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
인터넷에 한국100대명당이라 해서 떠돌고 있는 명당리스트가 있다. 나름대로 답사를 해서 얻은 결과라고 본다. 그 목록에 나온 묘를 한두개 빼고 거의 다 돌아본 저로서는 맘에 안드는 목록도 있지만 대부분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제 블로그에도 그대로 가감없이 올렸다. 물론 앞으로 제가 다녀온 곳을 나름대로 선별해서 다시 올려볼 예정이다.
조선8대명당이라 해서 나름대로 대략 10여개가 회자 되고 있는데 넉넉잡고 보면 거의 대동소이하다. 이곳 광주이씨 시조 이당 묘도 8대명당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다. 제 블로그에 올리지 못한 조선8대명당들이 아직도 많아서 이미 다녀온 곳들을 이제부터 조금씩 올리려고 한다.
이곳 광주이씨 시조 묘는 흔히 야자(也字)명당이라 부른다. 즉 백호가 본신 안산을 이루는 형태다. 그래서 물이 우선수로 청룡 끝으로 나가니 수구가 완벽하고 바람을 막아주어 아늑한 국을 이룬다. 앞쪽 조안산도 보기 좋고 주위 사격도 좋다. 입수룡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고 말하는 거니까 인정해주면 된다. 그러나 명당이라고 하면 100점짜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어디든지 흠은 있기 마련이고 그걸 어떻게 보완했는지 숲이나 건물 등으로 비보했는지를 살펴서 전체적인 방향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광주이씨 시조비 인화 이씨 묘 바로가기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는 신라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내물왕) 때의 내사령(內史令) 자성(自成)이다. 광주이씨의 중흥의 조(祖)는 고려 말의 학자 둔촌(遁村) 집(集)이다. 그는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을 논박하고 영천(永川)으로 피신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에 돌아왔다.
그의 아들 지직(之直)은 형조참의를 지냈는데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지강(之剛)은 좌참찬, 지유(之柔)는 사간을 지냈다. 지직의 아들 장손(長孫)은 사인(舍人)을 지냈고, 인손(仁孫)이 세조 때 우의정에 이르고, 예손(禮孫)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예손의 아들 극기(克基)는 참판을 지낸 성리학자이며, 현손 중경(重慶)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후손으로는 선조 때 병조판서 윤우(潤雨), 효종 때 이조판서 원정(元禎), 숙종 때 이조참판 담명(聃命) 등이 있는데, 담명은 1690년(숙종 16) 영남 대흉년에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상신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는데, 상신·대제학·청백리 중 청백리 중경만이 예손의 후손이고, 나머지는 모두 인손의 후손이다. <두산백과에서 인용>
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 이당(李唐)은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시조이다. 처는 인화 이씨(仁華李氏)로 슬하에 5남을 두니 이봉(李逢)·이집(李集)·이희령(李希齡)·이자령(李自齡)·이성(李省)으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얻었다. 광주 이씨의 분파를 보면, 둔촌(遁村) 이집(李集)[리원령(李元齡)]을 1세조로 하는 둔촌공파(遁村公派), 이익비(李益庇)의 현손 이녹생(李祿生)을 중시조로 하는 율정공파(栗亭公派)와 석탄공파(石灘公派), 암탄공파(巖灘公派) 등이 있다.
이당은 고려 때 고을 아전으로 국자생원(國子生員)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자손들이 이름을 얻으면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보(補)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로 증직되었다. 아들 이집(李集)이 1368년(고려 공민왕 17)에 신돈(辛旽)의 비위를 거슬러 화가 곧 미치게 되자 아버지 이당을 업고 경상북도 영천으로 피신을 와서 동방급제(同榜及第)인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숨어 지냈다. 다음 해인 1369년 기유년(己酉年) 이당이 세상을 뜨자 최원도는 장례를 부모와 같이 극진히 하고,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 묘소를 쓰게 하였다.
이당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 있으며, 후손 청도군수(淸道郡守) 이의경(李宜慶)이 쓴 묘비(墓碑)가 있다. 묘소 아래 묘재인 추원재(追遠齋)가 남아있다. <영천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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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 |
소재지 |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 산 85번지 |
관리자(연락처) | 광주이씨(廣州李氏)대종회 |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의 우정 공민왕 17년(1368)에 이집(李集)이 신돈을 탄핵하려다가 신돈이 이집을 죽이려고 체포령을 내리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집은 아버지 당(唐)을 등에 업고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경상도 영천에 사는 친우인 전직 사간(司諫) 최원도(崔元道)의 집으로 갔다. 최원도라면 자기를 숨겨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작은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원령은 잠깐 행낭채에 들어가 쉬고 있었다. 그런데 최원도(崔元道)가 나와 '망하려면 혼자 망하지 어째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드냐'며 노발대발하며 쫓아내고 역적이 앉았던 자리라고 하면서 행랑채에 불을 질러버렸다. 이집(李集)은 쫒겨 나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친구의 진심은 그렇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다. 며칠 뒤 이집은 한밤중 동네 사람 모르게 최원도 집 주변 덤불에 몸을 숨겼다. 최원도도 이집이 다시 찾아올 것을 생각하며 어두울 무렵 혼자 주위를 서성이다 둘은 서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최원도(崔元道)는 이집 부자를 데리고 집으로 와서 낮에는 다락에, 밤에는 골방에 숨어서 살게 했다.
최원도의 집에 '제비'라는 예쁜 이름의 계집종이 있었다. 그의 상전이 어느 날 갑자기 한끼에 밥 세 그릇씩 먹고 방안에서 용변을 하는 등 반미치광이 행세를 시작하였다. 그 시중을 제비가 도맡아 하였는데 어느날 문틈 새로 살펴보니 벽장 속에 낯선 두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 몸종은 안주인에게 알렸고 부인은 남편에게 까닭을 물었다. 최원도는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는 이 사실이 새나가면 두 집안이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몸종 ‘제비’는 자칫 자신이 실수할지 몰라 고민 끝에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자결하고 말았다.
1369년 이집의 아버지가 다락방에서 세상을 떠난다. 최원도(崔元道)는 장례를 자기 아버지와 똑같이 하여 자기의 수의(壽衣)를 내어다가 예에 어긋남이 없이 빈염을 하고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 놓은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에 장사지냈다. 광주 이씨는 이곳에 시조를 모신 음덕 때문인지 과거급제자를 많이 배출하고 조선 중기까지 대문중으로 우뚝 섰다. 현재 묘역 일대는 광주 이씨로 소유로 되었다고 한다. 광주 이씨들은 지금도 시조 시제를 지내면서 최원도 어머니 영천이씨에게도 제물을 올리고 몸종 제비한테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보고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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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용맥도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원경... 현무정을 살펴 볼 수 있다.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사격이 근사하다.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에 새겨진 성현(成俔,1439~1504)의 글. 當今門閥之盛 廣州李氏爲最(당금문벌지성 광주이씨위최) '지금 門閥이 번성하기로는 廣州 李氏가 으뜸' 이라고 했다. 이 말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말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當今門閥之盛。廣州李氏爲最。其次莫如我成氏。廣李自遁村以後漸大(당금문벌지성。광주이씨위최。기차막여아성씨。광리자둔촌이후점대) 지금에 있어서 門閥이 번성하기로는 廣州 李氏가 으뜸이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 成氏만한 집안도 없다. 광주 이씨는 遁村 이후로 점점 커졌으니... 에서 따온 말이다.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앞쪽에 재실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 전경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 묘 앞쪽에 이처럼 석물을 하는 것은 조선 초기의 묘에서 자주 보인다.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비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표 전면, 후면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비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 석물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청룡방...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장명등과 청룡방 수구처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 장명등과 조안산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백호방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후경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뒤에 있는 영천 최씨 최원도(崔元道)의 모친 영천이씨 묘... 원래 광주이씨 시조 묘 자리는 최원도가 자기의 신후지지로 잡아 놓은 자리라고 전한다.
▼ 최원도(崔元道)의 모친 영천이씨 묘표
▼ 최원도(崔元道)의 모친 영천이씨 묘 석물... 무인석을 세웠는데 무인석이 아주 특이하다.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과 최원도(崔元道)의 모친 영천이씨 묘 후경
贈 遁村(증 둔촌)/崔元道(최원도)
慷慨僞時淚滿襟 강개위시루만금
流離孝懇達幽陰 유리효간달유음
漢山迢遞雲煙阻 한산소체운연저
蘿峴盤回草樹深 라현반회초수심
天占後先雙馬鬛 천점후선쌍마울
誰知君我兩人心 유지군아양인심
願言世世長如此 원길세세장여비
須使交情利斷金 수사교정이단금
둔촌에게
강개하게 시국을 한탄하며 눈물로 옷깃을 적셨는데
유리(流離) 중에도 지극한 효성은 유음(幽陰)까지 달했노라
한산(漢山)은 멀고멀어 운연(雲煙)만이 아득한데
나현(羅峴)은 굽이굽이 돌아 초수(草樹)도 그윽하구나
앞뒤의 두 마렵(馬鬣)은 하늘이 가려준 것인데
그 누가 그대와 나 두 사람의 마음을 알 것인가
바라건대 대대로 길이 이와 같이하여
모름지기 교정(交情)이 이단금(利斷金)토록 하자꾸나.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에 있는 최원도(崔元道)가 둔촌(遁村) 이집(李集)에게 쓴 시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에 있는 진호석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입구에 세워진 둔촌선생유적비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청룡 끝자락 수구처에 있는 제비 묘(燕娥塚)
▼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 묘역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