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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연대방 스크랩 녹두대/오월대 이야기(남총련 사수대)
밴댕이 추천 0 조회 395 09.10.11 02: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80년대 중반, 전설의 남총련 산하 전남대 오월대와 조선대 녹두대.. 이들은 1개 소대의 병력으로 1개 중대의 전경들을 무장해제 시켰다는 전설적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깃발이 보이면 악독했던 5,6공의 백골단도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남총련 깃발

 

89년 임수경 방북 때 한양대 철길 진입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 수많은 학생들이 멈춰진 전철에서 일제히 뛰어내려 한양대로 뛰어가던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양대역 플랫폼에서 대기 중이던 전경들은 허를 찔려 황당하고 허탈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역력합니다. 당시 한양대를 지켜준 선봉대가 남대협입니다. 그 후신이 남총련이고요.. (아래, 아고라에서 퍼온 28548번 글이 바로 이 사건을 묘사한 글입니다.)

"백만학도 뛴다 투쟁전선에 너와 내가 손잡고서 두려움없이 싸워나가자 호남벌판 황톳길에...."

선봉대들이 남대협가를 부르며 등장하면 환호성이 대단했습니다.든든한 오월대와 녹두대의 용맹성은 당시 학생이 아닌 군특공대 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그들이 저리 용맹한 투사로 변한 것은  광주항쟁으로 맺힌 한과 윤상원 열사의 후배들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결합돼 백골단들도 오금을 못 펴게 만드는 전투력으로 승화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혹자는 8,90년대 남총련 전투조들은 공포에 의해서 더 자기방어적인 물리력을 강하게 행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건 공포에 의해서가 아니라 5.18에 대한 분노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서였습니다. 공포로 추동되는 폭력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울러, 신념이 없는 물리력은 금새 방향성을 잃고 제풀에 쓰러집니다. 하지만 분노와 신념을 바탕으로 한 행동은 더 강합니다.

제가 직접 겪고 들은 바를 근거로 또 간접적으로 경험한 바를 근거로 저는 남총련이 과격하고 무식한 집단이 아니라 분노의 신념에 찬 집단이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좌빨이네 주사파네 뭐네 욕을 하더라도요. 마치 지금 촛불집회에 나오는 유모차부대가 북한의 지령에 홀려서 그렇게 나온게 아님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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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대 깃발

 

첫번째 이야기

1989년, 임종석 전 국회의원이 전대협 의장으로 있던 시절. 여학우들이 임종석 의장 나오는 포스터를 찢어서 집에 가져가 붙일 정도로 당시 '얼짱'이었던 임의장의 인기는 높았었지요. 평양에서 열리는 평양축전에 즈음하여 서울에서도 대규모 집회를 주관하였습니다. 한양대에서 행사 중, 임수경 학우가 평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을때 집회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진압부대는 한양대에 총 공세를 강행하여 수천명의 학우가 한양대 건물 안에 갇힙니다. 이른바 89년 평축 임수경 북파 사건(?) 이지요.

한양대는 원래 처음부터 완벽히 봉쇄되었습니다. 결국 집회참가자들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한양대에 진입을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닥 뚝섬역에 내린 후 철로를 따라 한양대역 근처에 와서 미리 준비한 사다리를 타고 한양대에 진입을 하기로 한 것이지요.

이때 남대협의 학우들은 전경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왕십리와 한양대 입구쪽에서 가혹한 가투를 벌입니다. 어렵사리 진입한 한양대였지만 언제 경찰병력이 진입을 할 지 모르는 상황..

전경병력 절대다수가 배치된 정문쪽은 녹두대와 오월대의 남대협과 전북학협(전북지역 학생조직)이 맡고 있었고 끝까지 잘 버티고 있었는데, 결국 서총련과 경인총련이었나? 암튼 서울쪽 사수대가 맡고 있던 한양대 병원쪽이 뚫리고 학내에 전경들이 밀물처럼 쳐들어 왔습니다.

각 지구에서 방어하던 학우들도 혼비백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인근의 가까운 건물들로 대피했습니다. 정문쪽을 막던 남대협도 눈물을 머금고 지도부를 호위하며 한양대 인문관으로 퇴각, 농성을 시작합니다.

다른 건물로 산재한 학우들은 경찰의 검색에 의해 많은 이들이 연행이 되었습니다. 훗날의 후일담으로 어느 건물로 퇴각한 시위대 몇 명은 꼬박 이틀동안 숨어있었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물로 버텼다고도 하죠. 혹시라도 일어서서 창문에 그림자가 비칠까봐 똥오줌도 누워서 해결을 봤을 정도랍니다. 그 이틀동안 한양대 인문관은 섬이었습니다. 김원중이라는 가수가 5.18 광주를 섬처럼 느껴져서 부른 노래 '바위섬'처럼 한양대 인문관에 모든 이들이 고립되었습니다.

경찰이 철통같이 한양대 인문관을 포위 해버리고 만 상태에서 그대로 고사되어 제2의 건대사태가 발생할 지도 모르는 시점.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전대협 지도부는 정면돌파를 시도합니다. 한양대 인문관은 삼면이 절벽같은 산만디(^^;)로 되어있는 건물이어서 들고 나는 건 모두 현관쪽을 이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때 남대협(후에 남총련으로 확대재편되는 전남지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의 학우들이 선봉에 서서 수천명의 경찰이 진을 친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합니다. 이 작전을 위해 인문관 옥상에는 수십명의 학우들이 깃발을 걸고 마치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경찰들에게 정면돌파의 낌새를 눈치 못채게 하기 위해서지요. 당황한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시위대를 돌파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도부를 중심에 두고 남대협 학우들이 둘러싼채로 정면돌파한 후 우회로를 통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합니다. 이미 학내외 주변에 수만명의 경찰병력이 포진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인근 가옥의 돌담과 지붕을 넘어 퇴로를 확보합니다. 또 이들을 쫓기 위해 백골단과 체포조들이 따라다니르라 수많은 가정집들의 옥상과 기와가 거의 초토화될 지경이었다고 하지요.

일각에서는 경찰이 일부러 봐줬다는 설이 있으나 당시 여러 정황을 고려해서 봐준 것 같지는 않고요, 아무튼 오월대와 녹두대를 주축으로 한 남대협은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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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대 깃발

 

두번째 이야기

90년 광주 전남대에서 전대협 출범식이 열립니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폐타이어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칩니다. 이때 대구,부산, 대전, 서울 등 각 지의 전경들도 차출되어 광주에 집결합니다. 온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집니다.

친구 하나가 전남대 출신인데 학생들은 봉쇄된 전남대에 들어가기 위해 여학우와 함께 정장을 입고 갔다고 합니다. 부부처럼 보이고 싶어서였지요. 광주공영터미널에서부터 대학생으로 보이면 무조건 검문검색을 해서 다른 지역 학생이면 닥치고 닭장차에 연행하고 저 멀리 순창같은 허허벌판 논두렁에 내다버리고 오곤 했었거든요. 여차저차해서 전남대에 들어간 다음에 교문을 뚫고 나와서 시내에서 가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광주쪽은 전경이나 백골단들도 상상초월입니다.

본대에 있다가 진압이 들어와서 대오가 흐트러져서 어떻게하다보니 백골단 뒤쪽근처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당~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서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이쪽 백골단으로 화염병이 날아오며 전투가 붙었다고 합니다.

친구녀석이 직접 목격한 백골단 한 명은 화염병을 방패로 막는데 병이 깨지면서 머리 뒤쪽으로 불길이 옮겨붙었답니다. 동시에 소화기 꺼내서 치치칙 뿌리더니 태연히 불 다끄고 욕 허벌나게 뱉어내더니 또 다시 전방으로 나가서 진압했다 하더군요. 독한 놈들... 그런 애들하고 남대협하고 붙는 싸움은 정말 전쟁같았다고 합니다.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벌이는 집회와 진압이 아니라 마치 원수나라의 군인들이 벌이는 싸움.

남대협 전투조와 싸워본 적이 없던 타 지역의 전경들은 곳곳에서 무장해제를 당합니다. 이당시 전경으로 차줄되어 진압에 참가했던 한 후배녀석은, 다른 지역은 지랄탄 쏘고 SY-44탄 날리고 연기 자욱한 상태에서 소리 지르며 달려가면 애들이 멀찌감치 물러서 다 도망가곤 하는데, 남대협 애들한테 똑같이 그렇게 해서 연기속에 막 달려가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대협 애들하고 막 뒤섞여서 싸우고 있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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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대 깃발

 

세번째 이야기

범민족대회가 연세대에서 열렸는데 집회장소가 원천봉쇄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연세대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골목 어귀에 범대회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한 수십명 되었습니다. 골목 저 앞 쪽에는 전경 수백명이 틀어막고 있습니다. 그때는 뭐 당연히 핸폰같은 건 없고 삐삐도 광역삐삐가 나왔나 어쨌나 모르겠으나 암튼 뭐 택(전술지침)전달이 안되어서 저기를 뚫고 가냐 아니면 다른데로 모이냐 우왕좌왕하던 차였습니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 뜬금없이 전라도 사투리 걸쭉하게 쓰는 몇 명이 그러더군요.

"보씨시요, 쩌그 쟈들이 얼마 안?께, 우리가 저짜로 뛰어가면서 쟈들을 유인할텡께, 그 참에 조오~기로 뛰가서 담치기(담장넘어)해서 들어가씨씨요. 돌 좀 모아보소, 병은 못 만들것고..."

다른 학우들이 말리자,

"이거 말고 방법이 없응께, 우리들이 (경찰에) 달려(잡혀)드가는 대신 여러분들이 (행사장으로)드가면 우리 할 도리 다 한 거 같응께,우리 대신 잘 싸워주씨시요."

그러더군요. 눈물인지 뭔지.. 전율스런 감동이...

결국 그들 네 명은 조립식 쇠파이프 들고 수백명의 전경 무리속으로 짱돌을 던지며 돌진, 그 참에 나머지 범대회 참가자들은 무사히 학내로 진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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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대 두건

 

네번째 이야기

전대협 출범식 때 전국의 놀이패도 거의 다 집결합니다. 엄청난 규모죠. 북만 한 500개 넘게 모여서 치는데 장관입니다. 놀이패들도 가투에 나가는데, 대개는 전투가 벌어지면 뒤로 빠지죠. 고대에서 벌어진 행사 이후 회기역 쪽에서였던 것 같은데 지랄탄이 터져서 정말이지 한치 앞도 분간 못하는 상황입니다.

최루가스가 좀 걷히고 난 다음에도 저 앞쪽에 한 무리의 놀이패가 자리를 고수하고 소리를 냅니다. 바로 남총련 풍물패연합(?)이었습니다. 그쪽 방어는 서총련이 맡았던 쪽 같은데요, 의혈중앙이랑 민족고대 뻘건 깃발도 지랄탄과 SY-44탄을 피해서 뒤로 물러나 있는데 저 앞쪽에, 그러니까 시위대와 전경들 사이 한가운데서 숨도 쉬기 힘든 곳에서 방독면도 없이 눈물 흘리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없이 북치는 거 보니, 저거는 한이 맺히지 않고서는 저럴 수 없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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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대에 제압당한 전경

 

다섯번째 이야기

운암대첩이라고 하는데, 91년 강경대 열사의 시신이 광주로 운구되오는 시점에서 전경들이 이를 막아버립니다. 광주 운암동 근처입니다. 507, 506 전경대대들도 강하기로 소문난 부대였으나 남총련 학우들은 결국 이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강경대 열사의 시신을 안전히 망월동에 모셔옵니다. 이들이 싸움을 잘해서 운구차를 탈취하려던 전경을 무장해제 시킬 수 있었던 건 아닐 것입니다. 광주의 아들 강경대를 편히 쉬게 하고자, 그 분노와 가슴절절한 안타까움에 이틀밤낮을 싸워가며 운구차를 되찾은 거지요.

이거 말고도 몇가지 일화가 더 있습니. 전남대인가 조선대 축제에 광주 뭐시기파라는 조폭들이 야구방망이랑 회칼 들고 들어와서 학우들이 차린 천막에서 시비걸고 천막 뒤엎었는데 이 때 사수대가 출동 완전개박살 나고 무장해제 당했다는 얘기도 있고요...

뭐~ 암튼 대단했습니다. 가장 대단한 활약을 했지만 메이저 언론의 색깔공세에 가장 저평가되었던 남총련 산하 오월대 녹두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걸 보니 한편 기쁘면서도..이 스산한 정국이 눈물나도록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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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대에 제압당한 전경

 

그렇다면 녹두대가 행동조직으로 최선봉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며칠 전 만난 녹두대 출신 후배는 술자리에서 우스개 소리로 군대보다 더 했다고 표현합니다. 나중에 군대에 들어갔더니 녹두대/오월대 보다 못했답니다. 그래서 편했다나요. 남들도 알만한 힘든 곳에서 군생활했는데도 말입니다.

아무튼 녹두대/오월대가 입만 살은 조직이 아닌 실천과 행동의 조직으로 떠오르는데는 한 가지 핵심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평가하자면 그건 규율이었습니다. 추운 겨울 철규(이철규 열사)형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병원 찬 콘크리트 바닥에서 신문을 덮고 자면서도 원칙을 지켰습니다.

자신이 근무조일 때는 병원 순찰을 철저하게 하고 휴식조일 때만 잠을 잤습니다. 그런 생활을 몇 달동안 했습니다. 가투에 투입되는 것도 오더를 받는 조만 움직였습니다. 가투에서 싸울 때도 자기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타격조 일 때와 대열 보호조 일 때 일이 달랐습니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강철 같은 규율을 강조한 조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직력은 때로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했습니다. 여의도 시위, 현대 골리앗 투쟁에도 녹두대/오월대가 투입됐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다른 조직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장한 행동조직이지만 대중들 앞에서 보여 준 절제와 규율은 대단했습니다. 전투조직으로서 강건함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혼연일체와도 같은 조직력 그 자체였습니다. 몇 백 대오가 되도 투쟁에서는 하나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전경들도, 백골단도 그런 녹두대/오월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전대협 집회나 서대협 집회에서 보여 준 녹두대/오월대의 활약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직격탄이 날아와도 달아나지 않고 대열도 깨지지 않고 오히려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무장조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복경찰이나 백골단도 이들의 행동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런 녹두대/오월대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의아함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녹두대/오월대의 그 저력 뒤에는 철저한 규율과 실천으로 무장한 힘이 있었습니다.

녹두대/오월대가 창설됐을 때 건준위(민주총학생회건설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백영권은 강제징집 영장이 나온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영권이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헌병대와 경찰은 그를 잡으려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하게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바로 녹두대/오월대가 그를 보좌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처럼 다니지만 단봉(쇠파이프)을 팔에 끼고 다니는 녹두대/오월대 대원만 해도 무려 50여명이었습니다. 영권이가 커피숍에 들어가면 그들이 입구와 곳곳에서 그를 보좌했습니다. 날고 긴다는 사복조 경찰 200여명이 있어도 녹두대/오월대 50명을 잡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떡 버티고 있으니 누구도 그를 검거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87년 대선을 앞둔 터라 그런 모습은 시민들의 눈에도 자주 띄었습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막아내는 것을 지켜 본 시민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녹두대/오월대가 있는 곳에선 시민들의 환호도 뒤따랐습니다. 음식과 음료수를 내오고 때로는 담배값이라며 돈을 건네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녹두대/오월대는 가는 곳마다 화제를 낳았고 찬사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서울쪽 대학가에서는 극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녹두대/오월대의 추억과 기억이 이제는 가물가물합니다. 하지만 젊은 날에 우리가 주장하고 내세웠던 것은 무엇일까요? 음모적이고 권력지향적인 것과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살면서 그 때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살았던 그 때의 삶으로부터 지금의 삶을 영향받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교훈은 같습니다. 규율이 없는 조직은 조직력이나 단결된 힘이 없습니다. 원칙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선택 앞에 늘 놓여 있습니다.

가치롭고 당당하게 살 것이냐 아니면 권력이나 자본이면 모든 걸 저버리고 노예처럼 살 것이냐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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