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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욕행록」
낙강연안을 비롯한 영남지역의 창작현장과 그 유적-「봉산욕행록」을 중심으로-
1) ‘봉산욕행’의 배경과 주변 정황
정구가 신병 치료차 동래로 온정행을 떠난 것은 1617년 7월 20일 새벽이었다. 칠곡 지암(枝巖)에서 배를 띄운 정구 일행은 하빈⇒현풍⇒고령⇒창녕⇒함안⇒영산⇒밀양⇒김해⇒양산을 거쳐 7월 26일 정오에 목적지인 동래 온정에 도착하였다. 7일간의 여정에 물길(水行) 710리, 뭍길(陸行) 20리를 합해 총 730리에 이르는 원행이었다.
온정에서 꼬박 30일을 묵으며 온욕과 휴식을 취한 정구는 동년 8월 26일 동래를 떠나 양산⇒통도사⇒경주⇒영천⇒하양⇒경산을 거쳐 9월 4일 사수(泗水)로 돌아오게 된다. 전후 45일에 걸친 욕행은 신병 치료에 목적이 있었지만 낙강 연안을 중심으로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었던 한강학파의 결속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문인들을 규합해가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을 만큼 연로의 영남 유림들이 회합한 일대 사건이었다. 경상감사 윤훤(尹暄)은 직권으로서 여행에 따른 제반 편의를 제공하였고, 정구 일행이 경산의 소유정(小有亭)에 이르렀을 때는 몸소 영접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대구부사, 신안현감, 초계군수, 창원․밀양․김해․동래부사, 경주부윤 등 연로의 지방관이나 도동(道東)․연경(硏經)․신산(新山)․자천(紫川)․서악(西岳)․임고(臨皐書院), 성주․밀양․동래향교 등의 교원에서도 정구의 문안과 영접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정구 일행이 탄 배도 도동서원 소유로 원장 곽근(郭赾)이 정갈하게 수리하여 하루 전에 대기시켜 둔 것이었다.
동래행의 명분과 목적은 물론 욕천욕에 있었지만 그곳으로 가는 경로는 선유(船遊)를 겸한 여행이었다. 이 여행은 이미 정구에게는 시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익숙했던 낙강의 풍물을 재음미하며 자연과 더욱 합일해 가는 수양의 과정이었고, 문인․제자를 비롯한 인근 선비들의 경쟁적 영접 열기는 제왕의 순수를 방불케 했다.
불치불검(不侈不儉)의 선장(船粧)만큼이나 배 안의 분위기도 담박․진솔하였지만 여정에는 지켜야 할 규율이 있었다. 여행 이틀째인 7월 21일 이를 어기고 백희(白戱)를 행했다는 까닭으로 공사원 이천봉(李天封)이 문책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제간의 위계질서도 매우 엄격했다. 정구는 문인들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고, 하선시에는 반드시 견여(肩輿)나 남여(藍輿)에 오름으로써 도보로 이동하는 문인들과는 차별을 두었다.
정구의 6대조 정총(鄭摠)은 개국공신이었고, 그 자손들은 서울․경기 일원에 터전을 두고 살아 온 전형적인 ‘서울양반’이었다. 가문의 전통 때문인지 정구의 체질 속에는 결벽에 가까운 정갈함, 독존적 권위의 추구와 같은 요소가 잔존하고 있었다. 아래의 기사는 정구의 평소 생활상, 문인들과의 관계상을 관련하여 많은 것을 연상케 한다.
한강은 일찍부터 중명이 있어 사도(師道)로서 자존(自尊)했다. 한번 제자로 일컬어지면 간혹 남여(藍輿)를 메기도 하고, 혹은 밥을 짓거나 죽을 끓이기도 한다. … 평생토록 땅에다 대소변을 보는 일이 없었는데…(후략)
낙재(徐思遠)는 선생보다 7세 아래였는데, 산중에 올 때마다 낮에는 같은 책상을 마주했고, 밤에는 이부자리를 나란히 하면서도 새벽에 일어나 씻고 머리를 빗은 뒤에 들어가 안전(案前)에서 절을 하면 선생께서는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답하셨다.
45일간의 여정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차곡차곡 채워져 갔고, 7월 24일부터는 직일(直日)이 정해져 그날그날의 노정을 세밀하게 지휘․감독하며 전체 일정을 소화해 나갔다.「봉산욕행록」에 등장하는 직일 수행자는 이서(李)․이천봉(李天封)․이도자(李道孜)․이육(李堉)․이후경(李厚慶) 등 총 5인인데, 바로 이들이 동래욕행을 기획․추진한 강문고제들이라 할 수 있다.
당초 지암에서부터 정구를 배행했던 문인은 채몽연(蔡夢硯)․곽영희(郭永禧)․이천봉(李天封)․이언영(李彦英)․이윤우(李潤雨)․배상룡(裵尙龍)․이명룡(李命龍)․유무룡(柳武龍)․이난귀(李蘭貴)․이학(李壆)․정천주(鄭天澍) 등 12명이었으나 이육이 금강에서 합류하는 대신 이언영은 쌍산(雙山)의 수문에서(7월 20일), 곽영희․이명룡․배상룡․이난귀․유무룡 등은 현풍에서 되돌아감으로써(7월 21일) 이윤우․이서․이천봉․이육 등만 남게 되었고, 7월 23일 도흥에서 이후경․이도자 등이 합류함으로써 비로소 직일진이 꾸려질 수 있었다. 직일체계가 7월 24일에 가서야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회연급문록」에 수록된 한강문인은 341명에 이른다. 물론 이들 중에는 사환․거상(居喪) 등 다양한 이유와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 동래행에 동참할 수 없었던 사람도 있었겠고, 또 승선(乘船) 인원을 고려한 측면도 없지 않았겠지만 정구가 수많은 문인 중에서도 평소 신망하던 소수의 인사들만 대동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정구는 이번 여행이 낙강을 주유하는 생애의 마지막 기회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의 나이가 75세의 고령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낙강 유람이 마지막이라면 도동을 거쳐 산해정에 이르는 걸음도 다시금 기약하기 어려웠다. 주행 첫날인 7월 20일 도동서원 서상재(西上齋)에서 하루를 묵고 21일에 김굉필의 산소를 참배한 것이라든지 7월 25일 굳이 신산서원[산해정]을 봉심한 뒤에 동래로 간 것은, 정구에게 있어 동래욕행이 학문연원을 찾아가는 과정, 즉 심원(尋源)의 길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김굉필을 거쳐 조식을 찾아가는 그 여정에서, 그것도 51년만에 산해정을 다시 찾은 그 즈음에 그는 이황에 대한 추념과 경모의 마음을 함께 지폈다. 그런 마음은 7월 27일 이윤우(1569~1634)에게 이황의 ‘예의답문(禮疑答問)’의 대목(大目)을 정사케 하고, 8월 3일에는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와 상기 ‘예의답문’의 제목(題目)을 강정하는 단계에서 보다 선명해져 갔다. 신산서원 심방과 ‘남명종사소’의 주도, 이황 저술의 강정 작업이 정구에 대한 사림의 중망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에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퇴계․남명 양문의 적통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한편 이를 이윤우 등 일부 문인들에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결국 정구에게 있어 동래행은 영남맹주의식을 천명하는 과정인 동시에 자신의 뒤를 이을 고제집단을 설정해가는 자연스런 기회로 작용하였다. 후일 이윤우가 정구의 청시(請諡), 신도비의 건립, 회연서원의 건립,『한강집』및『오선생예설분류』,『오복연혁도』의 간행에 혼신의 힘을 다한 것도 사(師)의 기대에 대한 제(弟)의 화답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봉산욕행록」에 나타난 낙강연안의 정구 유적
(1) 칠곡․하빈․현풍고령 -부강정․노다암․영파정․도동서원․어목정․부래정․학암정-
7월 20일 지암을 출발한 정구 일행은 부강정(浮江亭)을 지나 금강 앞 여울에서 아침을 먹고 원당포(元堂浦)를 지나 노다암(老多巖)에서 이로․이서 등 10여명의 인사들과 만나 잠시 배를 멈추고 이들과 간단한 술자리를 가진 뒤 하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신안현감 김중청(金中淸)이 병으로 직접 영접치 못하는 대신 이윤우에게 시를 보내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전해 왔다.
소미성의 빛이 정수 궤도에 비치는 가을에 少微光耀井躔秋
노나라 늙은이가 어찌 바닷가 놀이를 사양하랴? 魯叟寧辭海上遊
나도 말미가 있으면 따르려 했는데 지금 병으로 누웠으니 從我有由今臥病
저 번지의 무리들 말 옆에서 모시고 가는 것 부럽구나 羨他遲輩御驂頭
이에 정구는 편지를 보내 성의에 답하였고, 이윤우 등 10인[李彦英․盧世厚․이서․李潤雨․盧垓․李道長․李天封․李蘭貴․裵尙龍․李堉]은 주중에서 화답시를 지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주상시회(舟上詩會)’로 이어져 출범을 자축하게 된다.
이 날 오후 덕산을 지나 저물녁에 쌍산의 수문에서 이언영과 작별한 일행은 영파정을 지나 도동서원에서 첫날밤을 묵었다. 이튿날인 7월 22일 정구 일행은 출범 때부터 동행했던 곽영희․이명룡 등과 헤어진 뒤 고령의 어목․부래정을 지나 초저녁에 창녕 경계의 우산촌가에서 유숙하게 된다.
지암에서 우산촌가에 이르는 물길 200리 동안 정구 일행은 부강정․노다암․영파정․도동서원․어목정․부래정을 지나왔는데, 이곳은 일찍이 정구가 유람․경유한 ‘강안문화(江岸文化)’의 거점들로서 대부분 한강문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역사문화적 공간들이었다.
정구는 성주․칠곡 일대에 걸쳐 있었던 주거기반, 창녕현감, 함안군수를 지낸 사환 경력, 낙강 연안에 밀집, 분포하고 있었던 사우문인의 관계망 등으로 인해 누구보다 낙강과 그 주변의 명소들을 유상할 수 있는 조건이 좋았고 기회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를 기념하고 노래한 작품은 극히 적은데, 아래의 시는 그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평생에 무슨 일이 가장 으뜸이던고 平生何事最爲多
오늘의 뱃놀이도 노래할 만하구나 今日船遊亦可歌
좋은 벗과 해후하여 함께 취했는데 邂逅良友仍共醉
물속에 잠긴 저녁노을 너른 물결을 비추네 斜陽倒影照平波
이 시는 정구가 함안군수를 그만 둔 이듬해인 1589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문인 노세후는 배 안에서 김중청의 증시에 화답한 시에서 당시의 주유를 이렇게 추억하고 있다.
20년 전 기축년(1589) 가을에 二十年前己丑秋
선생님을 좆아 여기서 놀았었네 追隨函丈作斯遊
다행스레 오늘 이곳을 또 다시 찾아오니 如今何幸重來過
그 날의 홍안들도 이젠 모두 백발이네 當日朱顔盡白頭
위의 뱃놀이의 위치는 정확치 않지만 정구 평소의 주유 동선을 고려할 때 부강정⇒․노다암⇒어목정⇒부래정에 이르는 경로로 파악되는데, 이제 이들 유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낙강 연안인 하빈현 하산동에 소재한 부강정은 본디 윤대승(尹大承)이 건립한 정자였다. 윤대승은 성주 사람으로 1564(명종19)에 생원에 입격했을 뿐 크게 드러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1577년(선조10) 외선조 심의(沈義)의 유고인『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를 편차하고, 간행을 위해 김극일(金克一)․권응인(權應仁)에게 후지를 부탁할만큼 문아(文雅)한 사람이었다.
부강정은 낙동강과 금호강의 합류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본래 신라 왕이 놀던 곳으로 임란 전까지만해도 정자 주변에는 노송 몇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두 강에 임하고 노송에 에워싸인 부강정의 아름다운 경관은 문인들의 내방을 재촉하였는데, 그런 아름다움은 이우(李瑀)․권문해(權文海)의 시를 통해 더욱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부강정은 임란의 병화를 겪으면서 크게 파손되었고, 이윽고 정주마저 사망함으로써 예전의 화려함도 일시 사라지게 된다. 1601년 3월 서사원의 완락재(玩樂齋) 낙성을 기념하여 장현광․이천배 등 23명과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했던 여대로(呂大老)는 부강정의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땅거미가 지자 배를 부강정에 댔다. 정자는 곧 상사(上舍) 윤대승이 지은 것이다. 용마루 기와는 병란 때 불에 탔는데, 상사가 죽은 지 채 10년도 되기 전이었다. 황량한 대(臺)는 홀로 저녁비 속에 머물러 있고, 소나무와 국화의 그림자가 빈 뜰에 얽혀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산양(山陽)의 감회를 일으키게 했다. 강촌에 어둠이 찾아와 정사에 들어가 쉬었는데, 방이 몇 칸에 지나지 않아 일행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어 나와 사빈(士彬:李奎文)은 학가(學可:李宗文)의 집으로 돌아가 잤다.
이후 부강정은 이지화(李之華)라는 새로운 주인을 맞아 점차 지난날의 모습을 되찾아 가게 된다. 전의이씨 출신의 이지화(1588-1666)는 1613년 문과에 합격하여 병조․예조참의를 지내는 등 영남남인으로서는 비교적 현달했던 인물이었고, 정구․장현광과 사우관계를 맺었다. 원래 그의 선대는 경기 부평에 세거하다 증조 이필(李佖) 대에 대구로 낙남하였고, 조부 이경두(李慶斗)는 임란 당시 곽재우의 의진에서 활동키도 했다.
이지화가 부강정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은 혼맥과 관련이 있었다. 조부 이경두는 파평윤씨 윤황(尹滉)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윤황은 부강정의 창건자 윤대승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윤씨가의 정기(亭基)를 인수한 이지화는 정자를 화려하게 중수한 뒤 부강거사(浮江居士)로 자호하여 이 곳이 자신의 영역임을 천명하게 된다.
이지화의 부강정 인수와 중수는 가문의 강거전통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부강정 이전에 이 가문에는 이종문 대에 건립된 하목정(霞鶩亭)이 있었다. 이 정자는 이덕형(李德馨) 등 공경이 제영을 남길만큼 경치가 아름다웠고, 인조가 능양군 시절에 찾은 적도 있었다. 특히, 후자와의 인연은 반정 이후 인조가 정주(亭主)의 장자 이지영(李之英)을 접견한 자리에서 하목정의 승경을 추억, 칭송하며 내탕고를 열어 수리 비용으로 은자(銀子) 200냥을 보조하고, 뒤이어 ‘하목당(霞鶩堂)’이란 어필을 내리는 단계로까지 진전되었다. 이로써 하목정은 낙강의 기관(奇觀)이자 국중 명소의 하나로 자리매김되었다.
이지화가 언제 부강정을 중수했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대략 병자호란(1636)을 전후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부강정에 대한 이지화의 애정은 특별했던 것 같다. 상량문․기문 등 중수와 관련된 주요 문자들을 이식(李植)․이민구(李敏求) 등 당시 조선 문단의 거장들에게 부탁한 것부터가 그랬다. 아래는 이식의 ‘부강정상량문’인데, 경관의 아름다운, 새로운 주인을 맞은 것에 대한 축하, 그 곳에서 신선처럼 살아갔으면 하는 정주에 대한 당부가 잘 녹아 있고, 그런 감회와 당부의 마음은 ‘부강정’이란 시에서 거듭 표현되었다.
팔공산(八公山)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멀리 대륙(大陸)의 언덕이 펼쳐지고, 낙동강(洛東江) 물은 남쪽으로 흘러내려 금호(琴湖) 나루에서 합류(合流)한다. 그 가운데에 하수(河水)를 가로막고 우뚝 선 지주(砥柱)처럼 푸른 산이 둥글게 서 있는데, 그곳에 일찍부터 화려한 정자가 있어 마치 뗏목을 타고 은하에 올라간 것과 같은 느낌을 자아내었다. 그 유허(遺墟)가 오래도록 방치된 채 매몰되어 왔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그 이름만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태평한 시대나 어지러운 시대나 그 땅은 항상 열려 있었건마는, 그곳에서 주인 노릇을 하거나 손님으로 찾아왔던 사람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야성(冶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음(山陰)의 별장이 있고, 낙수(洛水) 물가의 전원으로 물러나 반령(潘令)이 살았던 것처럼, 이곳에다 새로 정자를 짓고서 다시 명승(名勝)의 이름을 드러내게 되었다.
두 강물이 에워싼 평평한 작은 언덕 二江環合小洲平
유람선 가로 비껴 띄운 듯한 정자로세 亭勢眞成畫舫橫
산봉우리 들쭉날쭉 앉은 자리 문안 오고 列岫參差來几席
푸른 물결 넘실넘실 처마 기둥 일렁이네 滄波滉漾動簷楹
삼신산(三神山)의 선경이 여기에서 그리 멀까 方壺靈境知非遠
인끈 찬 명예 역시 가볍게 볼 만한 걸 絓組榮名直可輕
강해의 흥취 저버린 지 오래인 늙은 이 몸 老我已孤江海興
누워서 노니는 정 시로나 끄적일 수밖에 新題謾寫臥遊情
부강정에 대한 찬사는 이민구의 기문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었다. 이지화는 중수한 정자와 주변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이민구에게 기문을 청하였고, 이를 본 이민구는 하빈 일대 낙강 연안에 소재한 10여 누정 중에서 부강정을 으뜸으로 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부강정은 대구와 경산(京山:星州) 두 고을 사이에 있다. 강에 매우 가깝고 돌을 쌓아 터를 만들었는데, 마치 사빈(泗濱)의 부경(浮磬)과 같아 이런 이름을 얻었다 한다. 강의 위 아래로 물가에 임해 지은 정자가 10여 개인데, 유독 이 정자만이 가장 빼어나고 오래되었다. 나의 벗 이군 이실(而實)이 그 형세와 경치를 그림으로 그려 나에게 기문을 청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했던 부강정과 그 주변을 정구는 봉산욕행 이전은 물론 그 후에도 여러 번 주유하며 유람하곤 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1589년(선조22)의 뱃놀이를 비롯하여 1605년(선조38)에는 서사원․장현광․손처눌 등과 함께, 고종하기 한 해 전인 1619년 6월에는 신안현감 김중청 등과 더불어 뱃놀이를 즐겼다.
1605년 3월 정구는 고령의 어목정(漁牧亭)에서 출발하여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노다촌⇒부강정⇒낙재⇒선사⇒부강정에 이르는 경로를 6박 7일의 일정으로 주행한 적이 있었다. 성묘와 사제간의 회합을 겸한 이 행사는 당초 3월 중순 이후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구가 일정을 앞당겨 초6일에 발정하였다.
정구가 탄 배에는 박정번·곽근·이후경·이학·이난귀 등이 동주하여 수행하였고, 노다촌에서 하루를 묵은 일행은 8일 오후에 척성(尺城)을 지나 부강정에 도착하였다. 당초 정구의 성묘행을 이 달 20일 이후로 알고 있었던 서사원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생께서 타신 배가 척성(尺城) 아래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나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작은 배를 저어 강(江) 입구로 급히 내려가니 선생의 행차는 이미 부강정으로 들고 있었다. 나는 황공하여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올라가 포복한 채로 들어가 절을 하고 뒤늦음을 사과했다. 도생(都生)과 김생(金生)이 그릇 정탐한 허물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이날 정구 일행은 부강정에서 하루밤을 묵었는데, 당시 부강정의 여건은 1601년 여대로의 눈에 비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0일 정구는 불순한 일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정을 강행하였는데, 사문의 성사를 보기 위해 모인 인근의 선비만도 7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에는 곽재겸(郭再謙)와 유성유(柳聖兪:이름 미상)와 같이 주과를 준비하고 자제를 대동하고 내알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사원의 ‘낙재’에서 다시 하룻밤을 묵은 정구는 10일 아침에는 연경원장 손처눌의 영접을 받았고, 저녁에는 경상감사 이시언(李時彦)이 군관을 통해 함께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해오기도 했다. 역시 서사원의 선사 서재에서 다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된 정구는 대구향교 생도들의 환대를 받는 한편 이날 밤 장현광이 합류하게 됨으로써 사제 회합의 분위기도 더욱 고조되었다. 11일 대곡 선영을 찾아 치제를 마친 뒤 부강정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더 묵은 정구는 아침부터 일정을 재촉하여 정주(亭主)를 매우 당혹케 했다.
선사 서재 산장 서사술(徐思述)이 어제 재중에서 술을 돌리지 못했다 하여 재유들과 함께 정자 안에서 잔을 올렸다. 선생께서는 배를 빨리 띄우라고 재촉하셨는데, 주인은 미처 일행의 아침밥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감히 나아가 주인의 뜻을 말씀드리고 남여를 잠시 대문 밖에 머무르게 했다. 주인은 창졸간에도 성찬을 준비하여 부족함이 없었으니 선생을 존숭하는 정성이 또한 가상하였다.
조반을 마친 정구는 손처눌·손처약·도응유 등의 수행을 받으며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성주로 돌아가게 된다. 전후 7일에 걸친 여정의 본래의 목적은 성묘 및 족회 참여였지만 정구는 대부분의 시간을 문인들과 함께 보냈고, 이 과정에서 박정번·곽근·이후경·이학·이난귀·서사원·손처눌(연경원장)·정선·곽재겸·유성유·손처약·서사술·도응유․도성유 등 무려 70여명의 인사들이 배행 또는 내알·영접했다. 1617년의 봉산욕행이 한강문하 ‘후진’들의 주선 속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모임은 서사원으로 상징되는 ‘선진’과의 회동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그리고 그가 경유했던 어목정·부강정·낙재·선사서재도 문인들의 정자 또는 강학공간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정구 재세시 낙강연안의 누정들은 정구와 그 문인들이 소통·교유하는 학술문화의 구심점이자 매개체로서의 성격이 컸고, 이런 모임을 통해 한강학파는 내부적 결속력을 더욱 키워 가며 17세기 초반 영남학파의 주류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런 성격은 ‘을사선유’의 사실상의 주최자였던 서사원의 유람기[東遊記] 말미의 표현에서 더욱 명확해 진다. 즉, 서사원은 3월 9일 비바람이 몰아쳤던 악천후 속에서도 사문의 성회(盛會)를 더욱 빛내기 위해 주중에서 손처눌에게 시를 부탁하였고, 손처눌은 즉석에서 붓을 잡아 시를 완성한 뒤 정구에게 올렸다. 이후 이 시는 당시의 모임에 참여했던 70여명의 가운데 약 40명 및 개인 사정으로 당시 모임에는 참여치 못했지만 서사원의 뜻에 깊이 공감했던 7-8명의 인사들로부터도 창화를 받음으로써 ‘을사선유’는 낙강의 고사이자 한강문하의 미담으로 전해지게 된다.
이제 화제를 돌려 1605년 3월 6일 정구가 배를 띄웠던 장소인 어목정과 1617년 봉산욕행시에 경유했던 부래정에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의 고령군 우곡면에 있었던 어목정은 박정완(朴廷琬)의 정자였다. 고령 우곡의 예곡(禮谷)․도진(桃津) 일대는 조선초기 이래 고령박씨 박경(朴景)의 후손들이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박경의 5세손 박윤(朴潤)․일(溢)․택(澤) 3형제 대에 이르러 정인홍․정구 등과 사우문인관계를 형성하며 영남의 대표적 명가로 발돋움하여 흔히 ‘도진박씨(桃津朴氏)’로 예칭되기도 한다.
과거 현풍의 답곡(沓谷)에서 고령 도진에 이르는 강안의 요로를 점유하고 있었던 박씨 일문은 일찍부터 강거 및 누정문화를 꽃피워 박정완의 어목정을 비롯하여 박윤의 죽연정(竹淵亭), 박택의 낙락당(樂樂堂), 박정번의 부래정(浮來亭)과 학암정(鶴巖亭)이 조성되었고, 박정번의 손자 박응형(朴應衡)은 남고정(南皐亭)을 건립하여 가문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우곡의 박씨들은 남명학파에 속했고, 그 매개 역할이 된 것은 정인홍․정구와의 사승관계였다. 박윤(朴潤)⇒정벽(廷璧)⇒원갑(元甲)⇒종윤(宗胤:내암문인)로 이어지는 박계조의 장자 계열과 박택(朴澤)⇒정완(廷琬)⇒광선(光先:내암문인)⇒종주(宗冑:내암문인)로 이어지는 3자 계열은 정인홍과의 학연이 두드러진다. 박일(朴溢)⇒정번(廷璠:한강문인:생부朴澤)⇒창선(昌先:孝先)⇒응형(應衡)으로 이어지는 차자 계열에서는 비록 박정번이 한강문인이기는 했지만 그 아들 효선[창선]과 사위 조정생(曺挺生)이 내암문인이었고, 또 박정번 사후 정인홍의 그의 묘표를 지었다는 점에서 이들 또한 내암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다만 장자 계열의 경우 박광선․종주 부자가 정인홍과 끝까지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함으로써 인조반정 이후 가세의 급격한 추락을 감수했던 반면 박정번의 자손들은 정구와의 사승관계에 기반하여 퇴계학파와의 연대를 모색함으로써 조선후기에도 문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박정완의 어목정은 당시에 누렸던 문화공간으로서의 인지도에 비해 직접적인 자료가 많지 않은 반면 박정번의 부래정과 학암정에 대한 기록은 훨씬 나은 편이다. 부래정은 박정번이 우곡면 예곡리의 문연(文淵) 가에 세운 정자이고, 학암정은 백부 박윤의 죽연정 인근에 건립한 것으로 우곡면 도진리에 위치하였다.
박정번은 임란 당시 형 정완(廷琬)과 더불어 왜구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고, 한 때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생애의 대부분은 산수벽에 빠져 강호에서 보냈으며, 만년에는 문연재(文淵齋)를 건립하여 후진 양성에도 열정을 보였다.
군은 야천(倻川)과 낙수 사이에 집이 있었는데, 빼어난 곳을 골라 학암․부래정사를 짓고 종로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만년에는 문연재를 건립하여 이따금 고을의 자제들을 모아 강송하여 얻는 바가 매우 많았다.
박정번은 정구보다 7년 연하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구를 스승으로 깍듯하게 섬겼으며, ‘을사주행’ 당시에는 출범처인 어목정에서부터 사문을 배종키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산수벽도 1610년을 기점으로 와유(臥遊)의 대상이 되고 만다. 1610년 3월 8일 경상도사 배대유(裵大維)가 공무 수행차 부래정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조병(調病) 중이었다. 배대유의 표현처럼, 그는 부래정의 뜰을 가득 채운 매화와 송죽 그리고 활기차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화사한 봄기운을 느끼며 쾌차를 염원했겠지만 이로부터 채 1년이 되지 않아 향년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아래는 그의 죽음을 애도한 정구의 만사와 제문이다.
일생토록 강호에서 즐거움을 누렸고 一生全向江湖樂
반생토록 사우들과 종유했었지 半世相從士友遊
학암정과 백매원에서 함께 술잔 기울였고 鶴墅梅園多共酌
도진과 낙수 사이를 뱃놀이한 것은 얼마던가 桃津洛水幾同舟
성품이 호산(湖山)을 좋아하는 벽이 있어 50여년이나 누렸음에도 스스로는 그것을 벽(癖)이랄 것도 없이 여겼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고, 세상에서도 드문 일인데 하늘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아! 맑은 낙강에 언제 다시 배를 띄워 함께 뱃놀이 할 수 있겠으며, 언제 다시 부래정(浮來亭)에서 함께 술잔을 주고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박정번은 정구가 인정한 산수광이었고, 정구 역시 여러 번 도진을 왕래하며 부래정과 학암정에 족적을 드리웠던 것이다. 비록 봉산욕행시에는 어목정과 부래정을 들르지는 않았지만 필시 정구는 1617년 7월 21일 도진 부근을 지나며 지난날을 회상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때는 역풍이 세게 불어 주행이 더뎠던 탓에 그 시간도 좀 더 여유로왔을 수 있다.
(2) 창녕․영산․함안․칠원지역 -마수원․기강․도흥․경양대․두암대․창암정-
7월 22일 창녕에서 생질 노극홍(盧克弘)이 차려 온 아침을 먹고 출발한 정구 일행은 사막(沙幕)에서 초계군수 이광윤(李光胤), 전 함양군수 이대기(李大期)의 영접을 받았다. 월천․내암문인이었던 이광윤은 1612년 조목의 예천 정산서원(鼎山書院) 종향과 관련하여 정구에게 자문을 구한 인연이 있었고, 후일 1620년 8월에는 광해군의 명으로 정구에 대한 사제문을 짓기도 한다. 초계 출신의 이대기 역시 내암문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구와도 교유가 깊었고, 임해군 옥사 때는 정구의 전은론(全恩論)에 적극 동조하였다.
한편 이광윤․이대기와 헤어진 정구 일행이 마수원(馬首院) 인근을 지날 무렵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창녕현감 윤민철(尹民哲)이 정구를 영접하기 위해 강변에 장막을 치고 기다렸으나 일행이 그냥 지나쳐 버리자 당황한 현감이 작은 배를 타고 급히 따라와 간신히 헌작하였으며, 창녕 선비들도 별도로 채비를 하고 기다렸으나 이번에는 배를 댈 수가 없어 회합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행이 탄 배가 영산 경내인 기강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기강 인근에 인가가 적어 숙식이 불편하고, 무엇보다 도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이후경을 빨리 만나려는 마음에서 주행을 재촉한 정구는 도흥탄에 조금 못미쳐 창원부사 신지제, 이석경․후경․도자․도유․도일․도보․도순 등 벽진이씨 일문의 인사를 비롯하여 이흡․정육․신유임 등 약 30명에 이르는 영산․함인지역의 선비들의 마중을 받았다.
인근에 숙소를 봐 두었던 이석경 등이 그곳을 옮겨갈 것을 청했으나 촌가에서의 유숙을 마땅찮게 여긴 신지제가 경양대 아래에 자신이 마련한 숙소로 이동할 것을 권하자 정구가 이를 따랐다. 야심한 시각에 숙소에 도착한 일행은 차등을 두어 잠자리를 정했다. 정구와 이석경 두 사람만 신지제가 준비한 숙소에서 잤고, 이후경․이윤우는 인근 촌가에서, 노극홍․이서․이천봉․이육 등은 배 안에서 잤다. 밤에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자 정구는 배 안에서 자는 제자들 걱정에 잠을 설쳤다고 한다.
7월 23일 조반 후 주중의 집기를 건풍(乾風)한 일행은 함안 경내인 두암대(斗巖臺)로 향했다. 창원부사 신지제가 마련한 주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여에서 내린 정구는 잠시 휴식하며 강산의 수려함을 크게 칭상하였다. 함안 대산면 장암리에 위치한 두암대는 조방(趙垹)의 반구정이 건립된 곳인데, 반구정은 곽재우의 망우정과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형세를 취하고 있었다. 임란 때 함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암진(鼎巖津)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조방은 난후 강호에 은거자적하는 가운데 작은 배를 타고 수시로 망우정을 왕래하며 곽재우와 더불어 도의를 강마하며 지냈다고 한다.
소연(小宴)을 마친 일행은 전날 도흥에서 만난 영산․함안 사우들과 작별하는 대신 이석경․후경․도자․도일을 합류시켜 배종그룹을 확대, 강화하였다. 소임을 다하고 돌아가려는 신지제를 억지로 붙잡아 함께 하행길에 오른 일행의 시야에 정자 하나가 들어왔다. 바로 망우정이었다. 곽재우가 망우정에서 사망한 것이 1617년 4월 10일이었고, 현풍 구지산(仇知山)에다 안장된 것이 동년 8월이었으므로 이 때는 채 장례를 치르기도 전이었다.
충의대절의 상징이면서도 결코 순탄치 않은 만년을 보냈던 곽재우의 삶에 비감을 느낀 일행은 술잔을 기울이며 감회를 토로하게 된다. 이에 신지제․노극홍․이윤우․이서․이천봉․이후경․이도자노해․이육 등 수행인원 대부분이 시를 지어 저마다의 심경을 표현했는데, 아쉽게도「봉산욕행록」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은 9수 뿐이다. 이 가운데 신지제와 이후경의 시를 소개하기로 한다.
맑은 강의 햇빛은 흰 모래톱에 일렁이고 晴江日色動明沙
은빛 거품 노젓는 저녁 물결에 날아오르네 銀沫飛空櫓夕波
외람되이 정공이 나그네를 맞았던 그 곳을 찾아노니 猥忝鄭庄賓客地
신선의 배가 뉘라서 이보다 많았을까 仙舟千載較誰多
가을비 막 개이자 강물은 모래톱에 가득차고 秋雨初晴水滿沙
목란으로 만든 배 노를 저어 석양물결에 그치네 蘭舟棹罷夕陽波
물 가운데서 문득 흉금이 상쾌해짐을 깨달으니 中流頓覺胸襟爽
도도한 맑은 흥취는 내 분수 밖의 일이네 淸興陶陶分外多
저녁 무렵 본포에 도착한 일행은 이날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촌가에서 유숙하게 된다.「봉산욕행록」에 입각할 때, 마수원(창녕)⇒기강(영산)⇒도흥(함안)⇒경양대(칠원)⇒두암대(함안)⇒망우정(영산)을 지나오는 동안 정구는 두암대에서 강산의 수려함을 칭송했을 뿐 그 외 별다른 언행이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망우정을 지나면서도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구에 있어 이 지역은 너무도 낯익은 곳이었다. 1586~88년까지 군수를 지냈던 함안은 이른바 정구의 유애처(遺愛處)였고, 후술하겠지만 1607년에는 정월에는 창암(망우정)⇒경양대(칠원)⇒내내(함안)를 거쳐 용화산(함안) 아래 도흥강에서 사우들과 뱃놀이를 하고 돌아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1607년 주유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도흥강, 망우정, 경양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정구의『함주지』를 통해 도흥진의 위치부터 파악해 보기로 한다.
도흥진: 군성의 동북쪽 40리에 있다[代山里]. 강은 두 줄기의 원류가 있는데, 하나는 문경의 주흘산(主屹山), 하나는 삼척의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상주 땅에서 합류, 한 도(道)를 종횡으로 흘러 낙동강[상주], 월파정반[月波亭泮;선산], 무계진[茂溪津;현풍], 울어진[蔚於津;초계]을 이루어 여러 고을의 경계가 되고, 의령에서 정암진(鼎巖津)과 합류하여 기강(岐江)이 되어서는 동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5리 쯤에서 이 나루가 된다. 다시 경양대(景釀臺)를 지나 매포진[買浦津;칠원], 남수정(攬秀亭)․삼랑포[三浪浦;밀양], 황산강[黃山江;양산], 삼차강[三叉江;김해]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즉 도흥진[도흥강․도흥탄]은 낙동강의 본류와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의령 정암진을 통해 유입되는 남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수량이 풍부하여 뱃놀이에 적합하였고, 창암․용화산 등 주변 경관이 매우 수려하여 고려 이래로 이름난 누대들이 흥폐를 반복해 왔다.
정구가 함안의 용화산 아래 도흥강에서 사우들과 뱃놀이를 한 것은 1607년 정월 28일이었다. 선조 말년이자 광해군의 즉위 직전인 이 무렵은 정구 개인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정구는 만년에 이르러 ‘친퇴계적’ 입장을 보다 강화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최근에 발견된 ‘정맥고풍변(正脈高風辨)]’ 등 각종 기록에 따르면, 정구는 정인홍과의 불화와 대북의 정치적 공격이라는 난관 속에서도 조식에 대해 거의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고, 이러한 입장은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심화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물론 정구는 오선생예설, 심경발휘 등의 저술을 통해 이황에 대한 계승의식[嫡傳意識]을 드러낸 바 있고, 1603년(선조36)의 ‘동강만사(東岡輓詞)’에서는 이황을 ‘정맥(正脈)’, 조식을 ‘고풍(高風)’으로 평하는 등 ‘친퇴계적’ 입장을 강조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정구의 인식은 정인홍으로부터 조식에 대한 폄박으로 간주되어 반박을 당하기도 하며, 또 ‘동강만사’에 이황에 대한 비교 우위적인 뉘앙스가 내재되어 있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를 조식에 대한 폄박보다는 퇴계․남명에 대한 양측적 계승의식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정구의 퇴계․남명에 대한 양측적 계승의식은 이른바 ‘영남맹주의식’으로 치환될 수 있다. 정구는 김우옹을 애도한 이듬해인 1604년에는 염락갱장록(濂洛羮墻錄),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와룡암지(臥龍庵志), 경현속록(景賢續錄),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 등을 편차 또는 찬술하고, 도동서원의 건립을 발론했으며, 1605년에는 회연초당을 복설하는 등 저술과 강학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정인홍이 ‘정맥고풍변’을 지어 자신을 공박하던 1606년 가을에는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진주의 덕천서원 및 조식의 묘소, 함양의 남계서원을 심방하고 정여창의 묘소에 치제하는 등 우도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1607년의 영산․함안행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정구가 남행(南行)한 표면적 이유는 사소하지만 긴요한 것이었다. 정구는 함안군수 재직시 묘갈로 쓸 돌[石]을 구해다 도흥강변에 보관해 두었는데 20년 동안이나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 잠수부를 동원해서라도 수색하기 위해 남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계획은 이미 3-4년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는데, 이런 정황은 1604년 성경침에게 보낸 서간에서 확인된다.
듣자하니 새집이 최고운(崔孤雲)의 옛 자취가 있던 옆에 낙성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채서산(蔡西山)이 집을 지은 뜻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당장 말을 몰아 달려가고 싶지만 병든 몸이 세상일에까지 구애되어 있어 조금 기다렸다가 배를 구해 돛을 펼쳐달고 청송사(靑松寺)와 경양대(鏡釀臺:景釀臺) 사이에 이르면 사람을 시켜 내가 왔다고 알리겠습니다. 그 시기가 늦춰질런지 당겨질런지는 지금 미리 기약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07년 정월 27일 정구는 마침내 묵은 계획을 실행하였고, 그 날 영산 창암의 망우정에서 하루를 묵은 뒤 배를 타고 상류로 올라가 칠원 경내인 경양대 및 내내(柰內) 일대를 둘러 본 뒤 도흥촌에서 범주하며 마지막 여흥을 즐겼던 것이다. 이 모임에는 곽재우․박충후(朴忠後:함안군수)․장현광 및 함안(14명)․영산(10명)․창녕(1명)․현풍(1명)․고령(1명)․성주(4명) 등지에서 정구의 문인 또는 종유관계에 있던 35명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성회를 이루었다.
여흥이 무르익자 정구는 이 모임을 특별하게 기념하고 싶어 했다. 이에 함안의 진사 이명고(李明怘)가 명을 받들어 정구․곽재우․박충후․장현광 순으로 제명한 다음 그 나머지는 나이에 따라 성명․자․거주 및 회집한 날자를 직서하였다. ‘용화산하동범록’은 이런 과정을 통해 문헌화 되어 정구의 종자형 안정(安侹)의 집에 갈무리되었다. 이튿날 정구는 서둘러 강을 건너 성주로 돌아갔는데, 안동부사 부임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성대한 회합은 이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620년 경 여헌문인 조임도에 의해 새롭게 환기되면서 한려문하(寒旅門下)의 성사로 각인되어 갔다. 당시 칠원의 장춘사(長春寺)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조임도는 아버지 조식(趙埴)의 급보를 받고 모임에 동참하였고, 이로부터 시종일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의 감회는 <용화산하동범록후서(龍華山下同泛錄後序)>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정선생의 영호(英豪)한 덕망과 장선생의 혼후(渾厚)한 기상과 곽우윤의 탈속(脫俗)한 흉금이야 예전에 이미 들어 존상하고 흥감해 했었지만 오늘처럼 이 분들과 한 시대를 같이 살며 그 면목을 직접 바라보고 한날 한시에 한 배 안에 함께 모인 자리에서 우리 부자가 또한 아름다운 모임에 참여하여 청광(淸光)함을 가까이 하며 지란의 향기에 흠뻑 젖으며 저 광대한 강호를 마음껏 감상하였으니 참으로 일대의 성대한 회집(會集)이요 인간 세상의 성사(盛事)였다.…임도가 동범록에서 느낀 것은 거기에 흠앙(欽仰)할만한 점과 상모(想慕)할만한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흠앙해야 할 것은 2현[한강․여헌]의 덕업과 문장이 아니겠으며, 상모해야 할 것은 곽선옹(郭仙翁)의 기개와 풍절이 아니겠는가?
조임도는 감회 속에는 여헌문인으로서의 ‘自我認識’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현전하는 자료로서는 용화동범의 면면들을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는 실록이 된다.
한편 정구가 정월 27일에 묵었던 망우정은 1602년 곽재우가 건립한 정자인데, 흔히 창암 강정(江亭)으로 불린다. 1601년 영암 적소에서 해배된 그는 잠시 비슬산(琵瑟山)에 은거하다 이 때에 와서 영산 창암에다 정자를 짓고 만년 은거처로 삼았던 것이다. 1607년 정구의 유숙은 낙성 5년만에 이루어진 가객(佳客)의 내방에 다름 아니었고, 이후에도 곽재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생식(生食)하며 신선․도인처럼 살다 1617년 4월 10일 고종하였다.
망우정은 곽재우의 그 비범했던 행적만큼이나 그 전계 과정이 남달랐다. 여느 사람들처럼 곽재우도 자신의 강정이 길이 보존되기를 갈망했지만 그 방법은 사뭇 달랐다. 그는 진정 산수를 즐기고, 또 능히 이것을 수호할 수 있는 ‘어진이[賢]’에게 정자를 전수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이는 곽재우에 있어 망우정은 사물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까지 향유해야 할 사림의 문화공간이었고, 그 이면에는 세월이 흘러 주인이 바뀌어도 자신의 정신만큼은 올곧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곽재우는 두 아들과 여섯 손자를 제쳐두고 이도순(李道純)을 그 적임자로 지목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망우정의 ‘벽진세장화(碧珍世庄化)’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강상에 들어선 정자들 가운데 잘 수호되는 것이 드문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어진이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이 정자를 사물로 여기지 않고 군에게 주는 것은, 군에게 산수를 즐기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 나의 정자를 잘 수호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군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어진이를 얻어 이것을 넘겨주고, 뒷날의 어진이 또한 군과 같은 마음으로 수호할만한 어진이에게 전수한다면 길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곽재우에게 있어 이도순은 전혀 타인은 아니었다. 그는 맏사위 신응(辛膺)의 사위였으므로 곽재우에게는 외손서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사림파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했던 이약동(李約東)의 후손들인 영산의 벽진이씨는 이후경(李厚慶)․도자(道孜)․도유(道由)․도일(道一)․도순(道純)․도보(道輔)․흡(潝) 등 일문 7인이 한강문인이었다. 또한 이들은 봉산욕행 사흘째인 7월 22일 도흥탄에서 정구를 마중하였으며, 이 가운데 이석경․후경․도자․도일은 이후 사양정사로 돌아올 때까지 사문을 배행하였다.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용화산하동범록’(1607)에 나오는 영산지역 참가자 10명의 대부분이 이들이었을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한편 주변에서는 곽재우의 ‘택현전계(擇賢傳繼)’를 기려 정자의 이름을 ‘여현정(與賢亭)’으로 바꿀 것을 권유하며 새 정주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이도순이 단명함으로써 전현(前賢)의 기대와 당부는 퇴색일로에 처하고 만다.
강정(忘憂亭) 주인 곽탄(郭灘)이 큰 잔으로 세잔씩 술을 따르고 아침밥을 지어 제공했다. 탄은 죽은 좌윤 곽상공의 부실에서 난 아들이다. 상공께서 돌아가신 후 강사(江舍)가 오래도록 비게되자 탄이 그 곁에 와서 살면서 수리한 것이 많았으니 그 뜻이 가상하여 주인이라 하였다.
위의 기록은 1635년 조임도가 제향차 신산서원으로 가다 망우정을 들렀을 때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조임도의 표현에 따르면, 이도순의 사망 이후 망우정[여현정]은 주인을 잃고 방치되었고, 이를 보다 못한 서자 곽탄(郭灘)이 간신히 보수,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망우정은 곽재우의 사망 이후 채 20년이 되지 않아 크게 황폐해졌고,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그 터만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첨언할 것은 정구와 곽재우의 관계성이다. 주지하다시피 두 사람은 남명문하의 동문이었고, 용화동범에서도 살펴 본 바와 같이 상호 교계도 매우 두터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구는 1617년 4월 그가 사망했을 때 만사를 지어 조문치 않았고, 그 후 소상․대상에서도 치제하지 않았다. 평소의 관계성을 고려할 때,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정구가 곽재우를 조문․치제하지 않은 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그것은 임해군옥사에 대한 양인의 입장 차이와 관련지어 설명할 길 밖에 없다.
용화동범 이듬해인 1608년 곽재우는 부호군을 사직하는 상소에서 당시 조정의 현안으로 떠오른 임해군(臨海君)의 옥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전은론(全恩論)의 부당성을 맹렬하게 공척하였다.
어찌보면 벼슬을 사양하면서 조정의 현안에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조금의 양보도 없이 극론했던 것이다.「망우선생연보」에는 당시 그의 처사를 두고 춘추토역(春秋討逆)의 의리를 행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문제는 정구가 대표적인 전은론자라는데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임해군의 처리 문제를 두고 정치적 입장 차이를 보이면서 점차 소원해진 것으로 파악되는데, 1617년 7월 23일 정구가 두암대에 올라 강너머 망우정을 바라보고서도 곽재우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은 것과 조임도가 유림의 성사로 평가해마지 않았던 도흥강에서의 동범 사실을『한강연보』에서는 전혀 확인할 수 없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7월 22일 정구가 신지제의 안내를 받아 하룻밤을 묵었던 경양대는 칠원의 우포(雩浦) 서안에 있다. 돌기한 바위 정상에 1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천연의 평탄한 대가 만들어져 있다. 일명 지암담(地巖潭)이라고도 하는데, 그 아래는 수심이 매우 깊어 명주실 한 타래를 풀 수 있을 정도라 한다. 명칭의 유래는 자세하지 않으나 조임도는 경물(景物)이 잘 빚어진 술과 같이 조화롭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해석하였다.
일찍부터 남도 경승의 하나로 주목을 받은 경양대는 고려 무신정권기의 문인 이인로(李仁老)가 정자를 짓고 놀았고, 여말선초에도 이첨(李詹), 변계량 등 수다한 묵객들의 창작의 공간이 되었다.
강 위엔 가을빛이 맑고도 그윽한데 江上秋光淸且幽
원융(元戎)이 한가한 날에 배를 띄웠네 元戎暇日泛蘭舟
물은 쪽빛이요 모래는 눈결 같으며 水如藍色沙如雪
산은 병풍 같고 술은 기름 같아라 山似屛風酒似油
석벽(石壁)은 아침저녁 물결에 깎이고 石壁減磨朝暮浪
피리 소리는 고금의 시름을 깨뜨리네 笛聲吹破古今愁
이 중에 네 가지 일 저마다 흠이 없어 此中四事俱無缺
마음껏 취해서 촛불 잡고 논다한들 어떠하리 爛醉何妨秉燭遊
뿐만 아니라 지역 출신의 주세붕은 경양대를 ‘구성8경(龜城八景)’의 하나로 꼽았고, 신몽삼(申夢參)의 ‘강거21영(江居二十一詠)’에서도 경양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도흥강을 일대를 수시로 주유했던 조임도의『간송집』에는 경양대와 그 주변의 경관을 노래한 시가 10수 가까이 수록되어 있다.
24일. 맑음. 먼동이 틀 때 배를 출발시켰다. 거쳐 온 관내의 경양대 등 여러 곳을 돌아보니 마치 신선의 경계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엊그제는 이곳을 밤에 지나치는 바람에 등람치를 못했으니 큰 흠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윤우의 표현대로 정구 일행은 경양대에 도착한 것은 22일 밤이었고, 그 다음날은 다른 일정에 쫒겨 경양대와 그 주변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지만 칠원 지역에서도 정구의 자취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내내(柰內)의 형세를 언급하자면, 동서남쪽은 모두 산이고, 그 북쪽은 큰 강이다. 또 층암절벽이 강을 따라 몇 리에 걸쳐 병풍처럼 연립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이하고 빼어나기로 이름난 곳은 노어암(鱸魚巖)과 경양대인데, 이은대(李銀臺) 인로(仁老)가 일찍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 내내의 북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천 길의 깍아지른 벼랑이 강에 임하여 우뚝 솟아 있으며, 자라가 껍질 속에 오그려서 활처럼 등을 드러내고 있는 듯한 곳은 곧 고인이 된 처사 주익창(周益昌)의 구기(舊基)인데, 한강 선생께서 이곳에 살고자 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 시기와 주거의 구체적 형태는 알 수 없지만 한 때나마 정구는 주익창의 구기를 입수하여 칠원 땅에서 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익창은 주박(周博)의 3자이며, 주세붕의 손자이다. 임란 때 지리산으로 피난했다가 거기서 죽었는데, 부인 이씨도 지아비를 따라 강물에 뛰어 들어 죽음으로써 후일 열녀 정문이 내렸다.
이 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봉산욕행 당시 정구는 창녕․영산․함안․칠원 경내의 마수원․기강․도흥탄․경양대․두암대․망우정을 경유하면서 한 수의 시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흔적과 자취는 여로의 곳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3) 밀양․김해․양산지역 -남수정․황산․삼차강․신산서원․하룡당-
7월 24일 이른 새벽 본포를 출발한 정구 일행은 공명헌(空明軒), 남수정(攬秀亭)을 지나 중로에 밀양부사 이홍사(李弘嗣), 경상도사 안숙(安璹)과 합류한 뒤 미례(彌禮), 삼랑포(三浪浦)를 거쳐 저녁 무렵 양산에 도착하여 황산역(黃山驛)에서 묵었다.
이 날은 다른 날에 비해 내방 인사가 크게 줄어 여정은 한결 한산하였지만 정구에게는 매우 뜻깊은 하루였다. 어렸을 때 배운 오건(吳健)의 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침부터 소식(素食)하였고, 밀양부사 이홍사가 마련한 주연도 사양했다. 대신 그는 두 번이나 배를 세우는 여유를 보였고, 산천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찬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처음 배를 댄 곳은 밀양땅 미례(彌禮)였는데, 안도․이홍사가 이 일대의 경관을 자랑한 때문이었다.
뇌진(磊津) 인근인 미례는 멱례(覓禮) 또는 명례(明禮)로 별칭되며, 산수가 수려할 뿐만 아니라 곡창지대로도 유명했다. 본래 밀양부의 속현 수산현의 경내였던 이곳에는 1450년 밀양부사 이백상(李伯常)이 건립한 덕민정이 있었다. 총 6칸 규모로 건립된 덕민정은 조운과 물산의 요충지였던 수산현의 객사로서 중종연간 남수정이 건립되기까지 현의 대표적 공해이자 명승으로 자리하였다.
이런 가운데 1538년(중종33) 밀양부사 장적(張籍)이 덕민정 서남쪽에 정자를 새로이 건립하였고, 1539년 신임 부사로 부임한 어득강(魚得江)이 단청을 입힌 뒤 남수정이라 명명하였다. 그후 어득강을 이어 부사로 부임한 박세후(朴世垕)는 1542년 영남루를 중수하고 남은 재와(材瓦)를 활용하여 남수정을 수리하는 한편 그 서북쪽에 10칸 규모의 현사(縣舍)를 증축하였다.
장적․어득강․박세후의 노력에 의해 낙강의 동안(東岸)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남수정의 빼어난 경관은 1543년 주세붕의 기문을 통해 더욱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는 ‘남수정기(攬秀亭記)’에서 낙강 및 낙강으로 유입되는 5대 지강(支江)에서 빼어나기로 이름난 칠원의 매포루(買浦樓)․경양대(景釀臺), 선산의 월파정(月波亭), 상주의 황가정(黃家亭)․관수루(觀水樓)․한연당(閒燕堂), 양산의 임경대(臨鏡臺), 김해의 열친정(悅親亭), 의령의 십완당(十玩堂), 진주의 명홍정(冥鴻亭)․촉석루(矗石樓), 산음의 환아정(換鵝亭), 영천의 명원루(明遠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양산의 쌍벽루(雙碧樓) 등 17개의 누(樓)․정(亭)․당(堂)․대(臺) 중에서도 남수정을 최고로 꼽았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덕민정과 남수정은 임란 때 화소되어 구경할 수는 없었지만 언덕에 올라 강 아래를 내려 본 정구는 남수정의 구기를 비롯한 미례 강산의 경관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이후 안숙․이홍사와 작별한 정구는 삼랑포에 이르러 다시 하선하여 주변을 돌아본 뒤에 미시(未時) 경에 양산땅에 들어선 다음 저녁 무렵 황산(黃山)에 도착, 인근 역촌으로 이동하여 유숙하였다. 이날 저녁 정구는 수행 문인들에게 당초 일정에는 없었던 신산서원 봉심 의사를 전달하였다.
25일. 맑음. 새벽에 배를 움직여 산산(蒜山) 앞 여울에서 아침을 먹었다. 김해부사 조계명이 아이를 보내 문안했다. 삼차강(三叉江) 앞 여울을 지나자 부사가 사람과 말을 정제(整齊)하여 선생을 맞았다. 선생께서는 서원에 들어가서는 성정당(誠正堂)에서 휴식을 취했다. 종자(從者)가 먼저 사당에 들어가 향을 피운 뒤 두 번 절하고 나왔다. 조금 있다가 선생께서 부축을 받아 묘정(廟庭)에 들어가서는 부복하여 절을 올린 뒤에 다시금 성정당에서 쉬었다. 선생께서는 정묘년(1567)에 산해정에서 남명선생을 뵌 지 지금 51년이 되었는데, 묘실(廟室)이 위치한 자리가 산해정의 옛 터라고 한다. 부사가 들어가 배알하여 잠시 다례(茶禮)를 행했다. 선생은 견여를 배로 내려오셨고, 부사가 하룡당(下龍塘)까지 호송했다.
7월 25일 정구는 황산을 출발 산산진(蒜山津)⇒삼차강(三叉江)을 지나 신어산(神魚山) 아래 신산서원을 배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해부사로 재직하던 조식의 손자 조계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신어산을 등지고 남해를 바라보는 구도로 건립된 산해정은 삼가의 鷄伏堂․뇌룡사(雷龍舍), 진주 덕산의 산천재(山天齋)와 더불어 조식의 대표적인 강학처였다. 특히 산해정은 조식 문하의 선진들이 왕래․강학한 공간이란 점에서 남명학파의 산실이라 할 수 있었다. 위의 기록처럼 정구는 1566-67년 경에 산해정에서 유학하였고, 무려 51년 만에 이 곳을 다시 찾았지만 자신이 시강(侍講)했던 산해정은 이미 신산서원으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정구는 1572년 조식의 사망에서부터 1606년 덕천서원과 조식의 묘소를 알묘․치제하기까지 만사 1편, 제문 2편을 통해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고 덕을 기렸고, 1617년에는 ‘남명종사소’의 소문을 지어 학덕을 크게 칭송한 바 있었다. 비록 조식은 덕산에서 고종하였지만 정구의 만제(挽祭) 속에 산해정에서의 감회가 추억이 녹아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 가운데 1576년 제문과 1606년 제문의 핵심어는 각기 ‘청통쇄락(淸通灑落)과 ‘성덕고풍(盛德高風)’이었고, 1617년의 ‘남명종사소문’에서는 성운이 조식에 대해 표현했던 ‘고억(高嶷)’을 ‘회확(恢廓)’으로, 1576년 제문에서 표현했던 ‘청통(淸通)’을 ‘명통(明通)’으로 바꾸게 된다. 정구 주변의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수사적인 수정이 아니라 조식에 대한 경모심의 심화 과정으로 이해하였는데, 그런 점은 1617년 남명종사 요청시 택소의 자격으로 정구의 소본을 채택했던 하증의 언급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한강 선생을 관찰해 본다면, 그 만년에 견식은 더욱 높아지고 덕은 더욱 진보하셨으니 우리 선생을 더욱 존중하는 것은 學記라는 책 때문이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병자년(1576) 제문에는, ‘청통쇄락(淸通灑落)’이라 하셨고, 병오년(1606) 제문에는 ‘성덕고풍(盛德高風)’이라 하였는데, 혹자가 ‘고풍(高風)’의 의미를 물으니 안자(顔子)의 누항고풍(陋巷高風)의 이야기로 답해 주셨다. 또 유가야옥(遊伽倻錄)에서, ‘남쪽으로 두류(지리산)를 바라본다(南望頭流)’라고 하셨는데, 두류는 정선생(鄭汝昌)께서 어렸을 때 덕을 쌓으시고 조선생께서 만년에 은둔하시며 고상한 뜻을 기르신 곳이라 하였으니, 비록 두 분 사이에도 경중과 차등이 없을 수는 없는 듯하다.
정사년(1617) 가을에 남명선생의 문묘배향을 청하는 상소에, ‘타고난 자질 높고도 멀며, 기개와 도량은 넓고 크시다(天資迢邁氣宇恢廓)’라는 구절이 있는데 ‘회확(恢廓)’ 두 글자는 오초려(吳草廬)가 주자를 기리는 말 가운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래 대곡(大谷) 성운(成運) 선생이 ‘고억(高嶷)’이라 칭한 바를 바꾼 것이다. 또한, ‘소자가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이상(泥像)인 것처럼 보였으나 사람들과 마주하시면 온통 환하고 투명하고 깨끗한 기운을 발하셨다(小子以望之如泥塑然接人渾是明通灑落之氣)’ 라고 하신 것 중에서 ‘여니소연(如泥塑然)’ 네 글자는 주공섬(朱公掞)이 정명도(程明道) 선생을 지칭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명통(明通)’ 두 글자는 통서(通書) 중에 ‘배워서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밝아 통하게 되고 공변되어 널리 펼치면 성인에 거의 가까워질 수 있다(明通公溥其庶矣乎)’라고 대답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래 병자년 제문에서는 ‘청통(淸通)’이라고 썼던 것을 바꾼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고억(高嶷)’ 두 글자로는 도를 체득한 기개와 도량을 형상화하기에 부족하고 ‘청(淸)’이라는 한 글자는 성(聖)을 배우는 무욕(無欲)함에 치우쳤기 때문에 ‘회확(恢廓)’으로 ‘고억(高嶷)’을 바꾸고 ‘명통(明通)’으로 ‘청통(淸通)’을 바꾼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 두 글자를 고쳐 바꾸는 사이에서 한강 선생의 마음을 알 수 있으니, 초연히 홀로 깨달아 바꿀 문자의 유래를 궁구하였으니 그 고치는 전후에 경중의 분명함이 십, 백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이오 만이나 되니 가히 선생의 존귀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래 인용문에 따르면, 정구가 소본을 지어 차명으로 송고한 것은 1617년 8월 경이었다. 이 해 8월은 정구가 산해정[신산서원]을 다녀간 직후로 동래 온정에서 온욕에 열중하던 시기였다.
1617년 가을 8월, 남명 선생의 문묘종사를 청하기 위한 소회가 고령에서 열리니 모인 이가 수백 명이었다. 정선생께서 상소문을 지으시고는 진사 이서(李)의 이름으로 보내셨는데 외람되게도 내가 택소를 맡아 선생의 상소문을 뽑게 되었다.
더구나 정구가 당시 ‘남명종사소’의 수론자(首論者)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고려할 그의 신산서원 행은 그 의미가 자못 특별하다.
(4) 동래․부산 -온정․몰운대-
한편 조계명과 작별한 정구 일행은 온정을 20리 남겨두고 동래부사 황여일이 보낸 영접단과 합류하였다. 비록 날은 저물었지만 정구는 온정으로 직행하려 했으나 밤길에 낭패를 볼 것을 염려한 수행제자들의 거듭된 요청으로 하룡당 인근의 촌가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이튿날인 7월 26일 정구는 말과 견여를 번갈아 가며 기울현을 넘어 정오 무렵에 동래 온정에 도착하였다. 이로부터 정구는 8월 26일 동래를 떠나기까지 꼬박 한 달을 이 곳에 머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구와 그 일행은 동래부사 황여일을 비롯한 인근의 지방관 및 선비들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이미 봄부터 정구의 욕행 계획을 알고 있었던 황여일은 온정을 새로이 정비하고 가옥을 건립하는 등 일행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오시에 온정의 욕소에 도착했다. 주백(主伯:동래부사)은 지난 봄에 이미 선생께서 이곳에 와서 목욕하실 것이라는 말을 듣고 2실(室)1청(廳) 규모의 초옥을 별도로 건립하였는데, 매우 정결했다. 지금 선생을 따라 오는 자들이 많은 것을 알고는 다시 임시가옥 2간을 지어 제자들이 거처할 곳으로 삼았으니, 그 정성을 족히 알 수 있었다.
동래 읍치에서 약 5리 떨어져 있었던 온정은 그 역사가 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이 뜨겁고 효험이 좋아 신라왕이 여러 번 다녀갔고, 그 때 구리기둥을 세운 구멍이 남아 있다고 한다. 동래 온정의 명성에 대해서는 이미 성현(成俔)이『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언급한 바 있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6도마다 모두 온정이 있으나, 경기·전라도만 없다. …동래 온천이 가장 좋은데, 마치 비단결 같은 샘물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오는데, 물을 끌어들여 곡(斛)에다 받아둔다. 따뜻한 것이 끓는 것과 같아서 마실 수도 있고 데울 수도 있다. 일본인으로 우리나라에 오는 자는 반드시 목욕을 하고 가려 하므로, 얼룩옷[班衣]을 입은 사람들의 왕래가 번번하여 주현(州縣)은 그 괴로움이 많았다.
국중 최고의 온정이란 명성에 걸맞게 동래 온정에는 양녕대군, 광평대군의 부인, 임영대군, 연창위 공주 등 왕실 및 훈신들이 즐겨 찾았고, 이규보(李奎報)․정포(鄭誧)․박효수(朴孝修)․권제(權踶)․김종직 등 문인들의 제영도 많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성현이 익히 지적한 바와 같이 왜인들이 매우 좋아하여 그 폐단도 적지 않게 지적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래 온정은 임란 당시에는 격전지가 되어 1598년 명나라 장수 마귀와 조선의 김응서 등이 이 주변에 주둔한 왜군을 격파한 일도 있었다.
정구가 동래 온정을 찾은 1617년은 한 때 온정이 피로 물든 지 20년이 지난 뒤였고, 그 세월만큼 온정도 크게 정비되어 있었다.「봉산욕행록」에 기록된 당시 온정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정(井) 안팎에는 석감(石龕)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왕이 만든 것이라 한다. 하나의 감에는 5-6명씩 들어갈 수 있고, 샘은 위쪽의 석공에서 흘러나오는데, 물이 매우 뜨거워 손과 발을 함부로 담글 수가 없다.
한달 남짓한 온정 생활은 안온(安穩)하면서도 분주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정구는 심기가 불평(不平)할 경우가 아니면 거의 매일 목욕 및 복약을 반복하며 치병하였다. 더러는 침을 맞기도 했다. 한달 동안 목욕한 횟수는 7월 26일 온천수를 받아 세척한 것을 포함하여 총 41회였다. 이 가운데 황여일이 특별히 준비한 목탕자에서 목욕한 것이 3회였고, 외석정과 내석정에서 목욕한 것이 각기 16회와 21회였다.
거의 매일 인근 지방관 또는 읍인들이 해산물, 쌀, 찬 및 주과를 보내왔고, 일반 내방객들의 문안 행렬도 그칠새가 없었지만 정구는 7월 28일 원천수가 용출되는 곳을 몸소 답사키도 했다. 7월 29일에는 경상감사가 연로 군현에 응접을 지시한 관문이 도착했고, 7월 30일에는 수사가 조보(朝報) 및 도목정사(都目政事)의 결과를 보내와 조정의 동정을 살펴볼 기회도 있었다.
한편 정구는 학술활동 및 사문지사에도 열정을 보여 7월 27일에는 이윤우에게 ‘퇴계선생예의답문’의 대목을 정사케 했고, 8월 1일에는 ‘오복연혁도’를 강론했으며, 8월 3일에는 ‘오복연혁도’와 ‘퇴계선생예의답문’의 제목을 강정하였으며, 8월 7일에는 ‘남명종사소’의 진행 상황을 보고 받고 답서를 보냈으며, 8월 8일에는 이윤유에게 ‘오복연혁도’의 정사를 명했다.
동래를 출발하기 이틀 전인 8월 24일 이후경․이서․이천봉․이윤우․노극홍이 수사와 함께 몰운대(沒雲臺)를 유람하기 위해 부산으로 떠났다. 동래에 온 지 근 한 달만의 나들이였다.
해운(海雲)․신선(神仙)․의상(義湘)․오륜(五倫)이기(二妓)․태종대(太宗臺) 등과 함께 부산8대로 불리는 몰운대는 다대포의 서남단에 위치한 경승로 해류의 영향으로 짙은 안개가 끼어 시야가 자주 가려지기 때문에 몰운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견성(甄城)에 올라 바다를 관람한 뒤 하루를 묵고 8월 25일 낮에 온정으로 돌아왔다. 남해의 경승이었던 몰운대는 정유길, 황준량, 구봉령, 홍성민, 김상헌, 신익황, 이인상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제영이 전해오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구의 수행문인들은 몰운대와 관련된 시를 남기지 않았다. 8월 25일 오후 정구는 세 차례의 목욕을 끝으로 동래 온정에서의 일정을 사실상 마무리하게 된다.
(5) 경주․영천․하양․경산지역 -통도사․선도관․도천․이수․식송정․소유정-
8월 26일 정구는 작별의 아쉬움 때문인지 아침부터 과음을 했고, 동래를 떠나 10리 쯤에서 취기로 인해 가마를 세우고 잠기 쉬어 가기도 했다. 송정을 거쳐 저녁에 양산에 도착한 일행은 촌가에서 묵었다.
이튿날 일행은 통도사로 가던 도중 1614년(광해군6) 정인홍의 무함으로 양산에 유배된 전적 임회(林檜)를 만났고, 황산강 상류에서 점심을 먹은 뒤 무풍교(無風橋)에 도착, 양산군수의 영접을 받았다. 정구가 잠시 가마를 세운 무풍교 일대는 가야산의 홍류동(紅流洞)에 비견되는 명승지였다. 아래는 1579년 정구가 가야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행문인 ‘유가야산록’의 일부인데, 이를 통해 무풍교의 아름다움을 간접 체험해보기로 한다.
계곡의 물줄기가 어지러운 바위 틈에서 쏟아져 시끄럽게 흐르는데, 마치 천둥이 치듯 쾅쾅 울리고 밝은 대낮에 날리는 물방울이 숲속의 나무다리에 흩뿌리는가 하면, 혹은 한 굽이에 머물러 빙빙 돌며 흐르는데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 산봉우리는 드높고 골짜기는 깊은데, 소나무와 전나무가 울창하고 바위 비탈이 웅장하였다. 시내의 길이는 8-9리 정도가 되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위치가 바뀔 때마다 맑고 기이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정말 아름다운 경치였다.
무풍교에서 박민수․손항 등과 수작을 마친 정구는 통도사 서상실(西上室)에 거처를 정했고, 이날 저녁 양산군수는 법당에서 연포회(軟泡會)를 베풀며 융숭하게 대접했다.
28일 정구는 견여를 타고 절 밖으로 나가 천석을 돌아보고는 관음전(觀音殿)으로 올라가 도사 안숙이 마련한 주연에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봉산욕행 최초의 동화록(同話錄)이 작성되었다. 담화를 마친 정구가 서상실로 내려왔을 때 경주부윤 윤효전이 사람을 보내 문안하자 정구는 편지로써 이에 답했다.
29일 정구는 감기로 인해 동별당(東別堂)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종일 신음하며 보냈다. 이에 양산출신의 한강문인 최흥국 등이 술자리와 연포회를 마련하는 등 성의를 다하자 정구는 최흥국(崔興國)에게 시 한수를 증정하였다. 이것이 봉산욕행의 전과정에서 정구가 지은 유일한 시작인데,『한강집』에는 빠져 있다.
남계에도 와룡연이 있으니 南溪亦有臥龍淵
양보음 부르며 와서 옛 현인을 추모하네 梁甫吟來慕古賢
애석하여라 상자 속에 이름다운 옥이 감추어져 있으니 可惜櫝中藏美玉
일생의 영욕은 어디로부터 말미암는 것인가 一生榮辱肯何緣
솔개 날고 물고기 뜀은 절로 천연스러움이고 鳶飛魚躍自天然
한 줄기 참된 연원은 오직 우리 선생일세 一脈眞源獨我賢
늘그막에 도리어 강에 막혀있음을 안타까워하니 白首還嗟江渭阻
정다운 눈빛으로 마주함은 아득하여 찾을 길이 없구나 靑眸相對杳難緣
30일 통도사를 출발하여 무풍교⇒언양을 거쳐 저녁에 경주 전동(錢洞)에 도착하여 문인 최동언의 집에서 묵은 뒤 9월 1일 점심 직전에 경주의 노곡천(奴谷川)에서 경주부윤 윤효전과 회동하게 된다. 이어 정구는 포석정으로 들어가 유상곡수의 유지를 보고 비감을 느꼈고, 경주부윤이 마련한 주연에서는 주변에서 청한 취적(吹笛)조차도 멈추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두 번째 동화록인 ‘회고록(懷古錄)’이 만들어졌다.
이후 정구는 윤효전과 함께 반월성(半月城)⇒계림(鷄林)⇒첨성대(瞻星臺)를 거쳐 봉황대(鳳凰臺)에 올라 주연을 가진 뒤 황혼 무렵에는 촌가의 현등(懸燈)을 구경하고는 선도관(仙桃觀)으로 들어가 또 하루를 묵었다. 경주부 관아 내에 위치한 선도관은 윤효전이 부모를 모시기 위해 새로이 지은 건물이었다. 바로 이 곳에서 윤효전은 정구에게 제자의 예를 행함으로써 ‘한강학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9월 2일. 이 날 정구는 윤효전의 권유로 나악(羅樂)을 관람하게 된다. 원래 정구는 음악이나 가무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래는 봉산욕행에도 동행했던 문인 이천봉이 인식했던 정구의 음악관이다.
선생은 성품이 음악(絲竹)을 즐기지 않았는데, 천봉이 40년간 문하를 출입하는 동안 한 번도 노래하고 춤추는 때를 보지 못했다.
평소의 음악관이 이러했음에도 정구는 나악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8월 23일에는 수사가 마련한 주연에서는 여종들의 탄금․창가를, 9월 1일 봉황대에서는 취적(吹笛)을 즐기는 등 다소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후 정구는 모량(牟良)에서 점심을 먹고 아화역(阿火驛)을 지나 저녁에는 영천 문인 정담(鄭湛)의 집에서 투숙하였다. 당시 정구가 유숙한 곳은 정담이 도천에 건립한 도천재(道川齋)의 극복당(克復堂)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정구는 밤늦게까지 윤효전과 강론을 벌였다.
9월 3일 윤효전과 작별한 정구가 영천의 이수(二水) 가에 이르자 정담을 비롯한 영천지역 문인들이 천변에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모든 준비는 임고서원에서 주관한 것이었다. 이에 정구는 이 날의 회화를 ‘이수동화록(二水同話錄)’으로 명하였고, 정담․박사신(朴士愼)․박점(朴點)․박돈(朴暾)정사물(鄭四勿)․김취려(金就礪) 등 총 51명이 제명되었다.
저녁에 하양에 도착하여 김사행(金士行)의 식송정(植松亭)에 거처를 정한 정구는 약 30명에 이르는 인사들이 인사를 받았고, 하양현감 채득(蔡得)은 관비로 차와 저녁을 제공했다.
9월 4일 정구 일행이 경산의 반야촌(般若村)을 거쳐 소유정(小有亭)에 이르자 경상감사 윤훤(尹暄)이 미리 와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훤은 이미 연로에 공문을 발송하여 여행에 따른 각종 편의를 제공해 준 바 있었고, 이 날은 직접 마중까지 나오는 후의를 베풀었던 것이다. 소유정에서 감사와 수작을 마친 정구는 저물녁에 사수촌(泗水村)으로 돌아감으로써 전후 45일에 걸친 긴 여정을 모두 마무리하게 된다.
정구의 마지막 경유지였던 소유정은 금호강변에 위치한 유서 깊은 정자였다. 당시의 정주는 채선길(蔡先吉)이었지만 원래 소유정은 그의 아버지 채응린(蔡應麟)이 건립한 것이었다. 문예(文藝)가 숙성했고, 기우(氣宇)가 호매(豪邁)했으며, 살림살이가 넉넉했던 채응린은 일생 강호에 은거하여 시주(詩酒)와 연악(宴樂)으로 삶을 달관했던 처사풍의 인물이었다.
그는 1561년(명종16) 경 금호강변에 압로정(狎鷺亭)이라 불리는 더없이 화려한 정자를 지었는데, 세사를 멀리하고 산수 그리고 벗과 더불어 종로(終老)코자 했던 그의 심사는 압로정의 원운에 잘 표현되어 있었다.
산가엔 푸른 나무 산 앞엔 강물이며 山邊碧樹山前水
물 밖엔 푸른 들 물 위엔 집이네 水外靑郊水上家
산수를 품평하는 밖에 다른 일이 없으니 評水平山無外事
평생토록 정겨운 벗들 찾아주길 바랄 뿐 平生只願故人過
또한 그는 만년에 압로정의 남록을 개척하여 3간의 정자를 새로 지었는데, 이것이 곧 소유정이다. 소유정은 지세가 높아 압로정보다 훨씬 더 시원스런 맛이 있었고, 그 사이 사이에 심어진 창송(蒼松) 수십 그루는 무성한 그늘을 드리웠다고 한다. 이에 채응린은 늘 압로정과 소유정 사이를 산책하는 한편 때로는 달밤에 배를 띄우고, 때로는 물가에서 낚시대를 드리우며 강호의 즐거움을 만끽하다 1584년(선조17)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8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자는 폐허화 되었고, 그 터마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이에 1609년 4자 채선길이 형제들과 상의하여 정기를 되찾은 다음 정자를 중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건물의 제도에는 약간의 증감이 있었으나 편액은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압로정은 재정상의 이유로 이 때 중수되지 못한 채 자손들의 과제로 넘겨지게 되었다.
비록 정구는 소유정이 중수된 지 8년만에 방문하고서도 시 한 수를 남기지 않았지만 이후 소유정은 이준․김봉조․서사원․손처눌․이윤우․조형도․이돈 등 명사들의 방문과 창수화답이 끊이지 않게 된다.
바다 밖에 진경이 있는 줄이야 알았지만 海外徒聞眞境在
이 세상에도 오히려 지선의 집이 있다네 世間還有地仙家
주인은 선인의 뜻을 이어줄 알아 主人能繼先人志
매일같이 친구가 와도 싫은 기색이 없네 不厭賓朋日日過
이렇듯 소유정은 주변의 수려한 경관에 주인의 후한 인심이 더해져 소인․묵객들의 내방을 재촉하게 됨으로써 금호강 명소로서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