에 풍화가 되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높이만도 57미터에 달합니다. 그리하여 이 탑 역시 사마라의 탑처럼 유럽인들에게 종종 바벨탑으로 오인되기도 했습니다.
팔라 알주바위 박사/이라크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 박물관장: 과거에는 독일의 유적발굴단이 아칼쿠프 지구라트가 바벨탑의 자리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동방학회는 과학적 유적발굴 이후 정확한 바벨탑의 위치는 우르, 아칼쿠프, 보르시파 지구라트가 아니고 바빌론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내레이션: 어쩌면 바벨탑이 바빌론에 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연함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습니다. 독일의 고고학자였던 그의 이름은 Robert Koldewey 콜데바이의 제자이자 바빌론 전문가이기도 한 요하임 마르찬트씨는 지금도 스승이 물려준 유품을 분신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나침반과 각도기 그리고 청동으로 만들어진 광학기계, 로베르트 콜데바이(1855~1925)-독일 고고학자1899년부터 18년간 이라크 바빌론 유적발굴, 그러나 이 작은 기기들을 통해 잃어버린 바빌론의 역사 지하 20미터 깊이로 묻혀 있던 바빌론의 문명이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이라크 바빌론 북쪽왕궁 유적), 1899년 이곳에 도착한 콜데바이는 13년 동안의 긴 발굴을 통해 바빌론의 성문이었던 이슈타르문과 왕궁, 성벽 등을 발굴해 냈죠. 그 동안 전설로만 내려오던 바빌론을 실제 역사 속에 불러낸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땅 속 22미터 속에서 발굴해낸 이슈타르문입니다. 전쟁의 神 이슈타르의 이름을 딴 이 관문은 바빌론으로 들어가는 가장 큰 진입로였고 당시 청색 벽돌 위에 수많은 신상들이 새겨져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콜데바이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바벨탑 만큼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혀 뜻밖의 광경을 보게 돼죠. 주민들이 땅 속에서 끊임없이 벽돌을 채취해 가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콜데바이는 이곳이 바벨탑의 자리일 것이라 직감했습니다. 그렇다면 콜데바이가 바벨탑의 자리였다고 확신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잠시 뒤 기대를 안고 찾아간 그곳은 뜻밖에도 곳곳에 잡풀만 무성한 작은 웅덩이들에 불과했습니다. 도저히 우리가 상상했던 바벨탑의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곳, 더구나 이곳은 이슈타르 문이나 왕궁이 있는 바벨론 중심지와도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다 보자 전혀 달랐습니다. 거대한 사각형 모양의 건물터가 확연히 드러난 것입니다.
팔라 알주바위 박사/이라크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 박물관장: 독일의 유적발군단이 제1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바벨탑이 있던 자리를 발굴했는데 바벨탑의 기단은 네모난 형태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너비나 높이가 각각 91.5미터였습니다. 이들이 복원한 바벨탑 그림은 실제에 가장 가까웠고 이전의 유럽인들이 그린 그림들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내레이션: 일찍이 그리스의 학자 헤로도토스는 바벨탑의 크기에 대해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가 각각 180큐빗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각각 90미터가 돼죠. 이는 콜데바이가 주장했던 자리와 비교했을 때 그 크기가 불과 1.5미터 밖에 나지 않는 근소한 차이, (독일 베를린 페르가몬박물관), 콜데바이가 자신이 발굴했던 유물을 갖고 돌아온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 이곳 수장고엔 지금도 콜데바이의 발굴연구기록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온갖 신상들로 채워진 베를린 이슈타르 문에 대한 각종 기록은 물론 여전히 미스터리 건축물로 알려져 있는 공중정원, 그리고 성벽과 완공, 신전을 비롯하여 바벨탑의 크기와 모양에 대한 기록도 있죠. 이것이 콜데바이의 기록을 근거로 복원해낸 바벨탑입니다. 그런데 바벨탑에 대한 또 다른 단서가 프랑스에 있습니다.
에르베 르퀼로 박사 고고학자/프랑스 아시리아학회: 에사겔 타블렛은 공식적인 발굴을 통해 발견된 것이 아닙니다. 19세기에 도굴된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영국 학자들이 이것을 봤는데 그 뒤로 다시 사라졌습니다. 이후 한 프랑스 개인 수집가가 이 타블렛을 수집했고 1913년에 프랑스 학자들이 이것을 발견해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내레이션: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 우리는 이곳에서 작은 점토판 하나를 만났습니다. 에사겔 타블렛-바벨탑의 상세한 크기가 기록된 점토판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바벨론에 있던 신전 에사겔에서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낸 교과서였죠.
에르베: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면서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라트를 묘사하기 위한 목적이기 보다는 지구라트를 예를 들어 수학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는데요. 재밋는 것은 그 수치가 실제에 아주 근접했다는 것입니다.
내레이션: 종이가 없던 바빌론 시대, 모든 교과서는 이렇듯 점토판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과서에 바벨탑의 크기가 문제로 출제되어 있었습니다. 그 밑면과 높이가 각각 91미터, 이로써 콜데바이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발굴지와 해로도토스의 기록, 그리고 에사겔 점토판의 기록이 거의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확신까지는 이릅니다. 이것이 언제 건설되었으며 정말로 바벨탑인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이 있는 까닭이죠. (영국 런던대학교), 이 의문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증거가 최근 런던대학의 한 교수로부터 제기되었습니다.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 Studies
앤드류 조지: 15년 전에 발견된 또 다른 비석이 있습니다. 이것의 하단부는 많이 손상돼 있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관한 내용이 있고 지금은 노르웨이에 있습니다. 이 비석은 많이 손상됐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대한 진짜 기록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합니다.
내레이션: 런던 대학의 앤드류 조지 교수는 현재 바벨탑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권위자로 꼽힙니다. 그런 조지 교수는 어느날 바벨탑의 의문을 풀어줄 결정적 증거인 석비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석비엔 놀랍게도 탑의 모양은 물론 건설 시기와 왕의 이름까지 들어있었죠.
EBS 직원: 안녕하세요 저희는 한국에 있는 EBS입니다. 바빌론 유물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과 통화하고 싶습니다.
내레이션: 다행히 소장자 측으로부터 촬영이 가능하다는 답신이 왔습니다. You will be to film the stone itself, but nothing from the general library, nothing of the premises (석비만을 찍을 수 있습니다. 소장고 전경이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찍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장된 장소에 관한 힌트를 줄 수는 없고 어떤 촬영도 불허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석비가 있다는 곳은 뜻밖에도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EBS 직원: 저희는 한국의 EBS에서 온 촬영팀입니다. 저희는 벌써 오슬로에 도착했고 바벨탑 석비를 촬영하고자 합니다.
내레이션: 어쩌면 바벨탑에 관한 모든 실마리를 한꺼번에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런데~EBS 직원: 안녕하세요 저는 EBS PD 김동준입니다.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소장자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공개를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김동준 PD: 저는 당신의 이 메일을 받지 못했습니다. filming~ is not going to be possible (촬영이 불가능함을 알려 드립니다). 대신 그들은 고해상도의 사진 한 장을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검은 석비 사진), 이것이 문제의 그 석비입니다. 폭 25센치미터 높이 47센치미터의 작은 현무암 덩어리,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수많은 문양과 글씨들이 도들 새김으로 빼곡히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좌측 상단에 그려져 있는 이것은 누가 봐도 탑의 문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은 정면에 나있는 계단을 비롯하여 모두 7층으로 구성된 석탑임이 분명하죠. 이를 그동안 에사겔 파블렛을 근거로 상상해 본 탑과 비교해 보면 그 형태에서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석비에 들어있는 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정체가 역시 석비의 좌측 상단에 짧고 간단한 명문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E TEMEN AN KI (에 테멘 앙 키), 이것은 당시 바빌론의 神 마르둑이 거주하는 신전을 의미합니다.
앤드류 조지: 에 테멘 앙 키는 수메르어이며 바빌론 사람들이 바빌론의 신전탑에 붙인 이름입니다. 수메르어로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당시 수메르어가 고급 언어였기 때문이다. 수메르어로 에 테멘 앙 키는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 이라는 뜻입니다. 기초라는 것은 건물은 중앙에 위치하는데 바빌론인들은 건물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이 없으면 우주가 무너진다고 믿었습니다.
내레이션: 그 아래엔 지구라트 라고 ZI QU RA AT 라고 새겨져 있죠.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래 도시 한 가운데 세워졌던 거대한 신전탑을 뜻합니다. 그리고 맨 하단에 있는 이 명문 KA DINGIR RA KI (카 딩기 라 키), 이것은 수메르어로 카 딩기 라 키 (바빌루),
배철현 교수/수메르어전공/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세번째 줄에 나오는 카 딩기 라 키는 보통 아카드어로 바빌루 라고 읽습니다.
내레이션: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이것이 곧 바벨론에 있던 거대한 신전탑 곧 바벨탑이었던 것입니다. 바벨탑의 건설자는 석대 우측 상단에 부조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의 왕을 상징하는 원뿔 모양의 왕관을 쓰고 서 있는 이 사람, 이 사람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입니다.
앤드류 조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비석을 통해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벨탑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벨탑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도 나옵니다.
내레이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성경에서 흔히 느부갓네살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바벨론의 왕이죠. 그는 기원전 1800년경 바벨론을 세웠던 함무라비 대왕 사후, 근 1000년 동안 앗시리아에 빼앗겼던 바빌론을 수복한 사람이자 대단한 건설광이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605년 바빌론은 드디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전성기를 맞습니다. 주변국을 정복한 그는 바벨론이 세상의 중심임을 알리고 싶어 했죠. 당연히 그에 걸 맞는 바벨탑과 같은 상징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에 바벨탑 건설에 관한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자 벽돌을 단단히 구원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구약성경 창세기 11:4절)
앤드류 조지: 진흙이나 찰흑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매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건축재료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나무나 돌 같은 것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진흙으로 구운 벽돌로 온갖 것들을 지은 것입니다. (유프라테스강),
내레이션: 바빌론을 가로 지르는 유프라테스강, 고대의 모든 문명이 그렇듯 바벨론 역시 이 강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곳은 년 강수량이 100밀리미터도 안되는 아주 건조한 땅이어서 물을 주지 않으면 나무 한 그루도 자랄 수 없는 아주 황량한 땅입니다. 하지만 유프라테스 강은 모든 것을 가져다 주었죠. 물을 제공했고 매년 엄청난 양의 토사를 몰고와 땅을 기름지게 했으며 건축에 필요한 질 좋은 흙을 제공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남긴 거의 건축물이 흙으로 되어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 전에 아치와 같은 기술을 터득할 만큼 흙건축에 전문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벨탑 처럼 큰 규모의 탑을 짓자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강자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자면 전쟁보다 손쉬운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도시건설과 함께 주변국에 대한 정복전쟁을 계속 했죠. 그리하여 전성기 시절인 기원전 600년대 초반 바벨론 영토는 북으로는 아르메니아 남으로는 페르시아만 서쪽으로는 시리아와 예루살렘을 지나 이집트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유대인의 비극, 바벨론 유수도 그 결과물이었던 것이죠.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바벨탑 건설은 바빌론 제국의 영광을 선언한 야심찬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벨탑 건설이 애초부터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세운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나보폴라사르 (Nabopolasar)-기원전 625~605년 新바빌론 제국의 제1대 왕,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 역시 바벨탑을 건설하고 싶어했습니다.
앤드류 조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기록은 그가 바벨탑을 어떻게 지었고 마무리 했는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가 시작한 건축을 자세히 끝냈다고 합니다. 나보폴라사르가 30큐빗 즉 높이 15미터 정도의 탑을 쌓았고 자신이 15미터를 추가로 쌓았고 그 위에 신전탑을 지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내레이션: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바벨탑의 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내부에 또 다른 탑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가장 안쪽의 것은 한 면이 65미터 그 다음 것은 83미터 규모에 달했죠. 하지만 모두 무너지자 훗날 나보폴라사르는 다시 91미터로 확장, 탑을 건설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15미터만 올린 채 사망하고 말았죠. 그것은 대역사였고 최첨단의 기술이 동원됐을 것입니다. 건축은 가로 세로 30센치미터 높이 8센치미터의 흙 벽돌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벽돌을 가즈런히 놓은 다음에 그 위에 몰타르를 깔고 갈대와 밀짚을 얹었습니다. 그것은 접착력을 높이고 하중을 흡수하는 아주 효과작인 방법이었습니다. 기원전 1500년 경에 건설된 아칼쿠프 지구라트, 지금도 이 지구라트엔 갈대와 밀짚을 넣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비바람에 벽돌이 마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썩지 않고 남아 있는 갈대는 지붕의 처마역활도 하고 있음도 볼 수 있죠. 더 획기적인 건축재료도 사용되었습니다. 바로 석회입니다. 이것은 물른 진흙을 돌처럼 단단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바빌론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래 수천년 전부터 내려온 흙건축 기술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건설의 책임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였습니다.
앤드류 조지: 바벨탑을 짓는데 사용된 벽돌의 개수는 대략 3600~7500만개 정도가 사용된 것 같습니다.
내레이션: 벽돌을 굽는 매케한 연기가 매일 바빌론의 하늘을 채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십년에 걸쳐 완성됐을 가로 세로 높이 각각 91.2미터의 바빌론, 그러나 바벨탑이 갖고 있는 최고의 기술적 백미는 맨 꼭대기에 있는 이 푸른 색의 영롱한 신전일 것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실린더), 바빌론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푸른 색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당시 건축방법을 기록해 건물 하단에 매장했던 이 점토판 기록을 통해 그 단서를 알 수 있습니다.
앤드류 조지: 에 테멘 앙 키에 대해 언급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또 다른 기록이 있는데 신전의 꼭대기는 짙은 푸른 색 타일, 즉 라피스라줄리 벽돌로 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라피스라줄리 색깔과 같은 짙은 푸른 색으로 된 타일입니다. 라피스라줄리는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나는 짙은 푸른 색 돌인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값비싼 보석으로 여겼습니다.
내레이션: 푸른 색은 옛 부터 서아시아 사람들에게 부와 행운을 뜻했습니다. 때문에 그 어떤 보석보다 사랑받았던 것이 이 라피스라줄리라 불리는 천금색이었죠. 하지만 너무 귀했기에 이 거대한 신전탑을 천금색만으로 치장하기에는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의 주인 마르둑이 거주하는 신전을 그저 평범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또 하나의 놀랄만한 신기술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버립니다. 독일 페가르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입니다. 여기엔 사자와 황소 용 같은 수많은 신상들이 부조되어 있죠. 그런데 이 신상과 함께 눈에 띄는 게 푸른 색의 벽, 이것은 누가 봐도 불에 구워낸 벽돌, 즉 자기 벽돌입니다. 지금도 이라크의 도공들은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부터 시작해 바빌론, 페르시아, 이슬람에 이르는 도자기 역사의 산증인들이기도 하죠.
하데브 알 테브/이라크 도자기전문가: 바빌론 사람들은 이라크에 바빌론 문명 이전에도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상기 시켜줍니다. 수메르 문명시대에도 유리 공예와 도자기 공예가 있었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르 문명 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유리와 도자기 기술은 바빌론 사람들 이전부터 존재했고 우르인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이 바빌론 시대입니다.
내레이션: 260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바빌론 당시의 색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는 자기벽돌, 흔히 토기에서 도기로 넘어오는 이 과정을 인류문명의 전환점으로 꼽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는 뜻이죠. 때문에 오늘날의 도공들도 도자기를 굽기 위해 고온을 만들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김상구 안동요/도공; 자기를 만들려면 가마의 온도를 1200에서 1300도까지 올려야 합니다. 그 상태로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기 위해서는 가마를 설계하는 기술도 아주 중요하거든요. 이런 일들이 현대에도 간단한 일들은 아닙니다. 수천 년 전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참 놀랍습니다.
내레이션: 도자기는 흙을 녹여 보석을 만들어내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흔히 도자 예술을 불의 예술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렇다면 오늘 날에도 만들기 힘든 도자기를 그것도 나무 한 그루 드믄 사막에서 바빌론인들은 어떻게 자기 벽돌을 구워낼 수 있었을까요.
요하임 마르찬 고고학자/독일 페르가몬박물관: 점토를 구워서 만든 자기들이 생산되고 가마들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여기에 어떤 에너지원이 사용됐을 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많은 건축자재와 일상적으로 사용된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수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석유가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라크 히트),
내레이션: 요하임 마르찬씨는 그 해법을 이라크의 풍부한 석유자원에서 찾습니다. 기원전 1800년 경부터 사용된 천연 역청우물, 지금도 솟구치는 이 석유를 이용해 바벨론인들이 세계 최초로 도자기라는 세라믹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정에서 얻은 것은 석유만은 아니었습니다. 검고 끈적끈적한 이것이 바로 역청이라 불리는 천연 아스팔트입니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역청을 채취해 아주 요긴하게 사용합니다. 처음엔 무르지만 금방 단단해지면서도 접착력이 강해 건축 방수제로는 최고죠. 역청을 이용한 방수처리의 역사는 사실 5000년이 넘습니다. 기원전3000년 전에 건설되었다는 우르 지구라트의 하단엔 지금도 역청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청은 벽돌 사이에 들어가 몰타르를 대신하기도 했으며 건축 밑면에 칠해져 방수용 아스팔트가 되기도 했습니다. 비록 사막 위의 도시였지만 바빌론도 홍수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했습니다. 물이 채워진 (垓子) 도시 주변은 물론 시내 곳곳을 관통했고 가끔 유프라테스강이 범람하는 사태도 일어났습니다. 홍수가 나면 아무리 단단한 흙건물도 당해낼 재간이 없죠. 하지만 바빌론인들은 이 문제를 역청으로 간단히 해결해 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바빌론 어디에 세워진 것일까요. 그곳은 왕궁 옆에 있던 에사길 사원으로부터 약200미터 떨어진 너른 공터였습니다. 바빌론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주 전망 좋은 곳이기도 하죠. 자기 벽돌로 화려하게 장식된 신전 내부로 들어가면은 정중앙에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이 자리했습니다. 바빌론인들은 마르둑이 살아있는 神이라 믿었기에 한쪽에 침실까지 마련해 놓았죠.
앤드류 조지: 마르둑은 바빌론의 위대한 神으로써 마치 왕이 궁전에 살듯이 에사길 신전에 살았습니다. 그의 아내도 있었고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전 안에 각기 자기방도 가지고 있었고 시중을 드는 보좌신들도 있었습니다. (에사길), 신전 전체가 마치 신의 궁전과 같았습니다.
내레이션: (바벨탑 앞에서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 동영상), 이것이 세계 방송사상 최초로 입체영상을 통해 복원해 본 기원전 500년대 바빌론의 아침입니다. 매일 동이 트는 아침이면 특별히 선택받은 사제들이 신전 내부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곤 마르둑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싱싱한 과일들을 제단에 받쳤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심지어 마르둑에겐 아들이 있었고 매일 밤 정결함을 인정받은 여인이 그와 동침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합니다. 그리하여 밤중엔 엄격히 통제됐습니다. 단 별자리를 관측해야 하는 천문학자들만은 예외였죠. 그러나 바벨탑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神의 징벌이 아닌 페르시아의 침략에 의해 기원전 482년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그 뒤론 더 이상 복구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사막에 모래 바람에 묻혀버린 지 2500년 이 지역을 점령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 질 좋은 벽돌을 캐내 집 짓는 것은 물론 원형경기장, 댐건설, 도로를 위한 교각과 같은 건설재료로 사용해 버리고 맙니다. 그것이 바벨탑의 마지막 운명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벨탑은 전설도 성경 속에서 등장하는 신화도 아니었습니다. 엄연히 실제했던 역사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완성한 사람은 느부갓네살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였습니다. 건설왕이기도 했던 그는 바벨탑 외에도 역사에 남을만한 또 하나의 걸작을 남겼죠. 훗날 그리스인들이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렸던 이 건축물 바로 공중정원입니다. 끝. (EBS 다큐프라임 1479회 위대한 바빌론 제2부 바벨탑 에서 정리).
① 기원전 597년 3월 14일, 아시아의 서부 지중해 연안 예루살렘, 갑자기 수만 명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거대한 공성탑에 투석기까지 준비한 당시로서는 최고의 정예병들이었다. 높이 12미터의 성벽 위에서 예루살렘의 유대인 병사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인구 9만의 예루살렘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유대인들의 성소인 솔로몬 성전도 파괴되었다. 이것이 지난 2600년 동안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민족수난의 첫 장면이다. 예루살렘은 파괴되었다. 종교적으로 신성한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다. 이른바 바벨론 유수는 기원전 597~538년 이스라엘의 유다 왕국 사람들이 新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된 사건, 전쟁에 패한 유대의 왕 여호와김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 관료들이 바벨론으로 압송된 사건, 이때 포로들을 끌고간 바벨론의 왕은 느부갓네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 (BC 634~562) 新바벨론 제국의 제2대 왕이다. 수십일 후 유대인들은 그가 건설한 도시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바빌론, 그곳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사막 한 가운데 건설된 유대인들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도시였다. 도시를 둘러싼 18미터 높이의 성벽과 神의 상징들로 채워진 성문, 도시 내부를 관통하는 대로가 15만 명의 시민을 품고 있는 크고 작은 주택들, 거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조성된 정원도 있었고 하늘에 닿을 듯 뻗어 있는 거대한 탑도 있었다. 그러나 포로 신세인 유대인들에게는 이 마천루의 도시가 그저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②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재앙이었다. 유대인들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자신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동족을 포로로 끌고 갔기 때문에 그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빌론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바빌론에 관한 이야기들이 성경 곳곳에 나와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벨(Babel), 즉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다(구약성경 창세기 11장). 성경에서 바벨탑은 神에 대적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을 상징한다. 그래서 완성될 수 없는 탑이고 징벌받아야 할 마땅한 탑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런 바벨탑에 관해 가장 잘 담고 있는 피테르 브뢰헬의 작품이다. 브뢰헬의 작품은 후기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에 묘사된 바벨탑의 전형적인 예다. 물론 작품의 영감은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에서 가져온 것이다.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만 있는게 아니다. 성경에 기록되기 한참 전인 기원전 400년경 이곳을 방문했던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것은 아직도 존재한다. 탑의 높이는 90미터에 달한다. 바벨탑은 중세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모험가들이 이 미지의 탑을 찾아 사막을 건너 바벨론이 있다는 오늘날의 이라크로 향했다. 그리곤 각기 자신이 본 것을 바벨탑이라고 전했고 유럽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③ 18세기까지 여행자들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이 벽돌탑들을 성서 속의 바벨탑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바벨탑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까. 제작팀은 이라크 공군의 도움을 받아 그 진실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 바그다드를 출발한지 약30여분 눈앞에 거대한 흙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위야 (Malwiya)탑은 이라크 북부 사마라에 있는 기원후 851년에 건설된 이슬람 사원탑, 사마라탑은 탑 주위로 다섯 번이나 감아 올려진 독특한 계단 때문에 흔히 달팽이 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높이만 무려 52미터에 달한다. 그러나 이 탑은 바벨탑이 아니다. 지난 9세기 이슬람 압바스 왕조 때 건조된 미나래, 즉 이슬람 사원 탑인 것이다. 그런데도 과거 유럽의 모험가들은 종전 이 사마라 탑이 바벨탑일 것이라고 주장했고 유럽의 화가들은 그들의 주장과 성경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한때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번성했던 이라크 지역엔 수많은 흙탑들이 존재한다. 밝혀진 거대 흙탑만 무려 58개, 이것은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근처, 초가잔빌에 있는 또 하나의 지구라트다. 이란 초가잔빌(Choga Zanbil) 지구라트는 기원전 1200년대에 지어진 엘람 왕국의 신전 탑, 지구라트란 고대 메소포타미아 어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집이란 뜻, 즉 하늘에 있는 신의 가르침을 받아내는 아주 성스러운 신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때문에 다른 어떤 건축물 보다 규모가 크고 최고의 기술력이 동원됐다. 아치는 물론 출입을 통제하는 문도 설치됐다. 그 내부에는 건설자의 이름까지 새겨졌다. 이라크에 있는 58개의 지구라트 중 가장 큰 규모로 자랑하는 아칼쿠프 지구라트, 아칼쿠프(Aqar Quf) 지구라트는 이라크 바그다드 외곽에 있는 기원전 1500년대의 신전 탑, 기원전 1500년경에 건설되었다는 이 지구라트는 300년 넘게 비 바람에 풍화가 되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높이만도 57미터에 달한다. 그리하여 이 탑 역시 사마라의 탑처럼 유럽인들에게 종종 바벨탑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과거에는 독일의 유적발굴단이 아칼쿠프 지구라트가 바벨탑의 자리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었다. 그러나 독일 동방학회는 과학적 유적발굴 이후 정확한 바벨탑의 위치는 우르, 아칼쿠프, 보르시파 지구라트가 아니고 바빌론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④ 어쩌면 바벨탑이 바빌론에 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그 당연함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독일의 고고학자였던 그의 이름은 Robert Koldewey, 콜데바이의 제자이자 바빌론 전문가이기도 한 요하임 마르찬트씨는 지금도 스승이 물려준 유품을 분신처럼 여기고 있다. 나침반과 각도기 그리고 청동으로 만들어진 광학기계, 로베르트 콜데바이(1855~1925)는 독일 고고학자 1899년부터 18년간 이라크 바빌론 유적발굴, 그러나 이 작은 기기들을 통해 잃어버린 바빌론의 역사 지하 20미터 깊이로 묻혀 있던 바빌론의 문명이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1899년 이곳에 도착한 콜데바이는 13년 동안의 긴 발굴을 통해 바빌론의 성문이었던 이슈타르문과 왕궁, 성벽 등을 발굴해 냈다. 그 동안 전설로만 내려오던 바빌론을 실제 역사 속에 불러낸 것이다. 이곳이 바로 땅 속 22미터 속에서 발굴해낸 이슈타르 문이다. 전쟁의 神 이슈타르의 이름을 딴 이 관문은 바빌론으로 들어가는 가장 큰 진입로였고 당시 청색 벽돌 위에 수많은 신상들이 새겨져 있던 곳이다. 하지만 콜데바이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바벨탑 만큼은 찾을 수가 없었다.
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혀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된다. 주민들이 땅 속에서 끊임없이 벽돌을 채취해 가는 것을 목격한다. 콜데바이는 이곳이 바벨탑의 자리일 것이라 직감했다. 그렇다면 콜데바이가 바벨탑의 자리였다고 확신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잠시 뒤 기대를 안고 찾아간 그곳은 뜻밖에도 곳곳에 잡풀만 무성한 작은 웅덩이들에 불과했다. 도저히 우리가 상상했던 바벨탑의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곳, 더구나 이곳은 이슈타르 문이나 왕궁이 있는 바벨론 중심지와도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다 보자 전혀 달랐다. 거대한 사각형 모양의 건물터가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독일의 유적발군단이 제1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바벨탑이 있던 자리를 발굴했는데 바벨탑의 기단은 네모난 형태의 것으로 확인됐다. 너비나 높이가 각각 91.5미터였다. 이들이 복원한 바벨탑 그림은 실제에 가장 가까웠고 이전의 유럽인들이 그린 그림들과는 매우 달랐다.
⑥ 일찌기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바벨탑의 크기에 대해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가 각각 180큐빗이라고 했다. 이를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각각 90미터가 된다. 이는 콜데바이가 주장했던 자리와 비교했을 때 그 크기가 불과 1.5미터 밖에 나지 않는 근소한 차이, 콜데바이가 자신이 발굴했던 유물을 갖고 돌아온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 이곳 수장고엔 지금도 콜데바이의 발굴연구기록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온갖 신상들로 채워진 베를린 이슈타르 문에 대한 각종 기록은 물론 여전히 미스터리 건축물로 알려져 있는 공중정원, 그리고 성벽과 완공, 신전을 비롯하여 바벨탑의 크기와 모양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것이 콜데바이의 기록을 근거로 복원해낸 바벨탑이다. 그런데 바벨탑에 대한 또 다른 단서가 프랑스에 있다. 에사길 타블렛은 공식적인 발굴을 통해 발견된 것이 아니다. 19세기에 도굴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영국 학자들이 이것을 봤는데 그 뒤로 다시 사라졌다. 이후 한 프랑스 개인 수집가가 이 타블렛을 수집했고 1913년에 프랑스 학자들이 이것을 발견해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⑦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 우리는 이곳에서 작은 점토판 하나를 만났다. 에사길 타블렛은 바벨탑의 상세한 크기가 기록된 점토판, 바벨론에 있던 신전 에사길에서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낸 교과서였다.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면서 사용했을 수도 있다. 지구라트를 묘사하기 위한 목적이기 보다는 지구라트를 예를 들어 수학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재밋는 것은 그 수치가 실제에 아주 근접했다는 것이다. 종이가 없던 바빌론 시대, 모든 교과서는 이렇듯 점토판 이었다. 그런데 이 교과서에 바벨탑의 크기가 문제로 출제되어 있었다. 그 밑면과 높이가 각각 91미터, 이로써 콜데바이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발굴지와 해로도토스의 기록, 그리고 에사길 점토판의 기록이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아직 확신까지는 이르다. 이것이 언제 건설되었으며 정말로 바벨탑인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는 까닭이다. 이 의문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증거가 최근 런던대학의 한 교수로부터 제기되었다. 15년 전에 발견된 또 다른 비석이 있다. 이것의 하단부는 많이 손상돼 있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관한 내용이 있고 지금은 노르웨이에 있다. 이 비석은 많이 손상됐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대한 진짜 기록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하다. 런던 대학의 앤드류 조지 교수는 현재 바벨탑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권위자다. 그런 조지 교수는 어느날 바벨탑의 의문을 풀어줄 결정적 증거인 석비 하나를 찾아냈다. 석비엔 놀랍게도 탑의 모양은 물론 건설 시기와 왕의 이름까지 들어있었다. 석비가 있다는 곳은 뜻밖에도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바벨탑에 관한 모든 실마리를 한꺼번에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⑧ 그들은 고해상도의 사진 한 장을 보내주었다. 이것이 문제의 그 석비다. 폭 25센치미터 높이 47센치미터의 작은 현무암 덩어리,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수많은 문양과 글씨들이 도들 새김으로 빼곡히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좌측 상단에 그려져 있는 이것은 누가 봐도 탑의 문양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은 정면에 나있는 계단을 비롯하여 모두 7층으로 구성된 석탑임이 분명하다. 이를 그동안 에사길 타블렛을 근거로 상상해 본 탑과 비교해 보면 그 형태에서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석비에 들어있는 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 정체가 역시 석비의 좌측 상단에 짧고 간단한 명문으로 새겨져 있다. E TEMEN AN KI (에 테멘 앙 키), 이것은 당시 바빌론의 神 마르둑이 거주하는 신전을 의미한다. 에 테멘 앙 키는 수메르어이며 바빌론 사람들이 바빌론의 신전탑에 붙인 이름이다. 수메르어로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당시 수메르어가 고급 언어였기 때문이다. 수메르어로 에 테멘 앙 키는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 이라는 뜻이다. 기초라는 것은 건물은 중앙에 위치하는데 바빌론인들은 건물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이 없으면 우주가 무너진다고 믿었다. 그 아래엔 지구라트 라고 ZI QU RA AT 라고 새겨져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래 도시 한 가운데 세워졌던 거대한 신전탑을 뜻한다. 그리고 맨 하단에 있는 이 명문 KA DINGIR RA KI (카 딩기 라 키), 이것은 수메르어로 카 딩기 라 키 (바빌루), 세번째 줄에 나오는 카 딩기 라 키는 보통 아카드어로 바빌루 라고 읽는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것이 곧 바벨론에 있던 거대한 신전탑 곧 바벨탑이었다. 바벨탑의 건설자는 석대 우측 상단에 부조되어 있다. 바벨론의 왕을 상징하는 원뿔 모양의 왕관을 쓰고 서 있는 이 사람, 이 사람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다.
⑨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비석을 통해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벨탑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벨탑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도 나온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성경에서 흔히 느부갓네살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바벨론의 왕이다. 그는 기원전 1800년경 바벨론을 세웠던 함무라비 대왕 사후, 근 1000년 동안 앗시리아에 빼앗겼던 바빌론을 수복한 사람이자 대단한 건설광이기도 했다. 기원전 605년 바빌론은 드디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전성기를 맞는다. 주변국을 정복한 그는 바벨론이 세상의 중심임을 알리고 싶어 했다. 당연히 그에 걸 맞는 바벨탑과 같은 상징물이 필요했다. 성경 창세기에 바벨탑 건설에 관한 중요한 단서가 있다. “자 벽돌을 단단히 구원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구약성경 창세기 11:4절), 진흙이나 찰흑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매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건축재료다. 이 지역에서는 나무나 돌 같은 것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진흙으로 구운 벽돌로 온갖 것들을 지은 것이다.
⑩ 바빌론을 가로 지르는 유프라테스강, 고대의 모든 문명이 그렇듯 바벨론 역시 이 강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곳은 년 강수량이 100밀리미터도 안되는 아주 건조한 땅이어서 물을 주지 않으면 나무 한 그루도 자랄 수 없는 아주 황량한 땅이다. 하지만 유프라테스 강은 모든 것을 가져다 주었다. 물을 제공했고 매년 엄청난 양의 토사를 몰고와 땅을 기름지게 했으며 건축에 필요한 질 좋은 흙을 제공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남긴 거의 건축물이 흙으로 되어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 전에 아치와 같은 기술을 터득할 만큼 흙건축에 전문가들이었다. 하지만 바벨탑 처럼 큰 규모의 탑을 짓자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했다. 강자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자면 전쟁보다 손쉬운 방법이 없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도시건설과 함께 주변국에 대한 정복전쟁을 계속 했다. 그리하여 전성기 시절인 기원전 600년대 초반 바벨론 영토는 북으로는 아르메니아 남으로는 페르시아만 서쪽으로는 시리아와 예루살렘을 지나 이집트에 까지 이르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유대인의 비극, 바벨론 유수도 그 결과물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바벨탑 건설은 바빌론 제국의 영광을 선언한 야심찬 도전이었다. 하지만 바벨탑 건설이 애초부터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세운 계획은 아니었다. 나보폴라사르 (Nabopolasar)는 기원전 625~605년 新바빌론 제국의 제1대 왕,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 역시 바벨탑을 건설하고 싶어했다.
⑪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기록은 그가 바벨탑을 어떻게 지었고 마무리 했는지에 대해서 말해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가 시작한 건축을 자세히 끝냈다. 나보폴라사르가 30큐빗 즉 높이 15미터 정도의 탑을 쌓았고 자신이 15미터를 추가로 쌓았고 그 위에 신전탑을 지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바벨탑의 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내부에 또 다른 탑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가장 안쪽의 것은 한 면이 65미터 그 다음 것은 83미터 규모에 달했다. 하지만 모두 무너지자 훗날 나보폴라사르는 다시 91미터로 확장, 탑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단지 15미터만 올린 채 사망하고 말았다. 그것은 대역사였고 최첨단의 기술이 동원됐다. 건축은 가로 세로 30센치미터 높이 8센치미터의 흙 벽돌이 사용되었다. 그들은 이 벽돌을 가즈런히 놓은 다음에 그 위에 몰타르를 깔고 갈대와 밀짚을 얹었다. 그것은 접착력을 높이고 하중을 흡수하는 아주 효과작인 방법이었다. 기원전 1500년 경에 건설된 아칼쿠프 지구라트, 지금도 이 지구라트엔 갈대와 밀짚을 넣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비바람에 벽돌이 마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썩지 않고 남아 있는 갈대는 지붕의 처마역활도 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더 획기적인 건축재료도 사용되었다. 바로 석회다. 이것은 물론 진흙을 돌처럼 단단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바빌론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래 수천년 전부터 내려온 흙건축 기술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다. 물론 이 모든 건설의 책임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였다. 바벨탑을 짓는데 사용된 벽돌의 개수는 대략 3600~7500만개 정도, 벽돌을 굽는 매케한 연기가 매일 바빌론의 하늘을 채웠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년에 걸쳐 완성됐을 가로 세로 높이 각각 91.2미터의 바빌론, 그러나 바벨탑이 갖고 있는 최고의 기술적 백미는 맨 꼭대기에 있는 이 푸른 색의 영롱한 신전일 것이다. 바빌론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푸른 색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당시 건축방법을 기록해 건물 하단에 매장했던 이 점토판 기록을 통해 그 단서를 알 수 있다.
⑫ 에 테멘 앙 키에 대해 언급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또 다른 기록이 있는데 신전의 꼭대기는 짙은 푸른 색 타일, 즉 라피스라줄리 벽돌로 덮여 있었다. 라피스라줄리 색깔과 같은 짙은 푸른 색으로 된 타일이다. 라피스라줄리는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나는 짙은 푸른 색 돌인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값비싼 보석으로 여겼다. 푸른 색은 옛 부터 서아시아 사람들에게 부와 행운을 뜻했다. 때문에 그 어떤 보석보다 사랑받았던 것이 이 라피스라줄리라 불리는 천금색이었다. 하지만 너무 귀했기에 이 거대한 신전탑을 천금색만으로 치장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바벨탑의 주인 마르둑이 거주하는 신전을 그저 평범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또 하나의 놀랄만한 신기술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버린다. 독일 페가르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이다. 여기엔 사자와 황소 용 같은 수많은 신상들이 부조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신상과 함께 눈에 띄는 게 푸른 색의 벽, 이것은 누가 봐도 불에 구워낸 벽돌, 즉 자기 벽돌이다. 지금도 이라크의 도공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부터 시작해 바빌론, 페르시아, 이슬람에 이르는 도자기 역사의 산증인들이다.
⑬ 바빌론 사람들은 이라크에 바빌론 문명 이전에도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상기 시켜주었다. 수메르 문명시대에도 유리 공예와 도자기 공예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르 문명 시대에도 존재했다. 유리와 도자기 기술은 바빌론 사람들 이전부터 존재했고 우르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이 바빌론 시대다. 260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바빌론 당시의 색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는 자기벽돌, 흔히 토기에서 도기로 넘어오는 이 과정을 인류문명의 전환점으로 꼽는 학자들이 많다. 그만큼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는 뜻이다. 때문에 오늘날의 도공들도 도자기를 굽기 위해 고온을 만들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자기를 만들려면 가마의 온도를 1200에서 1300도까지 올려야 한다. 그 상태로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기 위해서는 가마를 설계하는 기술도 아주 중요하다. 이런 일들이 현대에도 간단한 일들은 아니다. 수천 년 전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참 놀랍다. 도자기는 흙을 녹여 보석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흔히 도자 예술을 불의 예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 날에도 만들기 힘든 도자기를 그것도 나무 한 그루 드믄 사막에서 바빌론인들은 어떻게 자기 벽돌을 구워낼 수 있었을까.
⑭ 점토를 구워서 만든 자기들이 생산되고 가마들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여기에 어떤 에너지원이 사용됐을 지에 대한 의문이다. 많은 건축자재와 일상적으로 사용된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수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석유가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하임 마르찬씨는 그 해법을 이라크의 풍부한 석유자원에서 찾는다. 기원전 1800년 경부터 사용된 천연 역청우물, 지금도 솟구치는 이 석유를 이용해 바벨론인들이 세계 최초로 도자기라는 세라믹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유정에서 얻은 것은 석유만은 아니었다. 검고 끈적끈적한 이것이 바로 역청이라 불리는 천연 아스팔트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역청을 채취해 아주 요긴하게 사용한다. 처음엔 무르지만 금방 단단해지면서도 접착력이 강해 건축 방수제로는 최고다. 역청을 이용한 방수처리의 역사는 사실 5000년이 넘는다. 기원전3000년 전에 건설되었다는 우르 지구라트의 하단엔 지금도 역청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역청은 벽돌 사이에 들어가 몰타르를 대신하기도 했으며 건축 밑면에 칠해져 방수용 아스팔트가 되기도 했다. 비록 사막 위의 도시였지만 바빌론도 홍수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했다. 물이 채워진 (垓子) 도시 주변은 물론 시내 곳곳을 관통했고 가끔 유프라테스강이 범람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홍수가 나면 아무리 단단한 흙건물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바빌론인들은 이 문제를 역청으로 간단히 해결해 냈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바빌론 어디에 세워진 것일까. 그곳은 왕궁 옆에 있던 에사길 사원으로부터 약200미터 떨어진 너른 공터였다. 바빌론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주 전망 좋은 곳이다. 자기 벽돌로 화려하게 장식된 신전 내부로 들어가면은 정중앙에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이 자리했다. 바빌론인들은 마르둑이 살아있는 神이라 믿었기에 한쪽에 침실까지 마련해 놓았다.
⑮ 마르둑은 바빌론의 위대한 神으로써 마치 왕이 궁전에 살듯이 에사길 신전에 살았다. 그는 아내도 있었고 아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전 안에 각기 자기방도 가지고 있었고 시중을 드는 보좌신들도 있었다. 신전 전체가 마치 신의 궁전과 같았다. 이것이 세계 방송사상 최초로 입체영상을 통해 복원해 본 기원전 500년대 바빌론의 아침이다. 매일 동이 트는 아침이면 특별히 선택받은 사제들이 신전 내부로 들어왔다. 그리곤 마르둑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싱싱한 과일들을 제단에 받쳤다. 기록에 의하면 심지어 마르둑에겐 아들이 있었고 매일 밤 정결함을 인정받은 여인이 그와 동침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 그리하여 밤중엔 엄격히 통제됐다. 단 별자리를 관측해야 하는 천문학자들만은 예외였다. 그러나 바벨탑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神의 징벌이 아닌 페르시아의 침략에 의해 기원전 482년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그 뒤론 더 이상 복구되지 못했다. 그렇게 사막에 모래 바람에 묻혀버린 지 2500년 이 지역을 점령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 질 좋은 벽돌을 캐내 집 짓는 것은 물론 원형경기장, 댐건설, 도로를 위한 교각과 같은 건설재료로 사용해 버리고 만다. 그것이 바벨탑의 마지막 운명이었다. 이처럼 바벨탑은 전설도 성경 속에서 등장하는 신화도 아니었다. 엄연히 실제했던 역사였다. 이 모든 것을 완성한 사람은 느부갓네살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였다. 건설왕이기도 했던 그는 바벨탑 외에도 역사에 남을만한 또 하나의 걸작을 남겼다. 훗날 그리스인들이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렸던 이 건축물 바로 공중정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