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왕후는 당시 왕실 최고의 어른이고 법통으로도 군주인 광해군의 어머니였지만, 그때부터는 실질적으로는 원수와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다.
광해군은 1615년(광해군 7년) 4월 자신의 거처를 재건된 창덕궁으로 옮기고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幽閉:깊숙히 가둠)시켰다.
경운궁은 태조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으로, 당시에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가(私家)였다.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궁궐에 불타 거처할 곳이 없었으므로 행궁으로 삼은 장소였다.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승하했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그 해 창덕궁이 재건되면서 광해군이 이 곳을 떠나게 되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宮號)가 붙게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는 폐서인(廢庶人)되어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좌의정 한효순, 공조판서 이상의, 예조판서 이이첨 등 17인이 〈폐비절목〉을 만들어 대비의 특권과 예우를 박탈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폐서인의 고명(誥命)이 내려오지 않아 인조반정 때까지 인목대비는 대비의 신분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1622년 12월, 이이첨은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에 들어가 인목대비를 시해하려 했으나 박승종 등이 가로막고 나서는 바람에 실패했다.
인목대비는 경운궁에서 맏딸 정명공주와 함께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인목대비의 비참한 생활상은 어느 궁녀가 쓴 《계축일기》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궁에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을 버릴 만한 빈터가 없어 그것이 쌓여 악취가 가득했으며, 구더기가 방 안과 밥 지어 먹는 솥 위에까지 기어다니고, 물로 씻어내도 없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생필품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바가지가 없어 소쿠리로 쌀을 일어야 했다.
솜옷이 없어 7,8년 동안 추위에 시달리다가 목화씨를 심어 재배하여 간신히 솜옷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경운궁의 궁녀들이 궐내에 텃밭을 일궈 나물을 재배하여 반찬으로 삼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이었다.
그렇게 10여 년 가량 경운궁에서 힘든 나날을 살고 있었던 인목대비에게 한줄기 빛이 비춰졌다.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1623년 3월 13일, 이귀, 심기원, 김자점, 김류, 최명길 등 서인들이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켰다.
거사의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였다.
군사를 이끌고 홍제원에 집결한 그들은 창의문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도성 안에 들어왔다.
그들은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통(內通)으로 활짝 열린 돈화문을 통과하여 손쉽게 창덕궁을 점령함으로써 반정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