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역사스폐셜 133회 : 한민족 특별기획 북한문화유산시리즈 (2001.10.27.)
8부작 제4편 세계의 보..
방송일: 20011027 조회수 : 6691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 북한 문화유산 시리즈 4>, 10월 27일
고인돌 왕국-고조선
-----------------------------------------------------------------------------------------
프롤로그
석천산 고인돌 군락
고인돌 2 SHOT 5 [첫 CUT 흘리고-]
흔들리는 CUT 8 그것은 잊혀진 역사였다.
수천년 세월동안,
삐딱한 고임돌들-TU 5 사라진 왕조와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잊혀져갔던 거대한 바윗돌들...
그러나 지금 침묵을 깨고,
고인돌 내부 8 그 고인돌이 되살아나고 있다.
타이틀 13 [타이틀 그림?]
-----------------------------------------------------------------------------------------
SUB-TITLE
-----------------------------------------------------------------------------------------
ST 1 [기본세트 뒤에 고인돌 걸려있고-]
역사 스페셜에서 한민족 특별기획으로 마련하고 있는 북한 문화유산 시리즈,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입니다.
[잠시 사이두고/힐끗 뒤돌아보면서-]
제 뒤에 세워져 있는 저 거대한 바위 구조물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듯 고인돌입니다.
고인돌, 돌을 고여만든 구조물이란 뜻인데요,
현재 우리나라에는 남북한을 통털어 4만기가 넘는 많은 수의 고인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의 평양인근에는 1만4천여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불과 100여년전까지만해도
이 고인돌은 아무 의미없는 거대한 돌덩이로만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고대인들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속에서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이 고인돌로 인해,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은 물론, 그들에게 찾아오고 있었던 거대한 변화까지도 알아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고인돌은 그 시대를 보여주는 스펙트럼인 셈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 거대한 돌무덤을 통해
그 시대를 하나하나 복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인돌들이 어디에 어떠한 모습으로 남아있는지부터 찾아 보겠습니다.
-----------------------------------------------------------------------------------------
VCR 1.
석천산 고인돌 군락 FS 5 [자막 들어오면-]
평안남도 용강군 석천산,
석천산 고인돌 간판 3 산 전체가 많은 고인돌로 뒤덮여 있다.
고인돌들... 13 [첫 컷 흘리고-]
이곳에는, 크고 잘생긴 고인돌부터 평범한 바위처럼 보이는 것까지 다양한 고인돌이 한데 모여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석천산 1호 고인돌 5 [자막 들어오면-]
1호 고인돌 SK 8 석천산 1호 고인돌-
육중한 덮개돌과 네 개의 고임돌이 축조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무덤방 내부 SK 12 [바깥으로 나올때까지 흘리고-]
고임돌 PAN 7 불과 100년전만 해도 사람들은 고인돌의 모양새나 규모에만 호기심을 가질 뿐 이것이 무덤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북방식 FS 9 그러나 고인돌 속에서 사람의 뼈와 부장품이 발견됨으로써, 이 거대한 바위돌이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채석장 흔적 SK 6 [흘리고-]
옆으로 기울어진 돌조각들 4 현재 이곳에는 고인돌을 만드는데 사용한 것으로 잘라진 바위단면 9 보이는 석재와
채석의 흔적들이 남아있어서, 고인돌 축조 과정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고인돌 타이트 SK 15 [잠시 포즈두고-]
수천년의 세월동안,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이 고인돌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도로TR/마을스치고 8 [바로-]
현재 평양 주변에는 만4천여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문흥리 FS 5 평양인근의 강동군 문흥리 고인돌 유적.
두사람 2 SHOT 8 취재를 위해 고인돌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석광준 박사가 동행했다.
고인돌 FS 3 [자막 뜨는 것 보고-]
타이트 PAN 10 문흥리 1호 고인돌은 탁자모양으로 육중한 덮개돌을 두 개의 날렵한 고임돌이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고임돌 2개 4 [흘리고-]
석판들... 10 [자막 들어오면-]
3호 고인돌속에서는 사람의 손가락뼈 십여점이 발견되었다.
[이어서-]
뾰족한 돌들.. 12 현재 덮개돌은 없어진 상태였는데, 수천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서있는 고임돌들은
이 고인돌이 매우 튼튼하게 세워졌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석광준 INT 25 고임돌 뚜껑돌 압력으로부터 고임돌이 넘어지지 않도록 기초시설을 아주 치밀하게 했다.
말하자면 홈을 파고, 이 고인돌은 1m70cm이고 두께가 45cm인데 이런 육중한 돌을 세우고 좌우에는 베개통
만한 돌로 이를 맞물려서 쇄기를 박았다.
북방식 고인돌 C/G 20 고인돌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치밀한 기초공사가 필요한 구조물이다
6/땅올라오고- 아래쪽에 고임돌을 세운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모양의 고인돌.
10/덮개돌 올려지고- 북한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해서 북방식 혹은 탁자식 고인돌이라고 불린다.
개석식 고인돌 C/G 20 북방식 고인돌이 시신을 지상에 그냥 놓아두는데 반해,
또다른 유형의 고인돌은 땅을 파고 무덤방을 만든다.
[이어서-]
돌판 내려와 꽂히고- 이런 고인돌을 개석식 고인돌이라고 하는데 덮개돌만 노출되기 때문에
겉으로는 고인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남방식[바둑판식] C/G 13 [조금 빨리-]
무덤방 위에 커다란 굄돌을 올린 후 주위에 돌무지를 쌓고 다시 덮개돌을 올려놓는 것을 바둑판식이라고 하는데
주로 남한에서 많이 발견되는 유형이다.
고인돌 분포지도 C/G 1'00 이런 세가지 유형의 고인돌이 우리나라 전역에 혼재하고 있으나,
크게보아 남한쪽에서는 주로 남방식 고인돌이 발견되다가 중부지방을 넘어서면서 초대형 탁자식 고인돌이 점차
많아진다.
15/노암리 고인돌 [자막 발생하면-]
북한에 있는 노암리 고인돌, 길이가 8미터, 두께가 70센티미터로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이다.
30/요동으로 올라간다 [노암리 들어가고 나서 무빙시작하면-]
이같은 초대형 탁자식 고인돌은 북한지방을 지나 중국 요동지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잠시 사이두고-]
47/요동쪽으로 이동 북한과 요동, 이 두지역에서 발견되는 초대형 탁자식 고인돌들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도로 TR 9 [지도 뜨고 나면-]
취재팀은 중국 해성시에 있는 고수석촌으로 향했다. 마을 주민과 얘기 FS 6 이 마을에 있다는 초대형 고인돌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마을주민과 현장음 [현장음-]
여기가 고수석촌입니까?
- 예 고인돌(석붕)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고인돌이 어디 있습니까?
- 마을 앞 저쪽 산위에 있습니다.
산위로 올라가는 차 5 고인돌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 고인돌 보이고- 4 언덕 정상에 홀로 서 있었다. [뒤 흘리고-]
고인돌 SK 11 [자막 들어오면-]
이 고인돌은, 마치 벽돌을 쌓아 놓은 듯 반듯하게 다듬어진 모습이다.
무덤방 PAN 12 [가운데 절반쯤 보이면-]
요동 지방의 고인돌중에서 축조 기술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덤앞 2 SHOT 4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로 생김새는 북한의 고인돌과 매우 닮아 있었다.
송호정 교수 INT 탁자모양의 북방식 고인돌이 요동과 서북지방에서 같이 존재하는 것은 이 양지역간에 주민
집단이 같은 계통이며 일정한 정치집단의 세력분포가 유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옥수수밭 찾아간다 10 마을 주민으로부터, 산아래 또다른 고인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확인해 보기로 했다.
현장음 이어지고- 18 [현장음 살리고-]
여기에 고인돌이 있었나?
- 있었다. 모두 파괴되어 땅에 묻혔다.
[앞그림에서 자막빠지면 바로-]
사람들 서 있는 FS 8 본래 산위의 시어머니 고인돌 고석과 산아래의 며느리 고인돌 수석이 쌍으로 있었는데
한기는 땅속에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채석장 돌멩이들 8 취재팀은 고인돌 근처에서, 고인돌의 석재를 가져왔을 법한 채석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위 단면 4 마치 칼로 잘라낸 듯 반듯하게 잘려진 돌멩이 만지는 두사람 12 단면들이,
고인돌의 석재를 이곳에서 가져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언덕위의 고인돌 FS 5 [흘리고-]
고인돌 FS 8 산등성이에 홀로 서 있는 고인돌, 이것은
성혈자국 5 이 무덤의 주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존재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송호정 교수 INT 낮은 봉우리위에 하나가 있으면서 반경 1-2km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단독으로 있는 것으로
봐서 청동기시대 초기에 일대에 살았던 지배자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고인돌 SK 15 북한과 요동지방에 걸쳐 존재하는 초대형 탁자식 고인돌은 두지역간에 동일한 문화집단이 존재
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지배자가 나타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ST 2 [석천산 고인돌 군락 or 고인돌 서 있는 배경]
[고인돌 군락에서 z.o하면 넓게 전망펼쳐진 언덕위 탁자식 고인돌 서 있다 ~
MC F.I/고인돌 고임돌 사이로 통과해서 걸어나오면서-]
주변을 멀리 내다볼 수 있고 또 밑에서 볼 때 우러러 봐야 하는 이런 높은 곳에 고인돌을 세운 것은,
죽은 사람의 위엄을 과시하고 또 죽은 후에는 하늘과 좀 더 가까이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고인돌 감탄하듯 살펴보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거대한 돌무덤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오늘날처럼 중장비가 있는것도 아닌데 집채만한 돌들은 어떻게 옮겨왔으며,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을 올려
놓는 작업들은 다 어떻게 해결했던 것일까요?
또 세운지 몇천년이 지나도록 무너지지 않고 서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뭔가 독특한 기술이 필요했을 것도 같습니다.
무덤 하나를 만드는데 왜 이처럼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을까요?
또 이 거대한 고인돌은 어느시기, 누구의 무덤일까요?
-----------------------------------------------------------------------------------------
2. 고인돌 축조의 비밀
장리 고인돌 Z.O 17 [Z.O 시작해서 고인돌 보이면-]
평안남도 상원군에 있는 장리 고인돌, 형태면에서 매우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다.
고인돌 고임돌 PAN 12 장리 고인돌은 탁자식 고인돌 중에서도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고인돌 축조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하 흘리고-]
고임돌 2개 FS 3 북한 학계에서는
고임돌끝의 뾰족한 부분 10 고임돌의 생김새로 고인돌의 발달정도를 나누는데, 후기로 갈수록 고임돌의
측면 SHOT 2 윗부분이 날렵해 진다고 한다.
석광준 INT 장리 고인돌은 고인돌의 말기적 특징을 보이는데 고임돌의 두께가 보통 50cm가 됩니다.
그런데 위로 올라가면서 끝은 칼등처럼 얇게 만들었다.
이것은 구조역학적으로 뚜껑돌의 중력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타산을 한 것이다.
고인돌 C/G 16 석광준 박사에 따르면, 고임돌은 땅속에 묻힌 부분도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한호흡 쉬고-]
10/ 땅 밑으로 꺼진다. 후기로 올수록 땅속으로 더 깊이 박히게 된다는 것이다.
고임돌 SK 8 이럴 경우, 위에서 누르는 힘이 커지더라도 더 잘 견딜 수 있게 된다.
건물을 지을 때 고인돌 FS 7 높이가 높아지는만큼 지하를 더 깊게 파는 것
것과 같다.
문돌 앞에서 얘기중 13 [6-7초정도 흘리고-]
고인돌의 출입문에 해당하는 문돌 역시, 점차 실용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문돌 C/G 21 처음에는 고임돌의 네 방향을 모두 판돌로 막았지만, 후기로 오면 작은 출입문을 따로 만들어 필요에
따라 이 문돌만 여닫게 했다
12/ 문 열리고 닫히고- [문 생기면-]
그런데 이렇게 육중한 돌덩이는 어떻게 떼어낸 것일까?
쇄기 박기 C/G 18 현재 도달한 결론은 바위에 구멍을 뚫은 후 마른 나무를 박고, 거기에 물을 뿌려주면 나무가
팽창하면서 바위를 깨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고임돌 내려와 박히고 28 그렇다면 덮개돌은 어떻게 올려놓았을까?
[한호흡 쉬고 이어서-]
8/ 흙 올라간다 먼저 고임돌 주위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든다.
[덮개돌 보이면-]
12/ 뚜껑돌 올려지고 그 위로 덮개돌을 끌어 올린 다음,
17/ 흙 제거한다 주변의 흙을 제거하는 것이다.
[흙 다 제거되면-]
바로 이같은 단계를 거쳐야, 하나의 고인돌이 완성된다.
북한의 대형 고인돌들 24 이같은 초대형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수백명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동원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그만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지배세력이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한 집단은 과연 누구였을까?
도로 TR[지도-] 6 [지도 뜨면-]
채석장 PAN /인부들 8 요동 보란점시의 고인돌 유적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서 돌을 다듬고 있는 석공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찾아가서 질문 24 [현장음]
이 돌이 무슨 돌입니까?
- 화강암입니다.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 저기 서산에서 가져왔습니다.
돌-쌍방 유적 전경 11 [두사람 보이면-]
넓은 대지위에 드문드문 늘어서 있는 바위들, 대부분의 고인돌들은 이미 파괴되어버린 상태였다.
돌자리들 4 [흘리고-]
서있는 고임돌 옆으로 다가가고- 7 2호 고인돌만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현장에는,
고인돌에 사용했을 것으로
바닥의 돌 집어들고- 12 보이는 판돌 조각이 아직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6/ 살펴본다 [2 SHOT 보이면-]
지난 80년대, 이곳에서는 개석식 고인돌 세 개,
FS 5 탁자식 고인돌 여섯 개 등 모두 아홉 개의 고인돌이 조사됐다. [이하 흘리고-]
C/G 33 [잠시 보고-]
그중 6호 돌무덤에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유물들이 출토됐다.
13/ 미송리형 토기 올라오고 [미송리형 올라오면-]
무덤 아래쪽에서는
평안북도 미송리에서 제일 먼저 발견되었다고 해서 미송리형 토기로 이름붙여진 그릇이 두점 출토됐고,
24/ 들어가고-비파형 올라오고 [비파형 올라오면-]
무덤 위쪽에서는 비파형 청동 단검이 한자루 발견됐다.
송호정 교수 INT 고조선의 문화적 지표로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 토기를 든다.
그런데 이 쌍방 지역에는 검날 중간에 마디가 앞쪽에 있는 초기비파형 검과 미송리형 토기도 초기형태가 나왔
습니다. 그래서 아마 고조선의 세력분포 범위를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으로 얘기할 때 초기 단계의 고조선
세력범위와 관련시킬 수 있는 지표가 되고 있다.
조선중앙 박물관 외경 PAN 10 북한의 조선 중앙 역사박물관은, 우리의 국립박물관과 같은 곳으로 북한지역에서
출토된 간판 3 중요한 유물들이 모두 전시되고 있다.
미송리형 토기 SK 23 이곳에서도 미송리형 토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토기는, 같은 시기의 중국토기와는 그 모양새가 다르다. 뿐만 아니라 출토지역 또한 북한과 중국의 요동 일대로
국한되어 있어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비파형 동검 FS 4 [잠시보고-]
비파형 동검은 그 모양이 악기인 비파를
동검 PAN 10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역시 고조선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손꼽히는 유물이다.
석광준 INT 미송리형 단지가 나와 비파형 창끝등이 나와...
일괄 고조선시기의 유물로 보던 청덩도구들, 방울...
상원 1호고인돌에서는 두사람이 어깨를 걸고 교예를하는 청동교예가 나온다. 이럴 정도로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로 찍어 말할 수 있는 유물들이 고인돌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것이 고조선의 유적이다. 이렇게 낙찰되었다.
고인돌 고임돌 PAN 12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형 토기를 사용하며 거대한 고인돌로 무덤을 쓰던 사람들-
고임돌위에 잡초들 5 그들은 바로 고조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고인돌 FS 8 [흘리고-]
-----------------------------------------------------------------------------------------
ST 3
[탁자식 고인돌 옆에 서 있는 MC / 고임돌은 4군데 모두 막혀있고-]
고인돌을 만들었던 시대라고하면, 흔히들 미개한 원시 사회였을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살펴 본 것처럼, 고인돌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시대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는 이미 청동제품을 만들어 쓸 줄 알았던 청동기 시대였죠.
[고인돌의 한쪽 문돌이 넘어지면서 내부 드러나면 MC 안으로 들어간다 ~
흙더미 속의 토기와 방울, 도끼, 청동칼등이 어지러이 놓여있는 것 보고는....]
어디 한번, 들어가볼까요?
문양이 새겨진 토기와, 청동도끼, 그리고 이 칼 등이 모두 고인돌 시대,
즉 고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졌던 것들입니다.
[가운데서 청동 거울 집어들고-]
이건, 청동으로 만든 거울인데요,
한쪽 면은 평편하고, 다른 한쪽에는 섬세한 줄무늬가 새겨져있군요.
오늘날에는 반도체나 컴퓨터 공학등이 첨단 기술에 해당하듯 당시로서는 이런 청동 제품들이 첨단 기술로
만들어졌을텐데요,
자, 그렇다면, 수천년전의 하이테크 -
청동 주조술을 통해서 고인돌 시대의 기술 수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3. 고인돌 시대의 첨단 하이테크 - 청동 주조술(청동 거울을 中心으로-)
평양 거리 FS 10 [PAN끝나면-]
현재 북한에는 상당한 양의 고조선 유물이 확보되어 있는데-
전시실 2 SHOT 8 이것은 해방 이후 진행된 대규모 발굴의 성과라고 했다.
청동활촉 5 [흘리고-]
도끼 4 여러 가지의 청동기 유물들과 함께 거푸집이 발견되어 청동 제품의
도끼 거푸집 5 주조 방법을 짐작케하는데, 그중에서도
청동거울 거푸집 5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 거울이다.
깨진 청동 거울들 7 [흘리고-]
완제 청동 거울 5 우리나라의 청동거울은 대부분 원이나 직선등
타이트 SK 5 기하무늬를 사용해, 동물문양을 즐기는 중국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이어서-]
타이트 PAN 13 조그마한 공간속에 빼곡이 새겨 놓은 섬세한 문양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리정남 실장 INT 잔줄무늬거울은 이름 그대로 줄무늬가 잘잖아, 그러니 쪼아서 만든 것이 아니고 돌에다가
무늬를 새겨서 놋쇠를 부어서 만들었는데 그 자체도 섬세하거니와 돌에다가 새긴 그 기술도 대단히 높다.
어떻게 보면 현대 공예가들도 만들기 어려워할 세공작업을 우리 조상들이 벌써 해냈단 말이다.
숭실대 박물관 외경 7 국내에서 발견된 잔줄무늬 거울중 가장 뛰어난 주조술을 자랑하는 것은,
국보 세문경 FS 8 현재 숭실대 박물관에 소장중인
국보 제 141호다. [이하 흘리고-]
타이트 PAN 13 직경 20센티미터가 채 안되는 공간속에, 무려 만4천여개의 원과 선이 그어져 있어 최고의 걸작품
으로 평가받고 있다.
줄무늬 타이트... 8 선하나의 굵기는 0.3mm-
그러나 어느곳 한군데도 일그러진 데가 없다.
원으로 Z.I 11 더욱 놀라운 것은 동심원을 이루고 있는 선의 홈깊이가 0.06mm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메니퓰레이터..돌리기 12 다른 청동거울 제품들처럼 돌에 새겨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 거울을 만들었던 것일까?
[뒤 흘리고-]
연세대학교 외경 3 취재팀은 청동거울 복원 실험을 하고 있는 전문가를 찾아갔다.
두사람 얘기하는 2 SHOT 5 그런데, 현재로서는 정확한 복원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했다.
박명도 선생 얘기중 제일 가까운 것이 밀랍을 형태를 만들어서 그 위에 쇳물을 붓는 것으로 만드는 실랍법을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밀랍으로 원형을 만드는 것 자체가 사람의 기술로써는 힘들지 않을까?
2 SHOT 6 [현장음인가?]
주조에 앞서,
문양의 도안을 만드는 것만해도 결코 쉽지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측면 SHOT [현장음]
세로무늬속의 직선도 한선한선 자를 대고 그었으리라고 믿을 수 없을만큼 정교하다
(9/인서트) 제도기구를 사용했을 거라고 추정된다. 동심원의 경우는 콤파스를 썼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콤파스도 하나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커다란 기둥에 가는 침들을 배치해서 한번 그음으로써 다 이뤄지도록
했을 것이다.
트레이싱 페이퍼 15 똑같은 도안을 얻기위해, 사진을 네배확대한 뒤
트레이싱 페이퍼를 대고 작업했다.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맡겼음에도 꼬박 2주가 걸렸다.
동심원 5 [흘리고-]
고려사 찾아가는... 9 완성된 도안을 가지고 청동거울을 복원해 보기로 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복원이 불가능하다면,
필름 사진찍는다 12 현대 기술을 동원하기로 했다.
9/ 출력되어 나오고 [트레이싱 페이퍼 놓고 유리내리면-]
먼저, 도안을 원래 크기로 축소해 플라스틱 필름에 복사를 했다.
필름 올려놓고 복사 12 이것을 다시 동판위에 올려놓고 복사를 하면 동판에 무늬가 새겨진다.
확인 3 [흘리고-]
약품 처리중 6 이 동판을 특수 용액속에 넣으면 복사된 자리에만 용액이 묻게 되는데, 이것을 화학적으로 처리
하면 그 부분만 부식하게 된다.
기계속에 넣는다 11 이같은 방법은 동판에 문양을 새기는 기술중에서
8/가동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가장 정밀하다.
꺼내고- 7 [흘리고-]
도로 TR 4 이렇게 만든 어미거울을 이용해,
안성유기공방 외경 7 전통 방법으로 주물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PD FS 5 우리나라 주물유기 분야의 무형 문화재인 김근수옹의 도움을 받아 실험에 나섰다.
쇳덩이 주워모은다 6 먼저 구리와 주석등의 합금 비율부터 맞춰야 했다.
쇳덩이 들고 얘기중 6 [현장음???]
구리가 29%좀 들어간거다.
할아버지 얘기중 9 그러니까 늘어날 정도로만 주석을 넣어야지, 너무 많이 넣어도 주물이 안된다.
그릇 들어서 불속에 넣고 12 금속이 녹을 수 있는 온도까지 가열하기 위해서는 풀무질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고조선 시대에, 이미 풀무질의 기술을 알았다는 것이다
본들고 이동하는 할아버지 6 [할아버지 현장음 잠시 살리고-]
이제, 가지고 온 본을 이용해 바닥에 놓인 본 3 주조틀을 만들 차례였다.
개토 설명중 20 이게 양화도에서 파온 흙이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곳에서 퍼온 것으로 흙도 모래도 아니다. 분자가 곱거든요.
송탄 뿌린다 4 [흘리고-]
채쳐서 개토 내려주고- 4 현재 사용되고 있는 주물틀의 재료가운데 입자가 가장 고운 것으로 알려진 개토를
개토 내려지는 타이트 7 사용했다. 섬세한 줄무늬를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였다.
흙퍼담고 9 [흘리고-]
거꾸로 돌려주고- 5 먼저 암틀을 만들고 똑같은 방법으로
수틀 만들어서 뚜껑열고 11 수틀을 만들면 주물틀이 완성된다.
- 틀에 새겨진 무늬.... 이제 본을 빼내고, 여기에 쇳물을 부어주면 되는 것이다.
달구어진 쇳물 5 [흘리고-]
쇳물 가져오고- 6 다 녹인 쇳물은 온도를 맞춰줘야 한다.
틀에 붓는다 8 조금만 높거나 낮아도, 식히는 과정에서 깨지기 때문이다. [이하 흘리고-]
쇳물 식혀지는 모습 8 청동 쇳물을 부어서 식히는 것으로,
중요한 작업은 모두 끝이 났다.
틀 떼어내고- 6 [흘리고-]
거울 집어들고- 8 전통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물에 식힌다 12 현대 기술을 동원한 복원 실험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매우 궁금했다.
[이하 흘리고-]
만들어진 거울 4 완성된 복원품,
그러나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타이트 SK 13 상당 부분에서 뭉개진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흘리고-]
할아버지와 얘기중 실물하고 비교하면?
-신비에 가깝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는지...이게 만들려면 본이 있어야 하는데, 첫째 그걸 우리가 알 수 없다.
국보 청동거울 FS 9 결국, 현대의 기술로도 2-3천년전의 청동 주조술을 복원하는 일은 실패로 끝났다.
타이트 SK 15 다만, 이 거울 하나를 만들어 내기위해 합금술, 주조술은 물론 불을 다루는 기술까지 고도의 기술
들이 동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흘리고-]
거울 돌아간다 12 이 잔줄무늬거울은 그시대의 최첨단 하이테크로, 우리에게 고조선 시대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하 흘리고-]
-----------------------------------------------------------------------------------------
ST 4 [탁자식 고인돌 옆에 서서 청동거울 들고서-]
[거울들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비춰보려면 꼭 못 볼 것도 없지만 썩 잘보이는 편은 아닌데요, 만약 거울이 아니었다면 이것이 대체
어디에 썼던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이 청동거울은 제사장이나 지배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가슴앞으로 가져다 놓으면서-]
줄을 달아서 이렇게 가슴에 걸어두면, 태양이 반사되어서 번쩍번쩍 빛나게 되죠.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태양에 버금가는 존재임을 나타낼 수 있었을 겁니다.
즉 고조선 시대의 지배자들은 그 당시의 첨단기술이었던 청동 주조술을 이용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지배체제를
확고히 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동원하고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덤을 만들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일반
사람들의 무덤과 구별되는 거대한 고인돌인 것이죠.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나눠지기 시작한 시대, 이 지배 세력들이 거주하던 곳에 고조선의 중심지가 있었을
겁니다. 과연 그곳은 어디였을까요?
-----------------------------------------------------------------------------------------
VCR 4.
통일거리 도로 TR 8 [자막뜨면-]
북한 최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는 통일거리-
정백동 간판 2 지난 90년대 초 아파트 건설을 위해
거리 SK 6 기초공사를 하던 중-
이곳에서는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두사람 뒷모습 2 SHOT 6 기원 전후 시기의 무덤 삼천여기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근수 부소장 INT 우리가 조사한 무덤이 3000기, 우리가 발굴한 건 2000-2300기 했을 겁니다.
조선 중앙 TV화면
발굴 현장 FS 6 [흘리고-]
흙퍼내고 있다 5 진흙속에서 발견된 무덤들은 매장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상태였다.
관뚜껑 옮기고- 8 [흘리고-]
진흙속 유적들 5 물기를 머금은 흙이 공기를 차단해
거울 뒤집고/반짝반짝 4 부식과 산화를 막아주었던 것이다.
[흘리고-]
발굴된 유적들... 8 발굴된 유물중에는 일부 중국제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유물들이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칼집 /칼 꺼낸다 7 [칼집에서 꺼내면-]
그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청동 단검이었다.
세형 동검들 9 검의 몸체가 길고 뾰족한 이 단검은
세형동검 C/G 19 [조금만 빨리-]
통일거리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무덤에서 출토됐다.
청동 무기가 당시 청동무기가 당시 지배계층의 전유물이라고 볼 때, 이곳은 그들의 집단적인 무덤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서-]
이같은 유물들을 토대로 현재 북한에서는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이었다게 정설이다.
공명성 연구사 INT 문헌 기록 대부분이 (중심지를) 평양으로보고
또 후세사람들이 평양을 고조선의 수도로 인정했다는것, 다음으로는 서북 조선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는
과정에 고조선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그러한 측면에서 서북 조선이 고조선의 중심지,
고조선이 성립되고 발전했던 본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세형동검(좁은 놋단검) 20 현재까지 발굴된 세형 동검의 80% 이상이 평양 주변에 집중돼 있어서 이 검을 사용
하던 시기,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한호흡쉬고-]
그러나 세형 동검을 사용하던 시기는 기원전 4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분포 C/G 2 10 또한 세형 동검이 발견되는 지역은 청천강 이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서영수 교수 INT 북한 학계는 대동강이 평양지역이 고조선의 중심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평양이 고조선의 후기중심지라는 것은 북한학계의 유물발굴의 성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초기중심으로 보는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평양지역에서 초기 유적인 미송리형 토기나 비파형
동검은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분포 C/G 19 비파형 동검의 경우,
3/ 비파형 동검 평양 근처에서는 소수만이 발견됐고 대부분 요동지방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11/ 미송리형 토기 미송리형 토기도 마찬가지다.
압록강 이남보다는 그 이북지역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위략 기록 13 중국 문헌인 <위략>에는 연나라가 군대를 보내서
조선의 서방영토 2천리를 빼앗았고 만번한으로 그 경계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분포 C/G 확장 15 이것을 역으로 해석해 보면,
9/ 확장 시작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기 이전에는 고조선의 영토가 평양 부근뿐만 아니라
서쪽으로 더 멀리 뻗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 TR[지도-] 7 [지도뜨면-]
중국 요녕성 본계시-
앞으로 태자하가 흘러 태자하 9 예로부터 생활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학교 FS 4/아이들 8 이곳에 있는 소학교에서는 지난 95년, 매우 중요한 발굴이 있었다.
학교 건물뒤 공터에서 기원전 무덤들이
촬영팀 걸어들어간다 23 발견된 것이다.
[이하 현장음]
이곳이 당시 유적이 발굴된 현장입니다.
-언제 발굴되었나요?/ 95년 7월입니다.
-무덤이 몇 개나 발굴되었나요?/전부합하면
4-5개로 관이 나왔죠.
FS 4 [현장음]
교장과 대화중 21 토기외에 길이가 이만한 청동단검 2자루가 나왔다.
발굴된 시체는 양손에 청동 단검을 쥐고 있었다.
발굴 상황 C/G 23 보고서의 내용에 따라,
발굴 상황을 그래픽으로 복원해보면-
가장 서쪽에 있는 무덤에서
11/ 검 발생 시체의 손에 쥐어진 청동단검이 발견됐다.
그런데 이 검은 비파형 동검과 세형 동검을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송호정 교수 INT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이 요동지역에 후기 청동기 문화라 할 수 있는 점토대 토기와 비파형
동검 말기 형태의 그러한 동검의 공반 관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고조선 연맹체에 속했던 지배집단,
지역집단이 존재했던 그런 것을 말해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세형동검-비파형 C/G 18 본계 유적의 동검은 세형동검이 비파형 동검을 계승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한호흡만 쉬고 이어서-]
14/ 세형동검 빠지고 그렇다면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를 따라가 보면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심양 거리 PAN 건물 9 [지도뜨고-]
요녕성 심양시
이곳에서는 유독 청동이라는 말이
청동 글자/청동 소구 7 여기저기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수 있었다.
시민들과 대화중 이곳을 왜 청동시장이라고 부릅니까?
-청동단검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저기 묘지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묘지가 있나요?
-예, 가보지는 않았어도 청동단검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좌판 PAN-건물 9 청동 단검이 발견된 자리에는 박물관이 서 있었다. 정가와자 유적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폐쇄된 상태 10 그러나 현재는 폐쇄된 상태였고, 취재진의 접근을 엄중히 차단하고 있었다.
[잠시 쉬고 이어서-]
벽에 그려진 거울과 검 10 다만 건물 외관에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 이곳에서 비파형 단검과 청동거울이 발견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하 흘리고-]
발굴 사진 FS 7 정가와자 유적의 발굴당시 사진이다.
[이어서-]
다리뼈의 청동단추들 7 인골의 다리뼈에서는 갑옷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단추가 발견돼 지배계층의
무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청동 단검들 9 [좀 빨리 읽어야 함-]
초기 비파형 동검을 비롯해, 대량의 유물들이 수습되면서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도하자가는 TR 6 [지도 뜨고-]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 후보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 또 있다. 요양의 이도하자 유적이다.
정면 TR 8 [이하 흘리고-]
두사람 걸어오는 모습 4 [바로-]
취재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주위 전경 11 [잠시 보고-]
갈대숲/물결 7 지금은 인적 드문 들판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이곳에서는 비파형 동검, 초기 세형동검, 미송리형
토기등 다량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곳에 고조선의 지배계층이 장기 지속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두사람 어두운데서 돌판들고- 13 당시에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석재들이 아직도 주변에 널려
있었다.
[뒤 현장음 잠깐 흘리고-]
두사람 서 있는 FS 10 [흘리나?]
분포 C/G 26 비파형 단검과 더불어
5/ 요동으로 지도 이동 요동지방에 초기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음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초대형
고인돌이다.
[잠시 쉬고-/두번째 고인돌 발생하면-]
요동 지방에서 발견되는 이런 초대형 고인돌들은 단순한 무덤 이상의, 종교적 기능까지 한 것으로 보인다.
서영수 INT 요동지역의 고인돌이 전형인데 요동지역의 고인돌은 큰 신전이다.
일설에 의하면 거기 채색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족장의 무덤이 아니라 왕궁의
신전적 기능을 같이 한 것이다
과수원지나서 고인돌로 14 [2-3초 흘리고-]
6/ 고인돌 보이고 요동 지방에 있는 고인돌들중 규모가 가장 큰 개주시 석붕산 고인돌.
고인돌 타이트 SK 12 길이 8m 60cm, 너비 5m 70cm로 작은 집 한 채만한 크기다.
[이하 흘리고-]
주변 살펴보는 두사람 7 고인돌의 재료는 화강석이었는데 역시 매끈하게 다듬은 상태였다.
벽화 SK 16 고임돌 내부의 천장과 정면에는 언제 그린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벽화가 그려져 있고-
10/ 제단흔적 그 아래로 최근까지 제사를 지낸 흔적이 남아있었다.
책/바위위의 PD 4 이같은 정황들은
전망 PAN 11 이 고인돌이 후세사람들이 우러러 모셨던 제단이었음을 보여준다.
[이하 흘리고-]
도로 TR 7 대석교시에 있는 또하나의 고인돌-
석붕욕 FS-취재팀 살펴보고 13 역시 거대한 고인돌 하나가 산위에 우뚝 솟아있다.
웅장한 규모로, 멀리서도 우러러 볼 수 있도록 축조된 고인돌...
고인돌 앙감/ 살펴보는 사람들 9 그 아래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주위전경 22 고조선 초기, 저 아래 고조선 사람들은 산위에 높이 솟아있는 고인돌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고인돌은 여기에 고조선의 왕이 묻혔음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
ST 5[마을???]
현재로선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에 대해 이 정도의 추정 밖에 못하지만, 중국 지역에 있는 고조선 유적에 대한
발굴이 더 이뤄지고, 조금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그 해답도 찾을 수 있게 되겠죠.
평양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그곳에 고조선의 후기중심지였음을 확인해 주었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문헌이 빈약하고 또 유물을 직접 보는데도 큰 제약이 따르는 상황속에서 우리는 고조선의 실체 찾기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그것은 고조선의 역사를 되찾는 것이 우리역사의 첫장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동과 한반도에 걸쳐 넓은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의 전통을 이어
오던 고조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고조선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던 국가였으며 그속에서 살고 있던 보통 사람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당시의 생활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
VCR 5.
귀일리 FS 5 [3-4초 정도 흘리고-]
간판 2 평안남도 상원군 귀일리에는
고인돌 FS 3 매우 특별한 고인돌이 하나 서 있다.
고임돌 SK/살펴보는 두사람 10 [3-4초 흘리고-]
덮개돌의 길이가 10m 가까이되는 대형 고인돌이다.
성혈 자국들 7/타이트 14 이 덮개돌에는 수십개의 구멍들이 뚫려있어, 그 용도를 놓고 오랫동안 의견이 분분
했었다.
그런데 최근 이것이 별자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석광준 INT 천문 전문가들이 달려들어 전문적으로 연구해본 결과, 고인돌 무덤 뚜껑돌의 홈구멍 자리는 고인돌
축조당시에 나타나곤 하던 하늘의 별자리를 재현했다
살펴보는 두사람 9 북한 학자들에 따르면,
(남쪽하늘에서 나타나는-)
남두육성을 중심으로 30여개의 별자리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석광준 INT 제일 큰 구멍, 이것을 연결해 놓고 보니까 바가지처럼 도형이 생긴다. 이건 뭔가하면,
천문학자들이 현대 천문도에서 얘기하는 남두육성에 해당한다.
별자리 C/G 18 별자리를 그렸다는 것은
5/ 별자리 발생 천체를 관측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0/ 하늘로 올라간다 [3-4초 흘리고-]
그렇다면 고인돌 시대의 사람들은 왜 하늘을 관측하고, 별자리를 새겼던 것일까?
박물관 두사람 걷는 FS 6 취재팀은 조선중앙 역사박물관에는 특이하게 생긴 유물을 하나 발견했다.
후치 FS 4 나무로 만든 농기구였다.
타이트 PAN 14 [2-3초 흘리고-]
평안북도 주의리에서 출토된 이 후치는 높이와 길이가 각각 70센터미터였는데, 땅을 파는 도구로 짐작됐다.
옹이자국 5 대체 이 농기구가 어디에 사용됐던
앞에 구멍난 자리 3 것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농업박물관 외경 4 서울에 있는 농업박물관-
내부의 전시물들 7 우리 선조들이 사용해오던 전통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순철 실장 설명중 [현장음]
이건 북한 지방에서는 후치라고 하는건데 남한에서는 쟁기의 일종이다 눕쟁기라고 해서 깊이 갈이가 아니라
밭을 타주는 그런 쟁기로 보인다
시연하는 실장과 PD 12 [5초정도 흘리고-]
5/ 정도부터 멘트 후치는 밭을 갈 때 사용하는 쟁기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김순철 실장 설명중 [현장음]
지금도 강원도 일부 산간 지방에서는 대개 인제현이나 평창 등에서는 지금도 쓰이고 있는 것을 제가 봤다.
국립박물관 외경 5 국립중앙 박물관에는 청동기 시대의 농경과 관련해 흥미로운
농경청동문으로 Z.I 4 유물이 있다. 바로 이 농경문 청동기다.
농경 청동문 PAN 11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청동기의 뒷면에는 특이하게도 농사와 관련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농경 청동문 C/G 33 [발생하면-]
3/ 곡식 저장 발생 이것은 곡식을 항아리에 저장하는 모습이다.
11/ 괭이질 발생 [발생하면-]
괭이를 들고 작업하는 사람의 모습,
[발생하면-]
19/ 따비 발생 따비로 보이는 농기구를 사용하는 사람도 보인다.
27/ 밭 발생 그런데 이 사람의 아래쪽에 그려져있는 것은 고랑과 이랑이 구분돼 있는 밭의 모습이다.
이상길 교수 INT 고랑을 따로 만들어서 효율적으로 잡초를 제거하거나 작물을 열을 지어 재배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관리나
수확이라든지 그런데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남경유적 출토 볍씨 16 [조금 빨리-]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터로 알려진 평양의 남경 유적에서는 볍씨가 발견되어 그시대에 이미 벼농사도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그렇다면 당시 벼농사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을까?
논자리 유적 13 [자막들어오면-]
울산 무거동의 청동기 유적.
5/ C/G로 변하고 이곳에서는 2600년전의 논자리가 발견됐는데 논둑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길 12 그리고 논에 물을 댄 흔적이 보이는데
3/ 그래픽 변하고 논과 논사이에는 길을 열어놓아 물이
7/ 물 흐른다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 [이하 흘리고-]
이상길 교수 INT 농사의 수준은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기후나 물의 조절이나 이런 것을 고려하게 되는 것이지. 환경, 조리에 이르기까지 지금 농촌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후치+ 바퀴 4 북한에서, 후치와 더불어 발견된 또 하나의 유물도 당시의 생산력 수준을 짐작
바퀴 FS 5 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타이트 SK 13 현재는 바퀴의 일부분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이것을 이용해 원주율을 계산하면, 그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리정남 실장 INT 지금 둥그스름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본래 모양을 복원하면 직경이 1.6m정도이고
바퀴살이 24개가 된다. 바퀴치고는 상당히 큰 것이다.
이정도 되는 경우 그 바퀴를 달고 다니는 수레가 얼마나 컸겠는가는 아마 짐작할 수 있겠다.
바퀴 C/G 40 북한에서 발견된 고조선 시대의 유물들은 당시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생각보다
5/ 원으로 바뀌고- 훨씬 더 발전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흘리고-]
11/ 바퀴살 생기고-
17/ 수레 생기고 마을로.... 농사에 활용하기 위해 하늘을 관측했을 뿐 아니라, 농사짓는 땅에 적합하도록 알맞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알았다 또 그 당시로서는 최첨단 산업이었을 논농사를 짓고, 발전된 생산력을 토대로
운송 또한 발전했던 시대였다.
관자 기록 19 기원전 7세기, 중국 제나라 관련 문헌인 <관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돈을 주고 조선으로부터 반점 모피와 모피 의류를 구입해오자는 내용이다.
이것은 제나라가 이 물건들을 조선으로부터 수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도 바닷가 13 두나라 사이의 교역은 어떻게 이뤄졌던 것일까?
기원전 7세기, 제나라는 주변 국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강대국이었다.
청도 번화가 SK 12 산동 반도 전체가 제나라의 영토였는데,
지금도 이지역은 중국의 개방정책을 토대로 활발한 경제 발전을 이뤄 우리나라 기업도 진출해 있는 곳이다.
한서의 기록 21 흥미로운 것은 옛중국 기록에 이 지방에 고인돌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는 것이다.
큰돌이 서 있는데 3개의 돌로 다리를 삼았다는 기록으로 탁자식 고인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도로 TR 6 또한 1900년대초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이 지역에서 고인돌을 확인했다는 보고도 있다.
동네 사람과 얘기 9 취재팀은 이곳 산동반도에서 고인돌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현장음 3-4초 정도 살리고-]
택시로 이동 4 [흘리고-]
얘기하는 사람들- 19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영성현 석문자 마을의 산기슭이었다.
9/ PAN 채석장 그러나 이곳에서 고인돌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고인돌이 서있었다는 자리에는 이미 커다란
채석장이 들어앉아있었다.
[잠시 쉬고-]
돌굴리는 인부 8 1970년대, 모택동 시대에 이곳의 고인돌들이 모두 파괴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INT [현장음]
여기있던 돌은 어떻게 생겼나?
-아주 높았다. 여러개가 있었는데, 저쪽 바다를 볼 수 있을만큼 높았다
척산 바닷가 8
기원전 7세기,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이곳 산등성이에는 고인돌이 서 있었다.
[이어서-]
바닷가 FS 10 고조선 사람들의 뱃길이 이곳까지 와 닿았음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
ST 6 [기본 SET : 노을과 고인돌 배경으로 깔려있고-]
오늘 우리는 북한에 있는 고인돌에서 출발해
한반도와 요동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을 무대로 활동했던 우리의 첫국가 고조선의 발자취를 돌아봤습니다.
우리가 만나보았던 북한과 요동의 고인돌들은 모두 고조선의 유산입니다.
수천년 세월을 고고히 버텨오면서 그 땅에 고조선이 있었노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을 통해 그시대 사람들의 삶은 물론이고, 고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던 고조선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고조선의 실체에 한걸음 다가서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은 아직도 그 역사의 대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고, 많은 것들이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분단 반세기동안 학문교류가 불가능했던 터라 그 과제를 해결해야 할 남북한 학자들간에는 의견 차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은 남과 북, 어느 한쪽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 공통의 역사이며 이 최초의 국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우리 민족의 역사 지평을 넓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남북한이 함께 손잡고 해결해 가야할 시대의 과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