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선 인간』
역사교육과 20644885 김문정
아날학파는 『아날』을 창간하고 이끌어 나간 페브르와 블로크, 그리고 이들을 계승한 브로델, 그리고 이들을 추종하는 역사가들을 말한다. 이들 아날학파 중 3세대 필립스 아리에스는 그의 책 『죽음 앞에 선 인간』에서 중세 초기부터 현대까지 죽음의 역사의 변화와 해석을 환경을 초월하는 집단적 무의식의 변동으로 관찰하였다.
중세 초기에 죽은 사람들은 모두 도시 외곽으로 쫓겨났다. 죽음의 성스러운 특징이 약한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 후 3세기에 접어들자 열묘식 묘지가 진행하는 등 죽음에 대한 성스러움과 불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교회는 성인들과 순교자들을 숭배하고 순례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묘지위에 들어서게 되는 등 중세의 묘지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혼재한 때로는 시끄러운 광장의 역할도 하였다.
묘비는 고대의 문명이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중시하는 문명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되자 묘비를 십자가가 대체하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의 아이덴티티가 약화되고 중세에 들어서는 익명성의 흐름으로 이행되어갔다. 개인별 무덤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자의식의 변하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묘지명도 부활하게 되었다. 이것은 문자와 독서의 보급과 함께 한다. 횡와상의 양손 제스처는 죽은 자의 신분을 알 수 있고, 그 모습에서 휴식 속의 기다림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도상에서 대체된 것으로 불멸의 영혼과 대치시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죽음의 침상에 관한 모습도 친밀한 죽음에서 고독한 죽음으로 변화함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자의식과 현세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개인주의가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최후의 심판의 모습도 보편적이고 공동체적 이상과 후반의 개인주의 사이의 타협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삶에 대한 순간적인 의식의 획득은 연옥을 대중들에게 확산 시켰고, 저승에서의 제회에 대한 소박한 신앙을 심어줬다.
* 서면 제출 후 카페이 올리는 것을 잊고 있다가 이제서야 올립니다;; 죄송합니다ㅠ
18세기 말 사람들은 항상 자신 죽는다는 것을 전통적인 훈계로 삼아 해골이나 주검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때에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야외 묘지는 이질적인 문화의 연속성을 시사하였다. 19세기의 묘지는 가족들의 집결과 죽음의 순간의 비통을 묘비위에 새기고자 집착하였다. 당시의 묘지는 가족 간의 사랑을 나타내주는 박물관이었다.
질문 : 열묘식의 묘지가 진행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구제적인 원인과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의 기도상과 횡와상의 결합된 형태를 이중적 존재라고 표현하였는데 어떻게 이중적인 것인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설명 부탁합니다. 그리고 존재의 이주엉에 대한 신념은 무엇인가요?
첫댓글 제 부분은 아니지만 ; 횡와상에서 기도상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횡와상 위에 기도상이 있는 결합된 과도기적 형태를 보이는데요 , 이것은 횡와상이 죽은사람을 표현한 데에서 영혼이 부각되면서 , 횡와상은 죽은 육신으로 , 기도상은 영혼으로 표현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죽은 육신과 영혼은 한 사람을 표현한 동시에 존재의 이중성이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