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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술과 미학(미학사의 한계극복 - 학문론적 해명)
이상의 '존재론적 이유'에 덧붙여, 이번에는 하이데거가 예술을 논하는 '학문론적 이유'에 초점을 맞추어보기로 하자.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예술에 대한 미학적 접근의 한계, 그 한계의 극복을 위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논문』의 후기에서 미학에 대한 은근한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전문적 고찰로서의 미학은 예술 작품을 "하나의 대상으로, 특히 아이스테시스의 대상, 즉 넓은 의미에서의 감각적 지각적 대상으로" 받아들여왔으며, 이러한 지각이 오늘날 '체험'으로서 예술의 향수에서나 창작에서나 결정적 원천이 되어 있는데, 이 체험이라는 것이 "예술을 사멸시키는 요소가 아닐까"하고 그는 강한 의구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는 후기 사유의 원천인 그의 제2의 주저 『철학에의 기여』에서부터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미학의 극복이라는 과제와 가장 밀접한 연관에서 있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Bp503). 그런데 '예술의 본질을 주객 연관의 지평에서 미학적으로 규정하는것'은 형이상학에 속한다고 그는 본다. 그리고 미학이 "존재자를 대상적으로 표상 가능한 것으로 보는 특정한 존재자의 파악"(BT)503)인 점에서도 그것은 형이상학에 속한다. 그런 만큼, 미학의 극복이라는 과제는 "형이상학 그 자체와의 역사적 대결"로 성격지워진다. 미학의 극복은 이렇게 형이상학의 극복과 연결되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극복이란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의 우위를 존재자에 대한 모든 '관념적', '인과적', '선험적', '변증법적' 설명으로부터 해방"(BPS04)하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것이 그의 미학 비판의 근본 취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취지를 확고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 미학이 어떤 것인지를, 아니 적어도 하이데거가 이 미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하이데거는 『니체I』제1장 『예술로서의 권력에의 의지』중 특히 제12절 ~ 제25절에 걸쳐 그의 '미학론'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미학은 논리학, 윤리학과 대응되는 것으로, "예술과 미에 대한 성찰"이다. 그것은 "아이스테티케 에피스테메, 즉 인간의 감성적 태도, 감수적 내지 감정적 태도에 관한 지, 그리고 그 태도를 규정하는 것에 관한 지"라고 이해된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인간의 감각과 그 감각에 관계되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감각, 즉 미학을 규정하는 것 그리고 인간의 감각 작용에 관계되는 것은 미다. ‥‥‥ 미라는 것이 ‥‥‥ 미학의 대상이다"(제12절)라고 그는 밝힌다. 따라서 미학은 "미와 관계된 인간의 감정 상태" 및 "인간의 감정 상태와 연관돼 있는 한에서의 미"를 고찰하는 것이다. 미 자체는 "자기를 내보여서 인간에게 그러한 감정 상태를 유발시키는 것"에 다름아니다(Ni I192). 다시 말해 미학은 "예술에 대한 성찰"로서, "예술에서 표현된 미에 대한 인간의 감정적 관계"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NiI193).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학에서는 예술이 "인간의 감정 상태에 소급해서" 경험되고 규정된다(Nil 114)는 것이다. 미에 대한 인간의 감정적 관계, '예술 및 그 산물에 대한 관계'는 '산출 내지 창조'의 형태로도, '향수 내지 감상'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미의 산출과 향유가 여기 - 인간의 감정 상태 - 에서부터 발원하며 거기에 속한다"(NiI114).
여기서 하이데거가 놓치지 않고 주목하는 것은 '주-객 관계'다. "예술의 미학적 고찰에서, 예술 작품은 산출된 예술미로서 규정되는데, 그런 한에서 감정 상태와의 관계에서 말하자면, 작품이 그 담지자, 유발자로서 표상되어 있는 셈이다. 예술 작품은 '주체'에 대한 하나의 '객체'로서 정립되고 있다. 주체-객체의 관계, 그것도 감정을 매개로 한 그것이, 예술 작품의 고찰에서 규범적이다. 작품은 그 체험에 향해진 측면에서, 대상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NiI193). 인간의 감정을 중심에 두고 작품을 하나의 객체-대상으로 바라보는 미학에서는 비은닉성과 드러냄의 현상이 간과된다. 미학이 주객 연관의 토대 위에 서있는 한, 이 미학에게는 예술을, 예술 작품을, 예술가적 현출을, 비은닉성의 발생에서부터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된다. 하이데거는 '역사 형성적인 예술'을 기대한다. 그런데 미학이 예술을 주도하는 한, 그 가능성은 닫혀지고 만다. "과연 한 시대가 미학에 사로잡혀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지, 한 시대가 과연 미학적인 태도에서 예술을 대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지 하는 사실이 실제로, 이러한 시대에 예술이 역사형성적이거나 아니면 예술부재이거나 하는 그 양식과 방식에 결정적이다" 라고 그는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학의 뿌리는 의외로 깊다. 물론 그 명칭은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통용된 비교적 '새로운' 것이지만, 예술작품이 "아이스테시스, 즉 넓은 의미의 감각적 지각적 대상"으로 이햐되었음을 감안하면 이 이름은 철학의 초창기부터 즉,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리스 이래로 예술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방식을 지칭해온 '오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과 미를, 향수자와 창작자의 감정 상태로부터 물어나가는 물음의 방식은 오래된 것으로, 서양의 사유에서의 예술과 미에 대한 성찰이 개시되는 것과 동시였다. 에술과 미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애당초 미의 미학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다" 라고까지 그는 말한다. 이런 관계로 하이데거는 미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그 문제점을 짚어본다. 그는 6개 항목의 '기본적 사실'을 지적해낸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1)미학의 이전 - "위대한 그리스의 예술은, 그것에 호응하는 사색적 개념적인 예술에의 성찰 없이 끝났다." 이렇게 그는 먼저 사색적 성찰의 결여를 말한다. 단 이 결여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체험의 신비'같은 것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근원적으로 배양된 명석한 지와, 지에의 열렬한 정열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청징한 지로 해서 어떠한 '미학'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그는 평가한다.
2)미학의 시작 - "그리스인들에게서 미학이 시작되는 것은 위대한 예술이, ‥‥‥‥ 그리고 위대한 철학이 종언에 이르는 바로 그 순간에서다." 이때 향후의 예술론을 방향 짓는 근본 개념들이 주조된다. 그것은 두 가지로 1)질료-형식이라는 개념, 그리고 2)'예술, 즉 테크네'라는 개념이다. 이데아와 형상을 거쳐 질료-형식이 형성되는 이 과정에서 미라는 것이 등장한다. 그런데 '질료와 형식이라는 구별은 용구(실용품)의 제작에 관한 영역에서 생겨난 것'이며 '본래는 협의의 예술, 즉 미적 예술과 그 작품의 영역에서 얻어진 것이 아리라 단순히 그 영역으로 전용된 것'이기 때문에 이 개념들을 예술에 대해 사용하는 것은 '의문'이다. 그리고 테크네는 '산출의 방식'을 나타내는 후대의 '기술'과 달리 '수공업적 제작'을 의미한다. 테크네는 퓌시스와 연관된다. 그런데 "질료와 형식의 구별이 확립되자, 이제 테크네의 본질은 특정의 방향성을 가지고 해석되게 되어, 근원적인 폭넓은 의의를 상실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는 테크네를 주목한다. 테크네는 '지의 한 형태', '일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인간적 산출 능력'으로서의 '예술'이다. 테크네란 "존재자에 관한 하나의 지", "존재의 한가운데에서의 일체의 인간적 발양을 지탱하고 이끄는 지", "인간적 지 그 자체"를 의미하며, 이로부터 파생해서 "이미 생육하고 있는 존재자(퓌시스)에 덧붙여, 그리고 이것을 기초로 해서, 실용품이나 예술 작품 등 다른 존재자가 제작되고 생산된다는 형태로의 존재자와의 대결 내지는 극복을 이끌고 근거 짓는 바의 지", "생산을 지적으로 이끈다는 방식으로의 존재자 그 자체의개시", "이러한 방책과 산출을 이끄는 지"를 의미하게 된다. 이 테크네가 이윽고 '아름다운 사물과 그 표상의 생산'에 관련되면서, 예술에 대한 성찰도 '미' 및 '미학'과 관계하게 된다. 이렇게 예술을 테크네로 보게 되면서 이것이 간직한 진의가 "그리스인에게도 또 후대에서도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고 그는 애석해 하는 것이다.
3)미학의 확립 - "근대에서 미학 및 예술에의 미학적 관계가 지배적으로 되는 것과 병행해서‥‥‥‥ 위대한 예술은 타락해간다." 이른바 '미학'이 확립된 것은 '근대의 시작'내지 그 '수세기에서'라고 하이데거는 생각한다. 이때 두드러진 것은, "인간이 그리고‥‥‥인간의 자유로운 지가, 존재를 어떻게 경험하고 규정하고 형태화하는지를 결정하는 장이 된다"는 것, "인간의 상태성,즉 인간이 존재자 및 자기 자신에 대치하는 그 방식"이 문제가 된다는 것, 그 결과 "인간이 여하히 사물을 바라보고 느끼는가 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태도, 즉 '취향'이 존재자에 관한 법정이 된다"는 것, "예술미의 성찰이 이제 전적으로 인간의 감정 상태, 즉 아이스테시스에의 연계 속에 위치지워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근거로 이른바 미학이 확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미학이 위대한 예술을 타락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이란 "인간의 역사적 현존재 내부에서, 어떤 결정적인 과제를 수행한다"는것, 즉 "작품이라는 방식으로 존재자 전체가 무엇인지를 해명하고, 그 해명성을 작품 속에 보존한다"는 데 있으며, 또 그것이 "인간이 걷는 하나의 도정"으로 "바로 거기에서 존재자 전체의 진리, 즉 무제약자, 절대자가 인간에게 개시되는 하나의 정류지"라는 점에, 다시 말해 "그것이 하나의 '절대적 필요"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타락이란, "'질'이 저하되고 양식이 비소해진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그 본질을 상실하고 절대자를 묘사한다고 하는 과제, 즉 절대자 그 자체를 역사적 인간의 영역 속으로 범례로서 내새운다고 하는 근본적 과제에의 직접적연계를 잃는다"는 것이다.
4)미학의 완성 - "미학의 고원함, 엄격한의 측치로 완성된 그 역사적 순간에 위대한 예술은 종식된다. "미학의 완성과 예술의 종식을 그는 말한다. "미학의 완성은 그것이 이 위대한 예술의 종언을 그야말로 종언으로서 인식하고 발언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서양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미학이 바로 혜겔의 미학이라고 하이데거는 본다. 그리고 예술의 종언이란 '예술이 절대자를 지향하는 힘, 절대적인 힘을 상실했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5)미학의 전락 - "19세기는 - 예술의 그 본질로부터의 전락이라는 점에 관해 - 다시 한 번 '종합 예술'로의 시도를 꾀한다." 이러한 노력을 하이데거는 바그너에게서 발견한다. 종합예술을 위한 노력이란, "제 예술이 이제 서로 병행해서 영위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 안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수량적인 통일을 넘어, 예술 작품은 민족 공동체의 한 축제, 즉 진정한 종교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극장'과 '오케스트라'가 그것을 상징한다. 음악, 건축, 회화, 조각, 문학이 모두 종합된 그것에서는 이른바 '체험'이 결정적이며, 작품의 의미는 오직 '체험'을 유발하는 것이다. 종합 예술은 "예술 그 자체가 다시금 하나의 절대적 요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절대적인 것이란 "전적으로 무규정적인 것, 순수한 감정으로의 전면적 해소,무로의 몰입"이다. 바그너의 이러한 시도는 좌절한다. 그 원인을 하이데거는 타예술에 대한 음악의 지나친 우세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미학화"에서 찾는다. "애당초 음악이 이러한 우위를 점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술에의 기본적 입장 전체가 점차 미학화되어 왔던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예술이 감정 상태로부터만 이해되고 평가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감정상태 자체가, 자의적인 감정의 단순한 비등과 흥분으로 점차 야만화된 것의 증거다"라고 하이데거는 보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예술이 여전히 존재자 전체의 결정적 형태화와 보존으로서 의지되고 인지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그랬는지 묻는 하이데거는 '음악의 입장에서의 종합 예술의 시도와 그 필연적 좌절'을 지적함으로써 그 답을 얻지만, 그와 더불어 이 시기의 또 한 가지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예술에 관한 지는 19세기에서 점차 고조되는 형이상학적 지로의 무력화에 호응하여, '순수한 예술사적 사실의 경험과 연구'로 변신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서, 전문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문학 연구는 문헌학이 되며, "미학은 자연 과학적으로 조작하는 심리학이 되어, 감정의 제 상태가 다만 그 자체 생기하는 사실로서 실험, 관찰, 측정의 대상이된다." 문학사와 미술사는, "중요한 지식을 발굴하는 동시에, 기율 있는 사유를 자극하는 하나의 학문"이 된다. 이러한 학문의 영위가 '정신'의 본래적 현실로 간주된다. "학문 자체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행위의 한 현상이며 한 영역이다. 다만 '미적인 것'이 연구의 대상이 아니게 되고, 인간의 태도 그 자체를 규정하게 되자, 미적 상태는 ‥‥‥ 예컨대 정치적 상태나 자연과학적 상태와 동렬의 한 상태가 되고 만다." 여기서 '미적 인간'이라는 이념도 생겨난다. 그러나 열의와 탐구, 좋은 취미와 진정한 요구가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기껏해야 그것은 니체가 지적했던 "니힐리존의 전경에 불과하다"고 펑가한다.
6) 미학의 구극 - "예술은 한편으로 그 역사적 과제에서 니힐리즘에의 반운동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 예술에 관한지는 '생리학'이 된다." 다시 말해 "예술은 자연과학적 설명에 넘겨지고 사실의 학의 한 분야 안에 편입된다. 여기에서 예술에 대한 미학적 물음은 그 궁극적 결론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사유된다. 감정 상태는 신경 계통의 자극, 신체의 제 상태로 환원된다. "응용생리학, 예술의 생리학으로서의 미학 - 즉, 신체의 상태와 사태와 그것을 야기하는 제 원인의 자연과학적 연구 - 이라고 하는 이러한 상태를 하이데거는 니체에게서 발견한다. '헤겔이 예술에 관해 말했던 것 - 즉, 예술이 절대자를 결정적으로 형태화하고 보존하는 것으로서의 힘을 상실해버렸다는 것 - 을, 니체는 '최고의 제 가치', 종교, 도덕, 철학에 관해 인식했다. 이는 즉 인간의 역사적 현존재를 존재자 전체의 속에 근거지우고자 하는 영위 안에 창조력과 규범이 부재, 결여돼있는 것이었다."
하이데거의 미학사 해설은 이렇게 완결된다. 이 과정을 되돌아볼 때 결정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학의 역사가 점증하는 예술 망각-예술 이반-예술 퇴행의 자취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뜻을 되찾아주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예술론은, 존재 망각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묻고자 하는 그의 근본적인 존재론과 병행하고 있다. 즉, 로고스, 퓌시스, 알레테이아 등을 통해 잃어버린 존재의 과거를 되돌리듯이 그는 테크네, 포이에시스를 통해 잃어버린 예술의 과거를 되돌리고자 한다. 그가 예술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점은 '기술론'과 관련된 그의 예술론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