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사진가
- 강 문 석 -
사진가 최민식. 이분은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는 걸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사진작품은 6.25를 관통하며 팔다리를 잃은 소년소녀들이 골목에서 신문이나 껌을 팔거나 고구마 몇 개 달랑 얹어놓고 파는 어린 딸과 어머니처럼 고단하고 남루한 일상들로 가득하다. 그 자신 또한 팔리지 않는 사진만 찍다보니 세상 끝나는 날까지 줄곧 가난과 함께 살았다. 그 때문에 삶의 진실이 더욱 진하게 그의 작품에서 묻어나 가슴 찡한 감동을 안겨주는지도 모를 일이다.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때였다. 요트경기장을 비롯하여 구덕운동장 등 올림픽경기장 전력시설 안전진단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 서면의 대한극장 앞에서 그를 만났다. 내 쪽에서만 그를 알고 있었다. 그의 양어깨엔 소문대로 카메라가 무겁게 걸려있었고 복장은 막노동하는 사람처럼 추레했다. 커피를 한잔 대접하고 싶다면서 건너편 지하다방으로 모시고는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덧붙여 군에서 사진을 시작하여 20년 넘게 해오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주로 부산의 뒷골목과 시장바닥을 돌면서 인간을 소재로 고집스레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들었지만 신문이 그를 소개하기 전까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인터뷰하듯 궁금한 몇 가질 그에게 물었다. 하루에 보통 12통에서 15통의 필름을 쓴다고 했다. 비가와도 그 수량엔 변함이 없다고 해서 벌어진 입을 다물기 어려웠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는다면 비용도 조달하기 어렵겠지만 촬영 후에 매달려야 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묻는 말엔 겨우 대답을 했지만 그는 말수가 적은 것 같았고 조금은 냉혈인간으로 비치기도 했다. 약간은 나같이 새까만 무명의 사진가와는 엮이지 않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결례를 무릅쓰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피사체를 응시하는 눈과 감각이 남달라 그렇게 훌륭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말을 저도 동의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3백장이 넘는 사진을 매일 찍는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많은 사진 중에서 한두 장 정도는 제대로 된 작품을 건지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입 꼬리만 약간 치켜 올리는 엷은 미소를 짓다가 ‘편할 대로 생각하라’고 짧게 말했다. 성당 홍보분과를 맡다보니 매년 교구에서 시행하는 실무교육에 참석해야만 했다. 당시에도 홍보업무에까지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히 늘어났고 사진 강좌는 그가 담당했다. 그래서 봄가을로 교구 버스를 이용하여 교외로 출사를 함께 나간 적도 있다. 인물사진에만 매달린 때문인지 기장의 바닷가나 밀양의 송림을 찾아 풍경을 담는 출사에서 그가 특별히 우리에게 지도를 해준 것은 기억에 없다.
어느 핸가 천안의 민방위학교에서 교육을 받느라 그곳의 여관방엘 들었다. 집에선 잘 보질 않던 TV를 켰더니 그가 출연하고 있었다. 누가 불러다 앉힌 것처럼 영상으로 그를 만났으니 참으로 묘한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방송출연이 처음이란 걸 밝히면서 감정을 쉽게 추스르지 못하는 듯했다. 딸이 “아버지, 딴 건 다 봐주겠는데 제발 TV에 나갈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그땐 나와 인연이 끝나니까요”라고 했다니 참 당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평생 돈 벌 생각은 않고 쓰기만 해댔으니 가족들에게 죄책감이 밀려와서 그랬던 것 같았다.
1968년 <휴먼> 제1집을 시작으로 14집까지 이어졌던 그의 작품집 출판기념회를 후반기에 난 몇 차례 찾았다. 작품집 한 권을 구입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내가 그를 도운 것이라면 행사장 사진을 파일로 보내드린 것이 전부였다. 행사는 주로 부산일보사 1층 전시관에서 열었고 그에게서 사진을 배운 문하생 중 중년여인들이 하객으로 더러 참석할 정도였다. 지역의 저명인사들이나 지역 사진가를 대표하는 인물들은 극소수가 얼굴을 내밀 뿐이었다. 그는 혹자가 말하는 것처럼 태생적으로 반골기질을 타고난 것 같지는 않았다.
새마을운동으로 대표되던 국가 재건시기에 정권차원에서 보면 그는 끝없이 청개구리 노릇을 해댔던 게 분명하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을 헐고 슬레이트나 기와로 바뀐 새마을은 안중에도 없고 그는 늘 뒷골목의 깡통 찬 헐벗은 걸인들이나 노점상들의 피곤에 찌든 몰골과 역전 광장 한구석의 지개꾼들까지 클로즈업해서 카메라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 등 권위 있는 사진콘테스트에 그것들을 보냈다. 국가의 변화된 이미지를 홍보해야하는 정권 담당자들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그러한 연유로 사진을 통해 세계적으로 나라를 끝없이 해코지하는 그를 간첩으로 몰았던 것이다. 뒤에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 뒤부터 그는 나에게 당시의 대통령을 향해 ‘개새끼’라는 욕설을 퍼붓는 걸 서슴지 않았다. 2년 전 그가 떠났고 훨씬 앞선 36년 전에 그 대통령이 떠났는데 그쪽 세상에서 서로 만나 이승의 악연을 풀고 화해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수필가단체 총회에도 가끔씩 얼굴을 내밀었지만 끝까지 남아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로지 사진에만 매달리느라 딴눈을 팔기가 어려웠을 터이다.
비교적 근년에 그를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은퇴자 단체를 맡은 때문이었다. 2010년 봄부터였으니까 그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이 된다. 사무실을 오가며 산책을 겸해서 가까운 용두산 공원을 자주 찾으면서 그곳에서 그를 가끔씩 만났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그는 카메라를 두 대나 늘 지니고 있었지만 내가 어느 정도 마음에 들게 자기를 찍는다는 것과 꼭 사진파일을 보내준다는 걸 알고는 나의 카메라 앞에 서면 약간 수줍은 듯 흡족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의 사진촬영 무대였던 자갈치시장과 영도 그리고 산복도로의 골목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벌어진 애환은 넘쳐난다.
좌판에 시퍼런 식칼을 앞에 놓고 퍼질러 앉은 자갈치 아지매를 향해 겁도 없이 셔터를 눌러댔으니 초라한 몰골을 들킨 당사자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을까.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당장 무슨 일을 저지를 것처럼 포악하게 나오는 여인을 향해 “난 데스까?”로 능청을 떨어야했다니…. “에잇 이 쪽발이 새끼가 아침부터 재수 없게스리 퇘 퇘 퇘…” 이런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다니 그 고충을 알고도 남을 것 같다. 특히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우리나라 정서에선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나이에 비해 젊게 살면서 85년이나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에 천착한 것이 체력단련에도 도움이 된 때문이리라.
그러한 연유로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쏘다니는 난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그의 분신과도 같은 사진작품은 생생히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골방을 벗어나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가 떠난 1년 후 부산시에서는 산복도로 르네상스사업의 일환으로 아미문화학습관을 준공했고 그 건물 2층에 ‘최민식갤러리’가 마련된 것이다. 생전의 그가 애지중지하던 니콘F4카메라도 물론 함께 갤러리의 앞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를 추억하는 이 부족한 글로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대표 사진가였던 빈첸시오 형제의 영면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첫댓글 흥미진진...두 군데 구청 평생학습관 수필반을 종강하고 나니 이리도 여유롭습니다. 귀한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