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자의 고뇌와 사랑
-김몽선 선생님께
언제 뵈어도 늘 환하게 웃으시며, 반겨 맞으시는 꿈배 선생님!
네 번째 시집『덧칠』의 상재를 축하합니다.
선생님과 저의 인연은 깊습니다. 어언 30년도 더 되었지요? 1977년 1월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옆 심사평 자리에 함께 이름 석 자가 나온 것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물론 그 때는 선생님이 누구신지를 전혀 몰랐지요. 그 뒤 곧 영남시조문학회에 입회하여 선생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1983년 3월 제가 영신초등학교에 부임하였을 때 선생님은 아주 반겨 맞아 주셨습니다. 여러 해를 가까이 모시고 교직 생활을 하면서 저는 그 때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운 바가 있습니다.
꿈배 선생님! 선생님은 참 젊으십니다. 늘 젊게 사십니다. 아직까지도 약주를 즐겨 드시는 선생님이 위대(?)하게만 보이고, 때로는 놀랍기까지 합니다. 철저한 자기 관리 없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시집『덧칠』을 보면서도 그것을 여실히 느낍니다. 사랑과 열정이 시집 전편 곳곳에 내장되어 있는 것을 읽습니다. 그러고 보니『덧칠』은 선생님의 네 번째 시집이군요. 모두 5부로 되어 있고, 5부는 ‘동심을 찾아’라는 제하에 21편의 동시조로 꾸며진 것이 특이한 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번 시집에서 다음 세상을 조심스레 시화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으로서는 능히 그러실 수 있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아직은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시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왜냐고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게는 선생님이 늘 청년 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가을 어귀 빗소리는/잔명 문득 일깨운다.
-「가을 빗소리」중에서
고별 무대 불귀의 춤/햇발 꿰어 걸었구나.
-「단풍을 보며」중에서
차마 어인 생각일까./저승에는 일월 없어//서른여덟 아버지와/예순셋의 어머니가//몰라라/여든의 아들/치매처럼 만난다면.
-「차마 어인 생각」전문
아마도/내일쯤은/무서리가 올 것 같다.
-「겨울 초입에」중에서
우리 삶은 수레바퀴/이, 저승은 그 위 한 점//또 다른 시작일까/애연한 눈 감춰두고
-「문병」중에서
오르는 정상마다/높낮이가 낯설지만//헐떡이는 목마름은/등짐 아래 하나같다.//망망히/만나는 일몰/하산 길에 시린 이마.
-「하산 길」전문
「가을 빗소리」에서 선생님은 잔명을 느낍니다. 아마 연조 탓이겠지요. 비가 오는 시점이 ‘가을 어귀’여서 그러한 감흥이 더욱 북받쳐 올랐을 것으로 짐작됩니다.「단풍을 보며」에서도 그러한 느낌을 받습니다. ‘불귀의 춤’과 ‘고별 무대’라는 표현에서 시인이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강하게 잔명의 아픔을 읽게 되지요. ‘단풍’을 보며 ‘햇발 꿰어 걸었구나.’라고 형용한 것은 자연의 변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차마 어인 생각」에 와서는 그것이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다음 세상에는 ‘일월’이 없으리라고 여기시는군요.(일월보다 큰 광명이 하늘나라에 있다고 저는 들었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과 저의 생각은 다를 테지만요.)
선친께서 젊으신 때에 별세하셨고, 자당께서도 오래 사신 것은 아니셨군요. 그 점에서 선생님은 안으로 회한을 삭이셨을 듯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은 두 분보다 더 오래 이 땅의 기름진 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자신을 ‘여든의 아들’로 설정하셨네요.(요즘 널리 인구에 회자하고 있는 ‘99881234’라는 건강 수명 운동(?)에 비추어 볼 때 좀 잘못하신 듯 합니다. ‘아흔’ 이상은 하셔야지요.) 종장에서 ‘치매처럼’ 만난다면 어찌할까 하면서 ‘몰라라’라고 걱정하시는데 너무 앞당겨서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겨울 초입에」에서 무서리를 예견하는 일이나,「문병」에서 다시금 다음 세상을 떠올리면서 ‘애연한 눈 감춰두고’, ‘또 다른 시작’이지 않을까 묻고 있습니다. 저는 ‘또 다른 시작’이라는 표현에 적극적으로 동조합니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이에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하산 길」에서도 역시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지요. ‘헐떡이는 목마름은/등짐 아래 하나같다’는 진술은 참입니다. 이 땅위의 누구든 다 그러하지요. 예외가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망망히/만나는 일몰’ 무렵 ‘하산 길’에 이마가 시려오는 것을 모두들 어찌하지 못하지요.
지금까지 살펴본 시편들에서 보듯 선생님은 ‘종생’을 적잖게 의식하십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직 청년이십니다. 아래와 같은 작품들을 더 많이 빚으셨으면 합니다.
벼랑 끝 늠름하게/휘파람 불며 버틴//소나무는 등 굽어도/사철 푸른 바람이지.//한 아름/빈 하늘 안고//툭툭 털며 살라 한다.//눈을 들면 한 폭 산수/귀를 열면 낭랑한 시//비바람 눈보라도/바다처럼 거느리고//보아라/칼날 같은 얼/솔잎 새로 빛난다.
-「소나무」전문
「소나무」의 생명력을 보십시오. 기개와 절조, 강인한 의지가 전편에 살아 넘치고 있지 않습니까? ‘등 굽은 소나무’를 ‘사철 푸른 바람’이라고 은유하고 있는 대목에서 쉬이 범접 못할 생명력과 더불어 삶에의 강렬한 도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첫 수 종장 후구 ‘툭툭 털며 살라 한다.’라는 구절은 소나무의 말이지만 기실은 선생님의 인생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오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한 폭 산수’와 ‘낭랑한 시’를 공유하고 있는 ‘소나무’는 선생님의 자화상 즉 초상인 셈입니다.
선생님께서 그동안 가꾸어 오신 동심의 세계는 주목을 요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전국방송을 탔던 선생님의 동요(이재덕 작곡)「햇빛 비치면」을 지금도 가끔 흥얼거릴 때가 있는데 선생님의 동시조를 읽으면서 그 때 그 애틋한 정감을 다시금 맛보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아지랑이 모락모락/늦겨울이 타고 있다.//탄 자리 헤집고서/고개 내민 꽃다지야//트는 움/내 마음 속엔/무슨 꽃을 피울까.
-「새 봄에」전문
「새 봄에」는 참 앙증맞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늦겨울이 타’는 것과 ‘모락모락’거리는 ‘아지랑이’를 연결 지은 점이 재미있습니다. 그 ‘탄 자리’를 살며시 ‘헤집고서/고개 내민 꽃다지’를 보는 서정적 자아의 자태가 또한 몹시도 어여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더구나 종장에서 ‘트는 움/내 마음 속엔/무슨 꽃을 피울까.’라고 결구를 지으면서 ‘꽃다지’에서 ‘내 마음’으로 전이된 정서가 묘한 울림을 자아올리고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우리 엄마/잔소리/묵은 김치/새콤한 맛//우리 아빠/깊은 눈빛/붕어빵/달콤한 맛//그 틈새/우리 오누이/재롱 굿이 한판이다.
-「우리 집」전문
‘묵은 김치/새콤한 맛’을 ‘우리 엄마/잔소리’에, ‘붕어빵/달콤한 맛’을 ‘우리 아빠/깊은 눈빛’에 진솔하게 빗댄 것이 공감을 줍니다. 그 틈 사이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고 있는 오누이의 재롱은 한 가정의 행복의 중심 추로 읽힙니다. 많은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지만 지면 관계로 다 이야기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처럼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를 뜰 앞 꽃밭을 돌보시듯이 가꾸시는 일에 몰두하십니다. 그 점이 더욱 선생님을 젊게 하셨나 봅니다.
이 땅위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결국 단독자이지요. 단독자로서 고뇌하고, 눈물겹게 사랑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시인의 고뇌와 사랑은 남다른 예민한 감각의 촉수 때문에 때로 그 고통이 배가 될 때가 적잖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지난한 굽이굽이 길을 돌아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선생님은 그 뉘보다 더욱 넉넉하여 보이십니다. 윤택하여 보이십니다.
꿈배 선생님!
‘김몽선 시학’의 결집으로 읽히는「상사화」로 제11회 대구시조문학상 수상하심을 심축 드리며, 후학을 위해서도 앞으로 더욱 건안하시고 건필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