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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3.1 운동정신
1. 을사늑약, 경술국치
학생들의 젋고 패기 찬 모습을 보니 기쁘다. 속이 뻥 뚫린다.
여기 중앙고등학교를 설립한 분이 인촌 김성수 선생이다.
@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1891-1955)
우리나라의 선구적 교육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민족의 교육이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중앙학교, 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발전시켰다. 동아일보사를 창립. 해방 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인촌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3.1운동이 생각난다. 그리고 내일 모레가 3.1절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3.1운동이 뭔지 아는가? 같이 알아보자.
우리나라가 일제시대에 들어간 해는 1910년인데, 1905년이라고 해도 된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있었다. 예전에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우리를 보호해 주었다는 의미로 만든 말인데, 일본인들이 우리를 보호해 준 적이 없다.
X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 O 을사늑약(乙巳勒約)
일본인들은 우리나라를 늑탈했다. 구체적으로는 외교권을 늑탈해갔다. 늑탈해간 조약이라고 해서 ‘늑약’이라고 한다.
@ 늑탈(勒奪) : 강압적으로 빼앗다. 강탈
1910년에는 한일합방이 있었다고 한다. 아직 교과서에서 한일합방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한일합방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한국과 일본이 나라를 합쳤다는 말인데, 합친 적이 없다. 합방은 나라 대 나라를 합쳤다는 의미이다.
합(合) : 합치다
방(邦) : 나라
두 나라가 합친 적이 없다. 그냥 강도놈이 들어온 것이다. 강도와 우리집이 합쳤다는 말을 쓸 수 없다. 그래서 합방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했다는 말은 쓸 수 있다.
@ 일제강점(日帝强占)
일본의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다.
그래서 요즘은 보통 일제시대를 ‘일제 강점기’라고 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한일합방을 말할 때, 경술국치라고 했다.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이라는 뜻으로 ‘경술국치’라는 말을 썼다.
@ 경술국치(庚戌國恥)
경술년(1910)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
그렇게 갑자기 나라에 도둑이 들어온 것은 내부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다. 도둑을 막는 장치를 허술하게 했다든지, 무언가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전체로 보면, 그 당시의 조선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몰랐다. 경술국치를 당했어도 서민들은 잘 몰랐다. 당시에는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없었으므로 잘 몰랐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맘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나라꼴이 이상해졌다는 것은 느꼈을 것이다.
2. 19세기의 서양
칭기즈 칸이 강할 때는 몽골 같은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다. 즉 동양인도 얼마든지 강할 수 있다. 세계 역사라는 것을 보면, 꼭 서양만이 강한 역사는 아니다. 그런데 19세기에 오면, 서양이 아주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왜 강해졌을까? 아마도 논술을 잘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들은 말을 잘하고, 논리적 사고가 투철했다. 서양인의 논술적 사고, 논리적 사고는 희랍에서부터 내려왔다. 즉 가설을 세우고, 자연을 탐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다.
이런 과학은 르네상스로 들어오면서, 힘을 얻는다. 르네상스를 문예부흥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문예는 희랍의 문학과 예술을 말한다.
희랍의 고대철학은 중세기를 지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서양의 중세기에는 기독교만이 있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인류를 지배하고 이끌어 갔다.
종교는 역사를 앞서가면 안 된다. 종교는 역사를 뒤따라오면서, 역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뒤에서 보살펴주고, 낙오자들을 치료해주어야 한다. 종교가 앞장을 서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경우, 인류의 역사가 대개 좋지 않았다. 기독교가 판치는 서양의 중세기는 암흑의 시기였다.
@ 르네상스(Renaissance)
14세기~16세기의 서양사조 문예부흥(文藝復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중세기를 깨치고 나온 게 바로 르네상스이다. 고대 철학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 르네상스다. 그리고 그 르네상스를 리드한 사람들의 대부분 과학자들이었다. 과학자들은 논술적 사고를 하고, 합리적 사고가 있고, 이성적 사고가 있는 합리주의자들이었다.
@ 합리주의자
합리주의자(合理主義者), Rationalist
그래서 서양은 과학이라는 학문이 엄청나게 발달하게 된다. 이런 과학의 힘은 르네상스로부터 점점 축적되어 간다. 그러다 19세기가 되면, 그런 것들이 엄청난 힘이 되어서 증기기관 만들고, 기관차를 만들고, 동력을 개발하고, 별의별 것을 다 만든다. 전기도 나오게 되는 데, 옛날에는 전기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물이 떨어지는 낙차를 이용한 에너지의 변환으로 전깃불을 밝히게 된다. 대단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해를 잘 못하겠다. 옛날에 이 교실정도로 불을 밝히려면 촛불이 몇 1,000개 있어도 안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소켓에 끼우면 될 정도로 효율화되었다.
3. 19세기의 조선
서양 사람들이 그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할 적에, 우리는 그야말로 촛불도 제대로 못 켜고 있었다. 그러니깐 서양은 동양을 깔보고, 덤벼들기 시작한다.
당시에 우리는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19세기 고종 이전에 철종이 있었다. 그런데 철종이라는 임금은 어디서 왔나? 강화도령이라는 사람이었다. 강화도에 애인이 있어서, 애인만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애인을 궁으로 데려올 수 없다고 하니깐, 그저 술만 퍼마시다가 죽었다. 임금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다가 그렇게 했으니, 그 사람도 불쌍하다.
사실 우리도 그 전에는 영정조 시대가 있었다. 영정조 시대의 리듬을 잘 살려서 노력해야 할 시기에,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세도정치 때문에 얼간이 하나 데려다가 임금이라고 앉혀놓고, 세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바보 노릇이나 하고 있었다. 그 뒤로 대원군, 민비, 고종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 역사가 전개된다.
우리는 그런 역사를 존경스럽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존경할 만한 구석을 찾기 어렵다.
1910년에는 임금도 완전히 폐위되고, 나라가 없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가 멸망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멸망은 기본적으로 조선왕조를 끌어왔던 소수의 지도자들, 정치인들, 지식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지식인이 되어 있을 때, 여러분들의 나라가 망한다면, 그 나라가 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4. 일본의 야망
여러분들은 돈 벌어 잘 살게 되면,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있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일본에서 자라고 있는 여러분 또래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그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서 한국을 집어 먹었다.
일본의 침략은 한국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한국 지배를 통해서 대륙을 지배하고, 그래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전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
@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公營圈)
큰 동아시아 공동번영권이라는 뜻인데, 일본이 아시아를 무력으로 지배하는 제국주의발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5. 일본의 공포감
일본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면서 제일 두려워한 것은, 또 다시 이순신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real threat였다. 진정한 두려움이었다.
@ real threat : 생생한 위협
조선은 우습게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수군을 만든 것도 아니고, 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양병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호남 한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배를 만들고, 사람을 모아서 싸웠는데, 꼼짝을 못했다. 조선은 일본을 그렇게 골탕 먹일 수 있는 저력이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뭐가 나올지, 어떤 의병이 나올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국 지배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 사람들에게 상당한 공포감이 있었다. 공포감이 있는 만큼 무서워서 다 죽였다. 조금만 까불면 다 죽였다. 아주 무자비하게 행동했다.
6. 3.1 운동
조선 땅이라고 하는 게 당대만 해도, 전체로 2,000만의 인구가 있었고, 세계적으로도 그러한 수준의 문명국이 흔치 않았다. 세계적으로도 한 10위권에는 드는 그런 문명국이었다. 그런 문명국가를 그렇게 처참하게 찬탈하고 짓밟은 것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
아프리카 식민지는 문명국이 아니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프리카를 깔보는 게 아니다. 당시 식민지라고 하는 것은 대개 문명 수준이 낮은 단계의 나라들이었다. 그런 나라들을 서양이 지배하였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지배한 방식은 너무도 악랄하고, 너무도 비상식적이고, 너무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비록 힘은 약하고, 그렇게 얼간이 같은 통치자들에 의해서 나라가 농락당하고 있었지만, 문명 수준이 대단한 나라였다. 사상적으로나, 합리적인 사고력에 있어서나, 예의범절에 있어서나, 사회 질서를 이끌어가는 능력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놀라운 저력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다. 그런데 그렇게 터무니없이 당하니깐, 사람들은 얼얼했다.
그렇게 얼얼하다가 한 9년 지나니깐 이제 알걸 다 알게 된 것이다. 모든 민중이 다 알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제 정말 이상한 나라가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천자만별의 연령, 직업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일체가 되어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즐겁게 ‘만세, 만세, 만세,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 배재학당 교장 휴-신(hugh Cynn)의 목격 기록
남녀노소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 춤을 추듯 평화로웠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케이스(Elizabeth Keith)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3.1 독립운동은 어떤 소수 집단에 의해 조직화된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호응을 했다. 2천만의 국민 중에서 10%인 2백만은 거리로 나와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그 뒤로, 이 운동의 여파로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났고, 인도에서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세계 각지로 우리 조선의 모습이 퍼져나갔다.
@ 5.4 운동(五四運動, May Fourth Movement)
중국 대학생들의 반제국주의 신문화 투쟁
@ 인도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운동
영국식민통지에 항거하는 간디의 비폭력 비협조 운동
따라서 3.1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7. 조선 개화 사상의 줄기
김성수가 중앙학교를 인수하기 이전에, 이 학교 교장을 지냈던 사람 중에 유길준이라는 사람이 있다.
@ 유길준(兪吉濬, 1985-1914)
우리나라의 대표적 개화사상가. 어윤중의 신사유람단에 끼어 최초의 일본유학생이 되었고, 후에 최초의 미국유학생이 되었다. 저서 [서유견문(西遊見聞)]
유길준이라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개화기에 활약했던 사람인데, 개화기에 활약한 사상가 중에서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같은 분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스승이 바로 박규수였다.
@ 박규수(朴珪壽, 1807-1877)
조선말기의 진취적인 개화사상가. 서울 계동 출신. 한성판윤, 형조판서 지냄. 세계와의 통상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리고 박규수는 바로 연암 박지원의 손자였다.
@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
서울 사람.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술과 저술에 전념. 북학파(北學派)의 거두가 됨. 사가시인(四家詩人) 스승
흔히 연암 박지원은 북학파라고 한다. 북학파 사람들은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변해가는 세계를 보자고 주장하면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 북학파(北學派)
중국은 명(明)에서 청(淸)으로 교체되었으나 우리 조선은 변화없이 500년을 유지했다. 따라서 청을 만주족이라고 깔보고 인정치 않았다. 그러나 북학파는 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려 했다.
이런 북학파의 대가가 바로 연암 박지원, 담헌 홍대용 같은 사람들이었다. 홍대용이나 박지원 같은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상가인 동시에 주체적인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시를 써도, 조선지풍이라고 해서, 조선식으로 쓰자고 주장하였다. 문학에서도 조선지풍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지풍(朝鮮之風)
연암 박지원이 이덕무 시집의 서문을 쓰면서 주창한 주체적 문학론
“우리는 조선 사람이고 조선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림도 허황된 몽유도원도 같은 것을 그리지 말고, 진경산수를 그리자고 한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산하를 그리자는 말이다. 우리의 삼각산을 그리지, 왜 소상팔경도를 그리냐는 것이었다. 중국의 가 보지도 못한 이상한 것은 그리지 말자고 한다.
@ 진경산수(眞景山水)
겸재 정선(1676-1759)으로부터 시작된 주체적 미술운동
“우리 산하(山河)을 그리자!”
마찬가지로 철학이나 사고도 실제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의 논술을 해야지, 공자, 맹자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우리 역사는 모르는 사람들이 중국 역사를 돌돌돌 외우고, 자치통감을 돌돌돌 외우고, 사마천의 사기를 돌돌돌 외워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렇게 주체적인 자각을 하고 나온 사람들이 북학파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사기(史記)는 대표적 중국의 역사서이다.
그리고 이런 북학파의 줄기에서 개화사상이 나온 것이다.
8. 유길준의 서유견문
중앙학교의 교장 선생을 한 유길준 선생은 유학을 갔다가 와서, 개화당으로 몰려서 연금을 당한다. 그 때 연금 상태에서 쓴 책이 바로 유명한 서유견문이라는 것이다.
@ 서유견문(西遊見聞)
‘서양에 놀러가서 보고 들은 것’이라는 이름의 책. 국한문혼용인데 일본에서 출판됨. 진보사관, 입헌군주제를 주장. 갑오경장의 이론적 배경이 됨.
서양을 놀러가서 보고 들은 것을 썼다는 뜻이다. 그때 그 시절, 이 사람은 서유견문에서 조선 중립화에 대한 안(案)을 주장한다. 상당히 재미난 생각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그런 것에 대해서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그때 러시아, 일본, 미국, 프랑스, 중국 등의 모든 나라들과 협상을 통해서 우리나라를 중립화시켰다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들이 너무 절박했고, 일본의 침략이 강력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결국 1910년에 강점을 당하게 되었고, 1919년에 이르러서 국민들이 그것을 자각하면서 일어난 운동이 바로 3.1운동이다.
9. 3.1운동의 과정
3.1운동은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의 민족적 자각에 의해 일어난 운동이다.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 33인이 모이기로 했는데, 파고다 공원은 위험하다고 해서, 그 옆에 있는 당시에는 명월관이라고 불렀던 태화관에 모였다.
명월관에 가서 스님 한용운 선생 등이 만세 삼창을 하고, 낭독서를 읽고, 건배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끝났는데, 학생들은 파고다 공원에서 하는 줄 알고 모여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여기 중앙고 학생들도 전원이 파고다 공원에 갔다.
그 당시 현상윤 선생이 이 학교의 선생이었다. 현상윤 선생은 제가 굉장히 존경하는 분으로 조선유학사를 쓰신 분이다. 나중에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하신 분이다. 그런 분이 여기 중앙고등학교에서 가르치셨는데, 교실에 들어오더니, ‘Good Chance, Good Chance!’라고 하셨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어서 나가라! 나가라!’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 전원이 파고다 공원으로 갔다.
@ 현상윤(玄相允, 1893~? 납북)
와세다 대학 사학과를 나온 선구적 교육자. 1918년 중앙학교 교사 부임.
초대 고려대학교 총장. [조선유학사]라는 우리나라 철학사분야의 최초의 명저를 썼다.
10. 복벽운동
조선왕조는 결국 1910년 멸망했지만, 그 당시 많은 사람들 생각에 자신은 왕의 신민이라고 생각했다. 신민으로 500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 신민(臣民)
왕의 신하로서의 백성.
근대적 시민(市民)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왕조가 멸망하자, 500년 동안을 신민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의로운 생각은 당연히 왕조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 사람들의 양심이었다. 이것을 복벽운동이라고 한다. 벽(辟)이라는 것은 주역에 나오는 말로, 왕을 의미한다.
@ 복벽(復辟)
왕조를 복귀시키자는 운동.
벽(辟)은 주역의 말로 군주를 가리킴.
왕조를 다시 회복시키려는 사람들을 영어로 말한다면, Royalist다. 불란서 혁명에서 본다면, 그 사람들은 왕당파가 되는 것이다.
로얄리스트(Royalist) : 왕당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본한테 나라가 망했지만, 그렇게 망한 꼴은 좋지 않지만, 어차피 망할 거 잘 망했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나라가 망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와서 우리나라 왕조를 멸망시키면 안 된다. 우리나라 왕조를 멸망시킨다면, 반드시 우리 손으로 멸망시켜야 했다. 우리에게도 우리 힘으로 왕조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
동학사상만 해도 새로운 인간관을 갖고 있었다. 동학은 신민적인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 곧 하늘이라고 말한다. 인내천 사상은 결코 왕조 사상이 아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이라고 한다. 기독교 사상보다 훨씬 더 어드벤스드(advanced)된 사상이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람이 신(神)이다. 사인여천(事人如天)
이러한 동학과 같은 저력을 갖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일본에 의해 왕조가 망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이제 왕조는 잘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왕조가 끝났으니 당연히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했다. 그런데 새로운 나라가 뭔지 몰랐다. 왕조로 500년간 살아온 사람들은 갑자기 나라를 어떻게 세워야 할지 몰랐다.
지금은 나라라고 하면 삼권분립이 되고, 대통령 선거가 있고, 국회가 있고, 등등의 말이 떠오르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런 것을 몰랐다. 그런 청사진이나 아이디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집을 짓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할지 머리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불란서도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공화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전에 합리적 사고, 과학적 사고를 하는 루소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미리미리 의회 질서라든가 하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루소(Jean-Jacques Roussau 1712~1778)
불란서 혁명을 고취시킨 계몽주의 사상가. 그의 저서 [에밀]은 임마누엘 칸트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 것들이 축척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을 때, 공화주의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은 모두 자기 역사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공화주의자들이 자기 역사 속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축척이 전혀 없었다.
아무런 청사진이 없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되느냐? 우리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선왕조가 멸망하자,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그 하나가 복벽운동이었다. 복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의병으로 나간다. 극단적으로 일본과 싸우려 했다. 이 사람들은 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답답한 사람들이었다. 왕조를 다시 일으키려는 사람들이니깐 역사적으로 보면 갑갑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조선말기의 이 사람들은 굉장히 자랑스러운 사람들이었고, 존경할만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이 전부 대단한 양반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우리나라가 망한다면, 돈 많고, 학식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의병으로 나갈까? 아마도 안 나갈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그래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의병으로 나갔다.
왜냐하면 이건 우리 책임이다. 우리나라가 망한 거니깐 우리가 끝까지 책임지고 싸워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요샛말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고 한다. 당시의 양반들은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확고한 사람들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은 전부 당대에 99칸짜리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던 양반들이었다. 그들이 형편없는 화승총을 들고 나가, 들판에서 고생을 하면서 싸웠다.
이것이 조선역사의 마지막 위대함이었다.
그러나 사실 답답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사상은 위정척사였기 때문이다.
@위정척사(衛正斥邪)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내친다.
이들은 통상도 거부하고 외세의 배척만을 답답하게 주장했다.
여기서 사(邪)라는 것은 외세다. 그리고 정(正)은 왕조였다. 그런데 이 위정척사의 이론은 주리론(主理論)이라고 하는 퇴계 계열의 학문이었다.
@주리론(主理論)
主氣論에 대비되는 조선유학의 사조.
이념적 성향이 강하다.
물론 퇴계의 직접 계통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노사 기정진, 화서 이항로 와 같은 사람들이 강렬한 위정척사론을 폈다.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는 위정척사 주리론 사상가의 대표자들이다. 이들 문하에서 의병장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구한말의 의병장으로 기억되는 사람 중에 최익현과 같은 분들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나갔다.
물론 친일파 더러운 새끼들도 많았지만, 그 새끼들은 사실 전체로 보면, 0.001%도 안 되는 숫자이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우리의 원한이 너무 크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 사람들의 나쁜 행동 비판에 몰입하다 보니깐, 당시의 전체적인 역사를 제대로 못 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나쁜 놈들은 나쁜 거지만, 그것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 그런 나쁜 새끼들이 왜 탄생하게 되었는지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 한다. 친일파 새끼들은 영원히 나쁜 새끼들이다. 이건 더 말할 것도 없다.
11. 애국계몽운동
복벽운동자들과 달리, 대비되어 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복벽주의자들에게 그렇게 의병활동을 하면서 싸워봤자 일본놈들한테 상대가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의병 부대가 1,000명이 있어도 기관총 가진 한 명의 일본군을 당할 수 없는데, 게임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는 1920년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 천 명을 죽인 일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 사람들은 복벽이라는 것은 택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대안으로 실력을 기르자고 주장했다. 일단 조선왕조는 망한 것이고, 아직 우리는 공화제 같은 것도 제대로 모르니깐 우선 실력을 배양하자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통 ‘애국계몽’이라고 한다.
즉 애국계몽자들은 어차피 조선왕조는 망했으니깐, 복벽운동이라는 것은 틀렸다고 말한다. 왕조를 다시 세울 수는 없다고 한다. 그 대신, 앞으로 우리가 어떤 나라를 세울지, 아직 실력이 없으니깐, 여기에 대해서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고 한다.
13. 의열투쟁
그리고 또 하나의 부류가 있었다. 아주 모던한 지식인 중에서 ‘애국계몽은 무슨 얼어 죽을 애국계몽이냐? 지금 애국계몽할 시간이 어디 있냐? 총칼로 들어온 새끼들은 총칼로 대항하자!’ 고 하는 투쟁론자들이 있었다. 이 투쟁론자들은 조직도 없고, 힘도 없었다. 그리고 대개 소수를 가지고 투쟁해야 했으므로 ‘테러’라는 형식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정당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테러라는 말은 안 쓰고, 무차별 공격이 아니라 선택된 투쟁이기 때문에 ‘의열투쟁’이라고 불렀다.
@의열투쟁(義烈鬪爭)
소수의 사람들이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정의로운 투쟁
이런 의열투쟁론자들로는 유명한 신채호 선생이 계시다. 이 분은 아주 열렬한 의열투쟁론자였다. 그 밖에 성균관 대학을 세운, 심산 김창숙 같은 분도 아나키스트였지만 이쪽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밀양의 약산 김원봉도 이런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다 아주 강렬한 사람들이었고, 아주 센 사람들이었다.
14. 김성수와 3.1운동
그리고 그렇게 용감한 스타일은 아니면서도 뭔가 깊이 있고, 온건한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애국계몽론자가 되었다.
그 애국계몽론자 중에 대표적인 분 중에 한 분이 중앙학원을 인수하신 김성수 선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성수 선생의 여러 공로도 높게 평가를 해야 한다.
김성수 선생은 애국계몽을 통해서 우리 민족을 교육시키고, 뭔가 새로운 국가에 대한 비전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교육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이 양반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나왔는데, 고창 지역의 엄청난 거부였다.
이 양반이 태어난 동네가 인촌이다. 그래서 호가 된 것이다. 그 인촌이 지금은 고창군에 속해있지만, 당시에는 고부군에 속해 있었다. 당대에는 고부가 아주 큰 지역이었다.
고부는 동학 운동의 발상지로, 고부군수 조병갑이 학정을 하면서 사람들을 때리고, 재물을 긁어서 결국 동학 운동의 일어난 지역이다.
지금은 고부군이 조그맣게 보이는데, 일본놈들이 동학을 탄압하면서, 그 죄과로 고부를 전부 찢어버려서 거의 없애다시피 한 것이다. 원래 고부는 엄청나게 큰 지역이었다. 바로 그 고부군 최고의 갑부가 김성수였다. 그리고 재미난 것은 김성수 선생이 고부군 인촌에서 태어났을 때, 조병갑이 바로 군수였다는 것이다.
이 분은 돈이 많으면서도 그 돈을 우리 민족의 교육 사업에 쓴 것이다.
3.1운동 때, 인촌 선생하고, 아까 말씀드린 고려대학교 초대총장을 한 현상윤 선생, 그리고 고하 송진우 선생이 이 학교 숙사에서 항상 같이 지냈다고 한다.
인촌과 고하는 비슷한 동네 사람으로, 모두 인촌의 장인이 만들어 놓은 영학숙이라는 데서 공부를 했다. 지금 창평이라는 곳에 가면 있다.
@창평영학숙(昌平英學塾)
김성수의 장인 고정주(高鼎柱)가 세운 영어학교로서 애국계몽운동의 산실. 고광준, 김성수, 송진우가 선생 이표 밑에서 공부.
여기 숙사는 일본관원들의 눈을 피하기 좋았기 때문에, 여기 모여서 3.1운동에 대한 거사준비를 했다고 한다.
중앙고등학교 3.1독립운동 발원지 기념관
@최린(崔麟, 1878~?)
함경남도 함흥 사람.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한 천도교 지도자. 당시 보성고보 교장.
당시 보성학교 교장이며, 신여성 나혜석의 애인으로 유명한 최린의 천도교 세력과 정주의 오산 학교를 설립한 남강 이승훈 선생의 기독교 세력, 그리고 한용운 선생의 불교 세력을 결집을 시켜서, 이곳을 연락사무소 비슷하게 사용하면서 3.1운동을 탄생시킨 것이다.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 1861~1930) 정주 오산학교를 설립한 우리나라의 걸출한 실업가, 교육자 3,1 운동도 이승훈의 공이 크다. 오산학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 지사를 많이 배출하였다.
15. 3.1운동의 의미
우리 민족의 이러한 복벽운동, 애국계몽운동, 의열투쟁과 같은 모든 갈래는 3.1운동으로 일단 마무리되고, 국민들에게 이제 왕조는 끝났고, 더 이상 복벽운동이라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새 나라를 어떻게 건설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국론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즉 그 이전의 역사가 완전히 통합이 되면서 새로운 역사를 향해 나가게 된다. 따라서 1919년의 3.1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민족 근대사의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이 말은 이제 우리나라는 독립국이 되었다는 것을 전 국민이 모여서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언 이후, 그 전에 일본이 우리를 강점하고 있는 것과 아주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걸 뚜렷이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지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식민지 정책에 의해서 일본이 강점은 하고 있지만, 시각에 따라서 우리가 식민지라는 것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1919년에 거족적으로 식민지로서 만족하지 않고, 독립국이라는 것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되는 민족인 자주민이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는 누구한테 지배를 받는 민족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되는 백성이라고 외치고 있다.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홀로 설 수 있는 독립 국가라고 선언하고 있다. 너희 일본인들은 필요 없다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외침은 단순히 선포로 끝나면 안 된다.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래서 바로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 것이다.
이렇게 3.1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인해서, 그 뒤로 27년 동안 우리 민족은 정부를 가진 나라로서 살았다. 그리고 결국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이 지구상에 80%가 식민지로 덮여 있었는데, 식민지 국가 중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망명정부를 세워 조직적으로 투쟁한 유래가 없다.
16. 사고력과 문장력
이러한 우리 근대사의 진원지가 중앙학교였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여러분들이 중앙학교를 다니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중앙학교를 다니면 안 된다. 내가 여기 중앙학교 와서 강의를 하기 때문에 중앙학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중앙학교는 거시적 역사 흐름의 한 분수령이었던 3.1운동의 진원지였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들은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현대사의 새로운 인식을 통해, 또다시 그러한 비극적 역사의 희생물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비극적 역사에 대한 우려를 저와 저 주변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 만일 여러분들이 또 다시 일본놈들의 총칼에 짓밟혀 살게 된다면 끔찍한 일이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합리적 사고를 해야 하고, 변화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되며, 자주민으로서 보다 주체적으로 우리 역사를 운영해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 힘을 기를 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서 논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논술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합리적 사고력이다. 그리고 그것을 명철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문장력이다.
앞으로 강의를 해나가면서 여러분들의 이러한 사고력과 문장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많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드리겠다. 그러니깐 여러분들은 자유롭게, 재미있게 듣기만 하면 된다.
질문이 있으면 아무 때나 나한테 질문하면 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내 강의와 더불어 훌륭한 인간으로서, 위대한 인간으로서, 용감한 인간으로서, 이 학교의 교훈(校訓)처럼 웅대하고 먼 웅원(雄遠)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