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相無相分 第九
일상무상분 제구
須菩提여 於意云河오 須陀洹이 能作是念하대 我得須陀洹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須陀洹은 名爲入流로대
而無所入이니 不入色聲香味觸法일새 是名須陀洹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斯多含이 能作是念하되 我得斯多含果不아
須菩提-言하되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斯多含은 名一往來로 而實無往來일새
是名斯多含이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河오 斯多含이 能作是念하되
我得阿那含果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斯多含은 名爲不來로대 而實無不來일새
是故로 名阿那含이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河오 阿羅漢이 能作是念하되
我得阿羅漢道不아
須菩提-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實無有法名阿羅漢이니
世尊하 若阿羅漢이 作是念하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니이다
世尊하 佛設我得無諍三昧人中 - 最爲第一이라
是第一離欲阿羅漢이라하시나 世尊하 我不作是念하대
我是離慾阿羅漢이라 하노이다
世尊하 我若作是念하대 我得阿羅漢道라하면
世尊이 卽不設須菩提-是樂阿蘭那行者라 하시려니와
以須菩提 - 實無所行일새
以名須菩提 - 是樂阿蘭那行이라 하시니이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수다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노라‘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을 이름하여 입류(入流)라고 하나
들어간 바가 없으니, 생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수다원이라 이름하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사다함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사다함과(斯多含果)를 얻었노라‘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을 이름하여 일왕래(一往來)라 하지만,
실제로는 가고 옴이 없으므로 사다함이라 이름하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나함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었노라‘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을 이름하여 불래(不來)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아나함이라 이름하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라한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노라‘고 하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제의 진리에는
아라한이라는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아라한과를 얻었노라‘고 하면 그것은 곧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에 집착함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은 사람들 중에 최고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 이라고 하시지만,
제 스스로는 ‘내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 ‘수보리는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기는 이’ 라고 말씀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수보리의 행하는 바가 실로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이’ 라고 말씀하시나이다.
제8 「의법출생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덕이 법에 의지하여 생겨난다는 것을 일깨워주셨고,
여기 제9 「일상무상분(一相無想分)」 에서는
수행의 어떠한 경지에도 집착됨이 없어야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대승경전 가운데 금강경을 가장 먼저 설하셨습니다.
곧 금강경은 부처님꼐께서 소승의 수행자들이 범하는 잘못을 바로잡아
대승의 길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설하신 최초의 경전인 것입니다.
따라서 금강경에는
소승의 수행자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집착을 놓아버리게 하는 법문들이 여러 곳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일상무상분」고 소승의 수행자가 성취하게 되는 네 가지 수행 도달점,
곧 4과(四果)를 설법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4과(四果)는 금강경의 본문에 보이는 수다원 . 사다함 . 아나함 . 아라한의 네 단계입니다.
먼저 이들 하나하나에 대해 설명을 한 다음, 경문의 뜻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소승 4과의 첫 번째 도달점인 수다원(Srota-apanna)은
‘입류(入流)’ . ‘예류(預流)’ 라고 번역하며, ‘미혹을 끊기 시작함으로써 성자의 흐름 속으로 들어간 자’라는 뜻입니다.
곧 불법을 닦아 영원한 평안의 경지로 나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럼 보통의 사람과 수다원은 어떻게 다른가?
보통 사람은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의 6근(六根)으로
빛깔[色] . 소리[聖] . 냄새[香] . 맛[味] . 촉감[觸] . 법[法]의 여섯가지 대상(이를 六境 또는 六〇이라 함)에 집착하여 생사윤회의 세게를 흘러다닙니다.
그러나 불교를 믿고 생사윤회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겠다는 결심하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6근이 6경에 의해
흔들리지도 물들지도 않게 되면 수다원과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다원과를 성취하게 되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貪 . 鎭 . 癡)으로 인한
거칠고 무거운 번뇌들이 생겨나지 않게 되므로, 다시는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등의 몸을 받지 않게 됩니다.
소승 4과의 두 번째인 사다함(Sakrdagamin)은
‘일래(一來)’ 떠는 ‘일왕래(一往來)’라고 번역하며, 범어를 직역하면 ‘한번 되돌아오는 자’입니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완전히 깨달은 성자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고이야기 합니다.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한 사다함은 죽은 다음 천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게 되므로, '일래' 또는 '일왕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다함의 경지에 이르면 잠시 되돌아보는 생각을 일으키기는 하나 그 생각에 집착을 하지않습니다.
곧 스스로가 행한 일이나 대상에 대해 한 차례 생각이 흔들리는 듯하다가,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수행을 하다가 '내가 잘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며 멈칫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소승 4과의 세번째 도달점인 아나함(Anagamin)은
'불환(不還)' , '불래(不來)' , 출욕(出欲)' 등으로 변역하며,
범어를 직역하면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 라는 뜻입니다.
이 아나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욕계(欲界)의 번뇌를 모두 끊어
욕계를 완전히 벗어난 성자이기 때문에 ‘출욕’이라고 하며,
죽은 다음 색계9(色界)나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날 뿐, 다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으므로
‘불환’ 또는 ‘불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재물욕 . 색욕 . 식욕 . 명예욕 . 수면욕의 5욕(五欲)을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바깥의 대상에 대한 욕심이 완전히 끊어져 마음이 결정코 흔들리지 않는 차원에 이르렀으므로,
주춤하거나 되돌아봄이 없이 한결같은 향상의 길을 걷습니다.
소승 4과의 마지막 도달점인 아라한(Arhan)은 ‘응공(應供)’ 또는 ‘무쟁(無諍)’으로 번역합니다.
안과 밖이 항상 고요하여 다틈이 없으므로 ‘무쟁’이라 하고, 모든 번뇌를 다끊어
마땅히 공양을 받을만한 분이기 때문에 ‘응공’이라 한 것입니다.
아라한의 차원에 이르게 되면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이 없고
더 이상 끊어야 할 번뇌가 없으며,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어긋난다 .
맞는다(違 . 順)’는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라한은 언제나 무쟁삼매(無諍三昧) 속에 머무릅니다.
그렇다면 아라한이 머무르는 무쟁삼매란 무엇인가?
나와 남, 주관관 객관이 다 비어있고 안과 밖이 항상 고요할 뿐아니라,
언제나 근본 지혜가 밝게 비치는 속에 있는 것을 무쟁삼매의 경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쟁삼매를 이룬 아라한은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실천합니다.
아란나행이란 무엇인가? 아란나행은 적정행(寂靜行)이요 무정행(無淨行)이요
청정행(淸淨行)입니다. 번뇌가 없는 적정행, 다툼이 없는 무쟁행,
한없이 맑은 청정행을 실천합니다.
실로 청정행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을 얻겠다는 마음(有所得心)’이 없어야 합니다.
결과를 기대하고 보답을 바라고 이익을 얻고자 하면 자연히 마음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면 맞고 맞지 않음에 대한 다툼이 생겨나게 되며,
다툼이 심해지면 번뇌가 끊일새없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금강경의 본문을 간략히 살펴봅시다.
이 「일상무상분」에서는 부처님의 비숫한 질문에 대한 수보리존자의 비숫한 답이 계속됩니다.
그 질문과 답은, 수다원 . 사다함 . 아나함 . 아라한이 스스로 그 경지를 이루었다고 집착하게 되면
그는 곧 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수보리존자가 이렇게 문답한 까닭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집착이 없어야 하고
어떤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상(相)에 머무르지 않아야 함을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수행자가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의
4상(四相)에 머무르고 있다면, 그는 무조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수행자가 스스로 깨달았음을 내세우는 아상에 빠져 다른 사람들을 경시하는 인상을 일으키고,
잘잘못을 시비하는 중생상이나 대접을 받고자하는 수자상을 갖는다면
그는 결코 수행자가 아닙니다. 오직 그는 범부(凡夫)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공부하는 이들은 절대로 상에 지착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가 있는 자리나 수행의 경지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런데 불행히도, 오늘날의 우리나라 절집안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이 노출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